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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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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도특설대는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항일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국 군대에 배속된 부대이다. 1938년 창설되어, 만주국 참의원 이범익의 건의로 대대장 등을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등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했으며,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해방 후, 훈련과 지식을 갖춘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고위직에 올랐다. 이 부대 출신 중 일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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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간도 특설대
원어 명칭간도 특설대 (한국어)
間島特設隊 (중국어, 일본어)
로마자 표기Gando Teukseoldae (한국어)
Jiāndǎo Tèshèduì (중국어)
간토 토쿠세쓰 부타이 (일본어)
군사 정보
활동 기간1938년 ~ 1945년
국가만주국
소속만주국군
군종육군
규모대대
역할대반란전
본부간도성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지휘관
주요 지휘관(정보 없음)

2. 역사적 배경

1930년대 만주 지역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1932년에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로 인해 간도를 비롯한 만주 지역은 항일 무장 투쟁과 친일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간도두만강 북쪽의 지역으로, 오래전부터 많은 조선인이 이주하여 생활하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여 간도로 이주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부터 일본은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한국인에 대한 사법권을 주장했고, 1909년 간도 협약이 체결되었다.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항일 무장 단체들은 만주국과 일본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 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 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만주국과 일본 당국은 곤경에 빠졌으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8년 12월 간도특설대가 창설되었다.

2. 1. 만주국과 간도 지역의 특수성

만주국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였다. 간도는 만주의 기린성 지역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이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여 한국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이후 중국 공산당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동북항일연군을 통해 활동했다.[2]

1907년부터 일본 정부는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한국인에 대한 사법권을 주장했고, 간도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 정부와 마찰이 심화되어 1909년 간도 협약이 체결되었다. 만주 사변 이후 1931년 일본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일본은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인들의 이민을 장려했다.[2]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간도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해졌고, 현지 주민들은 친일파와 반일/반만주국 파벌로 나뉘어 많은 이들이 게릴라전에 의존했다. 이 지역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은 친일 한국인 의용병을 특수 작전 부대로 모집하여, 만주국군을 통해 주로 대게릴라전 전술을 훈련시켰다.[2]

2. 2. 간도 특설대 창설 배경

간도에서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등 반일·반만주국 투쟁으로 만주국과 일본 당국이 곤경에 빠지자, 만주국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간도특설대를 설립하였다. 대대장 등 일부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으며, 부대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다. 간도특설대는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었다.[11]

1938년 12월, 만주국군 예하 부대로 간도성 명월구에서 창설되었다. 주로 간도 지역에서 징집된 조선인 병사로 조직되었으며, 장교는 대대장과 중대장 일부가 일본계 군관이었고, 그 외에는 만주국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은 조선인 장교가 배속되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군 소속이었지만, 부대 건설, 교육, 작전 투입은 모두 일본군의 지배를 받았다.[11]

1932년 만주국 수립 후, 간도 지역은 친일파와 반일/반만주국 파벌로 나뉘어 게릴라전이 빈번했다. 일본은 이 지역을 진압하기 위해 친일 한국인 의용병을 특수 작전 부대로 모집하여 대게릴라전 전술을 훈련시켰다.[2]

1907년부터 일본 정부는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한국인에 대한 사법권을 주장했고, 1909년 간도 협약이 체결되었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인 이민을 장려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 육군에서 불가능했던 진급 기회를 만주국 군사 학교에서 찾았고, 훗날 대한민국 장군이 된 백선엽도 간도특설대에 합류했다.[3] 역사학자 필립 조웨트는 간도특설대가 일본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잔혹 행위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고 언급했다.[4]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조직이 주민과 격리된 채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이에 맞서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의 노부세 토벌대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조선인 독립 운동 세력 소탕에 공헌했다.

