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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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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영희는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의 언론인, 저술가, 교수이다. 국립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통역 장교로 복무했으며, 이후 합동통신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역임했다.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교환 교수로 활동했으며, 한겨레신문 이사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이 있으며, 1970~80년대 운동권의 '사상의 은사'로 불리며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0년 간경화로 사망했으며, 5.18 민주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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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리영희
라틴어 표기Rhee Yeung-hee
한글 표기리영희
한자 표기李泳禧
가타카나 표기リ・ヨンヒ
작가 정보
이름이영희
출생일1929년 12월 2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사망일2010년 12월 5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국적대한민국
장르저술
활동 기간1950년 ~ 2010년
소속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학력경성공립공업학교
국립해양대학교 항해학과 학사
1952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3년 육군공병학교 졸업
195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1961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석사
직업언론인, 대학 교수, 사회운동가
종교없음(무신론)
배우자윤영자
자녀이건일 (아들), 이미정(딸), 이건석(아들), 이경록 이경서 이경민(손자), 오지혜 오지우 이소연 이민서(손녀)
부모리근국(부), 최희저(모)
언어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필명호(號)는 향사(鄕史)
닉네임은 사상의 은사
서명Riyeonghee Signature.png

2. 생애

리영희는 평안북도 운산 북진면에서 태어나 국립해양대학교(現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육군 갑종사관 국군 통역장교로 자원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2]

1957년 예편 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합동통신에서 외신부장을 역임했다.[2]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과정 연수를 수료했다.[2]

1972년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했다.[2]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했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 복직하는 등 군사정권 기간 동안 4번 해직되고 5차례 구속당했다.[2]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했고,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2]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 (1929-1950)

평안북도 운산 북진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평창이다. 1950년 국립해양대학교(現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갑종사관 통역장교로 자원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2]

2. 1. 1. 출생과 가계

리영희가 태어난 조선 평안북도 운산군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출생하여 다섯 살 되는 해에 삭주군으로 이사하여 외남면 대관동에서 성장하였다.[3] 아버지 리근국(李根國)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崔晞姐)는 지주의 딸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안북도 운산이나 삭주는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늘 소외되어 있었는데, 금광이 있는 지역이라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외세의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3] 리영희는 5세부터 14세까지 10년 동안 삭주에 살았는데, 그에게 있어 삭주군 대관동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유치원 2년을 마치고 소학교에 진학하였을 당시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교과 과정은 전시(戰時) 색채가 짙어지고 중국 전선에 나가 있는 일본군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어린 리영희는 별 생각 없이 일본어를 국어로 알고 학교 공부에 열중하였고, 창씨개명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4]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1944년 , 소학교를 졸업한 리영희는 신의주사범학교(新義州 師範學校)와 경성공립공업학교(京城公立工業學校)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는데, 아버지와 6학년 담임 일본인 교사가 내린 결정에 따라 경성공립공업학교 전기과에 진학하였다. 리영희의 서울 유학 생활은 고달팠다. 일제 말기여서 식량은 배급제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어려웠고,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5] 학업은 3학년을 끝으로 일절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동원체제에 따라 노동에 동원되었다. 학비와 하숙비를 합친 서울 생활비가 한 달에 40JPY가량 들었는데, 아버지의 월급은 고작 90JPY 정도여서 고향집에서는 늘 리영희의 유학비 때문에 힘겨워했고, 리영희 자신은 부모가 그리 어렵게 마련하여 보내준 학비를 내고 공부는커녕 노동에 동원되는 일상이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6]

모교 경성공립공업학교 (현 서울공업고등학교)

2. 1. 3. 광복과 해양대학교 재학

1945년 광복 당시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었다. 이후 국립해양대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고,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1]

2. 1. 4. 교직 생활

1950년 국립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7] 1972년 한양대학교 문리과학부 교수가 되었고, 동 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교수를 겸임하였다.[7]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고,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교수로 취임하였다.[7] 200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보학과 교수가 되었고, 동시에 명예교수가 되었다.[7]

2. 2. 군 복무 (1950-1957)

국립해양대학교(現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육군 갑종사관 국군 통역장교로 자원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7년 1월 28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 복무하였다.

