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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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효공주묘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훈춘시에 있는 발해 시대의 무덤으로,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이다. 1980년에 발굴되었으며, 벽돌과 석재를 사용하여 당나라와 고구려 양식이 혼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묘실에는 12명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고, 묘비, 도용, 유골 등이 출토되었다. 묘지명은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발해 문화의 독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현재는 방치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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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왕릉 -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는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한 발해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으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돌방봉토무덤이며 묘비명을 통해 정혜공주가 정효공주의 언니임이 밝혀졌으나, 중국 정부의 소홀한 관리로 훼손되어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가 있다. - 허룽시 - 중경 현덕부
중경 현덕부는 발해의 수도 중 하나로 742년부터 757년까지 수도 기능을 수행했으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화룡시 서고성자가 유력한 위치로 추정되고,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성곽 구조를 갖춘 유적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허룽시 -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는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한 발해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으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돌방봉토무덤이며 묘비명을 통해 정혜공주가 정효공주의 언니임이 밝혀졌으나, 중국 정부의 소홀한 관리로 훼손되어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가 있다. - 발해 문왕 - 대흥 (발해)
대흥은 발해 고왕 대조영 이후 713년부터 737년까지 사용된 연호로, 발해의 정치적 안정과 국제적 위상 강화, 당나라로부터의 공식적인 인정 및 그에 따른 간섭, 신라의 견제 속에서 발해의 독자적인 국가임을 천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 발해 문왕 - 정혜공주묘
정혜공주묘는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 고분군에 위치한 발해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으로, 고구려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돌방봉토무덤이며 묘비명을 통해 정혜공주가 정효공주의 언니임이 밝혀졌으나, 중국 정부의 소홀한 관리로 훼손되어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가 있다.
정효공주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유적 이름 | 정효공주묘 |
위치 |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허룽시 |
유적 유형 | 묘 |
문화재 유형 | 알 수 없음 |
문명 | 알 수 없음 |
건립 연대 | 알 수 없음 |
건립자 | 알 수 없음 |
발굴 시기 | 알 수 없음 |
발굴자 | 알 수 없음 |
현 소재지 | 알 수 없음 |
2. 무덤 구조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판돌을 사용하여 남쪽으로 향하게 쌓았으며, 무덤길, 무덤문, 널방, 탑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에서는 정효공주와 남편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유골 조사 결과 정효공주의 키는 156cm, 남편의 키는 161cm이고, 나이는 치아로 보아 25~45세 사이로 추정된다.[6]
2. 1. 무덤길
남쪽에 설치된 무덤길은 수평 거리가 7.1m로, 무덤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나팔 모양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2차례에 걸쳐 수축되었다.[6]2. 2. 무덤문과 널길
벽돌을 쌓아 막아놓은 무덤길을 지나면 길이 1.9m의 널길이 나오는데, 중간에 판돌문과 나무문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문 안쪽에는 정효공주 묘지가 있다.[6]2. 3. 널방 (묘실)
1980년 10월에 발굴된 널방은 푸른 벽돌로 덮여 있다.[1] 묘실 안에는 높이 1.05m, 크기 0.58m x 0.26m의 묘비가 있으며, 728자의 묘지(墓誌)가 18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1]묘실은 벽돌 및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깊이 3.1m, 너비 2.1m, 높이 3.4m의 직사각형이다. 평행 받침식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묘도의 길이는 7.1m이다. 봉토는 너비가 남쪽 5.75m, 북쪽 3.3m인 방형으로 위에 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묘실 및 묘도의 벽면에는 12명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발해 왕실의 내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1] 벽돌로 묘실을 축조했으며, 묘에서는 묘비, 도용 안부의 파편, 금동제 금구·못, 철제 못 등이 출토되었다.
