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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크시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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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루크시야르는 1683년에 태어난 무굴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바하두르 샤 1세의 손자이자 아우랑제브의 증손자이며, 1713년 자한다르 샤를 물리치고 황위에 올랐다. 통치 기간 동안 사이이드 형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폐위되어 1719년에 살해되었다. 파룩시야르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무역 특권을 부여하고, 펀자브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며, 파룩나가르와 파룩하바드 등 여러 지명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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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크시야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파루크시야르 황제, 보석을 들고 있음 {{circa|1717}}
파루크시야르 황제, 보석을 들고 있음
칭호파디샤
알 술탄 알-아잠
재위1713년 1월 11일 – 1719년 2월 28일
전임자자한다르 샤
후임자라피 우드-다라자트
배우자가우하르-운-니사 베굼
파크르-운-니사 베굼
인디라 칸와르(1715년 결혼)
부프 데비(1717년 결혼)
자녀바드샤 베굼
파르쿤다 바크트
자한 무라드 샤
자한기르 샤
전체 이름미르자 아불 무자파르 무인-웃딘 무함마드 샤 파루크시야르 알림 아크바르 사니 왈라 샨 파드샤-이-바흐르-우-바르
사후 칭호샤히드-이-마르훔 ('자비를 받은 순교자')
왕조티무르 왕조
가문바부르 가문
아버지아짐-우쉬-샨
어머니사히바 니즈완
출생일1683년 8월 20일
출생지아우랑가바드, 아흐마드나가르 수바, 무굴 제국
사망일1719년 4월 9일
사망지샤자하나바드, 델리, 무굴 제국
사망 원인감금에 의한 처형
매장지델리, 후마윤 묘
종교수니파 이슬람(하나피파)
군사 정보
전투구르다스푸르 포위전(1715년)
구르다스 난갈 전투(1715년)
기타
로마자 표기Farrukhsiyar

2. 초기 생애

1696년, 파룩시야르는 아버지 아짐-우시-샨(Azim-ush-Shan)을 따라 벵골(Bengal) 원정에 동행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아짐-우시-샨을 벵골에서 불러들이고 파룩시야르에게 그 지역을 맡겼다. 파룩시야르는 초기 몇 년을 벵골 주의 수도였던 다카(Dhaka)(현재 방글라데시(Bangladesh))에서 보냈다.

1712년,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의 죽음과 권력 다툼을 예상한 아짐-우시-샨은 파룩시야르를 불렀다. 아지마바드(Azimabad)(현재 인도 비하르(Bihar) 파트나(Patna))를 지나던 파룩시야르는 무굴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3월 21일, 파룩시야르는 아버지의 즉위를 선포하고 그의 이름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쿠트바(khutba)''(공공 기도)를 명령했다. 4월 6일, 줄피카르 칸 누스라트 웅(Zulfiqar Khan Nusrat Jung)이 자한다르 샤(Jahandar Shah)와 그의 동생들인 라피-우시-샨(Rafi-ush-Shan)과 자한 샤(Jahan Shah) 사이에서 꾸민 연합에 아버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파룩시야르는 자살을 고려했지만 벵골에서 온 친구들이 그를 만류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무함마드 파룩시야르는 1683년 8월 20일 (히즈라력 1094년 라마단 9일) 데칸 고원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서 아우랑제브(Aurangzeb)의 증손자이자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의 손자인 아짐-우시-샨(Azim-ush-Sha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그의 어머니는 카슈미르 출신의 사히바 니스완(Sahiba Niswan)이다.[3]
파룩시야르


1712년 2월, 아버지 아짐 우시얀은 황제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하자 황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으나, 3월에 형인 자한다르 샤(Jahandar Shah)에게 살해되었다.[29]

2. 2. 벵골에서의 유년 시절

1696년, 파룩시야르는 아버지 아짐-우시-샨(Azim-ush-Shan)을 따라 벵골(Bengal) 원정에 동행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아짐-우시-샨을 벵골에서 불러들이고 파룩시야르에게 그 지역을 맡겼다. 파룩시야르는 어린 시절을 벵골 주의 수도였던 다카(Dhaka)(현재 방글라데시(Bangladesh))에서 보냈다.[3]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 우시얀은 벵골 총독으로서 벵골을 통치했다.[29] 파룩시야르는 벵골에 홀로 남겨졌지만, 자한다르 샤(Jahandar Shah)를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 3. 자한다르 샤 즉위와 복수 다짐