2. 2. 1. 한국 전쟁 참전과 통역장교 복무

1946년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해양대학 (현 한국해양대학교) 창설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같은 해 7월 입학하였다. 마음먹은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등록금 마련은 고사하고 하루 생활하기도 힘겨운 터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12]

해방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어수선해졌다. 당시 군산에서 학교생활을 하던 리영희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서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으나, 학생 신분인 관계로 찬·반탁 투쟁이나 정세의 흐름에 깊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13]

그러던 중, 학교로부터 부산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으로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시행 중에 부산에서 중무장한 국군 1개 대대를 싣고 여수항으로 항해했는데, 배가 신시가지 쪽으로 접근하자 육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이른바 여수·순천 사건을 우연히 겪게 된 것이다.[13]

1950년 3월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여 앞길을 궁리하던 중 친구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경상북도 안동군 소재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하였다.[14] 1951년 한국 전쟁에 Interpreter officer|통역장교영어로 참전하였다.

2. 2. 2.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미군정에 줄을 댄 친일파, 기회주의자가 날뛰는 사회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18세의 리영희가 맨손으로 살아가기에 서울은 살벌했다. 그러던 중 1946년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 창설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고, 이에 응시하여 같은 해 7월 입학하였다. 마음먹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등록금 마련은 고사하고 하루 생활하기도 힘겨운 터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12]

신탁 통치 반대 운동


해양대학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해방 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어수선해졌다. 당시 군산에서 학교생활을 하던 리영희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서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대중 연설을 하기도 했으나, 학생 신분인 관계로 찬·반탁 투쟁이나 정세의 흐름에 깊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13]

그러던 중, 학교로부터 부산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으로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시행 중에 부산에서 중무장한 국군 1개 대대를 싣고 여수항으로 항해했는데, 배가 신시가지 쪽으로 접근하자 육지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이른바 여수·순천 사건을 우연히 겪게 된 것이다.[13]

2. 2. 3. 휴전 이후

1951년 1월, 국민방위군 사건 발생 당시 국군 통역장교로 복무하면서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훗날 리영희는 “이승만 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16] 리영희가 지켜본 국군의 행태는 아무리 급조된 부대이고 전시체제라고 해도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 폭력, 병무 행정의 난맥상, 세력가 자제들의 전방에서 후방 전속 등 총체적 비리였다.

같은 해 2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자신이 속한 부대가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국군 고위 간부들의 부정부패에 분노를 가지게 되어 제1공화국 정부 체제에 대하여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회고하였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국내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어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외신에 대대적으로 폭로되었다.[19]

2. 3. 언론인 활동 (1957-1972)

1957년 1월 28일, 한국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했던 리영희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시작으로,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합동통신에서 외신부장으로 일했다.[2] 1960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과정 연수를 받았다.[2]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 파병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퇴출되었고,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1971년 합동통신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했다.[2]

2. 3. 1. 합동통신 기자 시절

1957년 제대를 앞두고 우연히 신문에서 언론사 기자모집 광고를 본 리영희는, 통역장교 복무로 닦은 영어 실력을 기반으로 합동통신사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당시 응시생 273명 중 5명을 채용하는데 리영희는 꼴찌로 합격하였으며, 합격자 중 앞 4명은 모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출신이었다.[21] 합동통신에서 첫 발령 부서는 외신부였는데, 이는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에도 능했기 때문이었다. 외신부에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 중국 공산당의 혁명 전쟁, 아프리카 가나의 사회주의 지도자 은크루마의 반백인 식민지투쟁,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쿠바 혁명투쟁 등 제국·식민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구질서에 대항하는 각 대륙 인민의 현상타파 운동이었다.[22]

2. 3. 2. 이승만, 4.19 혁명, 5.16 군사정변 시기

1956년 이승만 정권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의 약진에 위협을 느껴 진보적인 월간지 《중앙정치》 11월호를 발매 금지하고,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하는 등 언론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 공작을 자행하면서 권력과 유착한 부패 언론인과 기백을 상실한 기자를 크게 늘게 하였다. 이 당시 《합동통신》의 기자들은 대부분 깨어 있는 언론인들이었고, 리영희도 이 같은 회사 분위기를 타고 기자의 정도(正道)를 걸었다.[23]

이승만 정권의 포악상을 지켜보면서 그저 통신사 외신부 일이나 열심히 하며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던 리영희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외신을 통해 감행하는 길을 모색했는데 그러던 중 찾은 길이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기고하는 것이었다.[26]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통신원'이라는 익명으로 활동하였는데, 미국에 원고를 보낼 때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장교들이나, 믿을 만한 사람이 미국에 갈 때 이를 부탁하면서, 미국에 도착하면 우체통에 넣어달라며 미국 우표를 붙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부터 《워싱턴 포스트》에는 그의 실명으로 칼럼이 오르게 되었다.[27]

