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교대협)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결성된 전대협의 교육대학 부문으로 시작하여, 전국 교육대학교 학생들의 대표 기구로 활동해왔다. 교대협은 교대협 건설, 조직 체계 강화, 교육 관련 투쟁, 교총련 전환 시도, 교대협 재건 등의 과정을 거치며, 교원 단체와의 연대, 동맹휴업, 시위 등을 통해 교육 정책에 대한 학생들의 목소리를 내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간부대회, 교대협 출범식, 교대인 한마당 등이 있으며, 교대협 의장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한다. 하지만 교대협은 활동이 교대협과 총학생회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다른 학생 운동 단체와의 연대 활동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교대협은 6월 항쟁과 함께 건설된 전대협의 교육대학 부문으로 출발했다.
개별 총학생회는 다른 상위단체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으나, 90년대 후반 토론 끝에 교대협은 협의체의 성격이므로 상위 단체에 소속되지 않음을 확실히 했다. 2008년경 실천적으로 해소된 전국국립사범대학학생연합(약칭 전사련, 전국사범대학생연합(건)과는 다른 조직)은 전대협의 한총련 전환기에 학생회연합으로 전환한 한총련의 사범대학 부문이었다.
2. 역사와 활동
1987년 9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대구교대가 의장교를 맡아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교대협) 건설을 위한 1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인 시각을 확보하였으나, 자연 발생적 조직 운동의 한계가 드러났다. 주요 사업으로는 문교 5원칙 철폐, 회칙 및 학칙의 민주적 개정 등이 있었다.
1988년 3월부터 6월까지는 서울교대가 의장교를 맡아 2기 활동을 이어갔다. 이양의 문제점이 나타났고, 전국적 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사무국 전망이 이루어졌다. 규약 개정, 각 대학 사무국 준비 등의 사업이 진행되었다.
3기는 1988년 6월부터 1989년 2월까지 활동하였으며, 소비조합 백서, 기성회비 공개 문제 등 대중적 사업을 모색하였다. 사무국의 지위 보장과 함께 교육국 건설을 통한 부분 연대 활성화 전망이 나타났다.
1989년부터 1990년 2월까지는 공주교대 총학생회장 구자환이 의장을 맡아 4기 활동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전교조와의 연대 등 공동 투쟁을 모색하고, 교종 대안 분쇄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의 전국 교대에 대한 학원 탄압이 극심해졌으며, 등록금 동결 투쟁, 학자 투쟁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그러나 교대협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으며, 전사련 및 전교조와의 교육 연대 틀을 마련하고 부분 계열 연대 강화와 지구별 연대를 모색하였다.
2시기(1990년 ~ 1993년)에는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교대협)의 조직 체계 강화와 교육 관련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5기(1990년 3월~1991년 2월, 의장: 대구교대 박대권 총학생회장)에는 교대협 건설 이후 최대 인원이 출범식에 참가하여 교원단체 전교조 결성과 교종대안에 대한 투쟁 의식을 고양하였다. 교종대안 철폐 투쟁, 임시 국회 교육법 개악 저지 투쟁, 교대협 첫 상경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0․8조치(임용고사 실시 법제화)에 반대하여 40~50일간 수업거부 투쟁을 진행하였고, 전교조․전사련과 연대를 강화하였다.
6기(1991년 3월~1992년 2월, 의장: 부산교대)에는 교대협 중앙집행체계를 강화하여 중앙집행국을 건설하였다. 각 대학 교육조직 정비와 체계 강화 사업을 통해 전일적인 교육사업 지도체계를 마련하고자 모색하였다. 지구별 사업으로 전주․광주 남북 대동제를 실시하였고, 안동대 초등교육과 신설 반대 투쟁, 교과전담제 실시 촉구 투쟁, 조기 영어교육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각 교육 주체와의 연대도 강화하였으며, 전경의 원천봉쇄로 출범식을 서울교대에서 치르지 못하고 서울대학교로 이동해 성사시켰다. 그러나 일상사업의 부재, 중앙집행국의 논의력/정책력 부재, 기층을 무시한 상층 중심의 사업, 각 대학별 인식 정도와 역량 차이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7기(1992년 3월~1993년 2월)에는 과학생회 강화를 모색하고, 지구간 연대사업을 강화하였으며, 교대협의 중앙조직체계를 완수하고 부서별 전국 교대 연석회의(갈래모임)를 신설하였다.
