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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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인성 전투는 1232년 몽골의 2차 고려 침략 당시,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이끄는 민간인과 의병들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이다. 이 전투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중요한 사례로, 몽골군의 퇴각을 이끌어 고려-몽골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투 이후 처인부곡은 현으로 승격되었으며, 김윤후는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사살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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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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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몽골의 고려 침공 |
전투명 | 처인성 전투 (處仁城 戰鬪) |
시기 | 1232년 음력 12월 16일 (1233년 2월 6일) |
위치 | 현재의 경기도 용인시 |
결과 | 고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고려 |
교전국 2 | 몽골 제국 |
지휘관 및 병력 | |
고려 지휘관 | 김윤후 |
고려 병력 | 승병 100여 명, 피란민 1,000여 명 |
몽골 지휘관 | 살리타이, 테게 |
몽골 병력 | 불명 |
사상자 | |
고려 사상자 | 불명 |
몽골 사상자 | 불명 |
관련 정보 | |
관련 캠페인 | 몽골의 침략과 정복 오고데이 칸의 캠페인 |
관련 전투 | 몽골의 중앙 아시아 침공 몽골의 서아시아 침공 몽골의 동아시아 침공 몽골의 유럽 침공 |
2. 배경
1218년 몽골 제국과 고려는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족을 함께 격퇴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를 침공했고, 1차 침입 후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겼다.
몽골의 압박에 반발한 최씨 정권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했는데, 이는 몽골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몽골은 제2차 고려 침략을 시작, 개성과 한양을 점령하고 남하하던 살리타이는 1232년 11월 광주에서 발이 묶이자 강화도 봉쇄를 명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처인성에 도착했다.[3]
처인성은 천민 중심의 '부곡' 지역으로, 전략적 가치가 낮아 정규군 없이 민간인과 의병 10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성벽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둘레는 약 425m였다.[4]
2. 1. 초기 관계
1218년 몽골 제국과 고려는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고,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를 침공한 거란족 군단(후요)을 함께 멸망시키며 정기적인 사신 교환을 약속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7] 그러나 1225년 몽골에서 고려로 파견된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피살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후 몽골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2. 2. 관계 악화
1218년 몽골 제국과 고려는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고,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에 침공한 거란족 군단(후요)을 함께 멸망시키며 정기적인 사신 교환을 약속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225년 몽골에서 고려로 파견된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살해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후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7]몽골은 고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고려는 이에 불만을 가졌다. 1231년 살리타이(Saldai)가 이끄는 몽골군(탐마치)은 홍복원 등의 도움을 받아 수도 개경을 포위했고, 고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항복했다.[7] 고려는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회안공(淮安公)을 시켜 몽골군을 배웅하게 했으나, 이후 몽골은 정복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파견했다.[8]
고려에 온 거란인 도단(都旦)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접대역을 살해하는 등 횡포를 부려 고려인들의 반감을 샀다.[9] 도단 등의 다루가치 파견은 살리타이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10]
도단은 살리타이로부터 추가적인 공물 요구를 전달했고, 공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변명하러 간 지의심(池義深)은 몽골군에게 붙잡혔다. 이에 고려 조정은 몽골에 대한 반감이 커져 몽골 제국으로부터 이반을 결의하게 되었다.
2. 3. 몽골의 1차 침입과 고려의 항복
1218년 몽골 제국과 고려는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고,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를 침공한 거란 군단(후요)을 함께 멸망시키며 정기적인 사신 교환을 약속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225년 몽골에서 고려로 파견된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살해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후 몽골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7]1231년 살리타이(Saldai)가 이끄는 몽골군(탐마치)은 홍복원 등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수도까지 침공하여, 같은 해 12월 수도인 개경을 포위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고[7]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동시에 회안공(淮安公)에게 몽골군을 국외로 배웅하게 했다. 그러나 몽골은 정복지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파견했다.[8] 특히, 몽골군을 배웅하고 돌아온 회안공과 함께 고려 조정을 방문한 거란인 도단(都旦)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접대역을 살해하는 등 횡포를 부려 고려인들의 반감을 샀다.[9] 다만, 몽골군이 고려를 떠난 지 불과 37일 만에 도단이 파견된 것으로 보아, 도단 등 다루가치의 파견은 살리타이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보인다.[10]
도단은 살리타이가 고려 조정에 추가적인 공물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전했고, 공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변명하러 간 지의심(池義深)은 몽골군에게 붙잡혔다. 이에 몽골군에 대한 반감이 커진 고려 조정은 몽골 제국으로부터의 이반을 결의했다.
