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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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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주성 전투는 1231년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귀주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이다.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여 귀주성에 이르렀고, 서북면병마사 박서의 지휘 아래 귀주성 병사들은 몽골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몽골군은 다양한 공성 무기를 동원하고 화공을 시도했지만, 박서는 임기응변으로 막아내며 30일간의 공방전을 벌였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고려 조정이 항복하면서, 박서는 투항하게 되었고, 이 전투는 고려의 대몽 항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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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갈등몽골의 고려 침공
시기1231년 9월 – 1232년 1월
장소귀주 (구성), 고려
결과고려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몽골 제국
교전 2고려
지휘관 및 지도자
몽골 제국살리타이
고려박서
병력 규모
몽골 제국10,000명
고려5,000명
피해 규모
몽골 제국알 수 없음
고려알 수 없음
관련 항목
로마자 표기Gwijuseong Jeontu
한자 표기귀주성전투
일본어 표기亀州包囲戦 (きしゅうほういせん)
관련 전투구주 전투 (Battle of Kuju)
제1차 몽골의 고려 침공
제1차 몽골의 고려 침공

2. 배경

2. 1. 몽골 제국의 고려 침입

2. 2. 귀주성의 전략적 중요성

3. 전투 경과

1218년 몽골 제국과 고려는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으며, 1219년에는 강동성의 전투에서 공동으로 고려를 침공한 거란족 군단(후요)을 멸망시키고, 정기적인 사신의 왕래를 약속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4] 그러나, 1225년 몽골에서 고려로 파견된 사자가 귀로에 피살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후 이 사자 살해를 구실로 몽골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었다.[5]

1231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한 살리타이(Sartaq)가 이끄는 몽골군(탐마치)은 홍복원 등의 도움을 받아 파죽지세로 진격, 먼저 함신진을 지키는 조숙창을 항복시키고, 이어서 철주를 점령했다.[6] 이후 몽골군은 동쪽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같은 해 9월에는 귀주성에 이르렀다.[7] 당시 귀주성은 서북면병마사 박서가 지키고 있었으며, 박서는 몽골군의 습격을 알자 삭주분도장군 김중온, 정주분도장군 김경손 등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정주, 삭주, 위주, 태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귀주성 병력을 증강시켰다.[7]

박서는 김중온에게 성의 동쪽과 서쪽을, 김경손에게 성의 남쪽을 각각 지키게 하고, 도호별초와 위주, 태주 별초 250여 명을 삼면에 배치했다.[8] 귀주에 도착한 몽골군은 여러 겹으로 이를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문, 남문, 북문을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귀주성 병사들에게 격퇴당했다.[8] 몽골군은 포로로 잡고 있던 위주 부사 박문창을 파견하여 성을 항복시키려 했지만, 박서는 찾아온 박문창을 즉시 참수하여 이를 거절했다.[8]

사자를 살해당한 몽골군은 정예 기병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게 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기에, 이후 정공법을 그만두고 모든 공성병기를 사용하여 귀주성 공략을 시도했다.[9] 몽골군은 먼저 누차(楼車), 대상(공성탑)을 세워 성에 접근하고, 또한 지하로 길을 파서 나아가려 했지만, 박서는 지하에는 녹인 쇠(철액)를 흘려 넣고, 누차는 불태워 이를 격퇴했다.[9] 이 때, 땅이 꺼지면서 압사한 몽골 병사가 30여 명이나 나왔다고 한다.[9] 다음으로, 몽골군은 대포차 15대를 준비하여 남문을 공격하려 했지만, 박서는 성에 투석기를 세워 투석으로 대포차를 파괴했다.[9] 그 후, 몽골군은 화공을 계획하여 땔감을 쌓아 올리거나 불붙은 수레를 밀어 넣었지만, 박서는 물과 진흙을 성벽에서 던지게 하여 이를 막고, 또한 성벽 위에 물을 채워 연소를 막았다.[9] 몽골군은 30일(3순) 동안 다양한 계략을 고안하여 귀주성을 공격했지만, 박서는 임기응변으로 이에 대처하여 그때마다 격퇴했기에, 결국 몽골군은 잠시 귀주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6][9] 『고려사』 권23 고종세가에 따르면 몽골군이 잠시 귀주에서 철수한 것은 고종 18년 9월 3일(1231년 10월 7일)이었다고 한다.[10]