8기(1993년 3월~1994년 2월, 의장: 인천교대 장지철 총학생회장)에는 강의평가제 실시 투쟁을 제안하고, 각 교대 모범사업(신입생 예비대학, 교육활동, 조국통일 투쟁)의 전국화를 추진하였다. 임용고사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경동․한상용 열사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수업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수업에 복귀하면서 교육재정 마련, 올바른 임용제도 마련, 교과전담제 실시 등을 중심 내용으로 요구하였다.
1994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전환에 발맞추어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교대협)의 전국교육대학생총학생회연합(이하 교총련)으로의 전환이 논의되었다. 임용고사 철폐를 위한 무기한 동맹휴업 총투표가 부결[1]되면서 조직이 약화되었는데, 총학생회 연합으로의 전환이 단결과 실천력을 담보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외부의 변화를 따라가는 식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1997년 12기 교총련 건준위로서의 위상 정립에 실패하고, 다시 교대협으로 전환하였다. 1998년 13기에는 서울교대 장서문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협 강화를 위한 중앙위 회의를 안정적으로 개최하고, 단절되었던 교대인한마당을 다시 개최하여 교대협을 재건하였다. 하반기에는 노동관리정책으로 추진되던 수습교사제 철회를 위한 투쟁을 전국 교대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1999년 14기에는 부산교대 김보영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사대 통폐합 저지 투쟁, 초등교육 정상화 투쟁을 전개하고, 4주간의 교대협 동맹휴업을 성사시켜 서울집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3개 지구 체계를 재도입하고 전사련․서사협과 예비교사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였으며, 상반기 교대협 출범식, 하반기 교대인 한마당, 연2회 간부대회 개최 등 대중운동의 틀을 마련하였다.
2000년 15기에는 춘천교대 장준걸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직발전종합방안 철회를 위한 공청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주도에서 개최된 교종안 6차 공청회에서는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공청회 사상 최초로 학생인 교대협 의장이 예비교사 대표로 발제하였다. 교육대책위에 참가하여 학생진영 공동으로 여름학교를 개최하고, 교대협 의장이 교육대책위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2001년 16기에는 광주교대 김구현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학점제 철폐를 위한 10주간의 동맹휴업과 7차례의 상경투쟁 등 강력한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중연대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2차례에 걸친 전국 예비교사 한마당을 개최하였으며, 교육학생연대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2002년 17기에는 청주교대 이민경 총학생회장이 교육학생연대 공동상임 대표를 역임하였다. 2003년 18기에는 전주교대 오준영 총학생회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19기에는 인천교대 박기현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미발령자특별법 저지와 하반기 교원양성체제 개편안을 준비하기 위한 경고동맹휴업으로 430예비교사총궐기를 진행하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10567 10.29교대협총궐기 및 10.30범국민대회]에도 참여하는 등 한 해 두 번의 동맹휴업으로 위력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5년 20기에는 경인교대 박희진, 춘천교대 박정윤, 부산교대 윤건 총학생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아 양성임용의 문제를 벗어나 대학구조조정 저지와 WTO교육개방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430전국교육주체공동행동을 전개하였다. 2006년 21기에는 부산교대 전승혁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학급총량제’를 막아내기 위한 하반기, [http://www.ytn.co.kr/_ln/0103_200611031204209977 전국적인 동맹휴업]을 전개하였다.
