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한다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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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한다르 샤는 1712년 무굴 제국의 황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바하두르 샤 1세의 아들로, 즉위 후 지지 기반이 약해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자한다르 샤는 랄 쿤와르라는 여성을 총애하고 그녀의 가족을 중용하여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조카 파루크시야르의 도전을 받아 아그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폐위된 후 1713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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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다르 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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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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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파디샤 알-술탄 알-아잠 |
출생명 | 미르자 무이즈 웃딘 베그 무함마드 칸 |
사후 칭호 | 쿨드 아람가 () |
로마자 표기 | Mīrzā Mu'izz-ud-Dīn Muhammad Jahāndār Shāh Bahādur |
출생일 | 1661년 5월 10일 |
출생지 | 데칸 고원, 무굴 제국 |
사망일 | 1713년 2월 11일 |
사망지 | 델리, 무굴 제국 |
매장지 | 후마윤 묘, 델리, 인도 |
종교 | 수니 이슬람 (하나피 학파) |
왕조 | 티무르 왕조 |
통치 | |
즉위 | 황제 |
통치 기간 | 1712년 3월 29일 ~ 1713년 2월 11일 |
대관식 | 1712년 3월 29일 |
이전 통치자 | 샤 알람 1세 |
다음 통치자 | 파루크 시야르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샤 알람 1세 |
어머니 | 니잠 베굼 |
배우자 | 1684년 결혼: 사이이드 운 니사 베굼 1676년 결혼: 임티야즈 마할 |
자녀 | 이즈 웃딘 미르자 아즈 웃딘 미르자 알람기르 2세 아즈 웃 다울라 무이즈 웃 다울라 이파트 아라 베굼 라비 베굼 |
2. 초기 생애
(내용 없음)
2. 1. 출생과 성장
무이즈 우딘 왕자는 1661년 5월 10일 데칸 수바에서 무아잠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니잠 바이는 하이데라바드 출신 귀족인 파테야와르 장의 딸이었다.[4] 그는 무아잠의 장남이자, 당시 황제 아우랑제브의 맏손자였다. 무굴 전통에 따라 그의 탄생은 무굴 궁정에서 성대하게 축하받았다.아우랑제브의 치세 동안 그는 데칸에서 3년간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북인도로 영구적으로 옮겨졌다.
아우랑제브가 사망한 후 아버지 무아잠 왕자는 왕위 계승 다툼에서 승리하여 1707년 6월, 바하두르 샤 1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가 즉위하자 무이즈 우딘은 자한다르 샤라는 칭호를 받고 타타와 물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5] 바하두르 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자한다르 샤는 다른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황실 궁정에 머물렀는데, 이는 황제가 노령에 왕위에 올라 왕자들이 그의 죽음에 대비하여 왕위에 가까이 있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2. 2. 부왕 즉위와 지위
무이즈 우딘 왕자는 1661년 5월 10일 데칸 수바에서 무아잠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니잠 바이는 파테야와르 장의 딸로, 하이데라바드 출신의 귀족이었다.[4] 그는 무아잠의 장남이자, 당시 황제 아우랑제브의 맏손자였다. 무굴 전통에 따라 그의 탄생은 무굴 궁정에서 성대하게 축하받았다.아우랑제브의 치세 동안 그는 데칸에서 3년간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북인도로 영구적으로 옮겨졌다.
아우랑제브가 사망한 후 무아잠 왕자는 뒤이은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1707년 6월, 바하두르 샤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부친이 즉위하자 무이즈 우딘은 자한다르 샤라는 칭호를 받고 타타와 물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5] 바하두르 샤의 재위 기간 동안 자한다르 샤는 바하두르 샤의 다른 아들들처럼 황실 궁정에 머물렀는데, 이는 황제가 노령에 왕위에 올랐고, 왕자들이 그의 죽음에 대비하여 왕위에 가까이 있고자 했기 때문이다.