그러나, 살리타이는 다른 경로를 택하여 9월 중에는 용주, 선주, 곽주를 함락시키고, 10월 21일(11월 21일)에는 안북부 전투에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했다.[11] 이 "안북부 전투"의 바로 전날인 10월 20일(11월 22일)에 귀주에도 별동대가 다시 공격을 가해[12], 30개의 "포차"로 성곽을 파괴했다.[13] 그러나 박서는 굴하지 않고 쇠사슬 등으로 성벽을 보강한 후 오히려 출전하여, 몽골 병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3] 몽골군은 다시 "포차"로 공격하려 했지만, 박서는 투석기로 이를 파괴하고, 손해를 입은 몽골군은 퇴각하여 책(柵)을 쌓았다.[13] 거듭된 공성 실패를 겪고 살리타이는 통사 지의심 등을 파견하여 항복을 권했지만, 박서는 이를 거절했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한편, 몽골군 본대는 12월 1일 고려국 수도 개경에 이르렀고, 결국 고려 조정은 항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14] 새해가 밝자, 고려왕 고종은 최림수와 감찰어사민희 등을 몽골인과 함께 귀주로 파견했고, 최림수는 성 밖에서 고려 조정은 이미 몽골과 강화했으며, 귀주도 항전을 멈추고 개성하라고 권고했다.[15] 이 권고는 4차례나 이루어졌지만 귀주는 쉽게 개성에 응하지 않았고, 박서는 자결하려 하기까지 했지만, 마침내 림수의 설득에 의해 투항을 결심하게 되었다.[15] 귀주에서 큰 손해를 입은 몽골군은 박서를 죽이려 했지만, 무신정권을 통치하는 최이의 배려로 박서는 향리에 은거하게 되었다.[15]

이 전투에는 70세가 넘는 몽골의 노장이 종군했으며, 전투 후에 귀주성 성루와 기계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머리를 땋고 종군하기 시작한 이후로, 천하의 여러 성의 공성전을 보아왔지만, 아직 이렇게까지 공격을 받고 [도시가] 결국 항복하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성 안의 장군은, 훗날 반드시 장상이 될 것이다(原文:吾結髮従軍、歴観天下城池攻戦之状、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城中諸将、他日必皆為将相) [15][16]。"

과연, 후에 박서는 문하평장사의 지위를 받았다.[15]

3. 1. 초기 공방전 (1231년 9월)

1231년 살리타이(Sartaq)가 이끄는 몽골군(탐마치)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 홍복원 등의 도움을 받아 파죽지세로 진격했다.[6] 몽골군은 먼저 함신진을 지키는 조숙창을 항복시키고, 이어서 철주를 점령한 뒤, 동쪽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9월에는 귀주성에 이르렀다.[6][7]

당시 귀주성은 서북면병마사 박서가 지키고 있었다. 박서는 몽골군의 습격 소식을 듣고 삭주분도장군 김중온, 정주분도장군 김경손 등에게 협력을 요청, 정주, 삭주, 위주, 태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7] 박서는 김중온에게 성의 동쪽과 서쪽을, 김경손에게 성의 남쪽을 각각 지키게 하고, 도호별초와 위주, 태주 별초 250여 명을 삼면에 배치했다.[8]

귀주에 도착한 몽골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문, 남문, 북문을 공격했지만, 박서와 고려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했다.[8] 몽골군은 포로로 잡고 있던 위주 부사 박문창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는 박문창을 즉시 참수하여 항복을 거부했다.[8] 몽골군은 정예 기병 300명을 동원하여 북문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모든 공성병기를 사용하여 귀주성 공략을 시도했다.[9]

3. 2. 몽골군의 다양한 공격 시도

1231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한 살리타이(Sartaq)가 이끄는 몽골군(탐마치)은 9월에 귀주에 이르렀다.[7] 몽골군은 정예 기병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모든 공성병기를 사용하여 귀주성을 공격하려 했다.[9] 몽골군은 누차(楼車), 대상(공성탑)을 세워 성에 접근하고, 지하로 길을 파서 공격하려 했지만, 박서는 지하에는 녹인 쇠(철액)를 흘려 넣고, 누차는 불태워 격퇴했다.[9] 땅이 꺼지면서 압사한 몽골 병사가 30여 명이나 되었다.[9]