2007년 22기에는 대구교대 이호철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육부의 중장기 교원수급계획과 교원양성임용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을 하였다. 2008년 23기에는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김용준, 공주교대 오수민, 부산교대 류승현 총학생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아 [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0803/e2008032818311193820.htm 3.28 전국대학생공동행동]을 시작으로 이명박 정권의 ‘교육시장화’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을 진행하였다. 다만, 3.28 투쟁은 일반대 등록금 문제가 대부분의 투쟁 내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교육 관련 투쟁이 아니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2009년 24기에는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황선명 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통폐합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5.8 이명박 교육정책 반대 - 전국초등예비교사 총궐기를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개최하여 '교대 통폐합 저지, 교대생 실업해소, 교육재정 확보, 일제고사 반대'를 주장하였다. 전국 교대에서 약 7천명의 교대생이 참여하였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1457512&code=11131300 OECD 수준의 교육여건 개선과 교육예산 삭감 중단을 요구하며 전국 교대 동맹휴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2010년 25기에는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신웅식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301811325&code=910110 6.2 지방선거 투표 참여 독려를 위한 유권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러 논쟁점들에 대해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11년 26기에는 경인교육대학교 김영환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2011년 4월 30일 서울교대에서 출범식을 열기로 하였으나, 내부적 문제로 취소되었다. 5.27 교대협-전사련 공동으로 전국 교•사대 예비교사 한마당을 개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4108916 9.30 교과부의 총장직선제 폐지와 대학 구조조정 정책을 규탄]하기 위한 전국 교육대학생 동맹휴업을 진행하였다.
2. 1. 1시기 - 교대협 건설기 (1987년 ~ 1990년)
1987년 9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대구교대가 의장교를 맡아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교대협) 건설을 위한 1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인 시각을 확보하였으나, 자연 발생적 조직 운동의 한계가 드러났다. 주요 사업으로는 문교 5원칙 철폐, 회칙 및 학칙의 민주적 개정 등이 있었다.
1988년 3월부터 6월까지는 서울교대가 의장교를 맡아 2기 활동을 이어갔다. 이양의 문제점이 나타났고, 전국적 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사무국 전망이 이루어졌다. 규약 개정, 각 대학 사무국 준비 등의 사업이 진행되었다.
3기는 1988년 6월부터 1989년 2월까지 활동하였으며, 소비조합 백서, 기성회비 공개 문제 등 대중적 사업을 모색하였다. 사무국의 지위 보장과 함께 교육국 건설을 통한 부분 연대 활성화 전망이 나타났다.
1989년부터 1990년 2월까지는 공주교대 총학생회장 구자환이 의장을 맡아 4기 활동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전교조와의 연대 등 공동 투쟁을 모색하고, 교종 대안 분쇄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의 전국 교대에 대한 학원 탄압이 극심해졌으며, 등록금 동결 투쟁, 학자 투쟁 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그러나 교대협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으며, 전사련 및 전교조와의 교육 연대 틀을 마련하고 부분 계열 연대 강화와 지구별 연대를 모색하였다.
2. 2. 2시기 (1990년 ~ 1993년)
2시기(1990년 ~ 1993년)에는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교대협)의 조직 체계 강화와 교육 관련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5기(1990년 3월~1991년 2월, 의장: 대구교대 박대권 총학생회장)에는 교대협 건설 이후 최대 인원이 출범식에 참가하여 교원단체 전교조 결성과 교종대안에 대한 투쟁 의식을 고양하였다. 교종대안 철폐 투쟁, 임시 국회 교육법 개악 저지 투쟁, 교대협 첫 상경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0․8조치(임용고사 실시 법제화)에 반대하여 40~50일간 수업거부 투쟁을 진행하였고, 전교조․전사련과 연대를 강화하였다.
6기(1991년 3월~1992년 2월, 의장: 부산교대)에는 교대협 중앙집행체계를 강화하여 중앙집행국을 건설하였다. 각 대학 교육조직 정비와 체계 강화 사업을 통해 전일적인 교육사업 지도체계를 마련하고자 모색하였다. 지구별 사업으로 전주․광주 남북 대동제를 실시하였고, 안동대 초등교육과 신설 반대 투쟁, 교과전담제 실시 촉구 투쟁, 조기 영어교육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각 교육 주체와의 연대도 강화하였으며, 전경의 원천봉쇄로 출범식을 서울교대에서 치르지 못하고 서울대학교로 이동해 성사시켰다. 그러나 일상사업의 부재, 중앙집행국의 논의력/정책력 부재, 기층을 무시한 상층 중심의 사업, 각 대학별 인식 정도와 역량 차이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7기(1992년 3월~1993년 2월)에는 과학생회 강화를 모색하고, 지구간 연대사업을 강화하였으며, 교대협의 중앙조직체계를 완수하고 부서별 전국 교대 연석회의(갈래모임)를 신설하였다.