1712년, 자한다르 샤(파룩시야르의 삼촌)는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우시-샨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황위에 올랐다. 파룩시야르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벵골의 수바다르(Subahdar)였던 후세인 알리 칸과 그의 형이자 알라하바드의 수바다르였던 압둘라 칸과 손을 잡았다.[29]

그들이 아지마바드에서 알라하바드에 도착했을 때, 자한다르 샤의 군 장관인 사이드 압둘 가파르 칸 가르데지와 1만 2천 명의 군대가 압둘라 칸과 충돌했고, 그 결과 압둘라 칸은 알라하바드 요새로 후퇴했다. 그러나 가르데지의 군대는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도망쳤다. 패배 후, 자한다르 샤는 쿠와자 아산 칸 장군과 그의 아들 아주딘을 보냈다. 그들이 카즈와(오늘날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파테푸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 파룩시야르가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압둘라 칸이 선봉대를 지휘하면서, 파룩시야르는 공격을 시작했다. 밤새 포격전이 벌어진 후, 아주딘과 쿠와자 아산 칸은 도망쳤고, 진영은 파룩시야르에게 함락되었다.

1713년 1월 10일, 파룩시야르와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사무가르에서 만났다. 자한다르 샤는 패배하여 투옥되었고, 다음 날 파룩시야르는 자신을 무굴 황제로 선포했다. 2월 12일, 파룩시야르는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로 진격하여 붉은 요새와 성채를 점령했다. 대나무 막대기에 꽂힌 자한다르 샤의 머리는 사형 집행인이 코끼리에 태워 운반했고, 그의 시신은 다른 코끼리에 실려 운반되었다.

자한다르 샤는 즉위 후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 델리 궁정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29] 파룩시야르는 이러한 델리의 상황을 놓치지 않고, 1712년 4월 17일 벵골의 파트나에서 즉위를 선포하며 자한다르 샤와의 대결 태세를 보였다.[29]

파룩시야르는 자한다르 샤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벵골에서 군대를 모으는 한편, 사이드 형제와도 손을 잡았다.[29] 사이드 형제는 알라하바드 총독 사이드 압둘라 칸과 비하르 총독 사이드 후세인 알리 칸 두 형제를 말한다.[29]

1712년 말 파룩시야르가 델리로 진군하는 가운데, 자한다르 샤도 대군을 이끌고 맞섰고,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부근 사무갈에서 대치했다(제2차 사무갈 전투).[29] 이 전투에 대해 하피 칸은 그의 전기에 "계급의 고저를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은 파룩시야르의 승리에 희망을 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30]

황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분열 상태였고, 하루 만에 삼자 연합군에게 쉽게 패배하여 자한다르 샤는 사로잡혔다. 1713년 1월 11일 파룩시야르는 아그라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무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월에는 자한다르 샤를 줄피카르 칸과 함께 처형하고 많은 황자들을 눈멀게 한 뒤 유폐했다.[31]

3. 자한다르 샤 타도와 즉위

파룩시야르가 후세인 알리 칸을 맞이하는 모습


1712년, 자한다르 샤(파룩시야르의 삼촌)는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우시-샨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황위에 올랐다. 파룩시야르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벵골의 수바다르(Subahdar)였던 후세인 알리 칸과 그의 형이자 알라하바드의 수바다르였던 압둘라 칸과 손을 잡았다.

아지마바드에서 알라하바드로 진군하던 중, 자한다르 샤의 군 장관 사이드 압둘 가파르 칸 가르데지와 1만 2천 명의 군대가 압둘라 칸을 공격하여 알라하바드 요새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르데지의 군대는 그의 죽음 소식(정확하지 않은 정보)을 듣고 도망쳤다. 이후 자한다르 샤는 쿠와자 아산 칸 장군과 그의 아들 아주딘을 보냈으나, 그들은 카즈와(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 파테푸르 지구)에서 파룩시야르와 사이이드 형제가 합류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압둘라 칸이 선봉대를 지휘하며 공격을 시작했고, 밤새 포격전이 벌어진 후 아주딘과 쿠와자 아산 칸은 도망쳤고, 진영은 파룩시야르에게 함락되었다.