몽골군은 대포차 15대를 준비하여 남문을 공격하려 했지만, 박서는 성에 투석기를 세워 투석으로 대포차를 파괴했다.[9] 그 후, 몽골군은 화공을 위해 땔감을 쌓아 올리거나 불붙은 수레를 밀어 넣었지만, 박서는 물과 진흙을 성벽에서 던져 막고, 성벽 위에 물을 채워 연소를 막았다.[9] 몽골군은 30일(3순) 동안 귀주성을 공격했지만, 박서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여 격퇴했고, 결국 몽골군은 9월 3일(10월 7일) 잠시 귀주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6][9][10]

3. 3. 안북부 전투와 귀주성 재공격 (1231년 10월)

1231년 10월 21일(11월 21일)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주력 부대는 안북부 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했다.[11] 이 전투 전날인 10월 20일(11월 22일) 몽골군은 귀주성에 대한 재공격을 개시했다.[12] 몽골군은 30개의 포차를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하려 했으나,[13] 서북면병마사 박서는 쇠사슬 등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출전하여 몽골군을 격퇴했다.[13] 박서는 투석기를 이용하여 몽골군의 포차를 파괴했고, 피해를 입은 몽골군은 퇴각하여 책(柵)을 쌓았다.[13] 살리타이는 통사 지의심 등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는 이를 거절하여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3. 4. 교착 상태와 고려 조정의 항복

1231년 몽골군은 거듭된 공성 실패에도 불구하고 통사 지의심 등을 파견하여 항복을 권유했지만, 박서는 이를 거절했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몽골군 본대는 12월 1일 고려국 수도 개경에 이르렀고, 결국 고려 조정은 항복을 결정하였다.[14]

3. 5. 귀주성의 함락

1231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한 살리타이(Sartaq)가 이끄는 몽골군은 철주를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귀주에 이르렀다.[6] 10월 20일(11월 22일)에 귀주에 별동대가 다시 공격을 가해, 30개의 "포차"로 성곽을 파괴했지만, 박서는 쇠사슬 등으로 성벽을 보강한 후 오히려 출전하여, 몽골 병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2][13] 몽골군은 다시 "포차"로 공격하려 했지만, 박서는 투석기로 이를 파괴하고, 손해를 입은 몽골군은 퇴각하여 책(柵)을 쌓았다.[13] 거듭된 공성 실패를 겪고 살리타이는 통사 지의심 등을 파견하여 항복을 권했지만, 박서는 이를 거절했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한편, 몽골군 본대는 12월 1일 고려국 수도 개경에 이르렀고, 결국 고려 조정은 항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14] 새해가 밝자, 고려 고종은 최림수와 감찰어사민희 등을 몽골인과 함께 귀주로 파견했고, 최림수는 성 밖에서 고려 조정은 이미 몽골과 강화했으며, 귀주도 항전을 멈추고 개성하라고 권고했다.[15] 이 권고는 4차례나 이루어졌지만 귀주는 쉽게 개성에 응하지 않았고, 박서는 자결하려 하기까지 했지만, 마침내 림수의 설득에 의해 투항을 결심하게 되었다.[15] 귀주에서 큰 손해를 입은 몽골군은 박서를 죽이려 했지만, 무신정권을 통치하는 최이의 배려로 박서는 향리에 은거하게 되었다.[15]

이 전투에는 70세가 넘는 몽골의 노장이 종군했으며, 전투 후에 귀주성 성루와 기계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머리를 땋고 종군하기 시작한 이후로, 천하의 여러 성의 공성전을 보아왔지만, 아직 이렇게까지 공격을 받고 [도시가] 결국 항복하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성 안의 장군은, 훗날 반드시 장상이 될 것이다(原文:吾結髮従軍、歴観天下城池攻戦之状、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城中諸将、他日必皆為将相) [15][16]。"

과연, 후에 박서는 문하평장사의 지위를 받았다.[15]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4. 1. 고려의 피해와 몽골군의 손실

