인도네시아 자유민주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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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네시아 자유민주주의 시대는 인도네시아가 독립 후 1950년부터 1959년까지 겪은 정치적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 해체 후 단일 공화국으로 통합되면서 시작되었으나, 지역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여러 내각의 불안정한 운영으로 특징지어진다. 나시르, 수키만, 윌로포,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부르하누딘 하라하프, 주안다 카르타위자야 등 여러 총리가 내각을 이끌었으며, 1955년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유도 민주주의를 추진했고, 1959년 칙령 발표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시대는 종식되고 유도 민주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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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유민주주의 시대 | |
---|---|
개요 | |
국가 | 인도네시아 |
존속 기간 | 1950년 ~ 1959년 |
이전 |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 |
이후 | 유도 민주주의 |
지도자 | 수카르노 |
주요 사건 | 임시 헌법 반둥 회의 인도네시아 제헌 의회 1955년 입법부 선거 1955년 제헌 의회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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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인도네시아 국민 혁명 이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원탁회의를 통해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 (RIS)이 수립되었지만, 내부 결속력 부족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대로 1950년 8월 17일 해체되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재병합되었다.[1]
인도네시아 사회는 종교, 관습, 지역 차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자바 정치 지배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분열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빈곤, 낮은 교육 수준, 권위주의적 전통으로 특징지어졌고, 다룰 이슬람, 남말루쿠 공화국, PRRI 등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경제는 일본 점령과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열악한 상태였다. 정부는 식량 생산을 늘릴 수 없었고, 인구는 문맹과 기술 부족을 겪었으며, 인플레이션과 밀수가 만연했다.
모하마드 나시르 총리의 나시르 내각은 마슈미당과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의 지지를 받았지만, 마슈미당과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간의 연립은 실패했다.[1] 이 시기 인도네시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서뉴기니 분쟁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51년 1월, 의회 불신임으로 나시르 총리는 사임했다.[1] 수키만 비르요산조요 총리의 수키만 내각은 마슈미당과 PNI의 연립 내각이었지만, PSI와 마슈미의 나시르 파는 참여하지 않았다.[1] 수키만 내각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탄압했지만, 외교 정책 문제로 1952년 2월 붕괴되었다.[1]
윌로포 수상의 윌로포 내각은 PNI 주도의 마슈미-PNI 연립 내각이었다. PNI는 마슈미를 의심하며 선거 연기를 모색했고, PKI는 PNI를 지지했다. 나들라툴 울라마(NU)가 자체 정당을 결성하면서 마슈미는 분열되었다.[1] 한국 전쟁 이후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고, 육군 지휘부는 군사 문제에 대한 민간 개입에 반발하여 10월 17일 사건이 발생했다.[1] 1953년 3월, 탄중 모라와 사건으로 내각이 붕괴되었다.[1]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총리의 내각은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주도, 나들라툴 울라마(NU) 지원으로 구성되었고, 마슈미와 인도네시아 사회주의당(PSI)는 제외되었다. 이 내각에서 관료 기구는 PNI 관계자들로 확장되었고, 경제는 인도네시아화 시기를 겪었으며, "알리 바바 기업"이 등장했다. 1955년 4월, 반둥 회의가 개최되어 저우언라이, 자와할랄 네루 등 29개국 대표가 참석했다.[1] 1955년 7월, 경제 악화와 NU의 철수로 내각이 해산되었다.
제2차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조 내각 붕괴 후, 수카르노 대통령은 PKI를 포함한 '고통 로용' 내각을 원했지만, 다른 정당과 육군의 반대로 물러섰다. 주안다 카르타위자야가 이끄는 내각(주안다 내각)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 권력을 행사한 유일한 내각이었다.
1956년 초, 수카르노는 의회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나사콤' 정부를 제안했다. 군부 지원으로 1957년 2월 '유도 민주주의'를 선포하고, PKI를 포함한 내각을 제안했다.[1] 1959년 7월 5일, 수카르노는 대통령령을 발표하여 제헌 의회를 해산하고 1945년 헌법으로 복귀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의 종말과 유도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1]
2. 1. 성립 배경
인도네시아 국민 혁명은 4년이 넘는 잔혹한 전투와 폭력 사태 끝에 종결되었고,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원탁회의를 통해 인도네시아 연방 공화국 (RIS)으로 주권이 이양되었다.[1] 그러나 RIS 정부는 내부 결속력이 부족했고, 많은 공화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결국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5주년 기념일인 1950년 8월 17일에 RIS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해체되고 단일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재병합되는 결과를 낳았다.[1]인도네시아 사회에는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습, 도덕, 전통, 종교의 지역적 차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자바 정치의 지배에 대한 두려움 등이 모두 분열에 기여했다. 새로운 국가는 빈곤, 낮은 교육 수준, 권위주의적 전통으로 특징지어졌다. 또한 새로운 공화국에 반대하는 다양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무장 단체 ''다룰 이슬람'' ('이슬람 영토')은 "인도네시아 이슬람 국가"를 선포하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서자바에서 공화국에 대항하여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말루쿠에서는 이전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 출신 암본인들이 독립 남말루쿠 공화국을 선포했다. 퍼르메스타와 PRRI 반군은 1955년에서 1961년 사이에 술라웨시와 수마트라 서부에서 중앙 정부와 싸웠다.
