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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고려-몽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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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고려-몽골 전쟁은 1231년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1219년 몽골과 고려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나, 1225년 몽골 사신 살해 사건으로 관계가 단절되었고, 1231년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살리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고려를 침공했다. 몽골군은 개경을 포위하며 강화를 요구했고,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다루가치를 배치했으나,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다루가치를 살해하며 항전을 지속했다. 이후 몽골은 지속적으로 침략하여 1259년 고려가 굴복할 때까지 한반도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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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고려-몽골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안북부 전투
분쟁몽골의 고려 침공
일부해당 없음
날짜태종 3년/고종 18년 10월 21일 ( 1231년 11월 16일 )
장소안북부 (현재의 북한평안남도안주시)
결과몽골 제국의 압승
교전 세력
교전국 1몽골 제국
교전국 2고려
지휘관 및 지도자
몽골 제국 지휘관살리타이 코르치
우야르 원수
이랄매노
고려 지휘관채송년
이언문
정웅
채식
사상자 및 피해
몽골 제국 사상자극소수
고려 사상자사망자 과반수
전쟁 정보
분쟁제1차 고려-몽골 전쟁
전체고려-몽골 전쟁
날짜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월
장소한반도 북부
결과몽골의 요구에 따른 강화
교전국
교전국 2몽골 제국
지휘관
몽골 제국 지휘관살리타이
탕구타이
푸타우
테게
디주
우예르
일라
바이누
비벤
고려 지휘관고종
최우

2. 배경

1219년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는 몽골 제국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세공을 바쳤다. 그러나 1225년 몽골 사신이 압록강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살해되면서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 1229년 즉위한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사신 피살 사건을 구실로 사리타이가 이끄는 군대를 고려에 파견했다.

2. 1. 고려-몽골 관계

1219년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는 몽골 제국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세공을 바쳤다. 그러나 1225년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압록강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자들에게 살해되면서 양국 간 국교가 단절되었다.[1]

2. 2. 몽골 제국의 침략 결정

1225년 압록강 근처에서 몽골 사신이 살해되자, 우구데이 칸(태종)은 이를 구실삼아 1231년(고종 18) 살리타( 撒禮塔|살례탑중국어)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3]

3.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고종 18) 오고타이 칸(태종)은 장군 살리타(撒禮塔|살례탑중국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입하게 하였다. 몽골군은 음력 8월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전반적인 전세는 불리했다.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살리타가 보낸 사신을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보내어 강화를 맺었다.[3]

전쟁은 일단 중지되었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다.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 72명을 두었다고[3] 전하나 《고려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3. 1. 몽골군의 진군

1231년(고종 18) 오고타이 칸(태종)은 장군 살리타(撒禮塔)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고려를 침입하게 하였다. 음력 8월에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3] 고려군은 구주(귀주)·자주(慈州)·서경 등에서 크게 무찔렀으나, 전체적인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3]

3. 2. 고려의 방어

오고타이 칸(태종)은 1231년(고종 18) 장군 살리타(zh)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고려 침입을 지시했고,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 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구주(귀주), 자주(慈州), 서경 등에서 크게 몽골군을 무찌르는 등 선전하였으나 전체적인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남하하던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3]

4. 안북부 전투

1231년 10월 21일,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안북부에 주둔하던 고려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은 진주대집성의 주장에 따라 성 밖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몽골군의 화살 공격에 혼란에 빠져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이언문, 정웅, 채식 등의 장수들이 전사했다.[1]

4. 1. 전투 경과

살리타이(Sariqtai)는 10월 21일 안북부 성 아래에 이르러 주둔하고 있던 고려의 삼군에게 결전을 걸었다. 삼군은 처음에는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으나, 후군 진주대집성이 야전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출격하여 성 밖에 포진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몽골군은 말에서 내려 대열을 갖추는 한편, 기병의 별동대가 고려의 우군을 강습했다. 몽골군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고려군은 혼란에 빠진 우군을 구원하려던 중군마저 혼란에 빠져 궤주 상태가 되었다. 몽골군의 추격으로 고려 병사의 과반수가 살해되었고, 장군 이언문, 정웅, 우군판관 채식 등도 전사했다.[1]

5. 강화와 몽골의 철수

1231년 몽골이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보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일단 중지되었고, 1232년 음력 1월 몽골군은 철수하였다.[3] 몽골 측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 72명을 두었다고 전하나, 《고려사》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3]

5. 1. 강화 협상

오고타이 칸(태종)은 1231년(고종 18) 장군 살리타( 撒禮塔|살례탑중국어)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고려 침입을 지시했고,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 철주 등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고려군은 구주(귀주), 자주(慈州), 서경 등에서 크게 승리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전체적인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남하하던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살리타가 보낸 항복 권유 사신을 만나고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 侹)을 적진에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3]

그 결과 전쟁은 일단 중지되고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 음력 1월 군대를 철수하였는데, 몽골 사료에는 이때 전국에 다루가치( 達魯花赤|달로화적중국어) 72명을 두었다고[3] 전하나 《고려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5. 2. 몽골의 다루가치 배치

1232년 음력 1월, 몽골군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전국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었다고 몽골 측 사료에 전해진다.[3] 그러나 《고려사》에는 다루가치 배치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몽골 측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6. 1232년 이후 상황

1232년 몽골군이 철수한 뒤, 최우는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2] 고려에 설치된 몽골의 다루가치 일부가 살해되기도 하였다.[2]

7. 영향

1232년 1월 몽골군이 물러가자, 최우는 철저한 항전을 위해 국도를 한강 하구의 강화도로 옮겼다. 또한 각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해안의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하도록 명령한 뒤, 다루가치를 모두 살해하여 몽골과의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2]

7. 1. 고려의 피해

몽골군은 안북부를 점령한 후 남하를 계속하여, 12월 1일에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했다. 모든 수단이 다한 고려는 사리타이에게 막대한 공물을 보내 항복했고, 몽골군에게 함락된 40여 성에는 72명의 다루가치가 배치되었다.[2]

이듬해 1232년 1월 몽골군이 물러가자, 최우는 철저한 항전을 위해 국도를 한강 하구의 강화도로 옮기고, 각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해안의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하도록 명령한 뒤, 다루가치를 모두 살해했다. 오고타이 칸 또한 즉시 죄를 묻는 군대를 파견했고, 1259년 고려가 굴복할 때까지 한반도는 몽골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7. 2. 고려-몽골 전쟁의 장기화

1232년 1월 몽골군이 물러가자, 최우는 철저한 항전을 위해 국도를 한강 하구의 강화도로 옮기고, 각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해안의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하도록 명령한 뒤, 다루가치를 모두 살해했다.[2] 오고타이 칸은 즉시 죄를 묻는 군대를 파견했고, 1259년 고려가 굴복할 때까지 한반도는 몽골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참조

[1] 서적 矢木1998
[2] 서적 元史 高麗伝
[3] 서적 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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