1713년 1월 10일, 파룩시야르와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그라에서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무가르에서 만났다. 자한다르 샤는 패배하여 투옥되었고, 다음 날 파룩시야르는 자신을 무굴 황제로 선포했다. 2월 12일, 파룩시야르는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로 진격하여 붉은 요새와 성채를 점령했다. 대나무 막대기에 꽂힌 자한다르 샤의 머리는 사형 집행인이 코끼리에 태워 운반했고, 그의 시신은 다른 코끼리에 실려 운반되었다.

3. 1. 사이이드 형제와의 동맹

자한다르 샤(파룩시야르의 삼촌)는 1712년에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우시-샨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황위에 올랐다. 파룩시야르는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벵골의 수바다르(Subahdar)였던 후세인 알리 칸과 그의 형이자 알라하바드의 수바다르였던 압둘라 칸과 동맹을 맺었다.

1713년 1월 10일, 파룩시야르와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사무가르에서 전투를 벌였다. 자한다르 샤는 패배하여 투옥되었고, 다음 날 파룩시야르는 무굴 황제로 즉위했다.

파룩시야르는 사이드 형제의 도움으로 자한다르 샤를 물리쳤다. 형제 중 한 명인 압둘라 칸은 와지르(총리)직을 원했지만, 이 자리는 가지우딘 칸에게 약속되었기에 거절되었다. 그러나 파룩시야르는 그에게 ''와킬-에-무틀락''이라는 섭정직을 제안했다. 압둘라 칸은 자신이 자한다르 샤에 맞서 파룩시야르의 군대를 이끌었기에 와지르직에 합당하다며 거절했다. 결국 파룩시야르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압둘라 칸을 와지르로 임명했다.[4] 그의 형제 후세인 알리 칸은 ''미르 바크시'' 즉, 총사령관이 되었다.

역사가 윌리엄 어바인에 따르면, 파룩시야르의 측근인 미르 줌라 3세와 칸 다우란은 파룩시야르가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었다. 이를 알게 된 후세인 알리 칸은 압둘라 칸에게 "황태자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과거의 공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의도 없이 약속을 저버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임이 분명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후세인 알리 칸은 "새로운 군주 계획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이드 형제가 군대의 가장 강력한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파룩시야르는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고, 사실상 사이드 형제가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5]

1685년 8월 20일, 파룩시야르는 바하두르 샤 1세의 차남 아짐 우시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8]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 우시얀은 벵골 총독으로서 벵골을 통치했다. 그러나 1712년 2월 황제 바하두르 샤 1세가 죽자 황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으나, 3월에 형인 자한다르 샤에게 살해되었다.[29] 유아였던 파룩시야르는 벵골에 홀로 남겨졌지만, 자한다르 샤 타도를 꾀하고 있었다.

한편, 자한다르 샤는 즉위 후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 델리 궁정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29] 파룩시야르는 이러한 델리의 상황을 놓치지 않고, 같은 해 4월 17일 벵골의 파트나에서 즉위를 선포하며 자한다르 샤와의 대결 태세를 보였다.[29]

파룩시야르는 자한다르 샤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벵골에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사이드 형제와도 손을 잡기로 했다.[29] 사이드 형제는 알라하바드 총독 사이드 압둘라 칸과 비하르 총독 사이드 후세인 알리 칸 두 형제를 말한다.[29]

같은 해 말 파룩시야르가 델리로 진군하는 가운데, 자한다르 샤도 대군을 이끌고 맞섰고,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부근 사무갈에서 대치했다(제2차 사무갈 전투).[29] 이 전투에 대해 하피 칸은 그의 전기에 "계급의 고저를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은 파룩시야르의 승리에 희망을 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30]

사실, 황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분열 상태였고, 하루 만에 삼자 연합군에게 쉽게 패배하여 자한다르 샤는 사로잡혔다. 1713년 1월 11일 파룩시야르는 아그라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무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월에는 자한다르 샤를 줄피카르 칸과 함께 처형하고 많은 황자들을 눈멀게 한 뒤 유폐했다.[31]

3. 2. 아그라 전투와 즉위



1712년, 자한다르 샤(파룩시야르의 삼촌)는 파룩시야르의 아버지 아짐-우시-샨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의 황위에 올랐다. 파룩시야르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벵골의 수바다르(Subahdar)였던 후세인 알리 칸과 그의 형이자 알라하바드의 수바다르였던 압둘라 칸과 손을 잡았다.