3. 왕위 계승 전쟁
1712년 2월 27일, 무굴 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6][12][16]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벵골의 수바다르(태수)였던 아짐우샨으로, 상당한 재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6][12] 반면 장남이었던 자한다르 샤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다.[6]
이 계승 전쟁은 제국의 강력한 귀족이자 미르 바흐시(군 사령관)였던 줄피카르 칸의 개입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6] 줄피카르 칸은 자한다르 샤 및 다른 왕자들과 동맹을 맺어 아짐우샨을 제거한 뒤, 다시 자한다르 샤를 도와 다른 동맹 왕자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살해했다.[6] 결국 수개월에 걸친 전쟁 끝에 자한다르 샤가 최종 승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6][12][17]
3. 1. 부왕의 죽음과 계승 분쟁
1712년 2월 27일, 무굴 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6][12][16] 당시 가장 유력한 계승 후보는 벵골의 수바다르(태수)였던 아짐우샨이었다. 그는 조부 아우랑제브 시절부터 벵골에 파견되어 무르시드 쿨리 칸의 도움으로 풍부한 재원과 강력한 군대를 확보하고 있었다.[6][12] 반면, 장남이었던 자한다르 샤는 군사력이나 자금 면에서 동생들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6]이전의 계승 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의 결과는 당시 제국의 유력자이자 미르 바흐시(군 사령관)였던 귀족 줄피카르 칸의 개입으로 크게 좌우되었다.[6] 줄피카르 칸은 자한다르 샤와 그의 다른 동생들인 라피우샨, 자한 샤 사이의 동맹을 주선했다. 그는 아짐우샨을 제거한 후 제국을 분할 통치하고, 자신이 공동 미르 바흐시가 되겠다고 제안했다.[6]
이 동맹은 성공적으로 아짐우샨을 격파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승리 후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의 도움을 받아 동맹을 깨고 동생 라피우샨과 자한 샤마저 제거했다.[6] 결국 수개월에 걸친 치열한 계승 전쟁 끝에, 자한다르 샤가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12][17]
3. 2. 줄피카르 칸의 지원과 승리
1712년 2월 27일, 아버지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하자 무굴 제국의 왕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12][16]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벵골의 태수로서 막대한 재력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아짐-우-샨이었다.[12] 할아버지 아우랑제브에 의해 벵골에 파견된 이후, 무르시드 쿨리 칸의 보좌를 받아 재원을 축적했기 때문이다.[12] 반면 자한다르 샤는 군사력이나 자금 면에서 가장 약한 왕자였다.[6]이전의 왕위 계승 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의 결과는 제국의 강력한 귀족이자 미르 바흐시였던 줄피카르 칸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그는 자한다르 샤와 그의 동생들인 라피-우-샨, 자한 샤 사이에 동맹을 주선했다. 줄피카르 칸은 승리하면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고 자신은 공동 ''미르 바흐시''가 되겠다고 제안했다.[6]
이 동맹은 먼저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아짐-우-샨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살해했다. 그러나 아짐-우-샨이 제거되자,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의 도움을 받아 동맹을 깨고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인 라피-우-샨과 자한 샤마저 격파하고 살해함으로써 수개월에 걸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제위에 올랐다.[6][12][17]
4. 치세
자한다르 샤는 1712년 3월 29일에 즉위했으나,[7] 그의 통치는 1년이 채 되지 못했다. 즉위 과정에서부터 제국 내 지지 기반이 약했고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지지자들에게 보상을 하는 한편, 이전 무굴의 관행과 달리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지지한 귀족들을 처형하고 패배한 왕자들의 시신을 방치하는 등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자한다르 샤의 치세 동안 실질적인 권력은 그를 황제로 옹립한 줄피카르 칸에게 있었다. 줄피카르 칸은 와지르(재상)로서 무굴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이 아닌 인물이 제국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6] 줄피카르 칸은 라지푸트, 마라타 연맹 등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제국의 재정 악화와 군사력 약화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6] 또한 그의 막강한 권력은 황제 자한다르 샤의 의심을 사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6]
자한다르 샤는 통치 기간 동안 타와이프(궁정 무희) 출신인 랄 쿤와르를 총애하여 정식 황후로 삼고 그녀의 가족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8] 이는 전통적인 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황제 자신도 연회와 오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기록가들과 후대 역사가들은 황제의 사생활과 잔혹성을 통치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8]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자한다르 샤가 왕자 시절부터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점, 당시 귀족들의 사리사욕 추구 심화 등 보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8] 이러한 총체적인 난맥상 속에서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파루크시야르의 도전을 받게 된다.
