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국방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절대국방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설정한 방어 구역이다. 1943년 9월, 일본은 치시마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내 남양(중서부) 및 뉴기니, 순다 열도, 버마를 포함하는 권역을 절대 확보해야 할 요역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공격, 방어, 보급, 전략적 문제, 그리고 항공력 부족으로 인해 절대국방권은 실질적인 방어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마리아나 제도의 상실과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대신의 사임으로 절대국방권은 붕괴되었고, 이는 일본의 패배를 가속화했다.
1943년 9월 30일, 일본 각의 및 어전회의에서 "향후 채택할 전쟁 지도 대강"이 결정되었다. 이 대강은 "제국 전쟁 수행상 태평양 및 인도양 방면에 있어서 절대 확보해야 할 요역"으로 치시마, 오가사와라, 내 남양 (중서부), 서부 "뉴기니", "순다", "버마"를 포함하는 권역을 설정했다.[1] 이는 동부 (마셜 제도)를 제외한 내 남양, 즉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게일빙 만[2] (현재의 첸데라와시 만) 서쪽의 뉴기니를 범위로 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태평양을 주전장으로 하는 해군과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육군으로 담당 지역을 나누었다. '절대국방권'은 육군이 설정한 지역에 가까웠으나, 이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격 및 방어 능력, 보급, 전략, 해상 교통로 방위 능력 등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태평양을 주 전장으로 하는 해군과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육군으로 담당 지역을 나누었지만, 절대 국방권은 육군이 설정한 지역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격력, 방어력, 보급선, 전략 사상, 시레인 방위 능력은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삼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절대 국방권 설정 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 해전에서 바깥쪽 지점 확보에 집착하여 국방권 내 방위 체제 구축이 뒷전으로 밀리는 거점이 있었다.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4]이 가능해지는 사이판 섬은 육군이 대륙 타통 작전에 집중하면서 방위력 증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방어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미국군의 침공을 받았다.
일본 수비대는 병력이 2배나 많은 미군에 맞서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에서 격렬히 저항했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하고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포함한 마리아나・파라오 제도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마리아나 제도 상실로 공세 기반은 무의미해졌고, 일본은 방어에만 집중해야 했다. 절대 국방권 붕괴로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고,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과 육군대신에서 사임했다.[5] 이후 테니안 섬을 주된 출격지로 하는 B-29의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2. 1. 설정 과정
1943년 9월 25일 일본 대본영이 제정하고, 9월 30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향후 채용될 전쟁 지도 대강》(今後採ルヘキ戰爭指導ノ大綱)에서 “제국 전쟁 수행을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 이르는 절대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 지역으로 쿠릴, 오가사와라, 내남양(중서부) 및 서부 뉴기니, 순다, 버마를 포함한 권역”[8]으로 정해진 것이 이제 동부(마샬 군도)를 제외한 내남양 즉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겔빈크 만[9](현재 첸데라와시 만) 이서 뉴기니 서쪽을 범위로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서 태평양을 주전장으로 하는 해군과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육군으로 그 담당 지역은 나누어져 있었지만,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한 지역은 육군이 설정한 것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설정은 좋았지만, 그것을 실현하고,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공격 능력도, 방어 능력도, 보급선도, 전략도, 해상교통로 방위 능력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있었다.
게다가 절대국방권 설정 이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의 전투에서 그 바깥쪽에 위치한 지점의 확보에 집착했기 때문에 국방권 내에서 방어 체제 구축이 뒷전이 되는 거점이었다.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가 통상적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가능해지는 중요 거점인 사이판도 방어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된다.
일본군은 두 배가 넘는 병력 차이에도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에게 선전했지만,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게 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비롯한 마리아나 · 팔라우 제도 전역에서 대패를 했고, 마리아나 제도를 잃은 것으로 공세를 위한 포석은 무의미해졌다. 따라서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절대국방권을 파기함으로써 패전은 거의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그 책임을 지고 총리를 사임했다.[11]
이후 사이판에 인접한 티니안을 주요 출격기지로 하는 B-29에 의한 본토 공습이 시작된다. 이 시점에서도 국내 여론은 철저한 항전론이 대두되었으며, 패전이 거의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정전협상을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이 원폭 투하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종종 있다.
