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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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문종(809년 ~ 840년)은 당나라의 황제였다.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환관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지만, 실권은 환관들이 장악했다. 그는 개혁 정치를 시도하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했으나, 환관 세력과의 갈등과 당쟁에 휘말렸다. 특히,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감로의 변' 이후 환관들의 지배를 받으며, 말년에는 우울한 삶을 보냈다. 결국 3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동생인 당 무종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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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문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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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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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앙 (李昂) |
대체 이름 | 이함 (李涵) |
중국어 정보 | |
중국어 간체 | 唐文宗 |
병음 | Táng Wénzōng |
개인 이름 | 李昂 |
병음 (개인 이름) | Lǐ Áng |
생애 | |
출생일 | 809년 11월 20일 |
사망일 | 840년 2월 10일 (30세) |
묻힌 곳 | 장릉 (章陵) |
통치 정보 | |
왕조 | 당나라 |
재위 기간 | 827년 1월 13일 – 840년 2월 10일 |
연호 | 대화 (大和) 또는 태화 (太和) 827–835 개성 (開成) 836–840 |
묘호 | 문종 (文宗) |
시호 | 소헌황제 (昭獻皇帝) (약칭) 원성소헌효황제 (元聖昭獻孝皇帝) (전칭) |
가계 | |
성씨 | 이 (李) |
부황 | 목종 |
모후 | 정헌황후 |
자녀 | 이용 흥당공주 서평공주 낭녕공주 광화공주 |
즉위 및 계승 | |
전임 | 경종 |
후임 | 무종 |
2. 생애
문종의 초명은 '''함'''(涵)이었으나, 후에 '''앙'''(昂)으로 개명하였다. 처음에는 강왕(江王)에 봉해졌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척 세력이 미미했던 그는, 826년(보력 2년) 이복형 당 경종이 환관 유극명(劉克明)에게 갑자기 살해되자, 유극명과 대립하던 환관 왕수징(王守澄) 세력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4]
즉위 초, 문종은 아버지 당 목종과 형 당 경종 시절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궁녀 3,000명을 내보내고 오방응견(五坊鷹犬)을 폐지하며, 불필요한 관리 1,200명을 파직하는 등 개혁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강력한 환관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환관들은 문종을 무시하고 농락했으며, 심지어 가짜 외삼촌을 내세워 황제를 우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종은 사실상 환관의 꼭두각시와 같은 처지였다.
황제로서 실권을 되찾기 위해 문종은 두 차례에 걸쳐 환관 세력 제거를 시도했다. 831년(대화 5년) 재상 송신석(宋申錫)과 함께 꾸민 첫 번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9] 이후 835년(대화 9년), 문종은 새로 등용한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등과 함께 다시 환관 숙청을 모의했다. 이들은 핵심 환관인 왕수징을 자살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으나, 곧이어 환관 전체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발각되면서 감로의 변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훈 등은 살해되었고, 문종 자신도 환관들에게 붙잡혀 궁궐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11]
감로의 변 이후 문종은 완전히 실권을 잃고 환관들의 통제하에 놓였다. 아들인 장각태자와 강왕을 이미 잃었던 그는 조카인 진왕을 황태자로 삼았으나, 이마저도 환관 구사량(仇士良) 등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되었다. 환관들은 문종의 이복동생인 영왕 이찬(李瀍)을 새로운 황태자로 세웠다.[13]
840년(개성 5년), 유폐되어 실의에 빠져 지내던 문종은 대명궁(大明宮) 태화전(太和殿)에서 3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일설에는 환관들에 의해 독살당했다고도 전해진다.[13]
2. 1. 즉위 전
809년 말, 할아버지인 헌종 재위 기간에 '''이함(李涵)'''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훗날 목종으로 즉위하는 이유(李恒)로, 당시에는 숙왕(遂王)이었다.[5] 어머니는 목종의 후궁이었던 소씨(蕭氏)이다.[2] 이함은 목종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형인 경종 이전(李湛)보다는 네 달 늦게 태어났다.[2] 조모인 곽태후(郭太后)는 헌종의 황후였으나,[6] 아버지 이유는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바로 황태자가 되지는 못했다.[7] 이복형 이녕(李寧) 사후인 812년에야 아버지가 이항(李恒)으로 개명하고 황태자로 책봉되었다.[6]820년 헌종이 사망하고 아버지 목종이 즉위하였다. 821년, 목종은 여러 아들들을 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이때 이함은 '''강왕(江王)'''에 봉해졌다.[8]
