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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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확은 당나라 시기의 인물로, 낙양 출신이다. 837년 진사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중서시랑, 감수국사를 겸임하며 유교에 정통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870년 진해군 절도사로 좌천되었고, 이후 하중절도사를 역임하다 사망했다. 동생 조분 또한 관료로 활동했으며, 두 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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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확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조확 |
| 출생 | 기원전 200년경 |
| 사망 | 기원전 124년 |
| 시대 | 전한 |
| 주요 활동 | 관료, 정치인, 사상가 |
| 관직 | |
| 역임 | 중대부 제남태수 어사대부 |
| 사상 | |
| 학문 | 황로학 |
| 가족 | |
| 아버지 | 조참 |
| 관련 인물 | |
| 상관 | 한 문제 |
2. 생애
조확은 당나라 낙양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6] 그의 가계는 할아버지 조주(曹周)와 아버지 조경백(曹景伯)까지만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7] 아버지 조경백은 당 덕종 803년 진사과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과거인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6] 조확에게는 남동생 조분(曹汾)이 있었으며, 조분은 훗날 당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다.[1]
조확은 당 문종 때인 837년 진사과에 급제한 후, 여러 지방 관찰사의 막료를 지냈다.[6] 이후 장안으로 소환되어 어사(御史)인 시어사(侍御史)로 재직했고, 공부(工部)원외랑(工部員外郎)을 역임하며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6] 그는 공부낭중(工部郎中)으로 승진했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겸했다.[6] 이후 중서성(中書省)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하남(河南) (낙양 지역) 지사(知事)를 대리했으며, 병부(兵部)시랑(侍郞)을 역임했다.[6]
863년, 병부시랑 겸 판탁지(判度支)였던 조확은 당 의종에게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8] 이후,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감수국사(監修國史) 직책을 추가로 제수받았다. 조확은 유학에 정통하고 일 처리에 신중했으며, 법도를 준수하였다고 전해진다.[6] 867년 3월, 당 의종은 총애하는 악공(樂工) 이가급(李可及)을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으로 임명하였는데, 조확은 이 직책이 악공에게는 부적합하다고 지적하였으나, 의종은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8]
870년까지 재상을 지낸 조확은 재임 동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까지 승진했다. 870년 3월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장쑤성 전장시)로 부임하였으며, 동중서문하평장사 직함은 명예직으로 계속 유지하였다.[9] 이후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본거지는 현 산시성 윈청시)로 전임되었고, 재임 중 하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사망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10]
2. 1. 출신 배경
조확은 당나라의 동도(東都)였던 낙양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6] 그의 가계는 할아버지 조주(曹周)와 아버지 조경백(曹景伯)까지만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7] 아버지 조경백은 당 덕종 803년 진사과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과거인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6] 조확에게는 최소한 한 명의 남동생 조분(曹汾)이 있었으며, 조분은 훗날 당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다.[1]2. 2. 초기 경력
조확은 당 문종 때인 837년에 진사과에 급제한 후, 여러 지방 관찰사의 막료를 지냈다.[6] 이후 장안으로 소환되어 어사(御史)인 시어사(侍御史)로 재직했고, 이후 공부(工部)의 말단 관료인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을 역임하며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다.[6] 그는 공부낭중(工部郎中)으로 승진했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겸했다.[6] 이후 중서성(中書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하남(河南), 즉 낙양 지역의 지사(知事)를 대리했으며, 병부(兵部)시랑(侍郞)을 역임했다.[6]2. 3. 재상을 지내다
863년, 당시 병부시랑 겸 판탁지(判度支)로 있던 조확은 재위 중이던 황제 당 의종(문종의 조카)에게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추가로 제수받아,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다.[8] 이후,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감수국사(監修國史) 직책을 추가로 제수받았다. 조확은 유학에 정통하고 일 처리에 신중했으며, 법도를 준수하였다고 전해진다.[6] 867년 3월, 당 의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악공(樂工) 이가급(李可及)을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조확은 이 직책이 악공에게는 부적합하다고 지적하였으나, 의종은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8]2. 4. 재상 퇴임 이후
조확은 870년까지 재상을 지냈다.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까지 이르렀다. 870년 3월에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장쑤성 전장시)로 보직되어 장안 외지로 부임하였으며, 동중서문하평장사 직함은 명예직으로 계속 유지하였다.[9] 이후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본거지는 현 산시성 윈청시)로 전임되었고, 재임 중 하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사망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10]3.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9-12-19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6]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7]
웹인용
신당서
http://www.sidneyluo[...]
2009-12-19
[8]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9]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10]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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