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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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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1866년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베네치아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쿠스토자 전투와 리사 해전에서 패배하는 등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쾨니히그레츠 전투 승리로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프랑스가 이를 이탈리아에 다시 양도하는 방식으로 베네치아를 합병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으며, 이후 로마 점령과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이탈리아 통일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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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다른 이름이탈리아어: Terza guerra d'indipendenza italiana
일부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탈리아 통일 운동
시기1866년 6월 20일 – 1866년 8월 12일
장소롬바르디아-베네치아
원인오스트리아의 동원 해제 요구에 대한 사르데냐의 거부
결과이탈리아의 승리
영토 변경베네토, 프리울리, 만토바가 이탈리아에 합병됨
교전 세력
교전국 1이탈리아 왕국
지원국프로이센
교전국 2오스트리아 제국
기타 교전국리히텐슈타인
지휘관
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의용군주세페 가리발디
이탈리아 군알폰소 라 마르모라
오스트리아 제국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제국 군알브레히트 대공
오스트리아 해군빌헬름 폰 테게토프
리히텐슈타인요한 2세
병력 규모
이탈리아 민치오 군11개 보병 사단, 1개 기병 사단 (총 120,000명)
이탈리아 포 군5개 보병 사단 (총 80,000명)
가리발디 부대의용군 대대 (총 20,000명)
총 병력 (이탈리아)220,000명
오스트리아 남부 군V, VII, IX 군단, 2개 기병 여단
리히텐슈타인 군80명
총 병력 (오스트리아)130,000–190,000명
사상자
이탈리아11,197명
오스트리아9,727명
관련 전투
주요 전투쿠스토차
트렌티노
가르다 호
발텔리나
몬테 수엘로
베차 디올리오
리싸
베체카
베르사
이미지
율리우시 코사크의 그림, 쿠스토차 전투 중 오스트리아 창기병이 이탈리아 베르살리에리 부대를 공격하는 모습
쿠스토차 전투 중 오스트리아 창기병이 이탈리아 베르살리에리 부대를 공격하는 모습. 율리우시 코사크 그림

2. 배경

사보이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되었지만,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나 교황령 등 이탈리아 내에 수복하지 못한 영토가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탈리아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62년 주세페 가리발디의 로마 점령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탈리아는 독일 문제를 둘러싼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을 주시했다. 1866년 이 갈등이 전쟁으로 번지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획득할 기회로 삼았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사르데냐 왕국과 두 시칠리아 왕국 군대의 통합 문제,[4] 남부 이탈리아의 불만과 격렬한 저항, Regia Marina (이탈리아 해군)을 구성했던 두 해군 간의 경쟁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866년 4월 8일,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3세의 중재를 통해 프로이센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에 맞설 준비를 했다.[2]

2. 1. 이탈리아의 통일 노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베네치아, 교황령 등 이탈리아 내에 수복하지 않은 영토가 남아 있었다. 이러한 미회수 영토는 이탈리아 국내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1862년 주세페 가리발디는 로마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중립을 유지했고, 가리발디는 제노바에서 팔레르모로 향했다. 1,200명의 자원자를 모집한 가리발디는 카타니아에서 출발해 8월 24일 칼라브리아에 위치한 멜리토에 상륙했다. 이들은 아스프로몬테 산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로마로 진군하고자 했다. 하지만 피에몬테 장군 엔리코 찰디니가 이들을 저지했으며, 아스프로몬테 전투에서 가리발디는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13]

한편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독일 문제는 1866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이 기회를 틈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점령하고자 했다. 1866년 4월 8일, 이탈리아 정부는 나폴레옹 3세의 중재 하에 프로이센 정부와 군사동맹을 맺었다.[14]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남부 전선에 맞붙을 예정이었다. 동시에 이탈리아는 해군의 우위를 이용해 달마티아 해안을 위협하고 트리에스테를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15]

베네치아의 의인화, 사자로 표현, 이탈리아(여성으로 표현)에 합류하길 희망함


전쟁 발발 시 이탈리아군은 다음과 같은 여러 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 사르데냐 왕국과 두 시칠리아 왕국 군대의 통합 문제[4]
  • 남부 이탈리아의 불만과 격렬한 저항
  • Regia Marina (이탈리아 해군)을 구성했던 두 해군 간의 경쟁

2. 2.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발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베네치아, 교황령 등 이탈리아 내에 수복하지 않은 영토가 남아 있었다. 1862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로마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아스프로몬테 전투에서 가리발디는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13]

한편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독일 문제는 1866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이 기회를 틈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정복하고자 했다. 1866년 4월 8일 이탈리아 정부는 나폴레옹 3세의 중재 하에 프로이센 정부와 군사동맹을 맺었다.[14]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남부 전선에 맞붙을 예정이었다. 동시에 이탈리아는 해군의 우위를 이용해 달마티아 해안을 위협하고 트리에스테를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15]

3. 전쟁

1866년 6월 16일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여러 독일 국가들을 공격했고, 6월 23일 이탈리아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군은 라 마르모라와 엔리코 치알디니가 지휘하는 두 군대로 나뉘어 각각 롬바르디아와 로마냐에 배치되었다. 라 마르모라는 만토바와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를 통해 진격했지만, 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하여 민치오 강을 건너 후퇴했다. 반면 치알디니는 초반에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리사 해전, 1866년 7월 20일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이탈리아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오스트리아는 을 방어하기 위해 이탈리아 주둔 군단 일부를 재배치해야 했다. 7월 5일,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3세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중재를 시도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병력 우위를 활용하여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다.

