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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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남진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중일 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남아시아로 진출했다. 1941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가 일본에 전쟁 위협에 직면하여 인도네시아 국민 동원을 거부한 이후, 일본은 1942년 초 신속하게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일본은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등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며,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일본의 점령은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을 고취시키고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인도네시아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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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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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현지 이름 | 일본어: (닛폰 센료카 노 오란다료히가시인도) 인도네시아어: Pendudukan Jepang di Hindia-Belanda (펜두두칸 즈팡 디 힌디아-벨란다) 네덜란드어: Japanse bezetting van Nederlands-Indië (야판서 베제팅 반 네덜란드스-인디에) |
약칭 | 일본 제국 |
역사 | |
시작 | 사건: 네덜란드 항복 날짜: 1942년 3월 8일 |
사건 | 태평양 전쟁 (1941년–1945년) 제1차 자바 해 해전 (1942년 2월 27일) 제2차 자바 해 해전 (1942년 3월 1일) 폰티아낙 사건 (폰티아낙 학살) (1943년–1944년) PETA 반란 (1945년 2월 14일)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15일) |
종료 | 사건: 독립 선언 날짜: 1945년 8월 17일 |
지위 | 일본 제국의 군정 |
지도 | |
![]() | |
국가 | 이전: 네덜란드령 동인도 (네덜란드 국기) 이전: 포르투갈령 티모르 (포르투갈 국기) 이후: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국기)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네덜란드 국기) 이후: 포르투갈령 티모르 (포르투갈 국기) |
국기 및 국장 | |
수도 | |
수도 | 자카르타 |
종교 | |
종교 | (정보 없음) |
언어 | |
공용어 |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네덜란드어 |
국가 | |
국가 | 일본어: 기미가요 [[File:Kimi ga Yo 1930 instrumental.ogg]] 인도네시아어 (비공식): 인도네시아 라야 [[File:Indonesia Raya dalam Propaganda Jepang 2 Nippon Eigasha 2605.ogg]] |
표어 | |
표어 | 팔굉일우 ()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정 |
천황 | 히로히토 (1942년–1945년) |
통화 | |
통화 | 네덜란드령 인도 루피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
2. 역사적 배경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남진론(南進論)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방 지역을 무역과 이민의 중심지로 삼았다.[1] 1942년까지 현재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알려져 있었다. 1929년 인도네시아 민족 각성 기간 동안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하타(후에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부통령이 됨)는 태평양 전쟁을 예상하고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공격하는 것이 독립 운동에 유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빛"이라고 선전했다. 일본은 19세기 말에 성공적으로 근대 기술 사회로 변신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으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이나 미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독립을 유지했고, 러일전쟁에서 유럽 열강인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했다. 제2차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 주도하의 무역 지대인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2. 1.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남진 정책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남진론(南進論)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방 지역을 무역과 이민의 중심지로 삼았다.[1]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3]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일본인 이민자들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데, 그중에는 동남아시아의 서구 식민지 매음굴에서 일하는 가라유키상(Karayuki-san)이라는 매춘부도 있었다.[2][4][5][6][8]19세기 말, 일본은 근대 기술 사회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으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이나 미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독립을 유지했고, 러일전쟁에서는 유럽 열강인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제2차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 주도의 무역 지대인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일본은 20세기 전반기에 아시아 전역으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왔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동인도에 사업적 연계를 구축했다. 이는 작은 마을의 이발소, 사진관, 세일즈맨에서부터 스즈키, 미쓰비시와 같은 대형 백화점과 기업이 설탕 무역에 참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인도네시아의 일본인 인구는 1931년 6,949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주로 일본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간의 경제적 긴장 때문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 특히 이슬람 정당들과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 파견되었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을 방문하도록 후원을 받았다. 이러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장려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더 광범위한 일본의 계획의 일부였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만주와 중국 침략은 인도네시아의 화교들 사이에 불안감을 야기했고, 그들은 반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조성했다. 네덜란드 정보 기관도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감시했다.
2. 2. 20세기 초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