그들이 아지마바드에서 알라하바드에 도착했을 때, 자한다르 샤의 군 장관인 사이드 압둘 가파르 칸 가르데지와 1만 2천 명의 군대가 압둘라 칸과 충돌했고, 그 결과 압둘라 칸은 알라하바드 요새로 후퇴했다. 그러나 가르데지의 군대는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도망쳤다. 패배 후, 자한다르 샤는 쿠와자 아산 칸 장군과 그의 아들 아주딘을 보냈다. 그들이 카즈와(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 파테푸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 파룩시야르가 후세인 알리 칸과 압둘라 칸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압둘라 칸이 선봉대를 지휘하면서, 파룩시야르는 공격을 시작했다. 밤새 포격전이 벌어진 후, 아주딘과 쿠와자 아산 칸은 도망쳤고, 진영은 파룩시야르에게 함락되었다.

1713년 1월 10일, 파룩시야르와 자한다르 샤의 군대는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그라에서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무가르에서 만났다. 자한다르 샤는 패배하여 투옥되었고, 다음 날 파룩시야르는 자신을 무굴 황제로 선포했다. 2월 12일, 파룩시야르는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로 진격하여 붉은 요새와 성채를 점령했다. 대나무 막대기에 꽂힌 자한다르 샤의 머리는 사형 집행인이 코끼리에 태워 운반했고, 그의 시신은 다른 코끼리에 실려 운반되었다.

자한다르 샤는 즉위 후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델리 궁정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29] 파룩시야르는 이러한 델리의 상황을 놓치지 않고, 1712년 4월 17일 벵골의 파트나에서 즉위를 선포하며 자한다르 샤와의 대결 태세를 보였다.[29]

파룩시야르는 자한다르 샤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벵골에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사이이드 형제와도 손을 잡기로 했다.[29] 사이이드 형제는 알라하바드 총독 사이이드 압둘라 칸과 비하르 총독 사이이드 후세인 알리 칸 두 형제를 말한다.[29]

1712년 말 파룩시야르가 델리로 진군하는 가운데, 자한다르 샤도 대군을 이끌고 맞섰고, 1713년 1월 10일 아그라 부근 사무갈에서 대치했다(제2차 사무갈 전투).[29] 이 전투에 대해 하피 칸은 그의 전기에 "계급의 고저를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은 파룩시야르의 승리에 희망을 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30]

황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분열 상태였고, 하루 만에 삼자 연합군에게 쉽게 패배하여 자한다르 샤는 사로잡혔다. 1713년 1월 11일 파룩시야르는 아그라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무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월에는 자한다르 샤를 줄피카르 칸과 함께 처형하고 많은 황자들을 눈멀게 한 뒤 유폐했다.[31]

4. 치세

파룩시야르가 델리의 대모스크에서 금요일 예배에 도착하다.


1714년 이타와에서 주조된 무굴 황제 파룩시야르 명의의 은화 루피.


파룩시야르는 자한다르 샤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이드 형제의 도움을 받았다.[4] 즉위 후, 사이드 형제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어, 압둘라 칸은 와지르(총리)가 되었고, 후사인 알리 칸은 미르 바크시(총사령관)가 되었다.[4]

하지만 파룩시야르는 사이드 형제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하여 측근들을 통해 견제하려 했으나, 사이드 형제는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5]

파룩시야르의 치세 동안 무굴 제국은 여러 반란에 직면했다. 마르와르의 아짓 싱은 아제르를 점령하고 무굴 제국의 외교관들을 추방했다.[6] 파룩시야르는 후사인 알리 칸을 보내 진압, 결국 아짓 싱은 항복하고 딸을 파룩시야르에게 바쳤다.[6]

자트족아그라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6] 파룩시야르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자트족 지도자 추라만과 협상을 통해 평화를 맺었다.[6]

펀자브에서는 시크교도들의 반란이 계속되었고, 1716년 반란 지도자 반다 싱이 처형된 후에도 무굴 제국은 펀자브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해 갔다. 데칸 고원에서는 마라타 제국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무굴 제국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룩시야르는 지즈야를 부활시켜 힌두교도들의 반발을 샀다.[20] 그는 메카의 샤리프가 보낸 편지를 근거로 지즈야 징수가 의무라고 주장했다.[20]

1717년, 파룩시야르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무역 특권을 부여하는 칙령을 내렸다.[21] 이 칙령으로 회사는 매년 3,000루피를 지불하는 대가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21] 하지만 회사 관리들은 이 특권을 악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고, 이는 벵골 나와브와의 갈등을 일으켰다.[22]