8기(1993년 3월~1994년 2월, 의장: 인천교대 장지철 총학생회장)에는 강의평가제 실시 투쟁을 제안하고, 각 교대 모범사업(신입생 예비대학, 교육활동, 조국통일 투쟁)의 전국화를 추진하였다. 임용고사 반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경동․한상용 열사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수업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수업에 복귀하면서 교육재정 마련, 올바른 임용제도 마련, 교과전담제 실시 등을 중심 내용으로 요구하였다.
2. 3. 3시기 - 교총련 전환기 (1994년 ~ 1996년)
1994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전환에 발맞추어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교대협)의 전국교육대학생총학생회연합(이하 교총련)으로의 전환이 논의되었다. 임용고사 철폐를 위한 무기한 동맹휴업 총투표가 부결[1]되면서 조직이 약화되었는데, 총학생회 연합으로의 전환이 단결과 실천력을 담보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외부의 변화를 따라가는 식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받는다.2. 4. 4시기 - 교대협 환원기 (1997년 ~ 현재)
1997년 12기 교총련 건준위로서의 위상 정립에 실패하고, 다시 교대협으로 전환하였다. 1998년 13기에는 서울교대 장서문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협 강화를 위한 중앙위 회의를 안정적으로 개최하고, 단절되었던 교대인한마당을 다시 개최하여 교대협을 재건하였다. 하반기에는 노동관리정책으로 추진되던 수습교사제 철회를 위한 투쟁을 전국 교대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1999년 14기에는 부산교대 김보영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사대 통폐합 저지 투쟁, 초등교육 정상화 투쟁을 전개하고, 4주간의 교대협 동맹휴업을 성사시켜 서울집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3개 지구 체계를 재도입하고 전사련․서사협과 예비교사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였으며, 상반기 교대협 출범식, 하반기 교대인 한마당, 연2회 간부대회 개최 등 대중운동의 틀을 마련하였다.
2000년 15기에는 춘천교대 장준걸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직발전종합방안 철회를 위한 공청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주도에서 개최된 교종안 6차 공청회에서는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공청회 사상 최초로 학생인 교대협 의장이 예비교사 대표로 발제하였다. 교육대책위에 참가하여 학생진영 공동으로 여름학교를 개최하고, 교대협 의장이 교육대책위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2001년 16기에는 광주교대 김구현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학점제 철폐를 위한 10주간의 동맹휴업과 7차례의 상경투쟁 등 강력한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중연대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2차례에 걸친 전국 예비교사 한마당을 개최하였으며, 교육학생연대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2002년 17기에는 청주교대 이민경 총학생회장이 교육학생연대 공동상임 대표를 역임하였다. 2003년 18기에는 전주교대 오준영 총학생회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19기에는 인천교대 박기현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미발령자특별법 저지와 하반기 교원양성체제 개편안을 준비하기 위한 경고동맹휴업으로 430예비교사총궐기를 진행하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10567 10.29교대협총궐기 및 10.30범국민대회]에도 참여하는 등 한 해 두 번의 동맹휴업으로 위력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5년 20기에는 경인교대 박희진, 춘천교대 박정윤, 부산교대 윤건 총학생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아 양성임용의 문제를 벗어나 대학구조조정 저지와 WTO교육개방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430전국교육주체공동행동을 전개하였다. 2006년 21기에는 부산교대 전승혁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학급총량제’를 막아내기 위한 하반기, [http://www.ytn.co.kr/_ln/0103_200611031204209977 전국적인 동맹휴업]을 전개하였다.