3. 조직 및 구성

간도특설대는 창설 초기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본부를 두고, 부관, 의무, 군수의 3실과 보병 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의 2개 연대로 편성되었다.[1] 1944년부터 본부에 부관처가 설치되어 군의, 군수, 군기, 통신, 재봉, 무선전 등을 총괄·관리했으며, 부관처에 전문 정보 활동을 담당하는 군관을 배치하고 현지 정보반을 직접 지휘하게 했다.[1]

일반 대원은 모두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제1기부터 제7기까지 모병했다.[1] 모병 대상은 간도성 내에 거주하며, 국민학교 또는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과 일본어 능력을 갖춘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의 조선인 남자였다.[1] 제1기는 200명, 제2기는 100명 정도를 모집했지만, 제3기 이후는 약 80명으로 고정되었다.[2] 제1기부터 제7기까지 약 690명의 일반 대원이 입대했지만, 실제 평균 인원은 지휘관을 포함하여 300명 전후였다.[1]

3. 1. 초기 편성

간도 특설대는 만주국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설립되었으며, 대대장 등 일부 직위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부대 명칭도 여기서 유래했으며,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었다.[11]

창설 초기 간도 특설대는 본부에 부관, 의무, 군수의 3실과 보병 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의 2개 연대로 구성되었다. 보병 연대는 3개, 기병 박격포 연대는 2개의 내무반으로 구성되었으나, 부대 출동 시에는 내무반이 여러 개의 배(소대)로 개편되고, 각 배에는 여러 개의 반(분대)이 배치되었다.

1940년 3월, 일반 대원 제2기생 모집 후에는 신병 연대가 편성되어 신병 훈련을 담당했다. 1940년 12월 이후에는 보병 제1연대, 보병 제2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로 개편되어 각 연대에 3개 배, 각 배에 3~4개 반을 두는 편제가 되었다. 열하성 파견 전까지 이 편제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44년부터 본부에는 부관처가 설치되어 군의, 군수, 군기, 통신, 재봉공, 무선전 등을 총괄·관리했다. 또한 부관처에는 전문 정보 활동을 담당하는 군관이 배치되었고, 1944년에 신설된 현지 정보반을 직접 지휘했다.

일반 대원은 모두 조선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제1기부터 제7기까지 모병이 이루어졌다. 모병 대상은 간도성 내에 거주하며, 국민학교 또는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과 일본어 능력을 갖춘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의 조선인 남자였다. 제1기는 200명, 제2기는 100명 정도가 모집되었지만, 제3기 이후는 약 80명으로 고정되었다. 제1기부터 제7기까지 약 690명의 일반 대원이 입대했지만, 실제 평균 인원은 지휘관을 포함하여 300명 전후였다.

3. 2. 부대 개편

창설 초기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본부를 두고 부관, 의무, 군수의 3실과 보병 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의 2개 연대를 설치하였다.[1] 보병 연대에는 3개, 기병 박격포 연대에는 2개의 내무반을 두었으나, 부대 출동 시에는 내무반을 수 개의 배(소대)로 개편하고 각 배에 수 개의 반(분대)을 배치하였다.[1]

1940년 3월 일반 대원 제2기생 모집 후, 일시적으로 신병 연대를 편성하여 훈련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보병 제1연대, 보병 제2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로 개편하였다. 각 연대는 3개 배, 각 배는 3~4개 반으로 구성되었다.[1] 이후 열하성 파견 전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2]

1944년부터 본부에 부관처를 설치하여 군의, 군수, 군기, 통신, 재봉, 무선전 등을 총괄·관리하였다.[1] 또한 부관처에 전문 정보 활동 담당 군관을 배치하고, 1944년 신설된 현지 정보반을 직접 지휘하게 하였다.[1]

3. 3. 구성원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만주국에 간도특설대 설립을 제안했고, 대대장 등 일부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었다.[11]

150여 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으며,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 김백일, 송석하, 김홍준 등 6명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 원로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17]

간도특설대는 창설 초기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본부를 두고 부관, 의무, 군수의 3실과 보병 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의 2개 연대로 구성되었다. 보병 연대에는 3개, 기병 박격포 연대에는 2개의 내무반이 있었고, 부대 출동 시에는 내무반이 수 개의 배(소대)로, 각 배는 수 개의 반(분대)으로 개편되었다.

1940년 3월 제2기생 모집 후 신병 연대가 편성되어 신병 훈련을 담당했으나, 1940년 12월 보병 제1연대, 보병 제2연대, 기병 박격포 연대로 개편되어 각 연대 3개 배, 각 배 3~4개 반 편제가 되었다. 이 편제는 러허성 파견 전까지 유지되었다.

