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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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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휘윤은 1944년 전라북도 김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되었다. 전주지방검찰청, 광주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며 학림 사건, 송씨 일가 간첩 사건 등을 수사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변호사로 개업 후 재경 김제향우회장, 남성총동창회 수석부회장 등을 지냈다. 2021년 사망했다.

2. 생애

임휘윤은 1944년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서 풍천 임씨[1] 집안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순천성동초등학교, 김제중학교(10회)[3], 남성고등학교(12회)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72년 사법연수원 2기를 수료하였다. 1973년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75년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1]

검사 재직 시절, 전주지방검찰청, 광주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대검찰청 등에서 근무했다.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시절에는 고향에 대한 애정을 보였고,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시절에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정치인과 대학생들을 기소했다.[6]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시절에는 학림 사건,[7] '송씨 일가 간첩 사건',[8]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9] 등을 수사했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 시절에는 건설업체 비리, 무허가 제품 제조, 상수도 공사 비리 등을 수사하고, 노동자 농성에 경찰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다.[19]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검사 시절에는 불법 건축, 불량 제품 제조, 환경 오염, 인신매매, 도박 등 다양한 사건을 수사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초원복집 사건을 수사하여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38]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시절에는 검찰청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39] 대검찰청 강력부장 시절에는 폭력범죄수사 지침을 마련하고,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을 추진했다.[49]

1999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에 임명되어 호남 출신으로는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되었다.[51]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및 옷로비 의혹 사건 특검팀의 사건 인수 거부,[54] 정형근 의원 수사,[55] 이용호 게이트 관련 조사[59] 등을 겪었다.

2000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했다.[68]

검찰 퇴직 후 변호사 등록을 신청했으나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등록을 보류했다가 2개월 후 자동 부여받았다.[65]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 지역구 출마가 예상되기도 했다.[69]

2021년 10월 29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1944년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서 풍천 임씨[1] 집안의 6형제(임휘진 자영업, 임휘연 전 KT과장, 임휘칠 전 대우자판건설사장, 임휘종 풍천건설사장, 임휘문 성원건설 대표이사) 중 넷째로 태어났다.[2] 순천성동초등학교, 김제중학교(10회)[3], 남성고등학교(12회)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2. 2. 검사 임용

1944년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에서 풍천 임씨[1] 집안의 6형제(임휘진 자영업, 임휘연 전 KT과장, 임휘칠 전 대우자판건설사장, 임휘종 풍천건설사장, 임휘문 성원건설 대표이사) 중 넷째로 태어나[2] 순천성동초등학교, 김제중학교(10회)[3], 남성고등학교(12회)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50명 합격)[4]하여 1972년 사법연수원 2기를 수료하였다. 1973년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75년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

2. 3. 검사 재직 시절

임휘윤은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72년 제2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1975년 전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1]

; 전주지방검찰청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시절, 고향 전북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제17대 재경남성동창회장, 2003년 재경 김제향우회장,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제18대 남성총동창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5]

; 광주지방검찰청

1978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유신 철폐를 주장한 야당 정치인과 대학생들을 기소했다.[6]

; 서울지방검찰청

198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서 안강민, 김경한과 함께 학림 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자들에게 최고 사형 판결을 이끌어냈으나, 2009년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고문 조작에 의한 사건이라며 재심을 권고했고, 2012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7] 1982년에는 '송씨 일가 간첩 사건'을 수사하여 유죄 판결을 이끌었으나, 이 사건 역시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8]

1982년 6월 15일,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정순철 피고인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9]

리영희, 강만길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피의자들이 경찰 진술을 번복할 우려가 있다며 사전증인신문을 청구했으나,[10] 이후 "잘못을 시인하며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 정부의 화합 조치에 발맞춘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20조에 의거해 공소 보류 결정했다.[11]

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한 가운데,[13] 연세대 학생 5명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으나,[14]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석방했다. 이 사건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았다.[15]

; 인천지방검찰청

1988년 11월, 화영종합건설 전·현직 대표이사 3명을 특가법 위반 등으로 구속했다.[16] 1988년 12월에는 무허가 발포 폴리스티렌 제조업자 5명을 구속하고 10명을 입건했다.[17]

1989년 3월, 인천시 상수도 노온정수장 건설공사 비리와 관련하여 이용식 남양주군수를 업무상 배임 등으로 구속했다.[18]