2007년 22기에는 대구교대 이호철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육부의 중장기 교원수급계획과 교원양성임용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을 하였다. 2008년 23기에는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김용준, 공주교대 오수민, 부산교대 류승현 총학생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아 [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0803/e2008032818311193820.htm 3.28 전국대학생공동행동]을 시작으로 이명박 정권의 ‘교육시장화’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을 진행하였다. 다만, 3.28 투쟁은 일반대 등록금 문제가 대부분의 투쟁 내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교육 관련 투쟁이 아니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2009년 24기에는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황선명 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교대통폐합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5.8 이명박 교육정책 반대 - 전국초등예비교사 총궐기를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개최하여 '교대 통폐합 저지, 교대생 실업해소, 교육재정 확보, 일제고사 반대'를 주장하였다. 전국 교대에서 약 7천명의 교대생이 참여하였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1457512&code=11131300 OECD 수준의 교육여건 개선과 교육예산 삭감 중단을 요구하며 전국 교대 동맹휴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2010년 25기에는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신웅식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301811325&code=910110 6.2 지방선거 투표 참여 독려를 위한 유권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여러 논쟁점들에 대해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11년 26기에는 경인교육대학교 김영환 총학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2011년 4월 30일 서울교육대학교에서 출범식을 열기로 하였으나, 내부적 문제로 취소되었다. 5.27 교대협-전사련 공동으로 전국 교•사대 예비교사 한마당을 개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4108916 9.30 교과부의 총장직선제 폐지와 대학 구조조정 정책을 규탄]하기 위한 전국 교육대학생 동맹휴업을 진행하였다.
3. 조직 구성
각 교대 총학생회장들이 중앙위원의 지위를 가지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는 과학생회장이 중앙위가 된다. 경인교육대학교는 인천캠퍼스와 경기캠퍼스 각각의 총학생회장들이 동일한 권한을 가지고 중앙위가 된다.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의 총학생회장도 중앙위의 권한을 가진다. 만약 각 교대에서 전년도의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어 총학생회를 중앙운영위원회, 총운영위원회의 연석회의가 운영하게 되거나 중운위, 총운위를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운영하게 되더라도 총학생회장 권한대행인 연석회의 의장이나 비대위원장은 중앙위의 자격을 가진다. 단, 이 경우 교대협 의장선거의 피선거권은 가질 수 없다.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와 함께 집행기구인 집행위원회가 있다. 연대사업국, 사무국, 정책국등을 두나 집행국의 구성은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유동적이다.
3. 1. 교육대학교 총학생회
3. 1. 1. 서울교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 동안 민중민주계열의 후보가 서울교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2007년에는 후보자 등록이 없어 선거가 무산되었다가, 재보궐 선거에서 민족해방계열의 후보가 당선되어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2009년에도 후보자 등록이 없어 선거가 무산되었으나, 2009년 4월 선거를 통해 총학생회가 다시 건설되었다. 박선영 남태현 열사 추모사업회가 자치기구로 있다. 2010년 선거는 후보자 등록이 없어 무산되어, 과학생회장단과 동아리연합회장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 총학생회를 운영하였다. 서울교대와 총학생회 명칭 앞에는 '민족사향'이라는 기치를 붙인다. (예: 민족사향 서울교대 XX대 총학생회)3. 1. 2. 경인교대
'''♦ 인천캠퍼스 (~2010)'''
전통적으로 민족해방계열의 당선이 많았으나, 2007-08년 연속으로 전국학생행진의 민중민주계열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2009년 등록 후보가 없어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어, 과학생회장으로 구성된 총운영위원회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 총학생회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캠퍼스 기능별 특화를 거치면서 양캠퍼스 통합 초대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 경기캠퍼스 (2007~2010)'''