1944년부터 본부에 부관처가 설치되어 군의, 군수, 군기, 통신, 재봉공, 무선전 등을 관리했고, 부관처 군관이 정보 활동을 담당하며 1944년 신설된 현지 정보반을 지휘했다.

일반 대원은 모두 조선인이었으며, 제1~7기생까지 모병되었다. 간도성 거주, 국민학교 또는 보통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과 일본어 능력을 갖춘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 조선인 남자가 모병 대상이었다. 제1기는 200명, 제2기는 100명, 3기 이후는 약 80명이 모집되었다. 제1~7기까지 약 690명이 입대했지만, 환자, 지원자, 퇴역자로 인해 상시 평균 인원은 지휘관 포함 300명 전후였다.

간도특설대 주요 인물
성명민족직책재임 기간경력해방 후 경력
쓰치야 잇세이일본인보병 제1연대장불명불명불명
아키바 마사시일본인보병 제1연대장불명불명불명
미노구치 진사부로일본인보병 제1연대장~1942년불명불명
김찬규조선인보병 제1연대장~1945년 8월중앙육군훈련처(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김백일로 개명, 대한민국 육군 행정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 제1군단장, 한국 전쟁 중 항공 사고로 사망, 대한민국 육군 중장
이자와 리쿠오일본인보병 제2연대장~1942년불명불명
이토 토시아키일본인보병 제2연대장불명중훈 6기불명
강재호조선인보병 제2연대장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 1943년 2월까지 광명 중학교 배속 장교대한민국 육군 소령
이타오 히데지일본인기박 연대장~1945년 8월중훈 5기1970년대 이시카와현 하쿠이 고등학교 근무
김홍준조선인기박 연대장불명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남조선 국방 경비대 제4연대장, 1946년 9월 사고사
야라 토모하루일본인본부 부관불명1940년 6월 중훈 졸업 후 특설대 배속불명
이시히봉조선인본부 부관불명중훈 5기, 일본 육사 54기 상당불명
이원형조선인본부 부관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불명
박봉조조선인불명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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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조선인불명불명중훈 6기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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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충식조선인보병 제2연대 제1배 중사 반장불명특설대 3기생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대한민국 육군 대장
김동근조선인보병 제2연대 제1배 제4반 중사 반장불명특설대 3기생중국 인민 해방군 입대, 르허성 활동 경력으로 징역 7년
김대식조선인불명불명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홍청파조선인불명불명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조선의용군 참가, 조선 인민군 제6사단 연대장
박창암조선인불명불명불명대한민국 육군 준장


4. 주요 활동

간도 특설대는 만주국동북항일연군 등 반일 무장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1938년에 창설한 특수 부대였다. 당시 만주국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등의 반일, 반만주국 투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만주국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을 주도했고, 대대장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부대 명칭도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했으며,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 소속이었다.[11]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 조직을 주요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만주국 내에서 저우바오중이 지휘하던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했고, 1944년에는 러허성(지금의 베이징시)으로 이동하여 팔로군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간도 특설대는 작전 중 다음과 같은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 1939년 5월: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 중 산나물을 뜯던 백성들을 살해하고 불태움.[12]
  • 1939년 7월: 천보산에서 항일연군 전사자의 간을 꺼내 훔쳐 먹음.[12]
  • 1941년 겨울: 체포한 항일군 2명 중 1명을 처형하고 머리를 베어 기념사진 촬영.[12]
  • 1941년 1월: 항일연군 여성 전사 4명을 체포,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13]
  • 1942년 8월: 양민증이 없다는 이유로 농민 두 명에게 형벌을 가하고 체포.[13]


전사한 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16용사 기념비'가 세워졌고, 만주국 정부는 전사자들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생존자에게는 무공장을 수여하기도 했다.[13]

4. 1. 항일 무장 세력 진압

1938년 12월, 만주국 내에서 동북항일연군 등 항일 무장 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간도 특설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만주국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주도하여 설립되었으며, 대대장 등 일부 직위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간도 특설대는 만주국군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았다.[11]

당시 항일 조직들은 군경의 단속과 집단 주거 마을 건설로 인해 주민과 격리된 채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에 대응하여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간도 특설대는 저우바오중이 이끌던 동북항일연군(1940~1941년 활동, 1942년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으로 개편)과 전투를 벌였다.