인도네시아 제도는 1819년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강제경작제도를 시행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국내 비판에 따라 정책을 변경하여, 유럽 문명으로 원주민 사회를 계몽한다는 "윤리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54] 윤리주의 정책에 따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교육 제도가 형성되었고, 인도네시아 주민들의 참여가 진전되어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다.[55][56]19세기 일본은 러일전쟁(1904년-1905년)에서 러시아 제국에 승리하였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주민들이 일본의 승리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활발해질 것을 우려하였다.[57]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네덜란드어 보급 대신 말레이어 보급을 추진하였고,[58] 1917년에 Balai Pustaka|발라이 푸스타카영어라는 출판 기관이 설립되었다. 말레이어 출판물이 증가하여 인도네시아어의 원형이 되었다. 이러한 언어 정책은 1928년 청년 선서로 이어졌다.[5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 되었으나, 1933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이 만주 사변(1931년) 이후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 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진 유럽과 미국 국가들은 일본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수입을 제한하였고, 이는 무역 마찰로 이어져 일·네 회담이 개최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6,949명에 달하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일본으로부터의 입국을 제한하였다.[59]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경계하였다.[60] 일청 전쟁 이후 타이완의 일본 통치 및 만주국의 설립은 화교들 사이에 불안감을 야기했다. 네덜란드의 정보 기관도 Japanese migration to Indonesia|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영어을 감시했다.[61] 네덜란드 본국은 1930년대 후반부터 나치 독일의 위협에 직면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일본의 위협이 존재했다. 일본과의 긴장 관계가 발생할 경우 인도네시아인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국제 정세 속에서 딜레마에 빠져 라디오 방송 권한 등에서 인도네시아인에게 양보하였다.[62]
일본에서는 1930년대부터의 정책에 따라 국책 회사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증가했다.[63]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1931년의 6,949명이 정점이었고, 그 이후로는 일본 정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간의 경제적 긴장으로 점차 감소하였다.[59] 일본 정부는 특히 무슬림계 정당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많은 인원을 파견하였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도 일본 방문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에서의 민족주의 고취는 일본 측의 보다 장대한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계획의 일환이었다.[64]
일본의 남방 진출을 위한 남진론은 만주 사변 이후 검토가 진행되었다. 미국은 중일 전쟁 발발 후 1939년에 일미 통상 항해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자원 공급 감소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자원의 보고"로 여기게 되었다.[65]
2. 3. 일본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간의 관계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태국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일란통상항해조약(1897년)과 일본인법(1899년)을 통해 자국민을 유럽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에 요구했다.[60] 이로 인해 일본인의 진출이 증가했고, 메단(1897년)과 바타비아(1913년)에 일본인회가 설립되었다.[60]러일전쟁(1904년-1905년)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인도네시아 주민들이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활발해질 것을 우려했다.[60] 한편, 인도네시아에서는 1927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이 결성되고, 1928년 청년의 서약을 통해 인도네시아어가 공용어로 확인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61] 수카르노와 모하마드 핫타는 태평양 전쟁 발발 가능성을 예측하고 일본의 진주가 인도네시아 독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61]
1915년 일본에서는 남양협회가 설립된 이후 재벌, 은행, 상사의 동남아시아 진출이 증가했다.[60]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상사 등 대기업들이 이 시기에 진출했다.[60] 1940년 네덜란드 전투에서 네덜란드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 진출을 본격화했다.[60] 일본은 제2차 일란 회상을 통해 석유 등 자원 확보를 네덜란드에 요구했지만, 일독이 삼국 동맹의 영향으로 1941년 협상이 중단되었다.[60]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은 일본의 남진론을 더욱 강화시켰다.[60] 일본 정부는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동남아시아 점령 후 "치안 회복, 조기 자원 획득, 군 부대의 현지 자활"을 기본 방침으로 결정했다.[60] 이는 약탈적인 정책을 의미했으며, 장기적인 유지 정책은 없었다.[60]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인을 상대로 라디오 도쿄 해외 방송을 통해 민족가요 "인도네시아 라야"를 방송하며 해방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60]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 하에서 특권 계급을 누리던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일본의 진주를 낙관하지 않았다.[60]
3. 일본의 침공과 점령
1941년 12월 8일,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62] 1942년 1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의 지휘 아래 동남아시아에서 연합군을 조정하기 위해 미국-영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 사령부가 설립되었다.[62]
1942년 초, 일본군은 신속하게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1월까지 술라웨시와 칼리만탄 일부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월에는 일본군이 수마트라에 상륙하여 아체인들이 네덜란드에 반항하도록 부추겼다.[64] 같은 달 19일, 암본을 이미 점령한 일본 동부 특별 기동부대는 티모르에 상륙하여 서티모르 꾸팡 근처에 특수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고, 12월에 침공한 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해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딜리 지역에 상륙했다.[63]
2월 27일, 자바 해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이 패배하면서 일본의 점령은 더욱 확고해졌다.[64]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일본군은 거의 방해받지 않고 자바 북부 해안의 네 곳에 상륙했다.[65] 가장 치열한 전투는 암본, 티모르, 칼리만탄 및 자바 해의 침공 지점에서 벌어졌다. 발리와 같이 네덜란드군이 없는 곳에서는 전투가 없었다.[65] 3월 9일, 네덜란드 사령관은 총독 알리디우스 차르다 반 스타르켄보르흐 스타추어와 함께 항복했다.[64]
3. 1. 초기 반응
일본군은 스스로를 "아시아의 빛"으로 칭하며 선전 활동을 펼쳤다.[66] 점령 초기,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고 열렬히 환영했다. 이들은 일본 국기를 흔들며 "일본은 우리의 형제다", "'''만세 대일본'''"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12]이러한 분위기에는 "인도네시아 민족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에게 지배받겠지만, 머지않아 북쪽에서 황색 피부의 민족이 와서 백인을 몰아내고 잠시 통치할 것이다. 옥수수가 열릴 때쯤 그들은 떠나고, 그 후에 독립이 올 것이다."라는 조요보요 전설[66]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이 진격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유럽인(특히 네덜란드인) 집단을 공격하고 일본군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렸다.[66] 인도네시아의 유명 작가 프라무드야 아난타 투어는 "일본이 왔을 때, 네덜란드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라고 회상했다.[13]
3. 2. 일본의 군정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수마트라, 자와와 마두라, 보르네오와 동인도네시아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항만, 우편 등 주요 기반 시설과 서비스를 장악하고, 현지 정치 엘리트들과 협력하며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1]일본 해군은 해군이 통제하는 지역을 해군 감독하에 있으면서도 민간 일본 관료들이 관리하는 영구 식민지로 만들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 해군은 행정관들을 데려왔다. 초기 남부 보르네오(네덜란드령 보르네오)의 군정은 사령장관이 이끄는 남방함대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사령장관은 다시 민정 총감 또는 최고 민정 행정관인 総官|소칸일본어을 임명했다. 총관은 마카사르에 설립된 해군 민정청(民政府|민세이후일본어)을 감독했다.
일본군은 점령 지역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통치했다.