4. 1. 즉위와 권력 공고화
자한다르 샤는 1712년 3월 29일에 즉위했다.[7] 그의 즉위는 제국 내에서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그는 정당성이 없는 통치자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한다르 샤는 즉위 후 지지자들에게 보상하고 승진시키면서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는 이전 무굴 왕위 계승 관행에서 벗어나 계승 과정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을 엄하게 처벌하여 여러 명을 처형했다. 또한 그는 패배한 왕자들의 시신을 적절한 매장을 고집했던 이전 황제들과는 달리 며칠 동안 썩도록 방치했다.
자한다르 샤의 즉위와 함께 줄피카르 칸은 ''와지르'' 자리에 올랐다. 자한다르 샤가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왕위 계승 과정의 상황으로 인해 실질적인 권력은 황제가 아닌 줄피카르 칸 자신이 행사했다. 이는 제국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이 왕조 외부인에 의해 행사된 무굴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자한다르 샤 통치 기간 동안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줄피카르 칸은 라지푸트, 시크교도, 마라타 연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제국에 평화를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제국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이는 자한다르 샤의 전임자들이 시작한 추세가 이어져 제국의 군사적 효능을 감소시켰다. 줄피카르 칸이 누린 과도한 권력은 자한다르 샤가 그를 음모하게 만들었고,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6]
자한다르 샤는 통치 기간 동안 신분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던 타와이프 랄 쿤와르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그가 가장 총애하는 부인이 되었고, 이후 그녀의 가족은 전례 없는 권력과 지위를 얻었다. 자한다르 샤는 또한 연회와 오락에 탐닉했다. 당시의 연대기 작가들과 후대의 역사가들은 황제의 사생활과 그의 반대자들에게 가해진 잔혹성을 통치의 혼란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다른 요인들을 강조한다. 무니스 파루키는 그가 왕자로서 정치적으로 약했던 점이 통치자로서의 실패를 낳았다고 강조한다. 아비셰크 카이커는 귀족들이 자한다르 샤의 즉위 무렵부터 더욱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의 통치의 "잔혹성"은 파루크시야르를 지지한 것에 대한 그들의 변호였다고 언급한다.[8]
4. 2. 줄피카르 칸의 섭정

자한다르 샤는 1712년 3월 29일에 즉위했지만,[7] 제국 내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등 정통성에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는 즉위 후 지지자들에게 보상을 하고 승진시키며 자신의 권위를 다지려 했으나, 왕위 계승 과정에서 형제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을 처형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패배한 왕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지 않고 방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한다르 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줄피카르 칸은 재상(와지르)의 자리에 올랐다.[17]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에게 크게 의존했고,[6] 이로 인해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황제가 아닌 줄피카르 칸에게 넘어갔다.[12][17] 이는 무굴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이 아닌 인물이 제국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 사례였다.[6]
실권을 장악한 줄피카르 칸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전 통치자들과의 전쟁으로 소원해졌던 라지푸트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여, 마르와르의 왕 아지트 싱을 구자라트 태수로, 암베르의 왕 자이 싱 2세를 마르와 태수로 임명했다.[17] 또한 마라타와는 1711년에 맺었던 약정을 재확인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7] 아그라 인근 바라트푸르의 자트 지도자 추라만과 분델칸드의 영주 차트라사르를 회유하기도 했다.[17] 그러나 1708년부터 대립해 온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도와는 타협하지 않고 반란 진압을 계속 추진했다.[17]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줄피카르 칸은 선대 황제 바하두르 샤 1세 시기부터 늘어난 자기르(봉토) 지급을 억제하려 했으며,[17] 군사적으로는 귀족과 군인들에게 부여된 만사브(관직 등급)에 맞는 병력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했다.[17]
하지만 줄피카르 칸의 정책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는 세수 확보를 위해 이자라라고 불리는 징세 청부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악바르 시대의 재무 대신 토다르 말이 시행했던 제도를 변형한 것이었다. 줄피카르 칸은 자민다르(지주 또는 세금 징수 관리인)들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자유롭게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주었고, 이로 인해 자민다르들은 농민들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하여 농민들의 고통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17]