4·19 혁명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리영희는 정권 교체를 희망하였으나, 조병옥의 돌연한 사망과 3·15 부정선거를 지켜보았고, 4·19 혁명이 발발하자 펜을 놓고 서슴없이 시위대열에 가담하였다.[28]

리영희의 혁명 참여는 연일 계속되었다. 4월 19일 광화문에서 경무대로 돌진할 때도 그 속에 끼었는데, 기자로서 취재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학생들의 반독재투쟁 열기에 일체화되어 있었다. 낮에는 시위에 참여하고 밤에는 학생들의 시위와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평론을 작성하여 《워싱턴 포스트》에 보냈고, 이에 《워싱턴 포스트》가 특파원을 보내자 리영희는 그와 동행하여 취재를 도왔다.[30]

4·19 혁명이 민중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하자,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교수 258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시위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리영희는 비판적이었다. 교수들이 이승만이 이미 실권한 사실을 알고서야 뒤늦게 나섰고, 학생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뒤늦게 슬쩍 숟가락만 얹어놓았다고 생각했던 이유에서였다.[31]

2. 3. 3. 박정희 정권 시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반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내각을 전복시켰다. (5·16 군사정변) 이는 언론인으로서의 리영희에게는 청천벽력이고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리영희는 “개혁과 숙정의 대상이어야 할 군대가 무엇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다니, 언어도단입니다. 쿠데타라니?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서 군대의 정권 탈취에 반대해야 합니다.”라며 외신부 기자들 앞에서 발언했고, 언론사 검열과 감시를 위해 찾아온 쿠데타 군인들을 문전에서 쫓아버리기도 하였다.[32] 5.16 군사정변에 반대하는 글을 미국의 《뉴 퍼블릭》에 기고하였다. 박정희는 정권장악이 확고해지자 방미(訪美) 길에 올랐는데, 리영희는 이를 두고 “정권을 세운 박정희가 마치 옛날 왕조시대에 세자책봉이나 왕위계승의 윤허를 얻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상전의 나라 중국을 찾아가는 꼴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33]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그런데 운명의 여신은 짓궂은 것인지 리영희는 박정희의 방미 취재 기자로 지명되었다. 군정 당국은 《합동통신》 편집국장에게 이승만 정권과 민주당 정권에서 부정·부패·타락에 연루되지 않은 기자를 선정해 보내라고 했는데 이에 리영희를 지명했던 것이었다. 미국에 건너간 기자들은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군사·경제원조와 함께 박정희를 한국의 권력자로 공식 승인한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짓 기사였고, 이에 대한 실체를 알고 싶던 리영희는 기고를 통하여 사귀게 된 《워싱턴 포스트》의 주필과 편집국장의 도움으로 케네디가 한 발언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특종기사였던 것이다.[34]

귀국 후, 박정희는 경무대에서 군 실력자들과 방미 외교 성공 축하 파티를 거창하게 열었는데, 다른 수행 기자들은 다 초청하면서 리영희만 제외하였고, 당시 왜곡된 기사를 썼던 기자들은 그 뒤 국회의원, 부총리, 국회의장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36] 리영희가 이러한 진실된 기사를 쓰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사 내용이 미국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에 명줄을 대고 있는 군사정권이 리영희를 구속했다가는 오히려 파장을 불러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37]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 파병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퇴출되었고,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1971년 합동통신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한양대학교에 초빙되어 교수직을 맡았으나,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아 76년과 80년 두 차례에 걸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2. 4. 대학교수 활동 (1972-1995)

1972년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였다.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는데, 신문사 재직 시절 2년 동안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출강한 적이 있었고, 장룡(張龍)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그를 추천한 것이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론사의 갇힌 영역을 벗어나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대부분의 평론이 교수시절 쓴 글이며, 앞으로 국제정세에 큰 변수가 될 중국 문제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하여 인권운동에 나섰다. 1960년대베트남 연구에 전념했다면, 1970년대에는 중국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를 집중했다.[40]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석사과정 연수를 수료하였다.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였고,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한양대학교

  • 1972년: 한양대학교 문리과학부 교수, 동 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교수.
  • 1995년: 한양대학교 정년퇴임.
  • 200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보학과 교수(동 명예교수).

