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 캉틀루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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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프 캉틀루브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이며, 특히 오베르뉴 지방의 민요를 편곡한 《오베르뉴의 노래》 연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뱅상 당디에게 사사하고 스콜라 칸토룸에서 수학했으며, 오페라와 민족주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캉틀루브는 프랑스 전통 민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힘썼으며, 1941년에는 비시 정권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는 1957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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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캉틀루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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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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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리조제프 캉틀루브 드 말라레 (Marie-Joseph Canteloube de Malaret) |
출생 | 1879년 10월 21일 |
출생지 | 프랑스 아르데슈주 앙노네 |
사망 | 1957년 11월 4일 |
사망지 | 프랑스 에손주 그리니 |
국적 | 프랑스 |
직업 및 장르 | |
직업 | 작곡가 |
장르 | 국민악파 |
참고 |
2. 생애
조제프 캉틀루브는 오베르뉴 지방의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프레데리크 쇼팽의 친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뱅상 당디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스콜라 칸토룸에서 뱅상 당디 등에게 배우며, 데오다 드 세브락 등과 교류하였다.
1907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 《산에서》를 작곡한 것을 시작으로, 《감상적인 대화》(1908), 《가을의 목가》(1910), 교향시 《먼 곳의 공주님으로》(1912) 등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1910년부터는 자작 대본으로 오페라 《농장》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1925년에 완성, 우제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25년, 캉틀루브는 고향 오베르뉴의 민요를 보급하기 위해 '라 부레'라는 단체를 창단하고, 민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다수 작곡했다. 《오베르뉴의 노래》는 그의 대표작으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듬어져 완성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정권에 협력하여 악시옹 프랑세즈에 기고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요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작곡 활동 외에도 음악학자로서 프랑스 전통 민요를 채보하고, 뱅상 당디와 데오다 드 세브락의 평전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캉틀루브는 1957년 에손주 그리니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캉틀루브는 오베르뉴 출신 가문에서 아르데슈주 아농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부터 프레데리크 쇼팽의 친구인 아멜리에 되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바칼로레아를 획득한 후, 보르도의 은행에서 일했다. 1896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캉틀루브는 앙노네 말라레에 있는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1899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였다. 이후 1901년에 샤를로트 마르테 칼라레와 결혼하여 1903년에는 쌍둥이 아들 피에르와 기를 낳았다.캉틀루브는 1901년부터 뱅상 당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기를 주저했으나, 당디의 거듭된 설득으로 1907년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한다. 캉틀루브는 뱅상 당디와 Charles Bordes|샤를 보르드프랑스어의 가르침 아래 Déodat de Séverac|데오다 드 세브락프랑스어, 이사크 알베니스, 알베르 루셀 등과 교제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학교를 떠났다.
2. 2. 초기 작품 활동
캉틀루브는 1901년부터 뱅상 당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기를 주저했으나, 당디의 거듭된 설득으로 1907년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한다. 캉틀루브는 뱅상 당디와 Charles Bordes|샤를 보르드프랑스어의 가르침 아래 Déodat de Séverac|데오다 드 세브락프랑스어, 이사크 알베니스, 알베르 루셀 등과 교제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학교를 떠난다.1907년에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산에서''(Dans la montagne)''》를 쓴다. 이후 보컬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감상적인 대화''(Colloque sentimental)'' (1908)》와 관현악을 위한 《가을의 목가''(Eglogue d'Automne)'' (1910)》, 교향시 《먼 곳의 공주님으로''(Vers la Princesse lointaine)'' (1912)》, 관현악 반주 가곡 《봄에''(Au Printemps)''》와 연작 멜로디집 《대지 ''L' Arada'' (1922)》 등을 작곡한다.
2. 3. 오페라 작곡과 민족주의 음악 활동
캉틀루브는 1910년부터 1925년까지 자작 대본으로 첫 오페라 《농장''Le Mas''》(masoc)을 작곡했다.[1] 이 3막 오페라는 1925년에 우제루 상과 10만 프랑을 수상했다.[1] 그러나 오페라 코미크의 이사들은 이 작품에 부정적이어서 1929년 4월 3일 초연 이후 다시는 연주되지 못했다.[1]두 번째 오페라인 《베르킨게토릭스''Vercingétorix''》는 퓌드돔주 리옴 시장 에티엔 클레망텔(Étienne Clémentel)과 엘베 루비크(Hervé Louwyck)의 합작 대본에 의한 4막의 오페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을 다루고 있다.[1] 1933년 6월 22일에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
1925년, 캉틀루브는 몇 명의 오베르뉴 출신 젊은이들과 함께 파리에서 '라 부레 (La Bourrée)'라는 모임을 창단하여 고향의 민요를 보급하려 노력했다.[1] 캉틀루브는 민요에 대해 "농민의 노래라는 것은 형식이 아닌, 정서나 표현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예술의 수준으로 도달하곤 한다"고 말했다.[1]
이후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많이 작곡했는데, Rouergue프랑스어, 리무쟁 등지의 민요를 기반으로 《상부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e Haute-Auvergne''》와 지역의 종교적인 민요에 의한 《오베르뉴의 종교 노래''Chants religieux d' Auvergne''》, 필리아스 르벡의 시에 의한 《갈리아인의 찬가 ''L' Hymne des Gaules''》를 작곡하였다.[1] 또한, 갈리아 음유시인 대학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1]
2. 4. 비시 정권 협력과 이후 활동
1941년 캉틀루브는 나치 점령하의 비시 정권에 협력하며 친군주제 언론인 악시옹 프랑세즈에 기고했다.[1] 이후 여러 라디오 방송국에서 민요 프로그램 "프랑스의 노래"를 진행했다. 이 방송은 지역의 대중 음악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학자로서도 프랑스 전통 민요를 채보하고 간행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1949년에는 은사인 뱅상 당디, 1950년에는 친구인 데오다 드 세브락의 평전을 집필하였다.