2. 4. 다루가치 파견과 고려의 반발
1219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거란족을 격퇴한 후, 양국은 정기적인 사신 교환을 약속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7] 그러나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홍복원 등의 도움을 받아 고려 수도 개경을 포위했고, 고려 조정은 항복하며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7] 몽골은 고려에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파견하여 정복지를 감시하게 했다.[8]
특히 거란인 출신 다루가치 도단(都旦)은 횡포가 심하여 고려인들의 반감을 샀다.[9] 도단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접대역을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9] 또한, 도단은 살리타이의 지시라며 고려 조정에 추가 공물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려던 고려 관리는 몽골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 조정이 몽골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몽골로부터의 이반을 결의하게 만들었다.
2. 5. 고려의 강화도 천도 결정
칭기즈 칸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몽골은 고려와 함께 거란족을 추방시켰으나, 이후 고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7] 몽골은 퇴각하면서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겼다.[8]이에 몽골에 대한 반감이 커진 고려 조정은 몽골 제국으로부터의 이반을 결의했다. 몽골군의 침공에 대한 방비와 천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11] 300년간 수도였던 개경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권신들의 강경책으로 천도가 실행되었다. 백성들에게는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고려 조정은 표면적으로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사자를 돌려보냈지만, 1232년 7월 6일 개경을 떠나 다음 날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12] 이와 동시에 고려 국내의 다루가치들을 살해했다.[12]
3. 몽골의 2차 침입과 처인성 전투
칭기즈 칸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거란족들은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몽골이 고려와 함께 거란족들을 추방시켰다. 그러나 이를 구실로 몽골은 고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때마침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1차 침입 후 몽골은 퇴각하였으나,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기고 갔다.
그러자 이를 계기로 최씨 정권은 몽골인이 물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몽골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와도 같았다.
1232년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하면서 몽골의 2차 침입은 막을 내렸다.[2] 살리타이는 개성과 한양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처인성에 도착했다. 처인성은 작고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어 정규군이 방어하지 않았고, 민간인과 의병들이 피난해 있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리타이는 처인성 포위 공격을 준비했고, 성의 사람들은 승려 김윤후를 지휘관으로 추대하여 몽골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결정했다. 12월 16일, 살리타이는 공격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동문(東門) 근처 언덕에 매복해 있던 게릴라 부대에게 기습을 받았다. 같은 날 살리타이는 성 안에 있던 승려 궁수가 쏜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몽골군은 붕괴되어 퇴각했다.[4]
3. 1. 몽골의 재침략
1232년, 고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골 제국은 이를 전쟁 선포로 간주하고 고려에 대한 2차 침략을 시작했다.[2] 홍복원은 고려 북방의 40여 주를 맡고 있었으나, 고려의 배반에도 동요하지 않고 살리타이 군을 맞이했다. 홍복원의 노력으로 서경(현재의 평양)까지 무난히 진출한 살리타이는 고려 국왕에게 직접 나올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권신의 출두를 요구했다.[14]개성과 한양을 점령한 몽골군은 강화도 공격에 어려움을 겪자 외교 교섭을 통해 고려의 항복을 요구하며 강화도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15] 그 대신 남하하여 고려 국내를 약탈하고, 임진강을 건너 남경(현재의 서울)을 공략하여 수주 방면에 이르렀다.[16] 11월에 광주에 도착했지만 요새 점령에는 실패했다.[3] 살리타이는 대부분의 병력에게 강화도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도록 명령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처인 마을에 도착했다.