베체카 전투, 1866년 7월 21일


베르사 전투, 1866년 7월 26일


7월 14일 페라라 군사 회의에서 새로운 작전 계획이 결정되었다. 치알디니는 주력군을 이끌고 베네치아를 통과하고, 라 마르모라는 콰드릴라테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묶어두기로 했다. 카를로 디 페르사노 제독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해군은 안코나에서 출발하여 트리에스테 점령을, 주세페 가리발디의 의용군(알프스 헌병대it)은 트렌티노로 진격하여 트렌토 점령을 목표로 했다. 치알디니는 7월 8일 포 강을 건너 7월 22일 우디네로 진격했고, 가리발디는 트렌티노 침공 중 베체카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7월 20일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패배하면서 이러한 진격은 빛을 잃었다.

1866년 7월 26일, 이탈리아군은 베르사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리울리 진격의 최전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간 적대 행위 중단으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증원을 보낼 가능성이 커졌다. 8월 9일, 가리발디는 육군 최고 사령부로부터 트렌티노 철수 명령을 받고 "Obbediscoit" ("복종하겠습니다")라고 답했는데, 이는 곧 이탈리아에서 유명해졌다.

3. 1. 이탈리아의 군사적 어려움

프로이센은 1866년 6월 16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여러 독일 국가들을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사흘 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6월 23일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1]

이탈리아군은 두 개의 군대로 나뉘었다. 라 마르모라가 지휘하는 군대는 롬바르디아에 배치되어 민치오 강 서쪽에 위치했으며,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콰드릴라테로 요새를 목표로 했다. 엔리코 치알디니가 지휘하는 두 번째 군대는 포 강 남쪽의 로마냐에 배치되어 만토바로비고를 목표로 했다.[1]

라 마르모라는 먼저 만토바와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를 통해 진격했지만, 6월 24일 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하여 혼란 속에 민치오 강을 건너 후퇴했다. 반면, 치알디니는 전쟁 초반에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여러 차례의 시위만 벌였으며, 포 강 남쪽 제방의 보르고포르테에 있는 오스트리아 교두보를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1]

쿠스토자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의 반격을 예상하여 재정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발텔리나와 발 카모니카를 급습했다 (베차 도글리오 전투).[1]

3. 2. 새로운 이탈리아 공세

그러나 전쟁의 흐름은 보헤미아에서 프로이센의 승리, 특히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 전투 (또는 사도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탈리아에 유리하게 돌아섰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 중 하나를 으로 재배치해야 했다. 이 지역에 남아있는 오스트리아군은 트렌티노와 이손초 주변에 방어선을 집중했다.

1866년 7월 5일, 이탈리아 정부는 나폴레옹 3세가 상황 해결을 위해 중재를 시도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 중재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을 받고, 특히 베네치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게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벌어진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패배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병력을 빈으로 재배치하자, 라 마르모라는 병력의 수적 우위를 활용하여 승리를 거두고 협상 테이블에서 이탈리아의 상황을 개선해야 했다.

1866년 7월 14일, 페라라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새로운 이탈리아 전쟁 계획이 결정되었다.

  • 치알디니는 15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주력군을 이끌고 베네치아를 통과하고, 라 마르모라는 약 7만 명의 병력으로 콰드릴라테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묶어두기로 했다.
  • 카를로 디 페르사노 제독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해군은 안코나에서 출발하여 트리에스테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
  • 가리발디의 의용군(알프스 헌병대it)은 정규 보병 사단으로 증강되어 트렌티노로 진격하여 수도인 트렌토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치알디니는 7월 8일 포 강을 건너 7월 22일 오스트리아군과 마주치지 않고 우디네로 진격했다.[3] 그동안 가리발디의 의용군은 브레시아에서 트렌티노 침공 동안 트렌토로 진격하여 7월 21일 베체카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진격은 7월 20일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예상치 못한 패배로 인해 빛을 잃었다.

1866년 7월 26일, 베르살리에리it와 기병대로 구성된 이탈리아 혼성 부대가 토레 강 도하를 방어하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현재 로만스 디손초에 도달하여 베르사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것은 이탈리아군의 프리울리 진격의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적대 행위가 중단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증원을 보낼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남부 동맹국인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자원병에 대항하여 스텔비오 고개 서쪽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5] 1866년 8월 9일, 가리발디는 육군 최고 사령부로부터 트렌티노에서 철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의 대답은 간단히 "Obbediscoit" ("복종하겠습니다")였고, 곧 이탈리아에서 유명해졌다.