2. 5. 《오베르뉴의 노래》와 말년
캉틀루브는 1925년 파리에서 고향의 민요를 보급하고자 하는 단체인 '라 부레(La Bourrée)'를 창단했다.[1] 그는 민요에 대해 "농민의 노래는 형식이 아닌, 정서나 표현에 있어서 가장 순수한 예술의 수준으로 도달하곤 한다"라고 말했다.[1] 이후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많이 작곡했는데, 루에르그, 리무쟁 등지의 민요를 기반으로 《상부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e Haute-Auvergne''》와 지역의 종교적인 민요에 의한 《오베르뉴의 종교 노래''Chants religieux d' Auvergne''》, 필리아스 르벡의 시에 의한 《갈리아인의 찬가 ''L' Hymne des Gaules''》를 작곡하였다. 갈리아 음유시인 대학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1941년에는 나치 지배하의 비시 프랑스에 협력하며 친군주제 언론인 악시옹 프랑세즈에 투고하였다.[1] 이후 여러 라디오 방송국에서 민요 프로그램 "프랑스의 노래''folklore français''"를 진행했다. 이 방송은 지역의 대중 음악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작곡가가 아닌 음악학자로서도 프랑스 전통 민요를 채보하고 간행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1949년에는 은사인 뱅상 당디, 1950년에는 친구인 데오다 드 세브락의 평전을 집필하였다.
캉틀루브는 1924년부터 1955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 Auvergne''》를 다듬어 마침내 완성시켰다. 이 가곡집은 프랑스 민요의 소박한 선율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눈부신 음색으로 오베르뉴의 풍경을 표현한다.
3. 주요 작품
캉틀루브의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관현악곡, 가곡 등이 있다.
- 1907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4악장 모음곡 《산악에서(Dans la montagne)》를 작곡하여 국민 음악 협회에서 상연되었다.
- 1910년부터 1913년에 걸쳐 옥시탄어 오페라 《농장(Le Mas)》을 작곡했다.
- 《베르생제토릭스》(Vercingétorix): 리옹 시장 Étienne Clémentel|에티엔느 클레망텔프랑스어과 에르베 루윅(Hervé Louwyck)의 공동 대본에 영감을 받은 4막의 오페라이다.
- 성악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감상적인 대화》(Colloque sentimental)
- 관현악을 위한 《가을의 목가》(Eglogue d'Automne)
- 교향시 《머나먼 공주에게》(Vers la Princesse lointaine)
- 관현악 반주 가곡 《봄에》(Au Printemps)
- 연작 가곡집 《대지》(L'Arada)
- Rouergue프랑스어와 리무쟁, Quercy|퀘르시 (프랑스)|퀘르시프랑스어의 민요를 바탕으로 한 《오트오베르뉴의 노래》
- 지역 종교 민요에 의한 《오베르뉴의 종교 노래》(Chants religieux d'Auvergne)
- 필리우스 루베스크의 시에 의한 《갈리아인의 찬가》(L'Hymne des Gaules)
캉틀루브의 대표작인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Auvergne)》는 완성하는 데 30년 이상이 걸렸다.