1989년 4월, 공안합동수사반장으로서 부천시 지역 4개 업체 농성장에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하고, 노조위원장 등 5명을 구속했다.[19] 추가로 노조 간부 등을 구속, 불구속 입건하고, 즉결심판에 넘기거나 훈방했다.[20] 같은 달, 인천시 삼양유지사료 농성장에 경찰 병력을 투입해 노조위원장 등 38명을 강제 연행하고, 연행자 가족들의 면회를 제한하여 항의를 받았다.[21]

1989년 7월, 무자료 주류 브로커 조직 6개 파 27명을 적발하여 10명을 구속하고,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 및 수배했다.[22]

;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연세대생 집단 상해치사 사건과 관련하여 대검찰청의 지시를 받아 사건수사전담반을 구성하여 수사했다.[23]

1989년 10월, 불법 건축물 준공 검사 비리와 관련하여 건축사 34명을 적발, 구속 및 불구속 입건하고, 관련 건축주 및 브로커를 수배했다.[24] 같은 달, 불량 이온정수기 제조 및 판매업자들을 약사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했다.[25]

1990년 1월, 가짜 약 캡슐을 제조·판매한 3명을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구속했다.[26] 1990년 2월, 마포경찰서 소속 노재섭 순경을 공용서류은닉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27] 같은 달, 학교 주변 조직폭력배 37명을 구속하고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 및 수배했다.[28]

1990년 3월, 무허가 중개업자 및 부동산 투기사범 등을 부동산중개업법 위반 등으로 구속하고,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 및 수배했다.[29] 1990년 5월, 저질 한약재 대량 판매와 관련된 한의사, 업주, 브로커 등 50명을 적발하여 17명을 구속하고,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 및 수배했다.[30] 같은 달, 대한적십자사 서울동부혈액원, 서울중부혈액원 원장 등 4명을 혈액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직원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31]

1990년 6월, 무면허 척추 교정업자 15명을 구속하고 10명을 불구속 입건했다.[32] 1990년 7월, 한강에 유해물질을 방류한 도금업체 대표 등 6명을 구속하고 1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33] 1990년 8월, 인신매매범 4명과 포주 6명을 특가법 위반 등으로 구속했다.[34]

1990년 10월, 도박단 7개 파 59명을 적발하여 조직폭력배와 상습도박자 등 22명을 구속했다.[35] 1990년 11월,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1000억 상당의 건물을 가로챈 일당 18명 중 6명을 구속했다.[36]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기춘법무부 장관 등이 참석한 초원복집 사건을 수사하여 김기춘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참석자들은 무혐의 처분했다. 기소된 김기춘은 이후 공소 취소되었다.[38]

;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1997년, 불기소 처분에 불복하는 헌법소원 절차를 간소화하고 대검찰청의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검찰청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39] 구속 피고인이 무죄 등을 선고받으면 검사가 석방지휘서를 교도관에게 교부하여 즉시 석방하는 제도를 시행하려 했으나, 지속되지 못했다.[40]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박상천 법무부 장관은 인사 정상화를 언급하며 김경한 춘천지방검찰청 검사장과 함께 임휘윤을 차기 대검찰청 공안부장으로 거론했으나, 전라북도 출신의 공안통인 임휘윤이 유력하게 부각되었다.[41]

; 대검찰청 강력부장

1998년 4월, 전국 강력부장 회의를 열고 폭력범죄수사 및 처리지침을 마련하여 시행했다.[42] 같은 달, 미성년자 윤락행위 근절 방안을 마련했다.[43] 1998년 7월,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유흥업소에 대한 영업장 폐쇄를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44]

보건복지부로부터 사회복지법인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일부 시설의 비리 조사에 착수했다.[45] 1998년 8월,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을 국제적 청소년 보호운동으로 확대하고 국제연맹을 창설하기로 했다.[46]

1999년 1월, '국회 529호실 난입사건'과 관련하여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등에게 출두를 촉구했다.[47] 1989년 대검찰청에 설립된 마약과 10주년을 맞아 '국가마약퇴치전략(National Drug Control Strategy)'을 만들었다.[48]

김태정 검찰총장의 역점사업이었던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을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기 위해 기존 자원봉사협의회 전국연합회를 공익법인화하고 민간기구로 재출범했다.[49]