3. 2. 처인성 포위
1232년 제2차 고려-몽골 전쟁 때 몽골군 최고 사령관 살리타이는 강화도 공격이 여의치 않자 남쪽으로 이동하여 처인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 살리타이는 임진강을 건너 남경 (현재의 서울)을 공략하고 수주(水州) 방면에 이르렀다.[16]처인성은 당시 천민이 대부분인 '부곡'이라는 차별적인 행정 구역에 속해 있었고, 작고 흙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약 1,000명의 민간인과 100여 명의 의병이 처인성을 방어하고 있었다.[4]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준비했고, 성 안의 사람들은 승려 김윤후를 중심으로 몽골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하였다.[4]
3. 3. 김윤후의 활약과 살리타이의 죽음
1232년, 제2차 고려-몽골 전쟁 때 승려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13] 고종 19년 12월 16일 (1233년 2월 6일), 살리타이는 수주에 속한 처인성을 포위했다.[17] 백현원에서 도망쳐 온 김윤후는 빌린 활과 화살로 살리타이를 쏘아 맞혔다.[18] 예상치 못한 주장의 죽음으로 몽골군은 부장 테게 코르치의 지휘하에 퇴각했고, 이로써 몽골의 제2차 고려 침공은 좌절되었다.[19][20]3. 4. 몽골군의 퇴각
1232년 제2차 고려-몽골 전쟁에서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13] 고종 19년(1232년) 12월 16일, 살리타이는 수주에 속한 처인성을 포위했다.[17] 이때 처인성에는 백현원에서 도망쳐 온 김윤후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김윤후는 빌린 활과 화살로 살리타이를 쏘아 맞혔다.[18] 예상치 못한 주장의 죽음으로 몽골군은 부장 테게 코르치의 지휘 아래 퇴각했고, 이로써 몽골의 제2차 고려 침공은 좌절되었다.[19][20]4. 처인성 전투의 의의와 영향
몽골은 칭기즈 칸의 지휘 아래 세계를 정복하면서 거란족을 고려로 몰아넣었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거란족을 격퇴했지만, 몽골은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했다. 저고여 피살 사건은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1차 침입 이후 몽골은 다루가치를 남겨 고려를 감시했다. 최씨 정권은 몽골의 수군 약점을 이용해 강화도로 천도했는데, 이는 사실상 몽골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4. 1. 전쟁의 전환점
1232년 제2차 고려-몽골 전쟁 때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살해하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다.[6] 처인성 전투는 이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되었다. 몽골군이 혼란에 빠지면서 전쟁은 고려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몽골 제국은 고려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했다.[6]고려 정부는 김윤후에게 관직 승진을 제안하며 몽골 장군을 쏜 인물로 칭송했으나, 김윤후는 전투 당시 활과 화살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그를 살리타이를 쏜 인물로 인정하고 있으며 널리 그렇게 알려져 있다. 김윤후는 21년 후 충주 전투에서 다시 참전했는데, 이는 5차 몽골의 고려 침략 기간 중이었다.[6]
4. 2. 김윤후에 대한 평가
고려 정부는 김윤후에게 관직 승진을 제안하며, 몽골 장군을 쏜 인물로 칭송했다. 그러나 김윤후는 전투 당시 활과 화살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는 그를 살리타이를 쏜 인물로 인정하고 있으며, 널리 그렇게 알려져 있다. 김윤후는 21년 후 충주 전투에서 다시 참전했는데, 이는 5차 몽골의 고려 침략 기간 중이었다.[6]4. 3. 처인부곡의 승격
처인성 전투 이후 처인부곡은 현으로 승격되었고, 이전의 차별적인 지위에서 벗어났다.[6]5. 몽골 침입의 장기적 영향
칭기즈 칸 집권 시기, 거란족의 고려 침략을 계기로 몽골과 고려가 협력하여 거란족을 격퇴했다. 그러나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 몽골은 1차 침입 후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를 감시했고,[1] 강화도 천도로 몽골에 저항했으나, 이는 제2차 고려-몽골 전쟁을 야기했다. 1232년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몽골의 침략은 장기간 지속되었다.[1]