경제는 3년간의 일본 점령과 그 이후 4년간의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처참한 상태였다. 젊고 경험 부족한 정부는 급증하는 인구에 맞춰 식량 및 기타 필수품 생산을 늘릴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구는 문맹이었고, 기술이 없었으며, 관리 능력도 부족했다. 인플레이션이 만연했고, 밀수는 중앙 정부에 필요한 외화를 앗아갔으며, 많은 농장이 점령과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2. 2. 초기 내각 (1950-1953)
모하마드 나시르 총리가 이끈 나시르 내각은 마슈미당과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의 지지를 받아 구성되었다. 그러나 마슈미당과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간의 연립은 실패했다.[1] 이 기간 동안 다룰 이슬람 반란, 마카사르 봉기, APRA 쿠데타, 남말루쿠 공화국 독립 운동 등 인도네시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뉴기니 분쟁 협상도 진행되었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51년 1월 22일 의회의 불신임 결의로 나시르 총리는 1951년 3월 21일 사임했다.[1]수키만 비르요산조요가 총리로 임명된 수키만 내각은 마슈미당과 PNI의 연립 내각이었다. 그러나 PSI와 마슈미의 나시르 파는 참여하지 않았다.[1] 수키만 내각은 군대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1951년 6월에서 8월 사이의 파업 이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탄압했다. 이는 9월 30일 운동 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탄압이었다.[1] 결국 수키만 내각은 인도네시아를 '자유 세계'에 묶어두는 외교 정책 문제로 붕괴되었고, 아흐마드 수바르조 외무 장관 사임 후 1952년 2월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1]
윌로포 수상이 이끈 윌로포 내각은 PNI 주도의 마슈미-PNI 연립 내각이었다. 이 시기 PNI는 마슈미를 의심하며 선거 연기를 모색했고, PKI는 PNI를 지지하며 내각을 비난하지 않았다. 한편, 마슈미는 나들라툴 울라마(NU)가 자체 정당을 결성하면서 분열을 겪었다.[1] 한국 전쟁 이후 경제 호황이 끝나고 수출 가격, 특히 고무 가격이 하락하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내각은 육군 예산을 포함한 지출을 삭감해야 했다.[1]
그러나 육군 지휘부는 군사 문제에 대한 민간 개입에 반발했다. 1952년 7월 친정부 장교 해임 이후 의회는 군대 지도부의 구조 조정을 요구했고, 이는 10월 17일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자카르타에서 육군이 동원한 시위대가 발생했고, 수카르노 대통령이 시위대를 진정시켰지만, 육군 지휘부 상당수가 교체되었다.[1] 1953년 3월, 탄중 모라와 사건으로 내각이 붕괴되었다. 이 사건은 메단 근처에서 경찰이 외국 소유 토지의 불법 점유자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농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의회에서 불신임 투표가 있기 전, 1953년 3월 16일 내각은 수카르노에게 권한을 반납했다.[1]
2. 3.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과 반둥 회의 (1953-1955)
6주가 넘는 협상과 다섯 차례의 다양한 정당 조합 시도 끝에,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이 주도하고 나들라툴 울라마(NU)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으며,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마슈미와 인도네시아 사회주의당(PSI)이 제외되었다.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에서 관료 기구가 더 많은 PNI 관계자들로 확장되었고, 경제는 인도네시아화 시기를 겪었으며, 정부는 토착 사업가들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신생 기업들은 정부 지지자들과 중국인 간의 계약을 위한 가짜 전선이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인('알리')이 중국인('바바') 기업가를 위한 바지사장이 되는 "알리 바바 기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5년 4월, 반둥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는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정부의 승리를 나타냈다. 약 29개국이 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로는 저우언라이, 자와할랄 네루, 팜반동, 모하마드 알리 보그라,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있었다.[1]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는 또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이전 내각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1954년 5월 31일, 중앙 및 지방 선거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계획은 입법부 선거를 9월 29일에, 제헌 의회 선거를 12월 15일에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로포 내각이 겪었던 것처럼,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은 경제 악화로 인해 NU가 철수하고 내각이 붕괴된 후, 1955년 7월에 해산되었고 다음 달 부르하누딘 하라하프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2. 4. 1955년 총선과 그 이후 (1955-1959)
제2차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조 내각이 붕괴된 후, 수카르노 대통령은 PKI를 포함한 4개의 주요 정당이 모두 협력하는 '고통 로용'(상호 지원) 내각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정당과 육군의 격렬한 반대로 수카르노는 물러섰다. 3월 15일, PNI 의장이자 전 자카르타 시장인 수위료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수카르노는 4월 14일에 정당 지도자와 군 장교 회의를 소집하여 내각 참여 의향을 물었다. 마슈미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내각 활동을 거부하며 수카르노가 불법적으로 행동한다고 비난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슈미당은 내각에 참여한 두 명의 구성원을 제명했다.수카르노는 정당을 대표하지 않는 개인들로 구성된 내각을 이끌 인물로 주안다 카르타위자야를 임명했다. 내각은 4월 8일에 발표되었고, 다음 날 메르데카 궁전에서 수카르노가 임명했다.