2. 4. 1. 군사 정권과의 갈등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외신 기자 생활을 하였고,[38] 1963년 여름부터 정치부 기자로 중앙청과 외무부를 출입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은 홍수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하고 민심이 흉흉했으나, 미국 정부는 의회에서 통과시킨 대(對)한국 식량 원조를 해가 바뀌도록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리영희는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핸더슨과의 면담에서 ‘박정희케네디와 약속한 민정이양을 지키지 않아서 미국 정부가 식량 원조 집행을 보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특종을 잡았다. 이를 기사화하여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케네디 정부도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39]

1964년 10월조선일보》 외신부로 직장을 옮겼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 파병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것 때문에 퇴출되었다. 1971년에는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 합동통신에서 해고되었다.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론사의 갇힌 영역을 벗어나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하여 인권운동에 나섰고, 중국 문제 연구에 몰두하였다.[40]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다.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복역하였으나, 특사로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같은 해 한겨레신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 취재를 기획한 것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 4. 2. 해외 활동

1985년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및 서독 하이델베르크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했다.[40]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다.[40]

2. 4. 3. 한겨레신문 활동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다.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복역하였으나, 특사로 사면복권되어 석방되었다.[40]

2. 5. 은퇴 이후 (1995-2010)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리영희는 20년간 교수 생활을 했지만, 두 차례 강제 해직으로 처음에는 퇴직연금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학교 측의 배려로 연금을 받게 되었다.[41] 같은 해, 단재 신채호를 기리는 '단재학술상'을 수상했다.[41] 국민의 정부 시절 햇볕정책으로 남북 간 화해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1998년 11월 10일 꿈에 그리던 고향 방문길에 올랐다.[42] 북한에서 귀환한 그해 11월 《스핑크스의 코》를 출간하였다.[43]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고문과 옥고를 치른 민주 인사들처럼, 리영희 역시 오랜 연구와 집필, 잦은 연행과 구속, 1012일간의 징역살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44] 2000년 72세의 나이로 '만해상'을 수상했으나,[45] 그해 11월 16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기관지염심장 질환으로 2002년 겨울에는 태국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했다.[46] 건강을 회복한 후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의 대화 형식으로 자서전 《대화》를 출간했다.[47]

2006년 한국기자협회로부터 '기자의 혼 상'을 수상했고,[50] 2007년에는 《한겨레》가 제정한 '한겨레 통일문학상'을 받았다.[51] 200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5·18 정신의 학술적 계승을 위해 전남대학교에서 제정한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51] 2009년 7월, 이명박 정부의 통치 행태에 대해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라고 비판하며,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명박의 독주와 반민주적 행태를 강하게 공박했다.[53]

2. 5. 1.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일찍부터 노무현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고, 당선 후에는 비공식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며 정권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1] 김대중 정권을 계승하는 노무현 정권 수립에도 힘썼다.[1]

2. 5. 2. 말년과 죽음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사망하였다.[2]

1995년 한양대학교를 정년퇴임할 당시 20년의 교수 생활에도 두 차례의 강제 해직 때문에 퇴직연금을 처음에는 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학교 측의 배려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를 기리는 ‘단재학술상’을 받았다.[41] 국민의 정부 시절 ‘햇볕정책’으로 남·북 간 화해 협력 분위기가 감돌면서 1998년 11월 10일 꿈에도 그리던 고향 방문에 나섰다.[42]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고문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른 민주인사들은 대부분 노후에 몇 가지씩 질병을 앓는데, 리영희의 경우 40여 년 동안 연구와 집필에 정신의 진을 빼고,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총 1012일 동안의 징역살이를 하느라 육신이 많이 상했다.[44] 72세가 되던 2000년 리영희는 ‘만해상’을 수상하였는데,[45] 그 기쁨도 잠시 11월 16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기관지염이 있고 심장까지 좋지 않아 2002년 겨울에는 태국으로 요양을 가기도 했다.[46] 집요한 노력으로 건강을 꽤 회복한 리영희는 2005년 문학평론가 임헌영과의 대화 형식으로 자서전인 《대화》를 펴냈다.[47]

2006년 한국기자협회로부터 ‘기자의 혼 상’을 수상하였고,[50] 2007년한겨레》가 제정한 ‘한겨레 통일문학상’을 수여받았으며, 200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5·18 정신의 학술적 계승을 위해 2007년 전남대학교에서 제정한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다.[51] 2009년 7월 이명박 정부의 통치 행태와 관련하여 “지난 1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 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53] 고 경고했던 리영희는 언론사 인터뷰에서 더욱 날을 세워 이명박의 독주와 반민주 행태를 공박했다.