행정 단위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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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통치 지역 | |
주(州, Shū) | 구 레지덴시(Residency). 레지덴시가 민정부(Minseibu)의 소재지와 일치하는 경우(예: 반자르마신을 수도로 하는 보르네오 남동부 레지덴시) 민정부의 직할 지역이 됨. |
분견(分遣, Bunken) | 네덜란드의 아프델링(Afdeeling)에 해당. |
토착민 통치 지역 | |
군(郡, Gun) 또는 구역 | 구 온더디스트릭트(onderdistrict)를 새롭게 그룹화한 것. |
부군(副郡, Fukugun) | 자바의 온더디스트릭트/아시스텐 케웨다난(asisten kewedanaan)에 해당하는 외딴섬 란드샤프(landschap)에 해당. |
손(村, Son) 또는 캄풍(Kampung) | 구 마을의 준(準) 행정구역. |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 영국령 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리지로드 학교와 바젤 선교 교회, 통신센터 역(구 올 세인츠 교회 사택) 등지에서 일본군 장교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했다. 발릭파판과 보포트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여성과 네덜란드 여성을 강간했고, 많은 여성들이 그 결과 성병에 감염되었다.[16] [17] [18] 수카르노는 미낭카바우 등의 민족 집단 출신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일본군에 매춘시켰다.[19] [20] [21] [22] [23]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도네시아 자바 여성에 대한 강간과 관련된 많은 문서를 파기하여 대량 강간의 실제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증언과 기록은 인도네시아 자바 출신 위안부들의 이름과 경험을 담고 있다.[24]
일본군은 한 사례로, 티모르 쿠팡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에 항복할 때 강간하던 자바 위안부들을 적십자 팔찌를 차고 있는 적십자 간호사로 위장하려 했다.[25] [26] [27] [28] [29] 자바 여성을 적십자 팔찌로 위장한 것 외에도 일부 네덜란드 여성도 쿠팡으로 끌려왔고, 쿠팡의 원주민 여성들도 일본군에게 납치당한 반면, 원주민 남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30] 비악섬의 인도와 자바 포로들은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의 통제에서 해방되었다.[31] 버마와 태국 사이의 죽음의 철도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26만 명의 자바인 중 7만 명만이 살아남았다.[32]
1945년 8월,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유럽 여성 수용자들을 총살하려 준비하고 있었고, 그 계획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이미 처형 대상자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33] 프랜시스 스탠리(프랭크) 테리라는 호주 해군 선원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섬에서 인도네시아 자바 출신 위안부들을 고향으로 송환하는 데 참여했다.[34] [35] [36] 네덜란드 왕실과 정부는 위안부 매춘으로 인한 돈을 여성들에게 보상하는 대신 스스로 차지했다.[37] [38]
일본군은 자바 여성들을 매춘부로 강제로 일하게 하고, 자바 남성들을 보르네오 라부안의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하게 했다. 자바 남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해골처럼 되었고,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1945년 6월 호주군에 의해 해방될 당시에는 각기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39] [40] 일본군은 라부안의 폭스로드에 매춘굴과 장교 클럽을 마련했다.[41] 1945년 8월 28일, 영국군과 호주군은 영양실조와 기아에 시달리는 300명의 자바와 말레이시아 남성 노예들에게 의료 치료를 제공했다.[42] [43]
많은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은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족자카르타의 카라마망모조 출신 10세 인도네시아 소녀 니엠(Niyem)은 서자바의 다른 인도네시아 소녀들과 함께 2개월 동안 일본군에게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그녀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부모에게 일본군이 자신에게 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44]
일본군은 400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살해했다.[45] 일본의 패전 후, 네덜란드는 일반적으로 비백인, 원주민 인도네시아 무슬림 소녀에 대한 일본군의 강간에 대해 무관심했고, 대부분의 경우 백인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강간에 대해서만 일본군 전범을 기소했다.[46] [47] [48]
네덜란드가 소모전과 초토화 작전을 시행하면서 자바의 중국인들을 내륙으로 도피시키고, 중국 공장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중요한 자산을 파괴했다. 현지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중국인을 공격하려고 네덜란드의 중국인에 대한 폭력에 가담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륙하여 네덜란드로부터 자바를 장악하자, 사람들은 놀랍게도 일본군이 현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중국인 약탈과 공격을 중단하도록 강요하고, 자바에서 반중국 폭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은 자바의 중국인과 그들의 경제력을 일본의 전쟁 노력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달리 자바의 중국인들에게 신체적 해를 끼치거나 처형하거나 고문하지 않았다. 영국령 말라야와 달리 자바에서 일본군과 중국인 사이에는 폭력적인 충돌이 없었다. 일본은 또한 해외 중국인 연합회(화교총회)의 자바 중국인들이 자위대(계보대)를 결성하여 일본군 교관의 사격 및 창 사용 훈련을 받도록 허용했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현지 인도네시아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자바의 대다수 중국인들은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 일본의 통제가 무너진 후, 일본군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현지 인도네시아인들이 자바 중국인들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였다.[49]
자와에서 일본군은 자바 여성을 위안부로 대거 모집하여 자바 외에도 뉴기니, 말레이시아, 태국 등 인도네시아 외 지역으로 데려갔다. 일본군은 자바 여성을 위안부로 부루섬과 칼리만탄으로 데려갔다. 일본군은 모든 민족의 현지 협력 경찰의 도움을 받아 자바 여성을 모집했는데, 한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모집자가 1942년 5월 자바의 한 지역 수령을 속여 좋은 자바 여성들을 일본군을 위한 매춘으로 보냈다고 비난했다. 일본군은 자바 여성들을 모집할 때 그들이 웨이트리스와 여배우가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일본군은 티모르 쿠팡에 자바 여성을 위안부로 데려왔고, 동티모르에서는 딜리의 현지 여성들을 데려갔다. 발리에서는 일본군이 상륙하여 발리 여성을 매춘부로 강제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발리 여성들을 성적으로 괴롭혔고, 발리 남성과 중국 남성을 발리 여성 모집에 이용했다. 발리의 모든 매춘굴은 발리 여성이 운영했다. 칼리만탄의 매춘굴에서 원주민 인도네시아 여성이 매춘부의 80%를 차지했다. 자바 여성과 현지 여성이 바투 간퉁의 암본에 있는 일본군 매춘굴에서 이용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위안부에 대한 문서에는 유럽계 네덜란드 여성이 과대 표현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가 당시 UN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희생된 원주민 인도네시아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들에 대한 기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의해 자바 밖의 섬으로 끌려간 자바 위안부들은 그 섬에 머물렀는지, 자바로 돌아왔는지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았다. 자바 사회가 성적으로 관대한 편이고 다른 자바인들에게 비밀로 유지했기 때문에 자바로 돌아온 자바 여성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았지만, 부루 섬과 같은 섬에 남은 자바 여성들은 현지 주민들이 더 가부장제였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에게 더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군은 티모르와 숨바에서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고 소녀들을 매춘에 강제로 끌어들였고, 교회의 성물과 성의를 훼손하고 교회를 매춘굴로 사용했다. 자바 여성들은 일본군에 의해 플로레스와 부루로 매춘부로 끌려갔다.[50] 유라시아인, 인도인, 중국인, 네덜란드인, 메나도네스, 바탁족, 부기스족, 다약족, 자바인, 아랍인, 말레이인이 만도르 사건에서 체포되어 학살당했다.[51]