4. 1. 사이이드 형제의 전횡



파룩시야르는 사이드 형제의 도움으로 자한다르 샤를 물리쳤다. 형제 중 한 명인 압둘라 칸은 와지르(총리)직을 원했으나, 이 자리는 가지우딘 칸에게 약속되었기에 거절되었다. 하지만 파룩시야르는 그에게 ''와킬-에-무틀락''이라는 섭정직을 제안했다. 압둘라 칸은 자한다르 샤에 맞서 파룩시야르의 군대를 이끌었기에 자신이 와지르직에 합당하다며 거절했고, 결국 파룩시야르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압둘라 칸은 와지르가 되었다.[4] 그의 형제 후사인 알리 칸은 ''미르 바크시'' 즉, 총사령관이 되었다.

역사가 윌리엄 어바인에 따르면, 파룩시야르의 측근인 미르 줌라 3세와 칸 다우란은 파룩시야르가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그의 마음속에 심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사이드 형제(후사인 알리 칸)는 압둘라 칸에게 "황태자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과거의 공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의도 없이 약속을 저버리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임이 분명합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후사인 알리 칸은 "새로운 군주 계획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이드 형제가 군대의 가장 강력한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파룩시야르는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고, 따라서 사이드 형제는 사실상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5]

파룩시야르는 즉위 후 곧바로 사이이드 형제의 협력에 대한 보답으로, 압둘라 칸을 재상이자 재무대신(와지르)에, 후사인 알리 칸을 군무대신(미르 바흐시, 군 총사령관)에 각각 임명했다.[31] 그러나 하피 칸은 이 임명을 파룩시야르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말한다.[31] 이전의 와지르와 미르 바흐시는 “매우 책임감 있는 요직이며, 과거의 왕들이 그 높은 지위를 수여했던 인물은 현명하고 고결하며, 놀라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질이 오랜 경험에 의해 검증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31]

파룩시야르 즉위 후, 사이이드 형제는 황제의 즉위에 반대한 귀족들을 대량 학살하는 등 궁정의 분열을 초래했다.[32]

4. 2. 내부 반란 진압

마하라자 아짓 싱은 마르와르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아제르를 점령하고 무굴 제국의 외교관들을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했다. 파루크시야르는 그를 복종시키기 위해 후세인 알리 칸을 보냈다. 그러나 무굴 황제 궁정 내의 반사이이드 형제 세력은 후세인 알리 칸을 물리치면 보상을 해주겠다는 내용의 밀서를 아짓 싱에게 보내도록 그를 압박했다.[6] 후세인 알리 칸은 1714년 1월 6일 델리에서 아제르로 출발했고, 그의 군대가 사라이 사할에 도착하자 아짓 싱은 외교관들을 보냈지만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후세인 알리 칸이 죠드푸르, 자이살메르, 메르타를 거쳐 아제르로 진군하자 아짓 싱은 무굴 장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사막으로 후퇴했다. 아짓 싱은 메르타에서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라자푸타나에 무굴의 권위가 회복되었다. 아짓 싱은 그의 두 번째 딸인 쿠나와리 인디라 칸와르를 파룩시야르에게 신부로 주었다. 그의 아들인 쿠나와르 아바이 싱은 그의 매형인 무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그를 따라가야 했다.

말을 탄 파룩시야르와 시종들


오랑제브의 25년에 걸친 데칸 고원 원정으로 인해 무굴 제국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북인도에서는 지역 통치자들이 득세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트족이 세력을 확장하였다. 1713년 초, 파룩시야르는 아그라의 ''수바다르''인 차벨라 람을 파견하여 자트족 지도자 추라만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임인 삼사무드 다울라 칸은 추라만을 무굴 황제와 협상하게 만들었다. 라자 바하두르 라토르는 그를 무굴 궁정으로 호위했지만, 파룩시야르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1716년 9월, 라자 자이 싱 2세는 현재 라자스탄(인도)에 있는 툰에 거주하는 추라만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였다. 11월 19일, 자이 싱 2세는 툰 요새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12월, 추라만의 아들 무캄 싱이 요새에서 출격하여 자이 싱 2세와 싸웠지만, 라자는 승리를 주장하였다. 무굴 군대의 탄약이 부족해지자, 사이드 무자파르 칸은 아그라 무기고에서 화약, 로켓, 납덩어리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1718년 1월까지 포위 공격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1717년 후기에 비가 늦게 내리면서 물가가 상승하자, 자이 싱 2세는 포위 공격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자트족과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며 파룩시야르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파룩시야르는 감명받지 않았다. 그래서 자이 싱 2세는 (델리에 있는 그의 대리인을 통해) 후세인 알리 칸에게 만약 그가 황제에게 자신의 사정을 호소해 준다면 정부에 300만인도 루피, 장관에게 200만인도 루피를 주겠다고 알렸다. 후세인 알리 칸과 파룩시야르 사이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파룩시야르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이드 칸 자한을 파견하여 추라만을 무굴 궁정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파룩시야르는 라자 자이 싱 2세에게 포위 공격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파르만'' (황실 칙령)을 발표하였다.