김대중 정부 집권 2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임휘윤의 영전이 예상되었으나,[50] 1999년 6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에 임명되어 호남 출신으로는 김용제 이후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되었다.[51] 그는 "검찰 조직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따갑다"며 "검찰인 모두가 힘을 합쳐 명예회복에 나서자"고 말했다.[52]

교통·건축·식품위생사범과 병역법 위반자 등 경미한 행정법규 위반사범에 대해 검찰 단계에서 사건을 종료시키는 약식사건 전결 검사 제도를 폐지했다.[53]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및 옷로비 의혹 사건의 강원일, 최병모 특별검사팀이 사건을 검찰에 인계하려는 것에 대해 "특검법에 저촉된다"며 사건 인수를 거부하는 의견서를 특검팀에 전달했다.[54]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정형근 의원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검찰이 긴급 체포를 시도했으나 무산되었고,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정형근을 검찰에 출석시켰다. 임휘윤은 정형근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유감을 표명했다.[55]

한나라당 정지행 부대변인이 임휘윤의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을 제기하자, 임휘윤은 장남은 축농증, 차남은 과체중으로 면제받았다고 해명했다.[56]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하여, 2001년 9월 이용호를 비호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특검이 출범하여 김대웅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이 수사 내용을 유출한 것이 밝혀지자, 임양운 전 광주고등검찰청 차장검사, 이덕선 전 군산지청장과 함께 검찰에서 물러났다. 김태정 변호사가 검찰 후배였던 임휘윤에게 전화하여 이용호의 무혐의를 주장했고,[57] 이후 이용호를 소환하고 사무실 압수수색까지 하고도[58] 무혐의 처분하여 특검 조사를 받았다.[59]

2000년 4월, 서울지방검찰청은 서울지방법원 예비판사의 병역 비리 혐의를 밝혀냈으나, 임휘윤이 서울지방법원 법원장에게 구두 통보만 하고 사건을 종결 처리하여 법원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60]

1999년 12월 이근안 고문 사건 관련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김근태 고문이 정형근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고 발표하자, 정형근은 2002년 12월 임휘윤 등 전·현직 검사 4명을 상대로 형사 고소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61]

임휘윤의 5촌 조카 임호균은 이용호에게 증권계좌 명의를 빌려준 것을 이용하여 주식을 처분, 3500여만원을 횡령하여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62]

2000년 3월 병역비리 합동수사 중 정치인 자제 등이 소환에 불응하자, "재소환에도 불응하면 인적사항, 면제사유 등을 공개하고 강제수사에 나서겠다"고 말했다.[63]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 특별감찰본부의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퇴직한 후, 2001년 11월 변호사 등록을 신청했으나 대한변호사협회는 등록을 보류했다가,[64] 2개월여 후 변호사 자격을 자동 부여했다.[65] 특검팀은 2001년 12월 임휘윤을 출국금지했다.[66]

김정길 (법조인) 법무부 장관과 같은 호남 출신이라는 점이 걸림돌로 평가되기도 했으나, 임휘윤은 법무부 차관에 적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법무부 차관 영전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67] 그러나 2000년 7월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 발령되었다.[68]

2. 4. 퇴임 이후

임휘윤은 검찰에서 퇴직한 후 2001년 11월 초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변호사 등록을 신청했으나, 대한변호사협회는 임휘윤이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등록을 보류했다.[64] 그러나 "변호사 등록 신청 후 2개월 동안 변협 측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변호사 등록신청을 받아들인다"는 규정에 따라 2002년 1월 9일에 변호사 자격이 자동으로 부여되었다.[65]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북도 지역구에 출마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69] 실제로 당시 새천년 민주당이 영입을 위해 노력했다.[70]

2008년 3월 6일부터 7월 10일까지 매주 목요일, 우석대학교에서 중견 기업인과 고위 관료 등을 대상으로 개설한 ‘미르 CEO 문화아카데미’를 수강했다. 이 강좌는 일반 강의, 문화체험, 해외 문화 및 기업 탐방 등으로 진행되었으며,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송승환 난타 대표, 이미경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71]

2014년 4월 15일, 익산시 남성 총동창회는 제8회 자랑스러운 남성인상 수상자로 임휘윤을 선정했다.[72]

2017년 2월 16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열전에 수록될 가능성이 높은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 명단에 임휘윤을 포함시켰다.[73]

2018년 1월 27일,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1980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석달윤 씨를 고문하여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을 방영한 직후, 여상규 의원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국민청원이 이어지면서 공안검사 출신인 임휘윤 변호사도 함께 비판받았다.[74]

2021년 10월 29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2. 5. 사망

林徽潤|임휘윤중국어은 2021년 10월 29일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3. 논란 및 비판

임휘윤은 검사 재직 시절 여러 시국 사건을 맡아 논란의 중심에 섰다.