수하르토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전쟁 범죄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막았지만, 1973년 영화 로무샤가 개봉되고 1974년 인도네시아에서 말라리 사건 폭동이 일본에 대한 것으로 일어났을 때도 무시되었다. 수하르토는 또한 1975년 이후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의 전쟁 범죄 때문에 일본군 전쟁 범죄에 대한 논의를 막으려고 했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한국의 사례를 따라 1990년대에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바 출신 인도네시아 위안부 마르디엠(Mardyiem)은 수십 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후 일본 변호사들이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을 인터뷰한 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52]
자와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에 맞서 세 차례의 주요 반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치레본의 서자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일본군에 막대한 양의 쌀을 넘기도록 강제했고, 일본군 장교들은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치레본의 인도네시아인들은 1944년 두 차례 반란을 일으켜 인도네시아 협력 관료와 일본군 장교들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치명적인 무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도네시아 반군을 살해했다. 수크마나, 싱가푸르나, 타식말라야 지역에서 보수적인 종교 교사 키아이 자이날 무스타파는 무함마드가 태어난 달에 자신의 신호를 줄 때 신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1943년 2월, 일본군 헌병대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지역으로 왔지만, 도로가 막혀 진입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마을 주민과 학생들은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하여 일본군 지휘관의 칼을 빼앗아 그를 죽였다. 더 많은 일본군이 도착했고, 전투에서 일본군 86명과 인도네시아 마을 주민 153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그 후 자이날과 다른 22명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수프리아디는 1945년 2월 페타 반란을 이끌었다.[53]
3. 2. 1. 자바 지역의 행정
일본군은 당초 네덜란드인 관리들을 유임시키려 했으나, 이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일본인 또는 인도네시아인으로 대체했다.[1] 제16군은 자바를 단일 행정구역으로 관리하려 했으나, 행정 전문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군정 구조는 군사령관, 군정관, 군정부의 세 직책으로 구성되었다.지방 정부 구조는 주(州), 시(市), 켄(県), 군(郡), 손(村), 구(区) 등으로 구성되었다. 군정감부가 있는 자카르타는 특별시로 지정되었고, 주장관과 특별시장은 일본인이 맡았으며, 현장 이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의 인원이나 인도네시아인이 그대로 기용되었다.[3]
자와섬의 농촌은 촌장이 거의 세습되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었다. 일본 군정에서는 농촌이 점령지 행정과 직결되었고, 촌장은 관리로서 사무적인 직무와 군정에 대한 협력을 요구받게 되었다. 촌장 대부분은 이러한 요구에 응할 수 없었고, 군정감부는 구장 선거 파면령과 대책 요강으로 개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
3. 2. 2. 수마트라 지역의 행정
일본군은 네덜란드인 관리자들이 계속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은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일본인 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이들의 상관 및 기술직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1] 10만 명의 유럽 민간인(일부 중국인 포함)과 8만 명의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연합군 병사들이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의 사망률은 13%에서 30%였다.[2]항복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인 중 인도네시아인들은 기본적으로 해방되었지만, 기독교계로 식민지 통치의 수혜자였던 메나도인은 강제로 병보에 편입되었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고문이 가해졌다. 다른 인도네시아인 출신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인에 대해서는 1942년 8월부터 병보 모집이 진행되었다.[3]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의 교육은 민족과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다. 수업 연한과 시간표가 다른 여러 종류의 초등학교가 있었으며,[4] 7년제 네덜란드 원주민 학교와 3년제 마을 학교의 두 가지 초등 교육이 있었다.[5] 일본군정감부는 1942년 4월 22일 포고 제12호로 6·3·3제를 도입하여 모든 초등학교를 6년제 국민학교로 만들었다.[4] 교과서는 당초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의 교과서를 계속 사용했지만, 내용을 검열하여 일본군정에 불편한 내용은 삭제하거나 변경하였다.[6][4]
1943년 9월 군정감부는 교육 방법을 명시하고, 단체의 규율 훈련, 근로 훈련, 교련 등을 중시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4] 교육 과정에는 일본어, 일본사, 수신, 勤労奉仕|근로봉사일본어 등이 있었다. 봉사의 실천과 사상 교육이 많았기 때문에 학력 향상에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강의 용어를 인도네시아어로 한 것은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변화였다.[5]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었다.[7]
일본은 관리 양성학교, 사범학교, 농림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 의과대학, 상선학교 등을 개교하였다.[8][9] 도시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体操|체조일본어, 教練|교련일본어, 勤労奉仕|근로봉사일본어를 요구했지만, 식량 부족(후술) 때문에 쓰러지는 학생도 있었다. 일본인 교관이나 단장은 그런 학생들을 뺨打(ビンタ|빈타일본어)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10]
3. 2. 3. 기타 섬 지역의 행정
일본 해군은 민정부를 통해 다른 섬들을 통치하려 했으며, 다음과 같은 행정 단위를 사용했다.행정 단위 | 설명 |
---|---|
주(州, Shū) | 구 레지덴시(Residency). 레지덴시가 민정부(Minseibu) 소재지와 일치하는 경우 민정부 직할 지역이 됨. |
분견(分遣, Bunken) | 네덜란드의 아프델링(Afdeeling)에 해당. |
토착민 통치 지역 | |
군(郡, Gun) 또는 구역 | 구 온더디스트릭트(onderdistrict)를 새롭게 그룹화한 것. |
부군(副郡, Fukugun) | 자바의 온더디스트릭트/아시스텐 케웨다난(asisten kewedanaan)에 해당하는 외딴섬 란드샤프(landschap)에 해당. |
손(村, Son) 또는 캄풍(Kampung) | 구 마을의 준(準) 행정구역. |