3. 1. 오페라
1907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4악장 모음곡 《산악에서(Dans la montagne)》를 작곡하여 국민 음악 협회에서 상연되었다. 그 외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성악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감상적인 대화(Colloque sentimental)》(1908년), 관현악을 위한 《가을의 목가(Eglogue d'Automne)》(1910년), 교향시 《머나먼 공주에게(Vers la Princesse lointaine)》(1912년), 관현악 반주 가곡 《봄에(Au Printemps)》과 연작 가곡집 《대지(L'Arada)》(1922년)가 있다.1910년부터 1913년에 걸쳐 자작 대본으로 옥시탄어 오페라 《농장(Le Mas)》을 작곡했다. 이 3막의 첫 번째 오페라는 1925년 우젤 상을 수상하여 10만 프랑을 받았다. 그러나 오페라 코미크 이사들의 반응은 출판사 심사위원만큼 열광적이지 않았고, 출판사의 압력으로 1929년 4월 3일 초연되었지만, 두 번 다시 재연되지 않았다. 두 번째 작품 《베르생제토릭스(Vercingétorix)》는 리옹 시장 Étienne Clémentel|에티엔느 클레망텔프랑스어(Étienne Clémentel)과 에르베 루윅(Hervé Louwyck)의 공동 대본에 영감을 받은 4막의 오페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을 다루고 있다. 1933년 6월 22일에 초연되었지만, 극장용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3. 2. 관현악곡
조제프 캉틀루브는 성악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감상적인 대화(Colloque sentimental)》(1908년), 관현악을 위한 《가을의 목가(Eglogue d'Automne)》(1910년), 교향시 《머나먼 공주에게(Vers la Princesse lointaine)》(1912년), 관현악 반주 가곡 《봄에(Au Printemps)》와 연작 가곡집 《대지(L'Arada)》(1922년)를 작곡했다.3. 3. 가곡
조제프 캉틀루브는 성악과 현악 4중주를 위한 《감상적인 대화》(Colloque sentimental)(1908년), 관현악 반주 가곡 《봄에》(Au Printemps)과 연작 가곡집 《대지》(L'Arada)(1922년) 등을 작곡했다.1925년에는 오베르뉴 출신 젊은이들과 문화 단체 "라 부레(La Bourrée)"를 파리에서 결성하여 고향의 민요와 명승지를 알리고자 했다. 캉틀루브는 "농민의 노래는 형식 면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정서와 표현에 있어서는 가장 순수한 예술 수준에 종종 도달한다"라고 믿었다. les chants paysans s'élèvent bien souvent au niveau de l'art le plus pur, par le sentiment et l'expression, sinon par la forme프랑스어 Rouergue프랑스어와 리무쟁, Quercy|퀘르시 (프랑스)|퀘르시프랑스어의 민요를 바탕으로 한 《오트오베르뉴의 노래》, 지역 종교 민요에 의한 《오베르뉴의 종교 노래(Chants religieux d'Auvergne)》, 필리우스 루베스크의 시에 의한 《갈리아인의 찬가(L'Hymne des Gaules)》를 작곡했으며, 켈트 음유 시인 대학교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캉틀루브는 대표작인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Auvergne)》를 완성하는 데 30년 이상을 소비했다. 애정이 담긴 이 가곡집은 오베르뉴의 풍경을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음색으로 묘사하여 프랑스 민요의 소박한 선율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4. 음악적 특징과 영향
캉틀루브는 오베르뉴 지방의 민요를 수집하고 편곡하여 클래식 음악과 접목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Auvergne)》는 오베르뉴 지방의 아름다운 풍경을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음색으로 표현하여 프랑스 민요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농민의 노래는 형식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지만, 정서와 표현에 있어서는 가장 순수한 예술 수준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1925년 오베르뉴 출신 젊은이들과 함께 문화 단체 "라 부레(La Bourrée)"를 결성하여 고향의 민요와 명승지를 알리는 데 힘썼다. 또한, 루에르그와 리무쟁, 퀘르시의 민요를 바탕으로 《오트오베르뉴의 노래》를 작곡하고, 지역 종교 민요를 바탕으로 《오베르뉴의 종교 노래(Chants religieux d'Auvergne)》를 작곡하는 등 민속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다.
캉틀루브는 작곡 활동 외에도 음악 학자로서 프랑스 민요를 채보하여 출판하고, 뱅상 댕디와 데오다 드 세브라크의 평전을 집필하는 등 음악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1941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비시 정권에 참여하여 군주제를 옹호하는 기관지에 기고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요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지방 대중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5. 캉틀루브에 대한 평가
조제프 캉틀루브는 민요를 수집하고 편곡하여 클래식 음악과 접목한 작곡가이자 음악학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오베르뉴의 노래(Chants d'Auvergne)》는 오베르뉴 지방의 아름다운 풍경을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음색으로 묘사하여 프랑스 민요의 소박한 선율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캉틀루브는 "농민의 노래는 형식 면에서는 부족할지라도, 정서와 표현에 있어서는 가장 순수한 예술 수준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캉틀루브는 작곡 활동 외에도 음악학자로서 프랑스 민요를 채보하고 출판하는 데 힘썼으며, 뱅상 댕디와 데오다 드 세브라크의 평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941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비시 정권에 참여하여 군주제를 옹호하는 기관지 『액션 프랑세즈』에 기고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요를 보급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6. 참고 문헌
- 스탠리 세이디(Stanley Sadie) 편집, [1992] (1994).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영어》, 제1권, A-D, 챕터: "Canteloube (de Malaret), (Marie) Joseph영어" (Richard Langham Smith영어 저), 뉴욕: 맥밀란.
- L.G. 부리아그(Bourriague), ''Canteloube프랑스어''(툴루즈, 1941)
- 프랑수아즈 쿠니오-라지넬(Françoise Cougniaud-Rajinel), ''Joseph Canteloube: un barde du terroir 1879–1957프랑스어''(베지에, 1988)
- 장-베르나르 카우르 다스프리(Jean-Bernard Cahours d'Aspry), ''Joseph Canteloube (1879–1957): chantre de l'Auvergne et d'ailleurs프랑스어''. (비아리츠: Séguier프랑스어,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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