줄피카르 칸이 누리는 막강한 권력은 황제 자한다르 샤의 의심을 사기도 했으며, 이는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이 되었다.[6] 자한다르 샤의 통치가 혼란스러웠던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가들과 후대 역사가들이 황제의 사생활(랄 쿤와르와의 관계, 연회 탐닉 등)과 반대파에 대한 잔혹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자한다르 샤가 왕자 시절부터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점이나, 귀족들이 점차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 점 등을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하기도 한다.[8]
4. 3. 줄피카르 칸의 개혁 정치
자한다르 샤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굴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던 줄피카르 칸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17] 자한다르 샤가 즉위하면서 줄피카르 칸은 재상(와지르)의 자리에 올랐고, 황제가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줄피카르 칸이 행사하게 되었다.[6][12][17] 이는 무굴 역사상 처음으로 황족이 아닌 인물이 제국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 사례였다.[6]
실권을 장악한 줄피카르 칸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 패배한 왕자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을 숙청하여 재산을 몰수하거나 처형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동시에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12][17]
줄피카르 칸은 제국의 주요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라지푸트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마르와르의 왕 아지트 싱을 구자라트 태수로, 암베르의 왕 자이 싱 2세를 마르와 태수로 임명했다.[17] 마라타와는 1711년에 자신의 대리인 다우드 칸 파니를 통해 맺었던 약정을 재확인하며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17] 또한 아그라 인근 바라트푸르의 자트 지도자 추라만과 분델칸드의 영주 차트라사르를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17] 그러나 1708년부터 적대 관계였던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도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유지하며 반란 진압을 계속했다.[17]
재정 및 군사 분야에서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선대 황제 바하두르 샤 1세 시기부터 과도하게 늘어난 자기르(봉토) 지급을 억제하여 재정 부담을 줄이려 했다.[17] 또한 귀족과 군인들에게 부여된 만사브(관직 등급)에 상응하는 병력을 실제로 유지하도록 강제하여 군사력을 확보하고자 했다.[17]
하지만 줄피카르 칸의 정책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세수 확보를 위해 도입한 이자라라고 불리는 징세 청부 제도는 심각한 폐단을 낳았다. 이 제도는 과거 악바르 시대의 재무 대신 토다르 말이 시행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자민다르(지주 또는 세금 징수 관리)와 계약을 맺고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줄피카르 칸은 자민다르들에게 사실상 무제한적인 세금 징수를 허용했고, 이는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7] 제국의 재정 악화 추세는 계속되었고, 이는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다.[6]
4. 4. 랄 쿤와르와의 관계와 국정 혼란
자한다르 샤는 통치 기간 동안 신분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던 타와이프 랄 쿤와르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그가 가장 총애하는 부인이 되었다.[8] 랄 쿤와르는 자한다르 샤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음유 시인의 딸이었다.[12] 이 결혼으로 랄 쿤와르와 그녀의 가족은 전례 없는 권력과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8] 그러나 평민 출신의 여성을 정비로 삼은 것은 기존 귀족들의 큰 반발을 샀고, 많은 귀족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12]
한편, 실질적인 권력은 재상 줄피카르 칸이 행사하고 있었지만, 어리석고 무능한 황제 자한다르 샤는 나태한 생활에 빠져 연회와 오락에 탐닉했다.[12][8] 그는 줄피카르 칸에게 국정을 크게 의존하면서도[6]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질투심 많은 다른 귀족들의 참언에 넘어가 줄피카르 칸이 황제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12][17][13] 겁이 많았던 자한다르 샤는 강력한 재상을 해임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몰아낼 음모를 몰래 꾸미기도 했다.[12][13]
