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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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천 임씨는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임온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임온의 5대손 임주 대에서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임주의 아들 대에서 삼사판사 임자송과 민부전서 임자순으로 갈라져 백파와 중파를 형성했다. 조선 시대에 48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임열, 임유겸, 임유후 등 주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본관은 황해도 풍천이며, 전국 각지에 집성촌이 존재한다. 2015년에는 약 14만 3천 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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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풍천 임씨는 원나라에서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온 임온(任溫)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임온은 황해도 풍천에 사적(賜籍)되었고, 은자광록대부에 이르렀다. 그의 6대손 임주(任澍)는 고려 충렬왕 때 경상도안찰사, 조봉대부, 감문위대장군을 역임하였다.[6]
임주의 아들 대에서 임자송(任子松)과 임자순(任子順)이 나와 두 파로 나뉘었다. 임자송의 후손 임열(任說)과 임자순의 후손 임유겸(任由謙), 임유손(任由遜) 형제가 풍천 임씨의 주요 인맥을 이룬다.[7]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481명으로, 문과 148명, 무과 24명, 사마시 308명, 역과 1명이다.[6]
2. 1. 시조 및 기원
풍천 임씨의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원나라에서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황해도 풍천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해지며, 은자광록대부에 이르렀다. 고려 충렬왕 때, 그의 6대손 임주(任澍)가 경상도안찰사, 조봉대부, 감문위대장군을 역임하였다.[6]풍천 임씨가 한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임온의 5대손인 '''임주'''에서부터라는 것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임주의 아들 대에서 삼사판사 임자송(任子松)과 민부전서 임자순(任子順)이 나와 두 파로 나뉜다. 임자송은 백파/부원군파의 시조가 되고 임자순은 중파/전서공파의 시조가 되었다.[6]
하지만 황해도 풍천 남쪽 박달산 아래 도곡리에서 임주의 조부 임도(任徒)와 부 임천유(任天裕)의 비(碑)와 지석(誌石)이 발견됨으로써, 시조 임온이 원나라에서 왔다는 중국 도래설은 거짓으로 보인다. 또한 대종회 측에서는 충렬왕 당시에는 제국대장공주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는 설에 대해 확증할 수는 없다고 한다. 풍천 임씨 시조 임온의 5대손 임주의 묘소는 풍천 적선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한다.
2. 2. 분파
풍천 임씨는 크게 백파(伯派)와 중파(仲派)로 나뉜다. 백파는 임자송(任子松)을 파조로 하며, 중파는 임자순(任子順)을 파조로 한다.[6]임자송은 백파/부원군파(伯派/府院君派)의 시조가 되고 임자순은 중파/전서공파(仲派/典書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두 파에서는 조선조에서 고르게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상신 1명, 호당 6명, 청백리 2명, 공신 1명, 장신 3명이 배출되었다.[6]
임자송의 7대손으로 명종 때 한성판윤·제학을 지낸 임열(任說)의 후손과 임자순의 6대손으로 중종 때 한성판윤·공조판서를 역임한 임유겸(任由謙)과 감찰 임유손(任由遜) 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여 풍천 임씨의 2대 인맥을 이룬다.[7]
- 백파(伯派) - 임자송(任子松)
- * 임경유, 임덕유, 임덕수
- 중파(仲派) - 임자순(任子順)
- * 임향(정승공파), 임진(사윤공파)[9]
2. 3. 조선시대
풍천 임씨는 조선시대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을 배출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문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번성하였다.[6]임자송(任子松)의 7대손 임열(任說)은 명종 때 한성판윤과 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고종 때 우의정을 지낸 임백경(任百經), 학자 임성주(任聖周),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任國老), 현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명신 임유후(任有後) 등이 있다.[7]
임자순(任子順)의 6대손인 임유겸(任由謙)과 임유손(任由遜) 형제는 중종 때 각각 한성판윤, 공조판서, 감찰을 역임하며 가문을 빛냈다. 임유겸의 후손으로는 중종 때 예조참판 임추(任樞), 병조판서·예조판서 임권(任權), 호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임호신(任虎臣), 형조참의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임보신(任輔臣) 등이 있다. 임유손의 후손으로는 남원부사 임현(任鉉), 숙종 때 형조참판 임홍망(任弘望), 정조 때의 학자 임태춘(任泰春), 헌종 때 형조판서 임성고(任聖皐),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任泰瑛), 철종 때 성리학의 대가 임헌회(任憲晦) 등이 있다. 사명당 유정(惟政: 송운대사)도 임자순의 후손이다.[7]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총 481명으로, 문과 148명, 무과 24명, 사마시 308명, 역과 1명이다.[6]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고구려의 구을현(仇乙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 : 안악)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풍주(豊州)로 이름을 바꾸고,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018년(현종 9) 군으로 강등되고 방어사(防御使)가 설치되었다. 1395년(태조 6) 진(鎭)이 설치되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했으며, 1413년(태종 13) 은율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었다.[8]
3. 본관
세종실록지리지에 황해도 풍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임(任)·노(盧)·문(文)·김(金) 4성이 기록되어 있고, 내성(來姓)으로는 양(楊)·오(吳)·내(來) 3성이 기록되어 있다.[8]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 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으나,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군 지역이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4. 주요 인물
5. 집성촌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집성촌이 있는 지역과 해당 지역의 인구수 및 비율은 다음과 같다.[4]
충청남도 보령시는 전국에서 풍천 임씨가 총 인구에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4]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에도 집성촌이 있다.[5]
6. 항렬자
7. 인구
2015년 기준 풍천 임씨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4]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풍천임씨 豊川任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간행물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4
[4]
웹사이트
본관분포
https://sgis.kostat.[...]
2023-02-24
[5]
웹사이트
임씨(任氏) 본관(本貫) 풍천(豊川)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8
[6]
뉴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8〉 임씨(任씨), 풍천임씨"
http://www.segye.com[...]
2013-09-30
[7]
서적
풍천임씨[豊川任氏]
http://www.doopedia.[...]
두산백과
[8]
문서
세종실록 152권, 지리지 황해도 풍천군
http://sillok.histor[...]
[9]
서적
족보고증확인백서
202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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