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2세 달랑송 공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 2세 달랑송 공작은 알랑송 공작이자 페르슈 백작으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버지의 사망으로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잔 다르크를 지지하며 루아르 계곡 전투에서 활약했다. 샤를 7세와 갈등을 겪고 반란에 가담하여 투옥되었으며, 루이 11세에 의해 석방되었지만 다시 투옥되어 1476년 사망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페르슈 백작 - 샤를 4세 달랑송 공작
샤를 4세 달랑송 공작은 프랑스의 귀족으로 알랑송 공작 등의 지위를 상속받고 프랑수아 1세의 누이와 결혼했으나 파비아 전투 후 사망하여 알랑송 가문의 단절을 초래, 프랑스 왕위 계승에 영향을 주었다. - 페르슈 백작 - 장 1세 달랑송 공작
장 1세 달랑송 공작은 알랑송 백작이자 공작, 페르슈 백작을 지낸 프랑스 귀족으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딸 마리 드 부르타뉴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와 사생아를 두었으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 발루아알랑송가 - 마르그리트 당굴렘
마르그리트 당굴렘은 프랑스 왕족이자 작가, 예술 후원가로서, 나바라 왕비가 되어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발루아알랑송가 - 샤를 4세 달랑송 공작
샤를 4세 달랑송 공작은 프랑스의 귀족으로 알랑송 공작 등의 지위를 상속받고 프랑수아 1세의 누이와 결혼했으나 파비아 전투 후 사망하여 알랑송 가문의 단절을 초래, 프랑스 왕위 계승에 영향을 주었다. - 알랑송 공작 -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은 프랑스 왕족으로, 형 루이 13세 치세에 반란과 음모를 일으키며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고, 루이 13세 사후에는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으며, 두 번의 결혼으로 자녀를 두었고 조카 루이 14세 치세에는 '르 그랑 몽시외'로 불렸다. - 알랑송 공작 - 루이 18세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망명 생활 후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는 부르봉 왕조의 국왕으로, 입헌 군주제를 표방했으나 반동적인 정책으로 비판받았다.
장 2세 달랑송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아랑송 공작 |
본명 | 장 2세 (Jean II) |
다른 이름 | 장 달랑송 (Jean d'Alençon) |
가문 | |
왕가 | 발루아-아랑송 가문 |
아버지 | 장 1세 달랑송 |
어머니 | 마리 드 브르타뉴 |
결혼 정보 | |
배우자 | 잔 드 발루아 (1424년 결혼, 1432년 5월 19일 사망) 마리 다르마냐크 (1437년 4월 30일 결혼, 1473년 7월 25일 사망) |
자녀 | 카트린 르네 달랑송 |
생애 | |
출생 | 1409년 3월 2일 |
출생지 | 아르장탕 성 |
사망 | 1476년 9월 8일 |
사망지 | 파리 |
2. 생애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장 2세는 어린 나이에 알랑송 공작과 페르슈 백작을 계승했다. 1421년 왕세자 샤를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사이의 동맹 강화를 위해 장 5세의 조카인 장 2세와 오를레앙 공작 샤를 드 발루아의 딸 잔이 결혼했다.
1437년 4월 30일, 리스르주르댕 성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의 딸인 아르마냐크의 마리와 결혼했다.[1]
장 2세는 아라스 조약에 불만을 품고 부르고뉴인들을 약탈하여 가난을 벗어나려 했다. 샤를 7세와 갈등을 겪었고 1439~40년 프라그리 반란에 참여했지만, 평생 왕의 친구였기에 용서받았다. 1449년 노르망디 침공에 참여했지만, 1455년에는 어리석게도 영국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베르뇌유 전투
알랑송의 장 1세와 브르타뉴의 마리의 아들로 아르장탕 성에서 태어났다.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서 15세의 나이로 처음 참전했으나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1] 1429년까지 르 크루투아에서 포로 생활을 했으며, 몸값으로 20만 살뤼 도르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소유한 모든 것을 영국군에게 팔았고, 자신의 봉토인 푸제르를 브르타뉴 공작에게 팔았다. 알랑송이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포드 공작은 알랑송 공작령을 장악했다. 1449년까지 알랑송을 되찾지 못했지만, 프랑스 왕실에서는 명목상 공작으로 남아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장 2세 달랑송은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불렸다.베르뇌유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기 전인 1424년 블루아 성에서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딸인 잔과 결혼했지만, 1432년 앙제에서 아이 없이 사망했다.
1429년 4월, 풀려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농에서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영국군으로부터 프랑스 왕국을 해방하겠다고 약속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포위전을 풀도록 요청한 잔 다르크에 대해 들었다. 알랑송은 열렬히 시농으로 왔고, 곧 잔 다르크의 좋은 친구이자 왕자들 중 가장 두드러진 지지자가 되었다. 잔 다르크가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등과 함께 오를레앙 포위전을 풀고 난 후, 프랑스군의 공식 사령관으로 도착하여 루아르 계곡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29년 9월,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영토 주변의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해 떠났다.