1944년 1월, 간도 특설대는 러허성(현재의 베이징시)으로 이동했다. 이후 1945년 1월까지 러허성 밀원현 석갑진 일대에서, 그리고 해산될 때까지 하북성 난남현에서 팔로군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주요 토벌 대상은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 팔로군 등 한족, 조선인, 그리고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만주 기린성 지역의 간도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1905년 일본의 한국 강점 이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병합에 반대하여 간도로 이주해 한국 독립 운동을 펼쳤다.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간도 지역은 친일파와 반일/반만주국 파벌로 나뉘어 매우 불안정했다. 일본은 이 지역을 진압하기 위해 친일 한국인 의용병을 모집하여 특수 작전 부대를 만들고, 대게릴라전 전술을 훈련시켰다.[2]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 육군에서 얻기 힘든 진급 기회를 찾아 만주국 군사 학교에 들어가 간도 특설대에 합류했다. 훗날 대한민국 장군이 된 백선엽도 그 중 한 명이었다.[3] 역사학자 필립 조웨트는 간도 특설대가 일본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쳤고,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평가했다.[4]

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의 노부세 토벌대 토벌 작전에 참여하여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 소탕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일본군으로부터 "상승의 조선인 부대"로 높이 평가받았다. 1944년에는 만주국군 북지나 임시 파견대(철석 부대)에 소속되어 화북 전선에 투입, 팔로군 계열의 중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4. 2. 중국 전선 투입

간도특설대는 주로 간도 지역에서 징집된 조선인 병사로 조직되었으며,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노부세 토벌대의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조선인 독립 운동 세력 소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활약은 일본군으로부터 "상승의 조선인 부대"로 높이 평가받았다.

1944년에는 만주국군 북지나 임시 파견대(철석 부대, 가토 도지 중장) 직할로 전황이 악화된 화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의 일익으로서 팔로군 계열의 중국군과 싸웠다. 종전 당시에는 철석 부대에 배속되어 북지나의 치안 유지 활동을 하였다.

4. 3. 잔혹 행위

간도특설대는 만주국과 일본 당국이 동북항일연군 등 반일, 반만주국 투쟁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부대였다. 이들은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으며, 항일 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기록이 있다.[4]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 중 산나물을 뜯던 무고한 백성들을 체포하여 살해하고 불에 태웠다.[12] 같은 해 7월 1일에는 천보산에서 항일연군 전사자의 간을 꺼내 훔쳐 먹은 사건도 있었다.[12]

1941년 겨울에는 체포한 항일군 2명 중 1명을 처형하고, 그 머리를 베어 기념 사진을 찍었다.[12] 같은 해 1월에는 항일연군 여성 전사 4명을 체포,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기도 했다.[13] 1942년 8월에는 양민증이 없다는 이유로 농민 두 명에게 형벌을 가하고 체포했다.[13]