당시의 연대기 작가들과 후대의 역사가들은 황제의 문란한 사생활과 반대파에 대한 잔혹함이 국정 혼란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8]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다른 요인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니스 파루키는 자한다르 샤가 왕자 시절부터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점이 통치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으며, 아비셰크 카이커는 귀족들이 자한다르 샤 즉위 무렵부터 더욱 사리사욕을 추구했고,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은 후에 파루크시야르를 지지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8]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벵골에 남아 있던 아짐 우샨의 아들 파루크시야르는 파트나에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12] 그는 사이드 형제로 알려진 유력자들과 손을 잡고 군대를 모아 델리로 진격했다.[12][13]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다음 해 1월 10일, 아그라 근처에서 파루크시야르의 연합군과 맞섰다(제2차 사무갈 전투).[12][15]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가 하피 칸은 "사람들은 양측 군세를 비교하며 자한다르 샤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황제가 천한 여자(랄 쿤와르)를 편애하고, 거친 무리와 어울리며 천한 신분의 자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실망했다.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군인이 파루크시야르의 승리에 희망을 걸었다"고 기록하며 황제군의 낮은 사기를 지적했다.[15]
실제로 황제군은 사기가 떨어져 분열된 상태였고, 전투가 시작된 지 하루 만에 파루크시야르 연합군에게 쉽게 격파당했다. 다음 날인 1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새로운 무굴 황제로 즉위했다.[12] 자한다르 샤는 포로로 잡혀 감금되었다가, 2월 11일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에 의해 교살당했다.[12][14] 그의 시신은 델리 성의 성문에 방치되어 부패하도록 내버려졌다.[12] 한편, 줄피카르 칸은 파루크시야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려 했으나, 그가 파루크시야르의 아버지 아짐 우샨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고 같은 날 처형되었다.[12]
4. 5. 무능과 사치
자한다르 샤는 1712년 3월 29일에 즉위했으나,[7] 제국 내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정당성이 부족한 통치자로 여겨졌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지자들에게 보상하고 승진시키는 한편, 이전 무굴 제국의 왕위 계승 관행에서 벗어나 자신의 형제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을 처형하는 등 엄하게 처벌했다. 심지어 패배한 왕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지 않고 며칠 동안 썩도록 방치하기도 했다.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장악한 와지르 줄피카르 칸은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이 아닌 인물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그의 과도한 권력은 황제의 의심을 샀고 둘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다.[6] 줄피카르 칸은 라지푸트, 시크교도, 마라타 연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제국에 평화를 가져오려 했으나, 제국의 재정은 계속 악화되었고 군사력은 약화되었다.[6] 자한다르 샤는 강력한 재상 줄피카르 칸을 해임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몰아내기 위해 몰래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12][13]
자한다르 샤는 통치 기간 동안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냈다. 특히 신분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던 타와이프(무희) 랄 쿤와르와 결혼하여 가장 총애하는 부인으로 삼았고, 그녀의 가족에게 전례 없는 권력과 지위를 부여했다.[12] 이는 많은 귀족들의 분노를 샀고, 그들이 자한다르 샤에게 등을 돌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2] 당시 연대기 작가들과 후대 역사가들은 황제의 방탕한 사생활과 반대파에 대한 잔혹성을 통치 혼란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자한다르 샤가 왕자 시절부터 정치적으로 취약했던 점이나, 귀족들이 점차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 점 등 다른 요인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한다.[8]
이러한 실정을 틈타 벵골에 있던 아짐 우샨의 아들 파루크시야르는 파트나에서 제위를 선언하고 자한다르 샤에게 도전했다.[12] 그는 사이드 형제와 손을 잡고 군대를 모아 델리로 진격했다.[12][13] 자한다르 샤는 줄피카르 칸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다음 해 1월 10일 아그라 근처에서 파루크시야르의 연합군과 맞섰다(제2차 사무갈 전투). 그러나 황제군은 이미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역사가 하피 칸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군세만 보고 자한다르 샤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황제가 천한 여자(랄 쿤와르)를 편애하고 저급한 무리와 어울리며 신분 낮은 자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실망했고, 모든 군인이 파루크시야르의 승리를 바랐다"고 기록했다.[15]
결국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하루 만에 쉽게 격파되었고, 다음 날인 1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새로운 무굴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12] 자한다르 샤는 포로로 잡혀 유폐되었다가 2월 11일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으로 교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델리 성 성문에 방치되어 부패하도록 내버려졌다.[12][14] 한편, 줄피카르 칸은 파루크시야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려 했으나, 자한다르 샤를 도와 파루크시야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용서받지 못하고 같은 날 처형되었다.