2. 2. 잔 다르크와의 만남과 루아르 계곡 전투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429년에 석방된 직후, 장 2세는 시농에서 잔 다르크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잔 다르크에 대한 궁정 심문에도 참여했다.[1] 장 2세는 잔 다르크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함께 루아르 강 부근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오를레앙 포위전 직후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된 장 2세는 잔 다르크, 질 드 레, 라 이르, 장 포톤 드 상트라이유, 앙드레 드 라발, 장 드 뒤누아와 함께 1429년 6월 루아르 계곡의 자르조 전투, 몽 쉬르 루아르 전투, 보장시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외삼촌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와 합류하여 파테 전투에서 활약했다.[2]
1429년 9월, 장 2세는 잔 다르크 등과 파리 포위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군사 행동이 끝나자, 샤를 7세에게 노르망디 원정을 명령받았으나 잔 다르크와 함께 가기를 원했던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홀로 원정을 떠나야 했다.[2]
2. 3. 샤를 7세와의 갈등과 반란
샤를 7세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1440년에는 뒤누아나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등과 함께 프라그리 반란에 가담하기도 하고, 잉글랜드 군과 내통하기도 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1450년에는 리슈몽, 뒤누아와 함께 캉 포위전에 참여했다.[3]1454년 왕세자 루이 (훗날 루이 11세)의 음모에 가담하여 샤를 7세에 반대하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3] 1456년 5월 3일 잔 다르크 복권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지만,[3] 잉글랜드 군에 무기를 제공하고 상륙을 돕는 계획이 발각되어 31일 왕명을 받은 뒤누아에게 반역자로 체포되었다.[3]
1458년 대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리슈몽의 중재로 감형되어 다시 수감되었다.[3]
2. 4. 루이 11세와의 갈등과 죽음
1458년, 대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슈몽의 중재로 형이 감형되어 다시 수용되었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루이 11세가 즉위하자 석방되었으나, 루이 11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세 번이나 다시 수용되었다.[3] 1474년 7월 18일 파리 의회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공작령이 몰수되었으나,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1476년 루브르 궁 감옥에서 사망했다.[4]3. 결혼과 자녀
장 2세는 잔 드 발루아와 사별 후 마리 다르마냐크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그 외에도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3. 1. 정실 부인
1421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 드 발루아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이자벨 드 발루아의 딸인 잔 드 발루아(1409년 - 1432년)와 결혼했으나, 잔과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 사별했다.1437년에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두 번째 아내 본의 오빠)의 딸인 마리 다르마냐크(1420년경 - 1473년)와 재혼했다. 마리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었다.
- 카트린(1452년 - 1505년)
- 르네(1454년 - 1492년)
3. 2. 자녀
장 2세 달랑송 공작은 마리 다르마냐크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고, 그 외 사생아를 여러 명 두었다.구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적자 | 카트린 | 1452년 - 1505년 | 기 15세 드 라발과 결혼 |
르네 | 1454년 - 1492년 | 아버지로부터 몰수된 알랑송 공작 및 페르슈 백작 지위 회복 | |
사생아 | 장 | 1483년 생존 | |
로베르 | 1489년 생존 | ||
잔 | ? - 1481년 이후 | 보몽-르-로제 백작, 기 드 몰몽과 결혼 | |
마들렌 | ? - ? | 앙리 드 브뢰유와 결혼 |
4. 가계도
Ahnentafel|계보de 표를 통해 장 2세 달랑송 공작의 가계도를 확인할 수 있다.
1. 장 2세 달랑송 공작 | |||
---|---|---|---|
2. 장 1세 달랑송 공작 | ! 3. 마리 드 브르타뉴 | ||
4. 피에르 2세 달랑송 백작 | 5. 마리 샤미야르, 보몽 자작 부인 | 6. 장 4세 브르타뉴 공작 | 7. 나바라의 조안 |
8. 샤를 2세 달랑송 백작 | 9. 마리아 데 라 세르다 | 10. 기욤 2세 샤미야르, 아테네즈 영주 | 11. 마리 드 브리엔, 보몽오멘 자작 부인 |
12. 몽포르의 장 | 13. 플랑드르의 조안 | 14. 나바라의 샤를 2세 | 15. 발루아의 조안 |
참조
[1]
서적
エチュヴェリー、P121、P135、ペルヌー、P317 - P318、清水、P115 - P116、P119
[2]
서적
ペルヌー、P63 - P66、P114、P117 - P121、P148 - P153、P318 - P320、清水、P142 - P143、P194、P197 - P203、P228 - P233、P235
[3]
서적
エチュヴェリー、P242 - P244、P285 - P286、P294 - P296、清水、P352 - P353、P360、P370 - P371、P388、P396 - P397
[4]
서적
エチュヴェリー、P302、ペルヌー、P320 - P321
[5]
서적
The Counts of Laval
Ashgate Publishing Compan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