1718년 4월 19일, 추라만은 파룩시야르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은 평화를 위해 협상하였으며, 추라만은 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칸 자한은 ''바하두르''("용감한")라는 칭호를 받았다. 추라만은 사이드 압둘라를 통해 파룩시야르에게 현금과 물품으로 500만인도 루피를 지불하기로 결정되었다.

샤 이나야트 샤히드는 신드(Sindh)의 가난한 농민들을 이끌고 신드의 자민다르(zamindars)에 맞서 결정적인 운동을 벌여 가난한 농민과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한 지도자였다. 그는 18세기 초 파룩시야르 황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15]

파룩시야르는 즉위 후 곧바로 사이드 형제의 협력에 대한 보답으로, 압둘라 칸을 재상이자 재무대신(와지르)에, 후사인 알리 칸을 군무대신(미르 바흐시, 군 총사령관)에 각각 임명했다.[31]

파룩시야르 즉위 후, 사이이드 형제는 황제의 즉위에 반대한 귀족들을 대량 학살하는 등 궁정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32]

같은 해, 데칸 지방의 마라타 제국에서는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마라타 제국의 재상이 되면서 마라타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펀자브에서는 시크교도의 반란이 계속되었고, 1716년 1월에 제국이 반란 지도자 반다 싱을 처형한 후에도 반란이 수습되지 않아 무굴 제국은 펀자브의 지배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또한 델리 근교 아그라에서는 자트족들이 바라트푸르에 독자적인 정권을 가지고 무굴 제국에 대한 반란을 계속했다.

제국은 이들 반란군을 돈으로 회유하려 했지만,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하여 세입이 급격히 감소하여 제국은 필요한 비용조차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4. 3. 지즈야 부활

파루크시야르는 사이이드 형제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적인 지지 세력이 필요했고, 이냐툴라 카슈미리 등 여러 카슈미르 귀족들에게 권력을 부여했다.[16][17][18][3] 1717년 이냐툴라 칸은 디완-이-탄-오 칼리사(Diwan-i-Tan-o Khalisa)와 무굴 제국카슈미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스리나가르의 힌두 지역에 불을 지르고 판딧들이 터번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19]

이냐툴라 칸은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에서 지즈야를 다시 부과하는 데에도 책임이 있었다. 파루크시야르는 힌두교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20]

> "이냐툴라는 나에게 메카의 샤리프(Sharif of Mecca)가 보낸 편지를 전달했는데, 그 편지에는 우리 성경에 따라 지즈야 징수가 의무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저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4. 4.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

1717년, 파룩시야르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무굴 제국 내 거주 및 무역권을 부여하는 파르만(farman, 칙령)을 발부했다. 이 칙령으로 회사는 매년 3,000루피를 지불하는 대가로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었다. 이는 파룩시야르의 질병을 치료한 회사 소속 외과의사 윌리엄 해밀턴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21]

회사는 물품 이동을 위한 다스타크(dastak, 통행증)를 발급받아 벵골 주(province of Bengal)에서 무관세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 관리들은 다스타크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악용했고, 이는 벵골 나와브(Nawab of Bengal) 알리바르디 칸의 분노를 샀다.[22]

18세기 초, 아우랑제브 사후 벵골 지방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각자의 거점을 중심으로 경쟁했다. 캘커타에 거점을 둔 영국 동인도 회사는 세력 확장을 위해 파룩시야르로부터 유리한 칙령을 받아냈다.