경인교대 경기캠퍼스는 2005년부터 신입생을 받았는데, 2005-06년은 캠퍼스 자치위원회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때 인천캠퍼스에서 파견된 집행국이 자치위의 집행국 역할을 했다. 2006년 말부터 자치위원장이 교대협 중앙위 회의에 의결권 없이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경우가 있었다. 첫 신입생이 3학년이 되던 2007년에 초대 총학생회를 건설하였는데, 인천캠퍼스와는 통합 총학생회장을 뽑는 등의 형태가 아닌 별개의 총학생회를 건설하였다. 학보사 등은 학생자치기구가 아니므로 양 캠퍼스에 걸쳐 하나만 있다.3. 1. 3. 춘천교대
춘천교육대학교 총학생회는 90년대 중반 교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들의 총학생회가 총대의원회 체제에서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체제로 전환할 때 전환하지 않아 현재도 총대의원회가 유지되고 있고 총학생회 선거시 선거관리위원회도 전학대회나 중운위가 아닌 총대의원회가 전환하여 구성된다. 하지만 총대의원회는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전학대회 수준의 의결, 승인 기구가 없고 최근 총대의원회는 비교적 간단히 총학생회의 예산, 사업계획을 승인해 주므로 이를 악용해 대내외적으로 총학생회의 사업을 알리고 학우들에게 승인 받아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치언론인 교지의 편집장과 독립자치기구들의 대표자도 중운위의 구성원이다. 예산자치제는 실시되고 있다. 학교와 총학생회 명칭앞에 붙이는 기치가 민중이나, 최근 민족해방성향의 총학생회가 많이 당선이 되면서 민족사도를 기치로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사도 춘천교대 XX대 총학생회)3. 1. 4. 청주교대
2009년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교대협과의 연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맨투맨 선거운동본부(총학생회장 : 서승우, 부학생회장 : 이광호)가 단독 출마하였으며 연장투표 끝에 당선되었다. 학교와 총학생회 명칭 앞에 붙이는 기치가 애국이다. (애국 청주교대 XX대 총학생회)
2010년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청주교대 통폐합 반대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건 함께뛰는 선거운동본부(총학생회장 : 이광호, 부학생회장 : 송도)가 당선되었다.
2011년도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전년도의 공약을 이어받아 실현하고 사회의 기타 교육여건 개선에 헌신하고자 선거운동본부(총학생회장 : 송도, 부총학생회장 : 박정훈)가 출범하였다.
3. 1. 5. 공주교대
2010년도 총학선거에는 단 한 명의 후보도 입후보하지 않아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은 각 학과의 회장과 부회장이 맡았으며, 위원장은 초등미술교육과 김민선이 담당했다. 공주교대 비대위는 2011년 4월 3일 전체학생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인준되었다. 4월 4일 비대위 전체회의에서 충남대학교와 공주대학교와의 통폐합이 사실상 결정된 것에 대해, 그리고 날치기로 진행된 통폐합 과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전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중으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통폐합 반대 설명회를 청목관 정화홀에서 열기로 결의하였다. 학교와 총학생회 명칭 앞에 붙이는 기치는 '애국'이다. (애국 공주교대 XX대 총학생회)3. 1. 6. 대구교대
민족 대구교대 XX대 총학생회 형태로 학교와 총학생회 명칭 앞에 '민족'이라는 기치를 붙인다.
3. 1. 7. 전주교대
2007년 전교대협 전주교대에서는 NL계열의 두 선거 운동 본부(선본)가 경선을 치렀는데, PD계열 활동가의 도움을 받은 선본이 당선되었다.
3. 1. 8. 광주교대
'광주 전대'에서 임용고사 철폐를 위해 분신한 한상용, 이경동 열사를 추모하는 사업회가 교대협 자치기구로 있다.
3. 1. 9. 부산교대
민족사도를 학교와 총학생회 명칭 앞에 붙이는 기치로 사용한다. (예: 민족사도 부산교대 XX대 총학생회)
3. 1. 10. 진주교대
진주교대는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에 위치한 교대이다. 1963년 1월 1일 설치인가를 받고 3월 1일 개교하였다. 따라서 진주교대 학사 일정 중 개교일로 쉬는 날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매년 3월 8일이 개교기념일로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진주교대 총학생회장단은 특정 정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다만 진주교대와 총학생회 앞에 붙는 기치가 애국이다.
또한 대부분 경선이 아닌 단선으로 찬반투표로 총학생회가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2006년도와 2007년도에는 총학생회기구가 세워졌으나, 2008년도부터 총학생회기구가 세워지지 않고 비대위 체제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도부터 총학생회기구가 부활하였다.