2010년 3월 병환으로 다시 쓰러진 리영희는 간경화 증세에, 신장 기능마저 약해져 복수가 차는 증상이 나타났고,[55][56] 결국 2010년 12월 5일 0시 30분 경, 간경화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82세였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되었고,[2]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 5·18 민주 묘지에 안장되었다.[57]

리영희의 묘 (국립 5·18 민주 묘지)

3. 사상과 평가

리영희는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과 금기를 깨는 저술 활동으로 "운동권의 아버지"로 존칭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지식인·언론인의 선두주자로 여겨지고 있다.[2]

특히 군사 정권 하에서 언론·보도에 대한 엄격한 감시가 행해지던 한국 사회에서는 지식인조차 해외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러 외국의 사정에 정통했던 리영희의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군사 독재 체제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한편, 정권 측에는 큰 위협이었다. 그는 생애 세 번 투옥되었지만, 감옥에서 간수를 맡았던 청년도 리영희에게 동경의 눈으로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항상 군사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여러 외국에 많은 친구와 지인을 두고 국내에서도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암살을 면했다고 전해진다.[2]

리영희는 자신의 언론인으로서의 행동을 저서에서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2]

3. 1. 주요 사상

리영희는 중도 진보적 관점을 견지하며 국제 정세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참전했고, 합동통신, 조선일보 등에서 외신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제 정세를 접했다. 특히,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1957년~1964년),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1964년~1971년)을 역임하며 국제 정세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2]

3. 1. 1. 중도 진보적 관점

리영희는 평안북도 운산 북진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창이다.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육군 갑종사관으로 국군 통역장교에 자원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 육군 소령까지 복무하였다. 1957년 1월 28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지냈다.[2]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고,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였다.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 복직되었으나, 그 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복직하여 군사정권 기간 동안 4번 해직, 5차례 구속을 당했다.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였고,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사망하였다.[2]

3. 1. 2. 국제 정세 인식

리영희는 한국 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참전했고, 합동통신, 조선일보 등에서 외신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제 정세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특히,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1957년~1964년),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1964년~1971년)을 역임하며 국제 정세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2]

3. 2. 평가

리영희는 1970~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과 금기를 깨는 저술 활동으로 "운동권의 아버지"로 존칭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지식인·언론인의 선두주자로 여겨진다.

특히 군사 정권 하에서 언론·보도에 대한 엄격한 감시가 행해지던 한국 사회에서는 지식인조차 해외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러 외국의 사정에 정통했던 리영희의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군사 독재 체제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한편, 정권 측에는 큰 위협이었다. 그는 생애 세 번 투옥되었지만, 감옥에서 간수를 맡았던 청년도 리영희에게 동경의 눈으로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항상 군사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여러 외국에 많은 친구와 지인을 두고 국내에서도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암살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리영희는 자신의 언론인으로서의 행동을 저서에서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3. 2. 1. 긍정적 평가

리영희는 1970~80년대 운동권 대학생과 진보세력 사이에서 '사상의 은사'로 불렸다.[58] 대한민국에서 ‘실천하는 지성’, ‘진보세력의 거목’으로 불리며 언론인으로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59] 강준만은 ‘리영희는 좌우(左右) 이념을 뛰어넘는 한국 사회의 소중한 지적 자산’이라고 평가했다.[60] 유시민은 자신의 저서 《청춘의 독서》에서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하여 리영희가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와 더불어 산다고 말하며, 리영희 선생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61] 리영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던 시절 금기시 되던 김산이나 중국 혁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 등을 탐구했고, 이것이 운동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70년대, 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과 금기(聖域)를 깨는 저술 활동으로 "운동권의 아버지"로 존칭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 지식인·언론인의 선두주자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군사 정권 하에서 언론·보도에 대한 엄격한 감시가 행해지던 한국 사회에서는 지식인조차 해외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러 외국의 사정에 정통했던 리영희의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군사 독재 체제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한편, 정권 측에는 큰 위협이었다. 리영희는 생애 세 번 투옥되었지만, 감옥에서 간수를 맡았던 청년도 리영희에게 동경의 눈으로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군사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여러 외국에 많은 친구와 지인을 두고 국내에서도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암살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리영희는 자신의 언론인으로서의 행동을 저서에서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3. 2. 2. 부정적 평가