5. 간도 특설대 출신 인물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군 소속이었지만, 부대 건설, 교육, 작전 투입은 모두 일본군 지배하에 있었다. 150여 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간도특설대 출신 인물[17]
성명민족직책재임 기간경력해방 후 경력
김찬규
(金澤俊南)
조선인보병 제1연대 연대장~1945년 8월중앙 육군 훈련 처(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김백일로 개명, 대한민국 육군 행정 참모 부장, 작전 참모 부장, 제1군단장. 한국 전쟁 중 이동 중 항공 사고로 사망, 대한민국 육군 중장
강재호
(혼고 마사야스)
조선인보병 제2연대 연대장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 1943년 2월까지 광명 중학교 배속 장교대한민국 육군 소령
김홍준
(가네자와 홍이치)
조선인기박 연대 연대장불명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남조선국방경비대 제4연대장, 1946년 9월 사고사
김석범
(가네야마 아키라)
조선인정보반 주임불명중훈 5기, 일본 육사 54기 상당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이시히봉
(이하라)
조선인본부 부관불명중훈 5기, 일본 육사 54기 상당
이원형
(미치도 마사요시)
조선인본부 부관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
박봉조
(야마토 세이키치)
조선인불명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
마동악조선인군의불명특설대 창설 요원
신현준
(우다가와 요시토)
조선인보병 제1연대 배장1938년 12월 ~
1944년 2월
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신현준으로 개명,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최남근
(마츠야마)
조선인제1연대 배장불명중훈 7기여수·순천 사건 후 제4여단 참모장.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총살
최경만
(쓰루하라 타케오)
조선인보병 제2연대 배장불명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준장
김명철
(가이바라 아키테츠)
조선인보병 제2연대 배장불명군교 2기김묵으로 개명, 한국 전쟁 개전 시 제8사단 공병대대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6]
이집룡
(오하시 슈류)
조선인기박 연대 배장특설대 1기생, 육군 훈련 학교 7기이룡으로 개명, 대한민국 육군 소장
태용범조선인보병 제1연대 소위불명특설대 1기생, 입대 후 중훈 8기 입학
손병일조선인보병 제1연대 소위불명특설대 1기생, 입대 후 중훈 9기 입학
윤수현조선인보병 제1연대 소위불명특설대 1기생, 입대 후 중훈 9기 입학대한민국 육군 병참감[7], 대한민국 육군 준장
송석하
(무하라 히로노리)
조선인기박 연대불명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소장
백선엽
(시라카와 요시노리)
조선인기박 연대, 정보반불명중훈 9기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대장
윤춘근조선인불명불명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소장
문리정조선인불명불명중훈 5기군사 영어 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 중령
김용기조선인불명불명중훈 6기
박춘식
(우미노 하루키)
조선인보병 제1연대 후보 소위 반장불명특설대 1기생대한민국 육군 소장
임충식
(이시카와 사다키치)
조선인보병 제2연대 제1배 중사 반장불명특설대 3기생대한민국 합동 참모 의장, 대한민국 육군 대장
김동근
(가네모리 아키오)
조선인보병 제2연대 제1배 제4반 중사 반장불명특설대 3기생중국 인민 해방군에 입대, 르허성 활동 경력이 밝혀져 징역 7년형
김대식조선인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홍청파
(홍소청원)
조선인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조선의용군 참가, 조선인민군 제6사단 연대장
박창암조선인불명대한민국 육군 준장


5. 1. 대한민국 군경 주요 인사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조선인 장교는 150여 명이며, 이 중 대한민국 군경의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이들 중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 김백일, 송석하, 김홍준 등 6명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 원로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17]

간도특설대 주요 인물[17]
이름직책경력해방 후 경력
강재호보병 제2연대 연대장중훈 4기, 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 1943년 2월까지 광명 중학교 배속 장교대한민국 육군 소령
김찬규보병 제1연대 연대장중앙 육군 훈련 처(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김백일로 개명, 대한민국 육군 행정 참모 부장, 작전 참모 부장, 제1군단장. 한국 전쟁 중 이동 중 항공 사고로 사망, 대한민국 육군 중장
김홍준기박 연대 연대장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남조선국방경비대 제4연대장, 1946년 9월 사고사
김석범정보반 주임중훈 5기, 일본 육사 54기 상당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신봉균보병 제1연대 배장중훈 5기, 특설대 창설 요원신현준으로 개명,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최남근제1연대 배장중훈 7기여수·순천 사건 후 제4여단 참모장.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총살
최경만보병 제2연대 배장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준장
이집룡기박 연대 배장특설대 1기생, 육군 훈련 학교 7기이룡으로 개명, 대한민국 육군 소장
송석하기박 연대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소장
백선엽기박 연대, 정보반중훈 9기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대장
윤춘근중훈 5기대한민국 육군 소장
박춘식보병 제1연대 후보 소위 반장특설대 1기생대한민국 육군 소장
임충식보병 제2연대 제1배 중사 반장특설대 3기생대한민국 합동 참모 의장, 대한민국 육군 대장
김대식훈춘 국경 감시대 출신, 특설대 창설 요원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박창암대한민국 육군 준장


5. 2.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봉천군관학교 출신 강재호,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김홍준, 백선엽 등과 기타 출신 이용, 윤춘근, 박창암 등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다.[17] 이들 중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 김백일, 송석하, 김홍준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17]

역사학자 필립 조웨트는 간도특설대가 일본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잔혹 행위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고 언급했다.[4]

일본의 항복 이후, 간도특설대 구성원 중 다수는 훈련, 한반도 북부 지형에 대한 상세한 지식,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전술을 이유로 미국 육군에 의해 새로운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고위직에 올랐다.