총학생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총회, 중앙운영위원회, 총집행위원회, 감사위원회, 동아리연합회, 각과학생회, 교지편집국을 두고 있다. 또한 중앙운영위원회는 총학생회장, 총학생회부회장, 감사위원장, 동아리연합회장, 각과 학생회장으로 구성되어있어 감사위원장의 역할이 독특하다. 이 구조는 대의원체제를 감사위원회체제로 바꿈으로써 생긴 체제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언론사 기구인 JBS(진주교육대학교 방송국)와 신문사는 총장산하기구로 설립되어 있다. 하지만 교지편집국은 총학생회 산하기구로써 운영되고 있으며 다만 기구 상의 위치로써 존재할 뿐 업무 상으로는 독립적인 존재가 더 크다.
매년 총학생회의 임기는 12월 1일부터 다음해 11월 30일까지이다.3. 1. 11.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사라캠퍼스)
제주교육대학교는 동아리 연합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고, 동아리 협의회가 동아리들의 대표 기구이다. 학생 수가 적어 총학생회장 선거가 무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회칙상 이 경우 중앙운영위원회가 과 학생회장 중에서 호선으로 정·부총학생회장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정·부총학생회장이 나온 과는 별도로 과 학생회장을 선출한다. 다른 교육대학의 경우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될 경우 중앙운영위원회를 연석회의나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해 중앙운영위원 중에서 의장 또는 위원장을 호선으로 뽑고 총학생회장의 권한을 위임받아 권한대행이 되지만, 제주교육대학교의 경우처럼 총·부총학생회장을 선출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교육대학 총학생회는 총학생회장단이 중앙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 과 학생회장이나 자치기구장을 겸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2006~2007년 민중민주계열의 총학생회장단이 선출되었다.
3. 1. 12.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학생회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학생회는 한국교원대 내의 다른 과 학생회가 학교 내부 문제에 치중하는 반면, 교대협 활동도 병행하기 때문에 대내, 대외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다. 한국교원대를 구성하는 24개 과 중 하나이지만, 초등교육과 학생회가 추진하는 사업과 영향력은 한국교원대 내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규모도 가장 크다. 초등교육과 3학년 11개 심화(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실과, 교육학)의 대표가 모여 초등교육과 중앙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 운영위원 정원은 13명이다. 중앙운영위원장과 부위원장은 과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이 당연직으로 맡는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발언권만 있을 뿐 투표권이 없다. 학생회 임원과 중앙운영위원은 겸직이 가능하다.
2011학년도에 당선된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학생회장단은 특별한 정치적 성향을 띠지 않고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없이 대내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3. 1. 13. 이화여대 사범대학 초등교육과 학생회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초등교육과 학생회는 2001년 교대협과의 갈등으로 인해 교대협에서 탈퇴하였다. 2006년 하반기 전국 교대 동맹휴업 당시 일시적으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며 교대협에 복귀하였으나, 이후 교대협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없는 상태이다.
3. 2. 총학생회의 특수성
87년 형식적 민주화 과정에서 교대 총학생회가 크게 기여한 부분이 없었기에 초기 학생회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부채감이 있었다. 박선영 열사의 경우도 서울교대 출신(수학교육과 85학번)이긴 하지만 외부 조직에서 활동했고, 당시 서울교대 내의 조직 활동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도호국단이 총학생회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각 과까지 학군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학생 자주적인 총학생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87년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어용 총학생회가 자리잡고 있는 교대가 많았다. 대부분의 교대에서는 초기에 총학생회 민주화를 위한 싸움부터 시작했다. 과학생회의 경우는 더 오랫동안 스스로 학생자치 기구임을 선언하지 못했는데, 90년대 말까지도 많은 수의 과학생회는 '학회'의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90년대 말 학부제의 실시로 수많은 학생사회가 힘을 잃을 때에도 과학생회 단위가 잘 살아 있었고, 김대중 정권 당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의 "나이 든 교사 하나 쓸 돈이면 젊은 교사 셋을 쓴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실시한 교원 정년단축으로 초등교사 부족사태가 발생하면서 학생들의 취업 문제가 보장되어 2000년대 초중반까지 상대적으로 건전한 학생사회가 유지되었다.