3. 3.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처우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인들은 고문, 성노예, 자의적 체포 및 처형, 강제 노동 등 가혹 행위를 당했다.[15]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프로젝트를 위한 강제 노동자(로무샤(romusha))로 인도네시아에서 끌려가 학대와 기아로 고통받거나 사망했다. 자바에서 모집된 20만 명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로무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노역을 당했다.수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굶주렸고, 노예 노동자로 일했으며, 또는 집에서 쫓겨났다. 그 후 일어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수만 명, 심지어 수십만 명이 독립이 달성되기 전에 일본군, 연합군, 그리고 다른 인도네시아인들과 싸우다 죽었다. 후에 발표된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점령 기간 동안 기아와 강제 노동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3만 명의 유럽군인과 유럽 민간인 수용자 사망자도 포함된다.[15]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로 동원했다. 네덜란드 정부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200~300명의 유럽 여성 중 "약 65명은 거의 확실히 강제 매춘을 당했다"고 결론지었다. 다른 젊은 여성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수용소 또는 전시 사회에서 여러 가지 압력에 직면하여, 종종 그 성격이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일자리 제안에 동의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 영국령 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리지로드 학교와 바젤 선교 교회, 통신센터 역(구 올 세인츠 교회 사택) 등지에서 일본군 장교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했다. 발리파판과 보포트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여성과 네덜란드 여성을 강간했다. 많은 여성들이 그 결과 성병에 감염되었다.[16] [17] [18] 수카르노는 미낭카바우 등의 민족 집단 출신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일본군에 매춘시켰다.[19] [20] [21] [22] [23]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도네시아 자바 여성에 대한 강간과 관련된 많은 문서를 파기하여 대량 강간의 실제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증언과 기록이 인도네시아 자바 출신 위안부들의 이름과 경험을 담고 있다.[24]
일본군은 한 사례로, 티모르 쿠팡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에 항복할 때 강간하던 자바 위안부들을 적십자 팔찌를 차고 있는 적십자 간호사로 위장하려 했다.[25] [26] [27] [28] [29]
버마와 태국 사이의 죽음의 철도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26만 명의 자바인 중 7만 명만이 살아남았다.[32]
1945년 8월,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유럽 여성 수용자들을 총살하려 준비하고 있었고, 그 계획은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이미 처형 대상자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33]
많은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은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요기야카르타의 카라마망모조 출신 10세 인도네시아 소녀 니엠(Niyem)은 서자바의 다른 인도네시아 소녀들과 함께 2개월 동안 일본군에게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그녀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부모에게 일본군이 자신에게 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44]
일본군은 400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살해했다.[45] 일본의 패전 후, 네덜란드는 일반적으로 비백인, 원주민 인도네시아 무슬림 소녀에 대한 일본군의 강간에 대해 무관심했고, 대부분의 경우 백인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강간에 대해서만 일본군 전범을 기소했다.[46] [47] [48]
3. 4. 전쟁 범죄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하고,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프로젝트를 위한 강제 노동자(로무샤)로 인도네시아에서 끌려가 학대와 기아로 고통받거나 사망했다.[15] 네덜란드 정부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200~300명의 유럽 여성 중 "약 65명은 거의 확실히 강제 매춘을 당했다"고 결론지었다.[16][17][18]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아 영국령 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리지로드 학교와 바젤 선교 교회, 통신센터 역(구 올 세인츠 교회 사택) 등지에서 일본군 장교들에게 강간을 자행했다. 발리파판과 보포트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인도네시아 여성과 네덜란드 여성을 강간했고, 많은 여성들이 그 결과 성병에 감염되었다. 수카르노는 미낭카바우 등의 민족 집단 출신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일본군에 매춘시켰다.[19][20][21][22][23]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도네시아 자바 여성에 대한 강간 관련 문서를 대량 파기하여 실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증언과 기록에는 인도네시아 자바 출신 위안부들의 이름과 경험이 담겨 있다.[24]
폰티아낙 사건(만도르 사건으로도 알려짐) 등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89][90] 1943년부터 1944년의 폰티아낙 사건에서 일본군은 칼리만탄섬의 모든 술탄을 포함한 말레이계 엘리트와 아랍인, 화교,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인, 인도인, 유라시아인들을 대규모로 체포하여 일본 지배 전복 혐의로 기소하고 처형했다. 일본군은 이슬람 민족 집단과 조직 모두가 일본군을 전복시켜 "서부 보르네오 공화국(Negara Rakyat Borneo Barat)"을 건설하는 계획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91] 일본군은 "서로 적대하던 술탄, 중국인,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 인도인, 아랍인들이 일본군을 모두 죽이기 위해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계획된 반란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폰티아낙의 술탄을 지목했다.[92] 최대 25명의 귀족, 폰티아낙 술탄의 친족, 그리고 많은 저명 인사들이 계획 참여자로 지목되어 만돌에서 처형되었다.[93][94]
3. 5. 지하 저항 운동

수탄 샤히르(Sutan Sjahrir) 외에 주목할 만한 반대파 정치인은 좌파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din)이었다. 그는 1942년 초 네덜란드로부터 지하 저항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2만 5천 길더(guilders)를 받았다. 이는 그의 마르크스주의(Marxist) 및 민족주의적 연줄을 통해 가능했다.[70] 일본은 1943년 아미르를 체포했지만, 수카르노의 개입으로 처형을 면했다.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내 인기와 전쟁 수행에서의 중요성을 일본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아미르의 수라바야 기반 그룹 외에도, 적극적으로 연합국을 지지하는 활동은 중국인, 암본 섬 주민, 그리고 마나도(Manado) 주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70]
3. 6. 독립 지원
1943년,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수행을 위한 협력을 얻기 위한 목적이 컸다.[72] 같은 해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일본 제국에 포함시키되 "원주민의 정치적 참여"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1943년 11월, 일본은 도쿄에서 대동아회의를 개최했지만, 인도네시아 대표는 초대받지 못했다. 대신 전쟁 전 독립 지도자인 수카르노, 하타, 하자르 데완타라가 회의 직후 도쿄에 초청되어 히로히토 천황과 토죠 히데키 수상을 만났지만, 인도네시아의 미래 독립에 대한 긍정적인 징후는 얻지 못했다.일본의 영토 확장이 중단되고 역전되면서,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참여에 더 호의적이 되었다. 전쟁 전 독립 지도자 수카르노를 수장으로 하는 중앙 자문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일본은 조국 방위군(Pembela Tanah Air|페타id; 郷土防衛義勇軍|교도 보에이 기유군일본어)을 창설했다. 1944년에는 일본의 이익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자바 봉사 협회(''자와 호코카이'')가 결성되었다.