  • 1978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시절,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고 유신 철폐를 주장한 야당 정치인과 대학생들을 기소했다.[6]
  • 198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시절, 안강민, 김경한과 함께 학림 사건을 수사하여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에게 최고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 조작에 의한 것이라며 재심을 권고했고, 2012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7]
  • 1982년 '송씨 일가 간첩 사건'을 수사하여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으나, 이 사건 역시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8]
  • 1982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피고인 정순철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9]
  •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조승혁 목사, 리영희, 강만길 등의 사전증인신문을 청구했으나, 이후 공소 보류 결정했다.[10][11]
  • 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된 대학생들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석방했다. 이 사건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았다.[12][13][14][15]
  •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을 수사하여 김기춘법무부 장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참석자들은 무혐의 처분했다. 기소된 김기춘은 이후 공소 취소되었다.[38]
  •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하여 검찰 특별감찰본부의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퇴직했다.[64][65]
  • 2018년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1980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석달윤 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 방송된 후, 공안검사 출신인 임휘윤도 비판을 받았다.[74]

4. 경력

연도직책
1975년전주지방검찰청 검사
1978년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80년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3년서울지방검찰청 고등검찰관
1986년대검찰청 공안제1과장검사
1988년인천지방검찰청 특수부장검사
1989년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특수부장검사
1991년서울지방검찰청 공안제2부장검사
1992년서울지방검찰청 공안제1부장검사
1993년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장, 수원지방검찰청 차장검사
1994년서울지방검찰청 의정부지청 지청장
1995년광주고등검찰청 차장검사
1997년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1998년대검찰청 강력부장검사
1999년 6월 9일 ~ 2000년 7월 14일제40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2000년 7월 15일 ~ 2001년 10월 11일제12대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2000년 ~ 2002년제17대 재경남성동창회장
2002년변호사 개업(서울)
2003년 3월성원건설 사외이사 재선임[79]
2003년 5월 29일재경 김제향우회장[75][76]
2004년 9월 7일 ~ 2004년 12월 21일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국제경영원 제50기 글로벌최고경영자 과정 수료[77][78]
2005년 ~ 2007년제18대 남성총동창회 수석부회장
2014년 11월 21일김제발전포럼[80]


참조

[1] 뉴스 http://www.segye.com[...]
[2] 뉴스 http://www.dt.co.kr/[...]
[3] 뉴스 http://www.jjan.kr/n[...]
[4] 뉴스 경향신문 1970-08-22
[5] 뉴스 http://www.jjan.kr/n[...]
[6] 뉴스 http://news.khan.co.[...]
[7] 뉴스 기 막힌 세기의 재판, 판·검사는 승승장구 https://www.sisain.c[...]
[8] 뉴스 http://www.fnnews.co[...]
[9] 뉴스 동아일보 1982-06-16
[10]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4-01-25
[11]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4-02-14
[12] 뉴스 11월의 함성 - 민정당 연수원 점거 농성 http://www.kdemo.or.[...]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3]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5-02-26
[14]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5-03-12
[15]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5-03-26
[16]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8-11-05
[17]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8-12-10
[18] 뉴스 동아일보 1989-03-27
[19] 뉴스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89-04-19
[20] 뉴스 한겨레 1989-04-20
[21] 뉴스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89-04-23
[22] 뉴스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89-07-13
[23] 뉴스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89-10-18
[24]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9-10-26
[25]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9-10-31
[26]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0-01-30
[27] 뉴스 https://newslibrary.[...] 한겨레 1990-02-21
[28] 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0-02-26
[29]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3-23
[30]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5-22
[31]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5-31
[32]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6-05
[33] 뉴스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0-07-21
[34] 뉴스 경향신문 1990-08-22
[35] 뉴스 한겨레 1990-10-26
[36] 뉴스 null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0-11-15
[37] 뉴스 null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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