4. 2. 박서의 평가와 최후

4. 3. 역사적 의의

5. 한국사의 관점

5. 1. 민족 저항의 상징

5. 2. 대몽 항쟁의 중요성

5.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참조

[1] 웹사이트 Expanding the Realm http://www.koreanhis[...] 2015-02-20
[2] 나무위키 귀주성 전투 https://namu.wiki/w/[...]
[3] 나무위키 귀주성 전투 https://namu.wiki/w/[...]
[4] 서적 池内1963,3-4頁
[5] 서적 池内1963,4-5頁
[6] 서적 池内1963,5頁
[7] 서적 『高麗史』巻103列伝16朴犀伝,「朴犀、竹州人、高宗十八年、為西北面兵馬使。蒙古元帥撒礼塔、屠鉄州、至亀州、犀与朔州分道将軍金仲温・静州分道将軍金慶孫、静・朔・渭・泰州守令等、各率兵、会亀州」
[8] 서적 『高麗史』巻103列伝16朴犀伝,「犀以仲温軍守城東西、慶孫軍守城南、都護別抄及渭・泰州別抄二百五十餘人、分守三面。蒙古兵囲城数重、日夜攻西南北門、城中軍突出擊走之。蒙古兵、擒渭州副使朴文昌、令入城諭降、犀斬之」
[9] 서적 『高麗史』巻103列伝16朴犀伝,「蒙古選精騎三百、攻北門、犀擊却之。蒙古創楼車及大床、裹以牛革、中藏兵、薄城底、以穿地道。犀穴城、注鉄液、以燒楼車、地且陷、蒙古兵壓死者、三十餘人。又爇朽茨、以焚木床、蒙古人錯愕而散。蒙古又以大砲車十五、攻城南甚急、犀亦築台城上、発砲車飛石却之。蒙古以人膏、漬薪厚積、縦火攻城、犀灌以水、火愈熾。令取泥土、和水投之、乃滅。蒙古又車載草、爇之攻譙楼、犀預貯水、楼上灌之、火焰尋息。蒙古囲城三旬、百計攻之、犀輒乗機応変、以固守、蒙古不克而退」
[10] 서적 『高麗史』巻23高宗世家2,「[高宗十八年九月]丙戌、蒙兵囲亀州城、不克而退」
[11] 서적 池内1963,5-6頁
[12] 서적 『高麗史』巻23高宗世家2,「[高宗十八年冬十月]壬申……蒙兵攻亀州、破城廊二百餘閒、州人隨卽修築以守」
[13] 서적 『高麗史』巻103列伝16朴犀伝,「復駆北界諸城兵来攻、列置砲車三十、攻破城郭五十間。犀隨毀隨葺、鎖以鉄絙、蒙古不敢復攻、犀出戦大捷。蒙古復以大砲車攻之、犀又発砲車飛石、擊殺無算、蒙古退屯、樹柵以守。撒礼塔遣我国通事池義深、学録姜遇昌、以淮安公侹牒、至亀州諭降、犀不聴。撒礼塔復遣人諭之、犀固守不降。蒙古又造雲梯攻城、犀以大于浦、迎擊之、無不糜碎、梯不得近。大于浦者、大刃大兵也」
[14] 서적 池内1963,6頁
[15] 서적 『高麗史』巻103列伝16朴犀伝,「明年、王遣後軍知兵馬事右諫議大夫崔林寿、監察御史閔曦、率蒙古人、往亀州城外、諭曰『已遣淮安公侹、講和于蒙古兵、我三軍亦已降、可罷戦出降』。諭之数四、猶不降、曦憤其固守、欲拔劒自刺。林寿更諭之、犀等重違王命、乃降。後蒙古使至、以犀固守不降、欲殺之、崔怡謂犀曰『卿於国家、忠節無比、然蒙古之言、亦可畏也。卿其図之』。犀乃退帰其郷。蒙古之囲亀州也、其将有年幾七十者、至城下、環視城塁・器械、歎曰『吾結髮従軍、歴観天下城池攻戦之状、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城中諸将、他日必皆為将相』。後犀果拝門下平章事」
[16] 웹사이트 Expanding the Realm http://www.koreanhis[...] 2015-02-20
[17] 서적 池内1963,14-15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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