6. 평가 및 영향

간도특설대는 1939년 12월부터 1945년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에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14]

간도특설대는 주로 간도 지역에서 징집된 조선인 병사로 조직되어 일본군의 지배를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노부세 토벌대의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조선인 독립 운동 세력을 소탕했고, 화북 전선에 투입되어 팔로군 계열의 중국군과 싸우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부대는 해체되었지만, 부대 출신 장교들은 초기 대한민국 육군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연대장이나 장군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건국 후 반란 진압과 공산계 게릴라 토벌, 한국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홍청파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람도 소수 있었다.

6. 1. 부정적 평가

간도특설대는 만주국의 징병제를 선도하고, 조선인의 대화혼(大和魂)을 고취하는 부대가로 그 정신을 표현했다.[14][15] 간도는 만주 지린성에 위치한 한인 거주 지역으로, 1905년 일본의 한국 강점 이전부터 많은 한국인이 이주하여 한국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 독립운동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 하에 동북항일연군을 통해 이루어졌다.

1907년 일본은 모든 한국인에 대한 사법권을 주장하며 청나라와 갈등을 빚었고, 1909년 간도 협약을 체결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전역을 장악하고 한국인 이민을 장려했다. 1932년 만주국 수립 후, 간도는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일본은 이 지역을 진압하기 위해 친일 한국인 의용병을 모집하여 특수 작전 부대인 간도특설대를 창설했다.[2]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 육군에서 얻을 수 없었던 진급 기회를 찾아 만주국 군사 학교에 입학했고, 간도특설대에 합류했다. 여기에는 훗날 대한민국 장군이 된 백선엽도 포함되었다.[3] 역사학자 필립 조웨트는 간도특설대가 일본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잔혹 행위로 명성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고 평가했다.[4]

일본의 항복 이후, 간도특설대 구성원 중 다수는 훈련 경험, 한반도 북부 지형 지식, 조선인민군 전술 이해 등을 이유로 미국 육군에 의해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고위직에 올랐다.

6. 2. 대한민국 군에 미친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간도특설대가 해체되었지만, 이 부대 출신의 장교들은 초기 대한민국 육군에서 중요한 지위를 독점하였다.[1] 이들은 연대장급이나 장군까지 승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 반란 진압과 공산계 게릴라 토벌에 활약했으며, 이후 한국 전쟁에서도 싸웠다.[1] 그러나 홍청파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람도 소수 있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Death of controversial four-star general stokes S. Korea's ideological divide http://english.hani.[...]
[2] 웹사이트 Korea Under the Rising Sun https://warfarehisto[...] 2016-09-29
[3] 웹사이트 Korean War Hero Paik Sun-yup Dies Aged 99 https://world.kbs.co[...]
[4] 서적 Rays of the Rising Sun Helion & Company Limited
[5] 뉴스 “抗日武装軍”を討伐したその手で大韓民国の要職を接収 http://japan.hani.co[...] 2013-03-10
[6] 서적 朝鮮戦争/韓国篇 中巻 50年春からソウルの陥落まで 原書房
[7] 간행물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5권(창군기) http://www.imhc.mil.[...] 한국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2021-04-25
[8] 문서 김일성이 일원이었다.
[9] 문서 중국 혁명군이다.
[10] 문서 [[김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떨어져나간 화북조선독립동맹이 중심세력이다.
[11] 서적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12] 서적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13] 서적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14] 서적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2004-02-25
[15] 문서 야마토 타마시이, 일본의 민족정신을 뜻하는 말
[16] 문서 당시 [[쇼와 천황]]
[17] 저널 백선엽이 구체적으로 독립군을 소탕한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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