묘비에는 해서체 한자 728자가 새겨져 있다. 묘비의 내용은 발해 제3대 왕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이고, 둘째 딸 정혜공주의 여동생이며, 792년에 사망하여 같은 해 겨울에 매장되었고, 향년 36세였으며,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어린 딸을 키우며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다.[1]
묘는 도굴되었지만, 묘 안에서 남녀 각각 1구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추정 연령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부부의 합장묘로 추정된다.[2] 묘의 구조나 벽면의 상황 등은 당나라의 묘제와 공통점이 많아, 남편은 당나라의 문물·제도에 정통한 인물 또는 발해 왕족으로 당에 숙위한 경험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2]
2. 4. 탑
묘실 위에는 직사각형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기단부만 남아 있다.[6]3. 무덤 양식
정효공주묘는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또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의 독특한 양식으로,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이 불교와 습합되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앞에는 무덤을 관리하던 건물이 서 있었고, 산 아래에는 무덤에 딸린 사원도 있었다.[1]
묘실은 벽돌 및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깊이 3.1m, 너비 2.1m의 직사각형으로 높이는 3.4m이다. 평행 받침식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묘도의 길이는 7.1m이며, 봉토는 너비가 남쪽 5.75m, 북쪽 3.3m의 방형으로 위에 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묘실 및 묘도의 벽면에는 12명의 인물화가 그려져 있으며, 발해 왕실의 내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묘는 도굴되었지만, 묘 안에서 남녀 각각 1구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추정 연령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부부의 합장묘로 추정되었다. 묘의 구조나 벽면의 상황 등은 당나라의 묘제와 공통점이 많다.[2]
4. 벽화
묘실은 4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보라색, 갈색의 옷을 입은 병사, 하인, 악사, 하녀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효공주묘의 벽화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널방(시신을 안치한 방)과 널길(묘실 입구에서 널방까지 이르는 길) 벽에 그려진 벽화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다.[1] 벽화에는 모두 12명의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1]
4. 1. 인물상
널방 벽화 속 인물들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인공은 그려져 있지 않다.[1] 이 인물들은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1] 벽화의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1]5. 묘지명
묘지문은 변려체(騈儷體) 문장으로, 12행의 서문(序文)과 5행의 명문(銘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혜공주의 묘지명과 전체 문장이 거의 같으며, 정혜공주 묘지와 함께 발해인이 남긴 진귀한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文王) 시대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묘비에는 해서체 한자로 728자가 새겨져 있으며[1], 발해 제3대 왕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이고[1], 둘째 딸 정혜공주의 여동생이며[1], 792년에 사망하여 같은 해 겨울에 매장되었고, 향년 36세였으며,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어린 딸을 키우며 정절을 지켰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1][2]
정혜공주묘 및 정효공주묘 묘지명은, 『시경』, 『예기』를 비롯한 고전에 출전을 둔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5]
5. 1. 묘지명의 내용
1980년 10월에 발굴된 정효공주묘 묘실 안에는 높이 1.05미터, 가로 0.58미터, 세로 0.26미터 크기의 묘비가 있고, 728자의 묘지(墓誌)가 18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묘지문은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 문장으로, 12행의 서문(序文)과 5행의 명문(銘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문장이 정혜공주 묘지명과 거의 같다. 정혜공주 묘지와 함께 발해인이 남긴 진귀한 사료로 주목받는데,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文王) 시대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묘지명에는 문왕의 넷째 딸로 정효공주(貞孝公主)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문왕의 존호(尊號)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寶曆)으로 바꾸었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또한 문왕에게 황상(皇上)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가 당시에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 측에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속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6. 정효공주와 가족
묘비명에는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정효공주는 정혜공주의 동생이기도 하다. 792년에 사망하여 이듬해인 793년 겨울에 매장되었다.[1]
묘비에는 해서체 한자로 728자가 새겨져 있는데, 발해 제3대 왕 대흠무(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이며, 둘째 딸 정혜공주의 여동생이고, 36세의 나이로 792년에 사망하여 같은 해 겨울에 매장되었으며,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어린 딸을 키우며 정절을 지켰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1][2]
7. 유물
무덤에서는 정효공주와 부군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유골 조사 결과 정효공주의 키는 156cm, 부군의 키는 161cm이며, 나이는 25~45세 사이로 추정된다.[6] 도굴되었지만, 묘 안에서는 도용 안부의 파편, 금동제 금구·못, 철제 못 등이 출토되었다.[2]
8. 발해 문화 논쟁
정혜공주묘는 고구려의 영향을, 정효공주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발해 문화가 고유한 민족 문화인지, 아니면 당나라에 예속된 문화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왕승례(Jilin Provincial Museum|지린성 박물관영어 관장)는 발해 문화가 독립적인 발해 고유의 민족 문화라는 주장은 잘못된 견해라는 인식을 보였으며, 실례로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를 비교하여 정혜공주묘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정효공주묘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며, 당나라에 대한 발해의 예속화가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3][4]
9. 현재 상태
정효공주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으며, 문은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안내 비석의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考古词条】铁器时代 · 渤海贞孝公主墓
https://kknews.cc/ot[...]
每日头条
2019-03-05
[2]
학술지
「海東の盛国」渤海の文化(2005年度春期東洋学講座講演要旨)
https://toyo-bunko.r[...]
東洋文庫
2005-09
[3]
서적
唐代渤海‘貞惠公主墓志’和‘貞孝公主墓志’的比較硏究
吉林省社会科学院
1982
[4]
서적
동아시아의 발해사 쟁점 비교 연구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2009-09
[5]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
[6]
문서
출처 - 동북아역사재단, 발해 역사와 문화(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7), pp.305~306.
http://www.amas.hk/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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