1944년 9월 7일, 일본의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은 "미래에" 동인도 제도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 후 자바 당국은 ''자와 호코카이'' 건물에 인도네시아 국기 게양을 허용했다. 마에다 타다시] 중장]은 수카르노와 하타의 군도 순회 여행에 자금을 지원했다. 1944년 10월, 마에다는 독립된 인도네시아를 위해 청년 지도자들을 준비하기 위한 자유 인도네시아 기숙사를 설립했다. 1945년 3월, 일본은
4. 점령의 종식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연합군 주력 부대는 인도네시아를 우회하여 자바섬이나 수마트라섬과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따라서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당시에도 인도네시아 대부분이 여전히 일본의 점령 하에 있었다.[71]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은 자바섬 해방을 원했지만, 통합 참모본부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일본의 점령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른 일본의 항복으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이틀 후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이 자바에서의 전쟁을 억제함으로써 일본인, 자바인, 네덜란드인, 미국인의 많은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맥아더가 자신의 방식을 채택하여 미군이 자바를 점령했더라면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더 빠르고 원활하게 달성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54] 후년의 유엔 보고서는 일본의 점령 결과로 인도네시아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24]
일본의 항복을 예상한 샤프릴(Syarifuddin Prawiranegara)은 8월 14일 청년들과 함께 수카르노(Soekarno)와 하타(Mohammad Hatta)를 방문하여 독립 선언을 요청했지만, 일본군의 저지를 우려한 두 사람에게 거절당했다.[54]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청년 활동가들은 수카르노 부부와 하타를 자카르타 교외의 르응가스덴끌록(Rengasdengklok)으로 납치했는데, 이는 렝아스뎅클로크 사건으로 불린다. 사건의 중심 인물은 디파 누산타라 아이디트, 아담 말릭, 차이룰 살레흐 등이었으며, 무장 봉기와 일본군으로부터의 권력 탈취를 요구했지만, 수카르노와 하타는 동의하지 않았다. 수카르노는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되면 목표는 달성될 수 있으므로 무장 봉기는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55] 납치 사건을 알게 된 독립 준비 위원회의 수바르조(Ahmad Soebardjo)와 해군 무관부장관 마에다 세이는 청년들을 설득하여 수하르토 등을 석방했다.[56]
항복 후 일본군은 연합군으로부터 현상 유지를 명령받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기로 했다. 이 정보를 마에다로부터 알게 된 수카르노는 독립 준비 위원회를 소집하여 독립을 결의했다.[56]
8월 17일, 수카르노는 멘텐의 저택 앞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수제로 만든 홍백기(메라 푸티)를 게양하고 인도네시아 라야를 제창했다. 8월 18일 독립 준비 위원회가 잠정 헌법을 채택하고 수카르노가 대통령, 하타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준비 위원회는 8월 29일 중앙 국민 위원회(국민 의회)로 개편되었고, 9월 4일 초대 내각이 조직되어 공화국 정부가 성립되었다.[56]
수카르노와 하타에 의한 정부와는 별도로, 8월 15일 이후 각지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점령 정책으로 인해 농업과 광업의 붕괴, 노무자 징용과 강제 노동, 쌀의 강제 징발이 발생하여 관료와 화교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청년을 중심으로 한 집단은 일본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정부 기관, 항만, 철도 등을 점거하고, 관료와 화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각지의 관청은 다양한 무장 조직에 점거되어 혼란에 빠졌다.[71] 후에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수하르토는 경찰에서 의용군에 자원하여 일본의 항복 후에는 국군 장교가 되어 족자카르타의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72] 전 네덜란드령 동인도 군인들은 암본섬이나 메단 주민들과 함께 행동을 일으켰다.[72]
네덜란드는 일본의 항복과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회복하려 했다. 네덜란드 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 피해로 인해, 대신 영국군이 1945년 9월 29일 자카르타에 상륙하여 치안 유지를 담당했고, 후에 1946년 3월에는 네덜란드군도 상륙했다.[124] 일본군의 무기 접수가 시작되었고, 독립을 추진하는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10월 5일 인민치안군(TKR, 후의 인도네시아 공화국군)을 조직했지만, 그 사이에도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를 계속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지휘하에 인도네시아인들의 활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기 때문에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125]
일본과 인도네시아 간의 무력 충돌 최종 단계는 1945년 10월, 일본이 인도네시아 측에 양도한 도시의 지배권을 연합군과의 항복 조건에 따라 되찾으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일본의 헌병대는 10월 3일 중부 자바 주 페칼롱안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청년 단원을 살해했고, 또한 일본군 부대는 서자바주 반둥에서 공화국 청년 단원을 추방하고 영국에 도시를 인계했지만, 일본인이 관련된 가장 치열한 전투는 세마랑에서 발생했다. 10월 14일 자바 섬에 상륙한 영국군이 세마랑 시를 향해 진주를 시작했다. 후퇴한 인도네시아 측은 사로잡았던 130명에서 300명의 일본군 포로를 살해했다. 일본인 500명과 인도네시아인 2000명이 살해되었고, 6일 후 영국군이 세마랑 시에 도착했을 때, 일단 도시의 모든 권한을 포기했던 일본군은 세마랑 시를 거의 점거하고 있었다.[125]
이 세마랑 사건은 일본이 연합군에 패배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세마랑에서 무장 집단을 만들어 공산당 지배하의 독립을 꾀해 행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126] 당시 이 공산당 과격파에 의해 「일본인이 수도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었다. 공산당 과격파는 일본군이 반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무기를 빼앗아 일본 민간인을 살해하고, 자바 지역의 방위 사령관의 저택을 습격하여 여단장을 감금하고 일본 해군 병사들을 납치했다. 세마랑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보병대는 납치된 일본인 약 400명 구출을 위해 인도네시아 공산당 과격파와의 전투를 불가피하게 되었다. 일본 보병대가 돌입하자 이미 130명의 일본인이 살해당해 있었다.[127][128]
패전 후 일본군의 처우는, 전쟁 중에 체포된 포로, 전쟁 후에 체포된 일본군, 그리고 전쟁범죄 혐의자로 분류된다.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와 식민지 관리 민간인은 전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수천 명 이상이 강제노역이나 치안유지 활동 등 전쟁범죄에 대한 선별 및 약 1038명의 개인에 대한 전쟁범죄 재판을 거쳐, 그들은 남은 일본 선박으로 일본에 송환되었다. 약 1,000명의 일본군 병사가 당시 연합군 지휘하에 있던 자신의 부대에서 탈영하여 현지 공동체에 동화되었다. 이들 병사 중 다수는 TNI(인도네시아 국군) 및 다른 인도네시아 군사 조직에 가담했고, 아브둘 락만을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사망한 자도 있었다.[129] 탈영한 일본군 중 독립전쟁에 참가한 사람은 8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130]
1949년까지 네덜란드 당국은 1038명의 혐의자(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에 관여한 체포된 일본군)에 대해 448건의 전쟁범죄 재판을 진행했다. 그중 969명(93.4%)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 236명(24.4%)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130]
네덜란드 정부는 일본에 협력했던 수카르노를 일본의 꼭두각시로 간주하여 협상을 하지 않았고,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13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네덜란드의 국민소득의 15%는 인도네시아에서 나왔고, 식민지 이익의 지속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네덜란드에서는 "인디에(Indië)를 잃으면 재앙이 생긴다"(Indië verloren, rampspoed geboren)라는 슬로건도 사용되었다.