2. 2. 설정 범위
1943년 9월 25일 일본 대본영이 제정하고, 9월 30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향후 채용될 전쟁 지도 대강》(今後採ルヘキ戰爭指導ノ大綱)에서 “제국 전쟁 수행을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 이르는 절대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 지역으로 쿠릴, 오가사와라, 내남양(중서부) 및 서부 뉴기니, 순다, 버마를 포함한 권역”[8]으로 정해졌다. 이것은 동부(마샬 군도)를 제외한 내남양, 즉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겔빈크 만[9](현재 첸데라와시 만) 이서 뉴기니 서쪽을 범위로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태평양을 주 전장으로 하는 해군과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육군으로 담당 지역을 나누었지만,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한 지역은 육군이 설정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설정은 좋았지만, 그것을 실현하고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공격 능력, 방어 능력, 보급선, 전략, 해상교통로 방위 능력 등 여러 면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절대국방권 설정 이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 전투에서 그 바깥쪽에 위치한 지점 확보에 집착했기 때문에 국방권 내 방어 체제 구축이 뒷전이 되는 거점도 있었다.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가 통상적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가능해지는 중요 거점인 사이판도 방어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된다.
2. 3. 전략적 문제점
1943년 9월 30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향후 채용될 전쟁 지도 대강》(今後採ルヘキ戰爭指導ノ大綱)에서는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서 절대 확보해야 할 중요 지역을 설정했지만, 이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격, 방어, 보급, 전략, 해상교통로 방위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8]
절대국방권 설정 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 전투에서 그 바깥쪽 지점 확보에 집착하여 국방권 내 방어 체제 구축이 뒷전이 되는 거점이 발생했다. 미국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로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는 중요 거점인 사이판도 방어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미국의 침공을 받았다.
일본군은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비롯한 마리아나 · 팔라우 제도 전역에서 대패하여 마리아나 제도를 잃으면서 공세를 위한 포석은 무의미해졌다.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절대국방권 파기로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책임을 지고 총리를 사임했다.[11]
1943년 발표 당시 제4항공군 사령관 테라모토 쿠마이치는 "쿠릴 열도 - 마리아나 제도 - 뉴기니 서부에 절대 국방권이라는 하나의 선을 긋고 절대로 이것을 지키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것은 선인가 점인가? (중략) 요컨대 제공권이 없으면 모두 점(고립된 섬)이 되어 버리고, 선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6] 당시 군령부 전쟁지도반장이었던 오이 아츠시도 "항공 전력이 부족해서는 거기서도 적을 막아낼 가망이 없다. 이 새로운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이라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여 봤자, 그림의 호랑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상했다.[7]
3. 붕괴
절대국방권 설정 이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 전투에서 바깥쪽 지점 확보에 집착하여 국방권 내 방어 체제 구축이 소홀해지는 거점이 있었다. 사이판은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로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는 중요 거점이었으나, 방어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미군의 침공을 받았다.
일본군은 사이판 전투 등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에 맞서 싸웠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고 마리아나 해전 등에서 대패했다. 마리아나 제도 상실로 공세 기반이 무너졌고,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강요받으며 절대국방권 붕괴와 함께 패전이 임박했다.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그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11]
이 시점에서도 일본 국내 여론은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고, 패전이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정전 협상을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은 원폭 투하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있다.
3. 1. 마리아나 제도 상실
1943년 9월 25일 일본 대본영이 제정하고, 9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향후 채용될 전쟁 지도 대강》(今後採ルヘキ戰爭指導ノ大綱)에서 “제국 전쟁 수행을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 방면에 이르는 절대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 지역"으로 설정된 절대 국방권에서 마리아나 제도는 동부(마샬 군도)를 제외한 내남양, 즉 캐롤라인 제도, 겔빈크 만[9](현재 첸데라와시 만) 이서 뉴기니 서쪽을 범위에 포함되었다.[8]
그러나 절대국방권 설정은 실현과 유지를 위한 공격, 방어 능력, 보급 및 전략, 해상교통로 방위 등 여러 능력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절대국방권 설정 이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의 전투에서 그 바깥쪽에 위치한 지점의 확보에 집착하여 국방권 내에서 방어 체제 구축이 뒷전이 되는 거점이 발생했다.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가 통상적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가능해지는 중요 거점인 사이판도 방위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두 배가 넘는 병력 차이에도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에게 선전했지만,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게 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비롯한 마리아나 · 팔라우 제도 전역에서 대패를 했고, 마리아나 제도를 잃은 것으로 공세를 위한 포석은 무의미해졌다. 따라서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절대국방권이 파기됨으로써 패전은 거의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그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11]