이 칙령의 내용은 "회사의 인장이 있는 허가증을 제시하면, 배로 수입되거나 수출되는 물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한다"는 것이었다.[33][34] 이 면제 특권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관세 없이 자유롭게 물산을 수출입할 수 있었고, 물산 이동에 대한 자유 통관권(다스타크)도 부여받았다.[34]

그러나 이 면제 특권은 총독의 세수 감소를 의미했고, 자유 통관권 발급 권한은 회사 직원들이 사적 무역의 세금을 면제받는 데 악용되어 총독 등과의 마찰을 빚었다.[35] 나아가 영국은 세력 확장 후 이 권리를 확대 해석하여 모든 사적 무역과 광범위한 물품 거래가 무관세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자유 통관권).[33]

5. 몰락과 죽음



1719년, 사이드 형제는 아짓 싱과 마라타 제국의 샤후 1세의 도움으로 파루크시야르의 눈을 멀게 하고 투옥한 뒤 처형했다.[25] 파루크시야르는 폐위된 후 탈출 계획이 발각되어 4월 29일 사이드 형제의 명령에 따라 델리 성에서 살해되었다.[28] [32] 이후 아짓 싱은 과부가 된 파루크시야르의 딸과 지참금을 되찾아 조드푸르로 돌아갔다.[26]

5. 1. 사이이드 형제와의 갈등 심화

1715년, 파루크시야르는 미르 줌라 3세에게 자신의 대리로 문서에 서명할 권한을 부여하며 "미르 줌라의 말과 인장이 곧 나의 말과 인장이다"라고 말했다. 미르 줌라 3세는 수상인 사이드 압둘라와 상의 없이 자기르(jagir)와 망삽(mansab)에 대한 제안을 승인하기 시작했다.[23] 사이드 압둘라의 부관인 라탄 찬드는 그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고, 무굴 황제에 의해 금지된 세금 징수(revenue farming)에 관여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미르 줌라 3세는 파룩시야르에게 사이드 형제가 직책을 맡기에 부적합하며 반항적이라고 비난했다. 파룩시야르는 형제들을 축출하기를 바라며 군사 준비를 시작했고, 미르 줌라 3세와 칸 다우란 휘하의 병력을 증강했다.[23]

사이드 후세인이 파룩시야르의 계획을 알게 되자, 그는 "중요한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아사프 자 1세 대신 데칸의 총독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파룩시야르는 이를 거절하고 그를 데칸으로 전임시켰다. 파룩시야르 지지자들의 공격을 두려워한 형제들은 군사적 준비를 시작했다. 파룩시야르는 처음에는 형제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대신 수상직을 원했던) 모하마드 아민 칸에게 맡기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제거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23]

1718년 2월, 데칸에 도착한 사이드 후세인은 마라타의 통치자 샤후 1세와 조약을 맺었다. 샤후는 데칸에서 사르데슈무키(sardeshmukhi)를 징수할 수 있었고, 베라르와 곤드와나의 땅을 받았다. 그 대가로 샤후는 매년 100만인도 루피를 지불하고 사이드 형제를 위해 1만 5천 기의 군대를 유지하기로 했다. 파룩시야르는 이 합의가 자신의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했다.[23] 그는 "비열한 적이 세입과 정부 문제에 있어서 거만한 파트너가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23]

1719년 9월, 파룩시야르는 사이이드 형제의 행동에 견디지 못하고 군무대신 후세인 알리 칸에게 궁정에 출사하도록 명령했다.[32] 당시 후세인 알리 칸은 데칸 총독으로서 데칸 지방에서 장기간 군사 원정 중이었지만, 11월에 수도로 돌아오기로 했다.[32][36][37]

후세인 알리 칸은 이 명령에 위기를 느껴 귀환 후 데리 근교에 진을 쳤고, 진중에서 여러 번 "이제 나는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2] 그는 반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자신의 북을 시끄럽게 울렸는데, 신하의 북을 황제의 거성 근처에서 울리는 것은 극히 규율에 위반되는 행위였다.[32]

같은 해 2월 28일, 후세인 알리 칸은 형 아브둘라 칸과 합류한 후 데리 성을 제압하고 황제 파룩시야르와 면회했다.[32] 아브둘라 칸은 면회 시 황제에게 "우리가 폐하를 위해 그토록 충성을 다했건만, 은혜를 모르고 그 수고에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악의와 의심과 배신으로 돌려주다니"라고 말했다.[32]