초대 수상이 된 샤프리르는 일본군정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수카르노 대신 인도네시아 정부 대표로서 네덜란드와 협상했다. 1946년에는 링가자티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 협정을 근거로 네덜란드가 식민지 지배의 부활을 추진했기 때문에 샤프리르는 국내에서 비판을 받고 사퇴했다. 다음 하타 수상은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주권 이양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재점령과 재식민지화를 시도하여 공화국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되었다. 독립 전쟁에서는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5. 전후 영향
일본 점령은 인도네시아 사회, 정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 등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로옴샤(노무자)로 동원되어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로옴샤로 동원된 인원은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으로 추산되며, 해외 파견자 30만 명 중 7만 명만이 귀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소녀들은 위안부로 끌려가기도 했다. 일본군 항복 후 이들은 각지에 버려졌고, 일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불루섬 등에서 계속 살았다. 네덜란드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군 매음굴에서 일하던 유럽 여성 200~300명 중 약 65명은 강제로 매춘을 강요당했다.[74]
유엔 보고서는 일본 점령 기간 중 기근과 강제 노동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400만 명(구금된 유럽 민간인 3만 명 포함)이 사망했다고 밝혔다.[83]
5. 1. 정치적 영향
일본 점령 기간 동안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억압했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이 고취되었다.[72] 일본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하고, 조국 방위군(PETA)과 같은 군사 조직을 창설하여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했다.[72]
일본은 초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인도네시아의 홍백기 사용을 허용했지만, 2개월 후 다시 금지했다.[71]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현지 주민을 동원하여 방위에 임하게 하기 위해 향토 방위 의용군(PETA)을 설립했다. PETA는 자바 섬에만 66개 대단, 3만 8,000명에 달했다.[72]
일본의 군사 훈련은 원래 일본 제국의 세력권(대동아 공영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훗날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에게 중요한 자원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국군 형성으로 이어졌다.[72]
일본 군정은 인도네시아를 위해 행해진 것은 아니지만, PETA 창설 등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에 도움이 되었으며,[72] 인도네시아 국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인을 일본군의 가치관 체계 안에 넣으려 하면서 다양한 일본화, 황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에 도입된 체조·군사 교련·집단 훈련 등은 인도네시아인의 체력·정신력·집단 규율·전투력 등을 높여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승리의 요인이 되었지만, 강제적인 일본화 정책은 인도네시아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31]
일본 군정에 대한 협력을 둘러싸고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세대 간의 갈등도 발생했다. 군정 이전부터 활동해 온 수카르노 등 구세대는 비교적 온건한 사상이었지만, 군정 중에 등장한 신세대는 급진적이었으며, 일본과의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수카르노와 대립했다.
5. 2. 사회적 영향
이웃 조직(토나리구미)은 일본 항복 후에도 계속 존재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증가했던 부농층에게 이웃 조직과 자(字) 상회(常会)는 마을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84] 따라서 이웃 조직은 자바 사회에서 계속되었고, 정부에 의해 법제화되기도 했다.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된 1960년대에 이웃 조직은 르쿤 테탕가(RT)와 르쿤 와르가(RW)로 명칭이 변경되어 국가의 통일적인 제도가 되었다. RT와 RW는 주민 통제와 정보 전달에 사용되었고, 9월 30일 사건 (1965년) 당시에는 RT가 각지로 도망친 공산주의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산주의자 사냥으로 인해 살해된 사람은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84]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설립되어 여당적인 역할을 수행한 단체인 골카르는 자바 봉공회(奉公会)를 기반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5. 3. 경제적 영향
일본의 군정과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으로 인도네시아의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렸으며, 국가 운영 자금이 부족했다. 1950년대 초 인도네시아 경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 수준까지 회복되지 못했다.[83] 주요 수출품이었던 설탕의 1950년 생산량은 1937년 수준의 20%에 불과했으며, 커피, 담배, 차, 키니나 나무(아카키나노키), 팜유 등의 회복도 더뎠는데, 이는 일본 점령기의 강제적인 전작이 원인이었다. 식량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토지에서 재배되었던 고무와 코프라의 회복은 빨랐다. 제조업도 전시에 파괴된 설비와 인프라 복구 등 전쟁 전 수준으로의 복귀가 과제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1951년)에 참석한 아흐마드 수바르조 외무장관은 "군정 중에 인도네시아가 입은 피해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약 400만 명의 인명 손실이고, 또 하나는 수십억 달러의 물질적 손해이다"라고 연설했다. 반면, 농원·기업 경영 노하우를 배운 인도네시아인들도 있었다.[138]전후 일본은 중국 시장을 잃었고, 경제 자립화와 성장을 위해 동남아시아 시장이 필요했다. 일본에게 동남아시아는 자원 수입과 공업 제품의 수출 시장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인도네시아의 풍부한 광물 자원은 전후 일본에서도 주목받았다. 일본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1951년) 발효로 무역 협상이 가능해졌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배상 완화를 주장하며, 금전 배상 대신 일본인의 역무 배상에 의한 지불을 지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을 1951년에 시작했지만, 협상은 난항을 겪었고 그 후 6년이나 걸렸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대일 감정이 악화되었고, 국민당의 위로포 내각은 강경 자세였다. 하타 부통령은 그 원인으로 일본 측이 전시 지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점, 일본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점에 대한 반감을 들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양국 간 평화 조약과 배상 해결을 세트로 하는 장기 협상으로 대응했다. 1953년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했고, 인도네시아 외무부는 "일본은 서비스 외에 자본재의 형태로도 배상 지불 준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미얀마와의 협상이 선례가 되어, 배상은 역무와 생산물(원칙적으로 자본재)에 의한 지불이 결정되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수상과 수카르노 대통령 및 주안다 카르타위조요 수상의 회담으로 채무 탕감에 의한 일종의 금전 배상도 포함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일본은 배상 2.3억달러와 채무 탕감 1.77억달러를 포함하는 배상 협정과 4억달러의 경제 협력 협정을 1958년 1월에 조인했다.