교대는 일반 종합대와는 달리 1개의 단과대학으로만 구성이 되어있어 총학생회가 일반적인 단대 학생회가 하는 수준의 사업까지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다. 단운위가 없고 각 과의 학생회장들이 중운위가 된다.
99%의 과학생회는 3학년이 되는 학번에서 호선으로 정, 부과학생회장을 선출하고 총회에서 인준을 한다. 4학기 이상 등록자는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도록 대부분의 과학생회에서 정하고 있으나 후보자 등록을 하고 선거를 치르는 과학생회는 현재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 주요 활동
방학중에 상하반기 간부대회를 연다. 교대협 출범식과 교대인 한마당을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나, 최근 내부 역량의 한계로 개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교대협의 하반기 대중사업인 교대인 한마당은 1995년 인천교육대학교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초등예비교사들의 삶과 문화,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자리로, 교대협 출범식과 더불어 교대협의 양대 사업으로 꼽힌다.
1995년 인천교육대학교에서 시작된 이후, 1996년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1997년에는 교총련(준) 건설 실패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1998년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재개되었다. 특히 1998년 행사에는 전교조 충북지부 교사들이 다수 참가하여, 단절되었던 전교조와의 연대 운동이 복원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다수의 사복경찰들이 학내에 들어와 행사를 감시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교대인 한마당은 1999년 광주교육대학교, 2000년 인천교육대학교, 2001년 부산교육대학교, 2002년 춘천교육대학교, 2003년 진주교육대학교, 2004년 서울교육대학교, 2005년 공주교육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겨울 방학 중 중앙위원 중 입후보자를 받아 상반기 간부대회에서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선출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모두 중앙위원에게만 있었으나, 2007년 선거부터 피선거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선거권은 각 학교 중운위(과학생회장만 포함, 자치기구장이 단위 학교에서 중운위 구성원이어도 인정하지 않음)로 확대되었다. 선거권 확대를 두고 교총련식의 학생회 연합으로 전환을 논의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선거권 확대를 제안한 그룹은 민주주의 확대의 개념이라는 입장이었다.
4. 1. 교대인 한마당
교대인 한마당은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교대협)의 하반기 대중사업으로 1995년 인천교육대학교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초등예비교사들의 삶과 문화,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자리로, 교대협 출범식과 더불어 교대협의 양대 사업으로 꼽힌다.1995년 인천교육대학교에서 시작된 이후, 1996년에는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1997년에는 교총련(준) 건설 실패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1998년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재개되었다. 특히 1998년 행사에는 전교조 충북지부 교사들이 다수 참가하여, 단절되었던 전교조와의 연대 운동이 복원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다수의 사복경찰들이 학내에 들어와 행사를 감시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교대인 한마당은 1999년 광주교육대학교, 2000년 인천교육대학교, 2001년 부산교육대학교, 2002년 춘천교육대학교, 2003년 진주교육대학교, 2004년 서울교육대학교, 2005년 공주교육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4. 2. 의장 선거
겨울 방학 중 중앙위원 중 입후보자를 받아 상반기 간부대회에서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선출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모두 중앙위원에게만 있었으나, 2007년 선거부터 피선거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선거권은 각 학교 중운위(과학생회장만 포함, 자치기구장이 단위 학교에서 중운위 구성원이어도 인정하지 않음)로 확대되었다. 선거권 확대를 두고 교총련식의 학생회 연합으로 전환을 논의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선거권 확대를 제안한 그룹은 민주주의 확대의 개념이라는 입장이었다.5. 의의와 한계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교대협)는 모든 활동을 교대협과 총학생회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초등교육 혹은 교육 부문에만 활동이 국한되어 다른 학생운동 단체와의 연대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5. 1. 비판
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교대협)는 모든 활동을 교대협과 총학생회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초등교육 혹은 교육 부문에만 활동이 국한되어 다른 학생운동 단체와의 연대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