다른 내각과 달리 이 내각(주안다 내각)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 권력을 행사한 유일한 내각이었다. 이 내각은 1959년 7월 5일 대통령령으로 정치 시스템이 변경되면서 사임했다.
2. 5.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종식
1956년 초부터 수카르노 대통령은 의회 민주주의가 '내재된 갈등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인도네시아의 조화 개념에 반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마을 원로들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마을 토론과 합의 시스템에 기반한 체제를 추구했다. 그는 '나사콤' 정부로 '민족주의('나시오날리슴')', '종교('아가마')', '공산주의('코무니슴')'의 세 가지를 혼합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세 주요 파벌인 군대, 이슬람 단체, 공산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군부의 지원을 받아 1957년 2월 '유도 민주주의'를 선포하고, 모든 중요한 정당(PKI 포함)을 대표하는 내각을 제안했다.[1]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1959년 7월 5일에 절정에 달했다.[1] 수카르노는 1959년 7월 5일 대통령령을 발표했는데, 이 법령에는 제헌 의회 해산과 1950년 헌법에서 1945년 헌법으로의 복귀가 포함되었다.[1] 이 사건은 의회 민주주의의 종말과 유도 민주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1] 그 후 정부는 균형 있는 정치 체제를 구현하는 유도 민주주의에서 임시 국민 협의회(MPRS) 기관을 구성했다.[1]
3. 정부와 정치
자유민주주의 시대 인도네시아는 총리가 인도네시아 내각을 이끌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했다. 대통령은 명목상의 역할만 수행했으며,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했다.
이 시기에는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마슈미 당, 나들라툴 울라마,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등 여러 정당이 활동했다. 기독교당, 가톨릭당, 사회당 등 소규모 정당들도 존재했다.[1] 주요 정당들은 내각 구성에 참여하거나 주도했다.
하지만 정당 간 협상과 연립 내각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잦은 내각 교체가 발생했다. 1945년부터 1958년까지 17개의 내각이 교체될 정도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1]
3. 1. 1950년 임시 헌법

1950년 임시 헌법은 1945년 헌법과 여러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1950년 임시 헌법은 의원 내각제를 의무화하고, 1948년 UN의 세계 인권 선언을 크게 차용하여 인권에 대한 헌법적 보장을 상세히 규정했다.[1] 수카르노 대통령은 1959년 포고령을 발표하여 제헌 의회를 해산하고 1945년 헌법을 복원하면서, 1950년 임시 헌법은 1959년 7월 9일에 폐지되었다.
3. 2. 총리
인도네시아 총리 직은 자유민주주의 시대 동안 인도네시아의 주요 정부 수반이었으며, 대통령은 명목상의 역할만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총리는 인도네시아 내각을 책임졌으며, 1950년 임시 헌법에 따라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졌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했다.초대 총리는 모하마드 나시르였다. 나시르 내각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서뉴기니 분쟁 협상도 진행되었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51년 의회의 불신임 결의로 나시르 총리는 사임했다.[1]
수키만 내각은 군대와의 관계 악화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탄압으로 유명했다. 이 내각은 인도네시아를 '자유 세계'에 묶어두는 외교 정책 위기로 인해 붕괴되었다.[1]
윌로포 내각 동안 한국 전쟁 이후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육군 예산 삭감이 이루어졌고, 이는 군부의 반발을 샀다. 10월 17일 사건으로 육군 지휘부가 교체되었고, 탄중 모라와 사건 이후 내각은 붕괴되었다.[1]
주안다 카르타위자야 총리의 내각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위임받은 유일한 내각이었다. 이 내각은 1959년 대통령령으로 인해 사임했다.[1]
자유민주주의 시대에는 연립 내각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총리는 종종 불신임 투표에 직면했고, 이로 인해 내각이 자주 교체되었다.
3. 3. 정당
자유민주주의 시대에는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마슈미 당, 나들라툴 울라마,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등 여러 정당이 활동했다. 이 외에도 기독교당, 가톨릭당, 사회당 등 소규모 정당들도 있었다.[1]주요 정당들은 내각 구성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 모하마드 나시르가 이끈 나시르 내각은 마슈미당과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도네시아 국민당(PNI)과의 연립에는 실패했다.[1] 수키만 비르요산조요가 이끈 수키만 내각은 마슈미 당과 PNI의 연립으로 구성되었으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탄압과 외교 정책 문제로 붕괴되었다.[1] 윌로포 내각은 PNI 주도로 구성되었으며, 나들라툴 울라마(NU)가 마슈미 당에서 분리되어 독자 정당을 결성하는 등 정당 재편이 일어났다.[1]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 내각은 PNI와 NU의 지원을 받았고, 부르하누딘 하라하프 내각은 마슈미 당 주도로 구성되었다.[1]
정당 수가 많아지면서 정당 간 협상과 연립 정부 구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 17개 내각이 교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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