그들은 제국의 모든 관직을 요구했고, 파룩시야르는 두려워서 후렘으로 도망쳤다.[32] 사이이드 형제는 그를 쫓아 지붕 구석에 숨어 있던 황제를 끌어내어 폐위시킨 후 실명시켜 데리 성에 유폐했다.[32][28] 그들은 파룩시야르를 폐위시킨 날, 새로운 황제로 파룩시야르의 사촌이자 바하두르 샤 1세의 셋째 아들 라피 우드다라자트의 아들 라피 우드샤한을 즉위시켰다.[28] 파룩시야르는 폐위된 후 탈출 계획이 발각되어 4월 29일 사이이드 형제의 명령에 따라 데리 성에서 살해되었다.[28] [32]

5. 2. 폐위와 죽음



파룩시야르


1719년, 아짓 싱과 마라타 제국의 샤후 1세의 도움으로 사이드 형제는 파루크시야르의 눈을 멀게 하고 투옥한 뒤 처형했다.[25] 파루크시야르가 사망한 후, 아짓 싱은 그의 과부가 된 딸과 함께 지참금을 되찾아 조드푸르로 돌아왔다.[26]

1719년 9월, 파루크시야르는 사이드 형제의 행동에 견디다 못해 군무대신 후세인 알리 칸에게 궁정에 출사하도록 명령했다.[32] 당시 후세인 알리 칸은 데칸 총독으로서 데칸 지방에서 장기간 군사 원정 중이었지만, 11월에 수도로 돌아오기로 했다.[32][36][37]

후세인 알리 칸은 이 명령에 위기를 느끼고 귀환 후 델리 근교에 진을 쳤다. 그는 진중에서 여러 번 "이제 나는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2] 또한 그는 이때 반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자신의 북을 시끄럽게 울렸다. 신하가 황제의 거성 근처에서 북을 울리는 것은 극히 규율에 위반되는 행위였다.[32]

같은 해 2월 28일, 후세인 알리 칸은 형 아브둘라 칸과 합류한 후 델리 성을 제압하고 황제 파루크시야르와 면회했다.[32] 아브둘라 칸은 면회 시 황제 파루크시야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32]

"우리가 폐하를 위해 그토록 충성을 다했건만, 은혜를 모르고 그 수고에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악의와 의심과 배신으로 돌려주다니"

그들은 제국의 모든 관직을 요구했고, 파루크시야르는 두려워서 후렘으로 도망쳤다.[32] 사이드 형제는 그를 쫓아 지붕 구석에 숨어 있던 황제를 끌어내어 폐위시킨 후 실명시켜 델리 성에 유폐했다.[32][28]

사이드 형제는 파루크시야르를 폐위시킨 날, 바하두르 샤 1세의 셋째 아들 라피 우드다라자트의 아들 라피 우드샤한을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28]

파루크시야르는 폐위된 후 탈출 계획이 발각되어 4월 29일 사이드 형제의 명령에 따라 델리 성에서 살해되었다.[28] [32]

6. 유산



아지트 싱과 마라타 제국의 샤후 1세의 도움으로, 파루크시야르는 1719년 사이드 형제에 의해 눈이 멀게 되고 투옥된 후 처형되었다.[25]

6. 1. 파룩나가르와 파룩하바드

아지트 싱과 마라타 제국의 샤후 1세의 도움을 받아, 파루크시야르는 1719년 사이드 형제에 의해 눈이 멀게 되고 투옥된 후 처형되었다.[25] 사망 후, 아지트 싱은 그의 과부가 된 딸과 함께 지참금을 되찾아 조드푸르로 돌아왔다.[26]

7. 가족 관계

배우자출신비고
파크르-운-니사 베굼 (가우하르-운-니사)미르 무함마드 타키 (사다트 칸)의 딸
바이 인디라 칸워르마하라자 아짓 싱의 딸자녀 없음. 1719년 남편 사후 친정 복귀.[24]
바이 부프 데비키슈트와르의 라자 자야 싱 (개종 후 벡티야르 칸)의 딸1717년 결혼.[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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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Europe's Ind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7
[3] 서적 Journal and Proceedings Volume 73, Parts 1-3 Royal Asiatic Society of Bengal 1907
[4] 서적 Tazkirat ul-Mu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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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무갈 황제 역대지
[31] 서적 무갈 황제 역대지
[32] 서적 무갈 황제 역대지
[33] 서적 세계 역사총서 방글라데시의 역사
[34] 서적 근대 인도의 역사
[35] 서적 근대 인도의 역사
[36] 서적 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37] 서적 近代インド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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