5. 1. 무신정권의 강화
칭기즈 칸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거란족들은 고려를 침략한다. 이때 몽골이 고려와 함께 거란족들을 추방시켰다. 그러나 이를 구실로 몽골은 고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때마침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면서 일이 시작된다.[1]1차 침입 후 몽골은 퇴각하였으나,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기고 갔다.[1]
그러자 이를 계기로 최씨 정권은 몽골인이 물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몽골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와도 같았다.[1]
5. 2. 고려의 자주성 수호 노력
칭기즈 칸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거란족들이 고려를 침략한다. 이때 몽골이 고려와 함께 거란족들을 추방시킨다. 그러나 이를 구실로 몽골은 고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때마침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면서 일이 시작된다.[1]1차 침입 후 몽골은 퇴각하였으나,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기고 간다.[1]
그러자 이를 계기로 최씨 정권은 몽골인이 물을 무서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몽골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와도 같았다.[1]
1232년, 제2차 고려-몽골 전쟁 때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살해하면서 막을 내렸다.[1]
5. 3. 문화적 영향
몽골의 1차 침입 후, 몽골은 고려에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남겨 내정에 간섭하려 했다.[1] 최씨 정권은 이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몽골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1]참조
[1]
웹사이트
처인성(處仁城)전투 -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
2016-11-07
[2]
논문
The Characteristics and its Affects of the Battle of Cheoin Castle(處仁城) in the Period of Goryeo-Mongol War
https://www.dbpia.co[...]
[3]
웹사이트
MONGOL SECOND CAMPAIGN: SARITAI IS KILLED
https://history-maps[...]
2024-03-15
[4]
웹사이트
처인성[處仁城]
http://www.doopedia.[...]
2016-11-07
[5]
웹사이트
처인성전투[處仁城-]
http://www.doopedia.[...]
2016-11-07
[6]
논문
Strategy and Leadership of Kim Yoonhu(金允侯) throughout Fighting against Mongol
https://www.kci.go.k[...]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간행물
高麗史』巻23高宗世家2,「[高宗十九年十二月]撒礼塔攻処仁城有一僧避兵在城中射殺之。答東真書曰……至今年十二月十六日、水州属邑処仁部曲之小城方与対戦射中魁帥撒礼塔殺之。虜亦多餘衆潰散……」
[18]
간행물
高麗史』巻103列伝16金允侯伝,「金允侯、高宗時人。嘗為僧、住白峴院、蒙古兵至、允侯避乱于処仁城。蒙古元帥撒礼塔来攻城、允侯射殺之。王嘉其功、授上将軍。允侯譲功于人曰『当戦時、吾無弓箭、豈敢虚受重賞』。固辞不受、乃改摂郎将」
[19]
간행물
元史』巻208列伝95高麗伝,「[太宗四年]六月、㬚尽殺朝廷所置達魯花赤七十二人以叛、遂率王京及諸州県民竄海島。洪福源集餘民保聚、以俟大兵。八月、復遣撒礼塔領兵討之、至王京南、攻其処仁城、中流矢卒。別将鉄哥以軍還。其已降之人、令福源領之」
[20]
간행물
元史』巻154列伝41洪福源伝「辛卯秋九月、太宗命将撒礼塔討之、福源率先附州県之民、与撒礼塔併力攻未附者、又与阿児禿等進至王京。高麗王乃遣其弟懐安公請降、遂置王京及州県達魯花赤七十二人以鎮之、師還。壬辰夏六月、高麗復叛、殺所置達魯花赤、悉駆国人入拠江華島、福源招集北界四十餘城遺民以待。秋八月、太宗復遣撒礼塔将兵來討、福源尽率所部合攻之、至王京処仁城、撒礼塔中流矢卒、其副帖哥引兵還、唯福源留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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