4. 결과 및 영향

1866년 프라하 화의에는 랑고바르드 철관을 이탈리아 왕에게 주는 것과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중재한 대가로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내용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네치아를 직접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평화 회담에 참여하지 못한 것과 베네치아를 프랑스로부터 선물받는 것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다.[16]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프랑스의 선물이 아닌 국민들의 의지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국민투표 이후에 베네치아를 합병하기로 결정했다.[16]

1866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빈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베네치아 영토를 양도했다.[17] 국민투표1866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열렸고, 투표 결과 이탈리아 왕국에 가입하는 것에 찬성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in Venice


1866년 7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후, 니콜스부르크 휴전으로 두 국가 간의 적대 행위가 종료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획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손초 강으로 철수했고,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넘겨졌다.[6]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와 독자적으로 휴전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6] 그러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휴전으로 비엔나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결국 8월 12일 체결된 코르몬스 휴전과 1866년 10월 3일 체결된 빈 조약을 통해 적대 행위 중단에 합의했다.

프라하 조약의 조건에는 이탈리아 국왕에게 롬바르디아 철관을 수여하고, 오스트리아가 현대의 베네토, 프리울리 일부, 그리고 만토바 시를 포함하는 베네치아를 할양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이전에 이탈리아가 사보이와 니스의 프랑스 합병에 동의한 대가로, 10월 19일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했다.[7]

빈 조약은 이탈리아에 영토 할양을 확정했다.[8] 그러나 평화 조약은 베네치아와 만토바의 합병이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이 이탈리아 왕국과의 합병에 대한 의사를 표명한 후에야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했다.[9] 주민투표는 10월 21일과 22일에 실시되었으며, 참여자의 99.9%가 이탈리아 합류를 지지하며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9][10]

한편, 7일 반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칠리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로마 점령[11](1870)과 제1차 세계 대전 말 트렌티노, 프리울리의 나머지 지역, 그리고 트리에스테의 합병으로 완성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제4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추가 정보



1866년 7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한 후, 니콜스부르크 휴전으로 양국 간의 적대 행위가 종료되었고,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획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손초 강으로 철수했고,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넘어갔다.[6]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에 오스트리아와 독자적으로 휴전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6] 그러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휴전으로 비엔나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오스트리아 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가 해군 지휘권을 잡았다.[6] 결국, 8월 12일 코르몬스 휴전과 1866년 10월 3일 빈 조약을 통해 적대 행위 중단에 합의했다.

프라하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국왕에게 롬바르디아 철관이 수여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현대의 베네토, 프리울리 일부, 그리고 만토바 시를 포함하는 베네치아를 할양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이전에 이탈리아가 사보이와 니스의 프랑스 합병에 동의한 대가로 10월 19일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했다.[7]

빈 조약은 이탈리아에 영토 할양을 확정했다.[8] 그러나 평화 조약은 베네치아와 만토바의 합병이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이 이탈리아 왕국과의 합병에 대한 의사를 표명한 후에야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했다.[9] 주민투표는 10월 21일과 22일에 실시되었으며, 참여자의 99.9%가 이탈리아 합류를 지지하며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9][10]

한편, 7일 반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칠리아 봉기도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은 로마 점령[11](1870)과 제1차 세계 대전 말 트렌티노, 프리울리의 나머지 지역, 그리고 트리에스테 합병으로 완성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제4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Sons of Garibaldi in Blue and Gray: Italians in the American Civil War Cambria Press
[2] 서적 "The Austro-Prussian War: Austria's War with Prussia and Italy in 1866"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Risorgimento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2022-01-21
[4] 웹사이트 La Terza guerra d'indipendenza http://www.150anni-l[...] 2014-02-11
[5] 웹사이트 Sonderausstellung: '1866: Liechtenstein im Krieg – Vor 150 Jahren' http://www.lie-zeit.[...] 2016-05-11
[6] 서적 Naval Strategy and Operations in Narrow Sea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03
[7] 서적 Cilindri e feluche. La politica estera dell'Italia dopo l'Unità Aracne
[8] 웹사이트 (HIS, P) Treaty between Austria and Italy, (Vienna) October 3, 1866 http://www.zum.de/ps[...] 2015-02-14
[9] 문서 Full text of "A Monograph on Plebiscites: With a Collection of Official Documents" https://archive.org/[...]
[10] 서적 Cronaca della nuova guerra d'Italia del 1866 https://books.google[...]
[11] 웹사이트 Le guerre d'Indipendenza http://www.treccani.[...] 2014-02-11
[12] 웹인용 Sonderausstellung: «1866: Liechtenstein im Krieg – Vor 150 Jahren» http://www.lie-zeit.[...] 2016-05-11
[13] 서적 Sons of Garibaldi in Blue and Gray: Italians in the American Civil War Cambria Press
[14] 서적 The Austro-Prussian War: Austria's War with Prussia and Italy in 1866 Cambridge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Risorgimento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www.treccani.[...]
[16] 문서 Full text of "A Monograph on Plebiscites: With a Collection of Official Documents" https://archive.org/[...]
[17] 웹사이트 (HIS,P) Treaty between Austria and Italy, (Vienna) October 3, 1866 http://www.zum.d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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