5. 폐위와 죽음
아그라 인근 전투에서 패배한 자한다르 샤는[9] 델리로 도망쳐 줄피카르 칸과 그의 아버지 아사드 칸에게 피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한다르 샤를 투옥하여 파루크시야르에게 넘겨 호의를 얻으려 했다. 결국 1713년 2월 11일, 자한다르 샤는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구타당한 뒤 참수되었으며[10], 그의 시신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두 마리의 코끼리에 거꾸로 매달린 채 델리 시내를 행진하는 수모를 겪었다.[11] 이후 후마윤 묘에 묻혔다.[10] 자한다르 샤를 배신했던 줄피카르 칸 역시 파루크시야르에 의해 처형되었다.[10]
5. 1. 파루크시야르의 반란
자한다르 샤의 즉위는 벵골에 기반을 둔 조카 파루크시야르(아짐 우스 샨의 아들)의 도전을 받았다. 파루크시야르는 독자적인 기반이 약했기에 자신의 입지를 지지해 줄 세력을 찾았고, 결국 사이이드 형제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확보했다. 사이이드 형제는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으로, 이들은 자한다르 샤에 의해 해임된 아짐 우스 샨의 행정관들이었다.[6] 사이이드 형제의 자원과 정치적 연계를 바탕으로 파루크시야르는 파트나에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하고 반란군을 모아 왕좌를 향해 델리로 진격했다.[12][13]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사기가 떨어진 제국군은 1713년 초 아그라 인근 전투에서 패배했다.[9]한편, 재상 주르피카르 칸이 정력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으나, 황제 자한다르 샤는 무능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12] 그는 주르피카르 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질투심 많은 다른 귀족들 역시 주르피카르 칸을 견제하며 황제에게 그가 야심을 품고 황제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참언했다.[12][17][13] 이로 인해 자한다르 샤는 강력한 재상인 주르피카르 칸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를 해임하지는 못했지만 몰아낼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12][13]
또한, 자한다르 샤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음유 시인의 딸인 라르 쿤와르라는 여인을 정비로 삼고 그 일족을 중용했다.[12] 평민 출신의 여인을 정비로 삼은 것은 기존 귀족들의 큰 반발을 샀고, 많은 귀족들이 자한다르 샤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12]
자한다르 샤는 주르피카르 칸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근교에서 파루크시야르의 연합군과 맞섰다 (제2차 사무갈 전투). 당시 역사가 하피 칸은 그의 기록에서 "사람들은 양측 군대의 규모를 비교하며 자한다르 샤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황제가 천한 여자(라르 쿤와르)를 편애하고 격 낮은 무리와 어울리며 신분이 낮은 자들을 중용했기에 귀족들은 실망했다. 모든 군인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파루크시야르의 승리를 바랐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15]
실제로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결국 전투는 하루 만에 파루크시야르 군대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고, 다음 날인 1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새로운 무굴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12]
자한다르 샤는 포로로 잡혀 유폐되었다가, 2월 11일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으로 교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델리 성 문 앞에 버려져 부패하도록 방치되었다.[12][14] 한편, 재상 주르피카르 칸은 파루크시야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려 했으나, 그가 지원했던 자한다르 샤가 파루크시야르의 아버지 아짐 우샨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고 같은 날 처형되었다.
5. 2. 아그라 전투와 패배
자한다르 샤의 즉위는 벵골에 기반을 둔 조카 파루크시야르(아짐 우스 샨의 아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파루크시야르는 독자적인 기반이 약했기에 자신의 입지를 지지해 줄 세력을 모색했고, 사이이드 형제, 즉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확보했다.[6] 이들은 본래 파루크시야르의 아버지 아짐 우스 샨의 행정관이었으나 자한다르 샤에 의해 해임된 인물들이었다.[6] 사이이드 형제의 자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파루크시야르는 파트나에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아 왕위를 향해 진격했다.[12][13] 반면, 급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던 자한다르 샤의 제국군은 1713년 초 아그라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9]
재상 주르피카르 칸이 정력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으나, 황제 자한다르 샤는 무능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12] 그는 주르피카르 칸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다른 귀족들 역시 재상을 질투하여 뒤에서 그를 비방했다.[12][17] 이들 귀족은 주르피카르 칸이 황제의 권위를 위협할 야심을 품고 있다고 참언했고, 자한다르 샤는 이에 두려움을 느꼈다.[13] 겁이 많았던 자한다르 샤는 강력한 재상을 해임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제거할 음모를 몰래 꾸미기도 했다.[12][13]
설상가상으로 자한다르 샤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음유 시인의 딸 라르 쿤와르를 정비로 삼고 그녀의 일족을 중용했다.[12] 평민 출신 여인을 정비로 맞이한 것은 귀족들의 큰 반발을 샀고, 많은 이들이 자한다르 샤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12]
자한다르 샤는 주르피카르 칸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근처에서 파루크시야르 연합군과 대치했다(제2차 사무갈 전투). 역사가 하피 칸은 당시 상황에 대해 자신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사람들은 파루크시야르와 자한다르 샤 양측의 군세를 비교하며 후자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황제가 천한 여자(라르 쿤와르)를 편애하고, 거친 무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신분이 낮은 자들을 중용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실망했다. 계급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군인은 파루크시야르의 승리에 희망을 걸었다."[15]
실제로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고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결국 전투는 하루 만에 연합군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고, 다음 날인 1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새로운 무굴 황제로 즉위했다.[12]
자한다르 샤는 전투 후 사로잡혀 유폐되었으며, 2월 11일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으로 교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델리 성의 성문에 방치되어 부패하도록 내버려졌다.[12][14] 한편, 주르피카르 칸은 파루크시야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파루크시야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일조한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주르피카르 칸 역시 자한다르 샤가 처형된 같은 날 처형되었다.