이영희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그의 저서가 '북한맹과 시장맹'이라는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62] 그는 거창 양민학살은 비난하면서도, 마오쩌둥 정부의 문화대혁명 시기 숙청 희생자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62]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우파적인 시각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4. 저서


  • 《8억인과의 대화》 (창작과비평사, 1977년 10월 1일) ISBN 2006335000027
  • 《전환시대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1974년 6월 5일)
  • 《전환시대의 논리》(개정판) (창작과 비평사, 1999년 1월 20일)
  •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1984년 10월 1일)
  • 《10억인의 나라》 (두레, 1985년 1월 1일) ISBN 2001792000016
  • 《베트남전쟁》 (두레, 1985년 7월 1일) ISBN 2001792000351
  • 《역설의 변증》 (한길사, 1987년 3월 1일)
  • 《역정(나의 청년시대)》 (한길사, 1988년 3월 1일)
  • 《반핵:핵위기의 구조와 한반도》 (창비(창작과비평사), 1988년 8월 1일)
  • 《서대문형무소》 (열화당, 1988년 10월 1일)
  • 《우상과 이성》 (한길사, 1990년 8월 1일)
  • 《자유인 자유인》 (한길사, 1990년 9월 1일)
  • 《인간만사 새옹지마》 (범우사, 1991년 7월 1일)
  • 《국가선진화를위한 개혁과제 20》 (길벗, 1994년 2월 6일)
  • 《반세기의 신화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 (삼인, 1999년 1월 31일)
  • 《동굴 속의 독백》 (나남, 2000년 1월 31일)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001년 12월 17일)
  • 《대화》 (한길사, 2005년 3월 10일)
  • 《21세기 아침의 사색》 (한길사, 2006년 8월 30일)
  •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한길사, 2006년 8월 30일)
  •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2008년 5월 10일)
  • 《희망》 (한길사, 2011년 1월 14일)
  • 《지식인의 세계》 (동녘, 1998년 3월 20일)
  • 《스핑크스의 코》 (까치, 1998년 11월 5일)

5. 상훈

6. 학력

참조

[1] 뉴스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 치른다…광주 5·18 국립묘지 안장(李泳禧先生‘民主社会葬’行う・・・光州5・18国立墓地に埋葬 http://www.hani.co.k[...] 2010-12-05
[2] 뉴스인용 '실천하는 지성인' 리영희, 지병 간경화로 타계‥애도물결 http://ntn.seoul.co.[...] 서울신문 2012-03-04
[3]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5]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6]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7]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8]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9]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0]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11]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2]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3]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4]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5]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16] 뉴스인용 국민방위군 사건 직권조사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2-03-04
[17]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18] 서적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2005-03-10
[19]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0]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1]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2]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3]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4]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25]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6]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7]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8]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29]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30]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1]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2]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3]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34]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5] 서적 대화 한길사 2005-03-10
[36]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7]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8]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39]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0]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1]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2]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3]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4]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5] 뉴스 제4회 만해상 수상자에 리영희교수등 6명 선정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2-03-05
[46]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7] 뉴스 리영희 자서전 '대화' 출간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2-03-05
[48]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49] 뉴스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대화 /리영희/대담 임헌영/한길사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2-03-05
[50] 뉴스 제1회 '기자의 혼' 상에 리영희 선생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2-03-05
[51] 뉴스 리영희교수 ‘후광 김대중 학술상’ http://news.khan.co.[...] 연합뉴스 2012-03-05
[52]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53] 뉴스 리영희 前교수 “李정부 1년 반, 인권 존재하지 않았다” http://news.khan.co.[...] 한겨레 2012-03-05
[54] 간행물 권력의 독주시대 다시 리영희 선생에게 듣는다 한겨레21 2009-12-07
[55] 서적 리영희 평전 책보세 2010-12-10
[56] 뉴스 리영희 전 교수, 간경화 악화로 입원 중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3-05
[57] 뉴스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 치른다…광주 5·18 국립묘지 안장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03-04
[58] 뉴스 리영희, ‘우상’을 깨고 떠나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2-03-04
[59] 뉴스 타계 리영희는 누구? 진보세력의 대부, 실천하는 지성 http://www.sisaseoul[...] 시사서울 2012-03-04
[60] 뉴스 (강준만 기고) 리영희 비판에 되묻는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03-04
[61] 서적 청춘의 독서 웅진지식하우스 2009-10-27
[62] 뉴스 "리영희가 우리 사회 시장맹·북한맹 만들어"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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