1960년대에는 동남아시아에 일본 기업이 진출하여 경제 성장이 진행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투자와 일본 제품이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일본이 권력자의 이익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대동아 공영권 이미지에도 연결되어 일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에 맞춰 말라리 사건이 일어났다.
5. 4. 문화적 영향
1928년 인도네시아 청년 회의 선언을 일본 군정 간부가 계승하여 인도네시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면서, 인도네시아어는 국가 통합의 상징이 되었고, 이는 독립 운동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 수카르노는 "우리가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로 뭉치려면 통일된 새로운 인도네시아어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으며, 아담 말릭은 "현재 국어가 된 인도네시아어는 국가 건설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1] 이처럼 인도네시아어가 공용어로 보급되고 발전한 것은 인도네시아인들 간의 연대감을 조성하고, 나아가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국가 건설에 기여했다.[1]일본 점령 시기에 사용되었던 일본어가 인도네시아 어휘로 정착되기도 했다.[2] 1970년대 초판 중학교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어 기원 어휘로 Bogodan(방호단), Dokuritsu Zyunbi Tyoosakai(독립준비조사회), Heiho(병보), Jawa Hokokai(자와 봉공회), Kenpeitai(헌병대) 등이 기록되었다.[2]
쿠슈 케이호(공습경보)도 인도네시아 어휘가 되었다.[3] 암시장 가격은 "할가 쿠슈 케이호"라고 불렸는데, 할가는 가격, 쿠슈 케이호는 공습 경보를 의미한다.[3]
1995년 당시 인도네시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교과서 103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일본어는 Romusha(로무샤)였다.[4] 인도네시아에서 "로무샤"는 일본의 "노무자"와는 달리 "일본 점령 시대에 중노동을 강요받던 사람들, 즉 강제 노동자"를 의미한다.[4] 역사 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던 전 교육 문화부 장관 누그로호 노토수산토는 로무샤라는 단어를 교과서에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4] (1) 전시 중 일본에서 사용되었고 현재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2) 이 단어에 해당하는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3) 100만 명 이상이 노무자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며, 이러한 점도 다른 단어로 번역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4]
6. 평가와 유산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은 인도네시아 역사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은 가혹한 통치를 통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결과도 낳았다.
6. 1. 역사적 평가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은 가혹한 통치와 전쟁 범죄로 얼룩진 시기였다.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로옴샤(강제 노무자)로 동원되어 학대와 기아로 사망하였고,[72]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고통을 겪었다.[73][74][75][76][77][78][79][80][81][82] 유엔 보고서는 일본 점령 기간 동안 기근과 강제 노동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83]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무례한 언행과 폭력을 일삼았으며, 특히 헌병의 잔혹 행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132] 헌병들은 가혹한 조사와 고문을 자행했으며,[133][134] 인도네시아인들은 헌병의 횡포에 큰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일본 점령은 인도네시아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일본 군정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하고, 수카르노와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지원했다.[72] 또한, 일본 군정 하에 향토방위의용군(PETA) 등 군사 조직이 훈련을 받았고,[72] 이는 훗날 인도네시아 국군의 기반이 되었다.[72]

이러한 점 때문에, 서구에서는 일본 군정이 인도네시아 독립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유발한 '촉매' 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35]
종전 후, 일부 일본군 병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독립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126][127][128][129] 이들은 인도네시아 국군 및 기타 군사 조직에 합류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웠다.
6. 2. 위안부 문제
인도네시아에서는 소녀들이 위안소로 끌려가 자바섬에서 배를 타고 태국이나 쇼난섬(싱가포르)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있었다.[73] 일본이나 싱가포르에 유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73] 일본군이 항복한 후, 여성들은 각지에 버려졌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불루섬 등에서 계속 살았다.[73] 이러한 여성들의 존재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89] 네덜란드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군 매음굴에서 일하는 유럽 여성 200~300명 중 "약 65명은 거의 확실히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한다.[74] 수용소나 전시 사회에서 여러 압력에 직면하여 매춘을 제공한 젊은 여성(그리고 그 가족)도 있었지만, 그 성격(강제적이었는지 아닌지)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75][76][77][78][79][80][81][82]1960년대 수하르토 정권이 정치범들을 불루섬으로 보내기 시작했을 때, 과거 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3] 정치범으로 불루섬에 보내진 작가 프람디야 아난타 투르는 그러한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73]
일본의 점령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일본 정부는 사과 서한과 출연금을 지급했다.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은 "일본 정부가 보상을 한다면, 그것은 효과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89] 1995년부터 인도네시아 병보협회가 협력하여 전직 위안부들이 서류에 등록하고, 상세한 조사를 실시했다.[89]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대통령에게 사과 서한을 보냈고, 아시아여성기금 간에 양해각서(MOU)가 체결되어 일본 정부는 10년에 걸쳐 3.8억엔을 지원했다.[89] 그러나 일본 정부의 지원금은 인도네시아에서 노인 요양 시설 건설에 사용되었고, 전직 위안부를 위한 자금이라는 점이 홍보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89]
6. 3. 문화적 유산
일본 점령기의 경험은 인도네시아에서 문학,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1920년대에 태어나 일본 점령과 독립 전쟁을 겪은 작가들을 "45년 세대"라고 부르며, 이들은 독립을 찬양하거나 사회 격변 속 민중의 삶을 조명하는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137] 강제 노동을 다룬 영화 "로무샤"(1973년)가 제작되었으나, 상영 중지되기도 하였다.[138] 위안부를 주제로 한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도 제작되었다.[139]일본 점령 관련 자료는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 등에 보관되어 연구되고 있다.[139]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에는 일본어 자료도 소장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일본 국내에서도 찾기 어려운 문헌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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