이후 사이판에 인접한 티니안을 주요 출격기지로 하는 B-29에 의한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3. 2. 도조 히데키 총리 사임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 팔라우 제도 전역에서 대패하고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1] 일본군은 마리아나 제도에 침공한 미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었다. 마리아나 제도 상실로 공세를 위한 포석은 무의미해졌고,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되어 절대국방권 파기와 함께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후 사이판 인근 티니안을 주요 출격 기지로 하는 B-29의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3. 3. 결과
1943년 9월 30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향후 채용될 전쟁 지도 대강》에서 "절대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 지역"으로 쿠릴, 오가사와라, 내남양(중서부) 및 서부 뉴기니, 순다, 버마를 포함한 권역[8]으로 정해졌지만, 이는 동부(마샬 군도)를 제외한 내남양 즉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겔빈크 만[9](현재 첸데라와시 만) 이서 뉴기니 서쪽을 범위로 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태평양을 주전장으로 하는 해군과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육군으로 담당 지역이 나뉘어 있었지만,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한 지역은 육군이 설정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설정은 좋았지만, 이를 실현하고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공격 능력, 방어 능력, 보급선, 전략, 해상교통로 방위 능력에서 이미 광범위한 지역을 전장으로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절대국방권 설정 이후에도 해군은 솔로몬 제도의 전투에서 그 바깥쪽에 위치한 지점 확보에 집착하여 국방권 내 방어 체제 구축이 뒷전이 되는 거점도 있었다. 미군이 장악하면 B-29 폭격기[10]가 통상적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가능해지는 중요 거점인 사이판도 방어 체제가 갖추어지기 전에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두 배가 넘는 병력 차이에도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한 미군에게 선전했지만,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게 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사이판 전투를 비롯한 마리아나 · 팔라우 제도 전역에서 대패를 했고, 마리아나 제도를 잃은 것으로 공세를 위한 포석은 무의미해졌다. 따라서 일본은 일방적인 방어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절대국방권을 파기함으로써 패전은 거의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1944년 7월 18일 도조 히데키는 그 책임을 지고 총리를 사임했다.[11]
이후 사이판에 인접한 티니안을 주요 출격기지로 하는 B-29에 의한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다.
4. 평가
이 구상은 1943년 발표 당시 테라모토 쿠마이치 제4항공군 사령관과 오이 아츠시 군령부 전쟁지도반장 등 일본 군부 내부에서조차 제공권과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실질적인 효용성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6][7]
4. 1. 당대 일본 군부의 비판적 시각
테라모토 쿠마이치 제4항공군 사령관은 1943년 "대본영 작전과는 이 9월, 절대 국방권이라는 하나의 선을 쿠릴 열도-마리아나 제도-뉴기니 서부에 긋고 절대로 이것을 지키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것은 선인가 점인가? (중략) 요컨대 제공권이 없으면 모두 점(고립된 섬)이 되어 버리고, 선이 아니다. (중략) 큰 섬이라도 증원과 보급이 끊기면 그 섬에 병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태평양의 넓은 면적으로 볼 때 점으로 취급될 뿐이다."라고 비판했다.[6]오이 아츠시 군령부 전쟁지도반장도 전후에 "누가 봐도 명백하듯이, 작전의 열쇠는 항공 전력이라고 여겨졌다. 지금 라바울, 솔로몬의 전선에서 몹시 적에게 압박을 받아 고전하고 있는 중대한 원인도, 우리 측의 항공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나, 캐롤라인의 선으로 후퇴해 봤자, 항공 전력이 부족해서는 거기서도 적을 막아낼 가망이 없다. 이 새로운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이라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여 봤자, 그림의 호랑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상했다.[7]
4. 2. 전후 평가
이 구상은 1943년 발표 당시 제4항공군 사령관 테라모토 쿠마이치가 다음과 같이 발언하면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대본영 작전과는 이 9월, 절대 국방권이라는 하나의 선을, 쿠릴 열도 - 마리아나 제도 - 뉴기니 서부에 긋고 절대로 이것을 지키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것은 선인가 점인가? (중략) 요컨대 제공권이 없으면 모두 점(고립된 섬)이 되어 버리고, 선이 아니다. (중략) 큰 섬이라도 증원과 보급이 끊기면 그 섬에 병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태평양의 넓은 면적으로 볼 때 점으로 취급될 뿐이다."[6]당시 군령부 전쟁지도반장이었던 오이 아츠시도 전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누가 봐도 명백하듯이, 작전의 열쇠는 항공 전력이라고 여겨졌다. 지금 라바울, 솔로몬의 전선에서 몹시 적에게 압박을 받아 고전하고 있는 중대한 원인도, 우리 측의 항공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나, 캐롤라인의 선으로 후퇴해 봤자, 항공 전력이 부족해서는 거기서도 적을 막아낼 가망이 없다. 이 새로운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이라고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여 봤자, 그림의 호랑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7]
참조
[1]
웹사이트
今後採ルヘキ戦争指導ノ大綱
http://www.ndl.go.jp[...]
1943-09-30
[2]
문서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서적
大本営参謀の情報戦記
[7]
서적
海上護衛戦
[8]
웹인용
今後採ルヘキ戦争指導ノ大綱
http://www.ndl.go.jp[...]
2008-02-25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