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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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고구려-수 전쟁은 613년에 일어난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이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방어에 막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시기 수나라 내부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나자, 수 양제는 군대를 철수했다.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퇴각을 확인하고 추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수나라의 멸망과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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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3년 중국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수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네 차례 침공한 전쟁으로, 수나라의 팽창 정책과 고구려의 강경한 외교 정책이 충돌하여 발발했으며 양국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수나라 멸망과 당나라 건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613년 한국 - 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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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구려-수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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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구려-수 전쟁 | |
전체 | 고구려-수 전쟁 |
날짜 | 613년 |
장소 | 랴오둥반도 |
결과 | 수나라의 철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수나라 |
교전국 2 | 고구려 |
지휘관 | |
수나라 지휘관 | 수 양제 우문술 내호아 왕안공 양의신 곡사정 |
고구려 지휘관 | 영양왕 고건무 |
병력 | |
사상자 | |
수나라 사상자 | 수천 ~ 수만 |
기타 | |
관련 전투 | 신성 전투 요동성 전투 |
2. 배경
6세기 말, 수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고 주변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특히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 지역을 공격하고 돌궐과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며 군사를 탁군에 모으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는 등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였으나, 좌광록 대부 곽영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2. 1. 국제 정세
6세기 말, 동아시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돌궐, 수나라 등이 대립하는 복잡한 국제 정세였다.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국에 조공을 요구하며 압박했고, 고구려는 이에 맞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가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며 군사를 탁군에 모으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는 등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준비를 하였다. 좌광록 대부 곽영은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양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
2. 2. 수나라의 군사 동원
수 양제는 613년 고구려 원정을 위해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모았다. 백성들을 모집하여 군사 물자를 만들고, 요동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도록 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며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이때 좌광록 대부 곽영이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 라며 간언하였으나, 수 양제는 듣지 않았다.
3. 제2차 고구려-수 전쟁 (6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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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3차 고구려-수 전쟁 (613년)
613년 영양왕 24년 봄 정월, 수 양제는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모으고, 백성을 모집하여 요하에 다리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양제는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며 고구려 재침을 논의하였다. 좌광록대부 곽영이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간언했으나, 양제는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수 양제는 요하를 건넜다.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은 부여도로 나와 신성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 수만 명이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날랜 기병 1천 명으로 고구려군을 격파하자, 고구려군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4. 1. 요동성 전투
수 양제는 여러 장수에게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수나라는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를 이용해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임기응변으로 막아 20여 일 동안 함락되지 않았고, 양측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심광은 충제의 장대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며 고구려군과 싸웠는데, 칼로 십수 명을 죽였다. 고구려군이 그를 공격하여 떨어지게 되었으나,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양제는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에 임명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양제는 베 주머니 백여만 개를 만들어 그 속에 흙을 가득 넣어 어량대도를 만들었다. 어량대도는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같아 수나라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쏘면서 공격할 기일을 정했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4. 2. 양현감의 반란과 수나라군의 회군
613년 수 양제가 고구려 재침공을 결정했을 때,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현감은 수나라 고위 관료의 자손들을 이끌고 거병하였으며,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쳐 오는 사건이 발생했다.수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 소식과 고관 자제들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크게 동요하여, 몰래 장수들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이때 군수품, 기계, 공격용 도구들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보루와 장막도 그대로 둔 채 철수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의 철수를 즉시 알아차렸지만, 수나라 군의 속임수를 우려하여 즉각적인 추격은 하지 않았다. 이틀 후, 수천 명의 군사로 추격하였으나, 수나라 군의 규모를 두려워하여 80~90리의 거리를 유지했다. 요수에 이르러 수나라 황제의 병영이 강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후군을 압박하였다. 당시 후군의 수는 수만 명이었으나, 고구려군은 끝까지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5. 전쟁의 결과
양현감의 반란 소식과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쳐 온 일로 수나라 양제는 크게 불안해했다. 양제는 밤에 몰래 장수들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다. 이때 군수품, 기계, 공격용 도구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보루와 장막도 그대로였지만,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부대를 나누지 못하고 흩어졌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의 철수를 즉시 알아챘지만, 함정일까 의심하여 성 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지만 여전히 의심했고, 이틀 뒤에야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 추격했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아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80km에서 90km의 거리를 유지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 수 양제의 병영이 강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후군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이러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대규모 토목 공사로 인해 수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1. 수나라의 멸망
양현감의 반란 소식에 수나라 양제는 크게 두려워했고,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쳐 오자 더욱 불안해했다. 밤에 몰래 장수들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다. 군수품, 기계, 공격용 도구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보루와 장막도 그대로였지만,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부대를 나누지 못하고 흩어졌다.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의 철수를 즉시 알아챘지만, 함정일까 의심하여 성 안에서 북을 치고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지만 여전히 의심했고, 이틀 뒤에야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 추격했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아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8, 90리의 거리를 유지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 수 양제의 병영이 강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후군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이러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대규모 토목 공사로 인해 수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6. 관련 인물
수 양제는 고구려가 상국을 무시한다고 여겨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6. 1. 수나라
수 양제는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모으고, 백성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었으며,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며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좌광록 대부 곽영이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였으나, 수 양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수 양제는 요하를 건너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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