5. 3. 최후
벵골에 있던 아짐 우샨의 아들 파루크시야르는 자한다르 샤의 실정을 지켜보며 파트나에서 제위를 선언했다.[12] 그는 사이드 형제와 동맹을 맺고 델리로 진격했다.[12][13]자한다르 샤는 라르 쿤와르라는 평민 출신 여인을 정비로 삼고 그 일족을 중용하여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12], 강력한 재상 주르피카르 칸마저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12][13][17] 이러한 내부 분열 속에서 자한다르 샤는 주르피카르 칸과 함께 군대를 모아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근처에서 파루크시야르의 연합군과 맞섰다(제2차 사무갈 전투). 역사가 하피 칸은 당시 자한다르 샤 군대의 사기가 매우 낮았다고 기록했다. 황제가 천한 신분의 여자를 편애하고 무능한 자들을 중용하자 귀족들이 실망했으며, 군인들조차 파루크시야르의 승리를 바랐다는 것이다.[15]
결국 황제군은 하루 만에 연합군에게 쉽게 격파되었고, 다음 날인 1월 11일 파루크시야르가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12]
패배한 자한다르 샤는 델리로 도망쳐 줄피카르 칸과 그의 아버지 아사드 칸에게 피신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한다르 샤를 투옥하여 파루크시야르에게 넘겼다.[10] 1713년 2월 11일, 자한다르 샤는 파루크시야르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구타당한 후 참수되었고[10], 다른 기록에는 교살되었다고 전해진다.[12][14] 그의 시신은 두 마리의 코끼리에 거꾸로 매달려 델리 시내를 행진하거나[11], 델리 성 성문에 방치되어 부패하도록 내버려졌다고 한다.[12][14] 이후 후마윤 묘에 묻혔다.[10]
한편, 줄피카르 칸은 파루크시야르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의 아버지 아짐 우샨을 살해한 전력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고 자한다르 샤와 같은 날 처형되었다.[12]
6. 가족 관계
자한다르 샤의 첫 번째 부인은 미르자 무카람 칸 사파비의 딸이었다. 결혼은 1676년 10월 13일에 이루어졌다. 첫 부인이 사망한 후, 그는 1684년 8월 30일에 루스탐 미르자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사이이드-운-니사 베굼과 결혼했다. 카지 아부 사'이드가 황제 아우랑제브와 무아잠 왕자 앞에서 결혼식을 주관했으며, 결혼은 9월 18일에 성사되었다. 사이이드-운-니사 베굼은 결혼 선물로 67000INR 상당의 보석을 받았다. 결혼 축하 행사는 지나트-운-니사 베굼 공주가 감독했다.
7. 화폐
자한다르 샤는 금화, 은화, 동화에 두 줄짜리 시구인 쿠플렛(couplet)을 다시 새겨 발행했다. 이때 '아부 알-파테'(Abu al-Fateh)와 '사하브 키란'(Sahab Qiran)이라는 두 종류의 쿠플렛이 사용되었다. 동전은 20g과 14g의 두 가지 무게 표준으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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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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