824년 목종이 사망하고 형인 경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827년 새해 무렵, 경종은 환관 유극명(劉克明) 등이 일으킨 정변으로 암살당했다.[4] 유극명은 처음 목종의 동생인 강왕(絳王) 이오(李悟)를 황제로 세우려 했으나,[4] 곧 환관 왕수징(王守澄), 양승하(楊承和)와 신책군 사령관 위종간(魏從簡), 양수첨(梁守謙) 등이 반격에 나섰다.[4] 이들은 유극명 등 반란 세력을 제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오 역시 살해되었다.[4] 이후 왕수징 등은 당시 황태후였던 곽태후의 명의를 빌려 강왕(江王) 이함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고, 이함은 이름을 '''이앙(李昻)'''으로 고치고 즉위하였다.[4] 이로써 문종이 황제가 되었으나, 조정의 실권은 왕수징을 비롯한 환관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2. 2. 초기 통치와 개혁 시도 (대화(大和) 연간)
문종의 초명은 '''함'''(涵)이었으나, 후에 '''앙'''(昂)으로 개명하였고, 처음에는 강왕(江王)에 봉해졌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자매 및 모계 친척이 적었던 그는, 826년 이복형 당 경종이 유극명에게 갑자기 살해되자, 유극명과 대립하던 환관 왕수징(王守澄) 세력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4]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조정의 실권은 왕수징 등 환관들이 장악하였고, 문종은 황제로서의 실권을 거의 가지지 못한 채 사실상 꼭두각시에 가까운 존재였다.그럼에도 즉위 초, 문종은 아버지 당 목종과 형 당 경종 시절의 낭비를 바로잡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절약과 근면을 강조하며 신하들과 자주 국정을 논의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려 했다. 이를 위해 궁녀 3,000명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 황실 매와 사냥개를 관리하던 오방응견(五坊鷹犬)을 폐지했으며, 불필요한 관직과 부패 관리 1,200명을 파직시키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4] 문종은 겸손하게 신하들의 비판에 귀 기울였으나, 결단력이 부족하여 재상의 건의를 수용했다가도 자주 마음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다. 재상 위주후(魏徵候)가 정책에 반대하며 사직을 청했을 때 문종이 이를 만류하기도 했다.[4] 한편, 문종은 어머니 효황후(孝皇后)를 황태후로 추존하고, 할머니 고황태후(郭皇太后)와 경종의 어머니 왕황태후(王皇太后)를 극진히 모셨다. 궁궐 안에 세 명의 황태후가 공존했으며, 문종은 효심으로 이들을 섬겨 좋은 진상품은 항상 세 황태후에게 먼저 올렸다고 전해진다.[4]
그러나 문종의 개혁 의지는 강력한 환관 세력 앞에서 무력했다. 환관들은 문종을 무시하고 농락했으며, 심지어 아들처럼 대하기도 했다. 모계 친척이 적었던 문종이 비밀리에 외가를 수소문하자, 이를 이용한 환관들이 가짜 외삼촌을 내세워 황제를 우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들 가짜 외삼촌 세 명은 결국 발각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문종의 초기 통치는 지방 군벌들의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경종 말기부터 시작된 횡해절도사(橫海, 현재 허베이성 창저우) 이동결(李同捷)의 반란은 문종 즉위 후 본격화되었다. 이동결은 아버지 이전략(李全略) 사망 후 황제의 허락 없이 절도사직 계승을 시도했고, 문종이 그를 연해절도사(兗海, 현재 산둥성 지닝)로 전보시키려 하자 군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반란은 인근 성덕절도사(成德, 현재 허베이성 스자좡) 군벌 왕정구(王庭凑)의 지원까지 받았다. 조정은 주변 여러 도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고, 829년에 이르러서야 이우(李祐) 장군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이동결의 난이 진압되었다.[4][9]
이동결의 패배는 다른 군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위보절도사(魏博, 현재 허베이성 한단) 사선성(史憲誠)은 조정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투항 의사를 밝혔다. 문종은 사선성을 하중절도사(河中, 현재 산시성 운청)로 옮기고 황군 장군 이청(李聽)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선성이 위보를 떠나기 전,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선성을 살해하고 하금도(何進滔)를 새 지도자로 추대하여 이청의 부임에 저항했다. 결국 하금도가 이청을 격파하자, 횡해 원정으로 국고가 소진된 조정은 더 이상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하금도를 위보절도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9]
829년 말에는 남쪽 국경에서 남조(南詔)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서천절도사(西川, 현재 쓰촨성 청두)의 절도사였던 전 재상 두원영(杜元穎)이 군사 봉급을 삭감하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남조 국경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격분한 남조는 서천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청두까지 진격,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남조는 문종에게 두원영의 처벌을 요구했고, 문종은 두원영을 유배 보내고 남조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남조군은 서천 지역 주민 수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가는 피해를 남겼다.[9]
830년부터는 조정 내에서 당쟁(牛李黨爭)으로 알려진 이종민(李宗閔)과 뉴승루(牛僧孺) 중심의 뉴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 중심의 이당(李黨) 사이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배도(裴度)는 고령으로 영향력이 감소했고, 후임 재상인 이종민과 뉴승루는 정적인 이덕유 세력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데 힘썼다. 배도가 이덕유를 재상으로 추천했으나, 이종민이 환관의 도움으로 이를 저지했다는 설도 있다.[9]
환관들의 전횡에 염증을 느낀 문종은 831년(대화 5년) 재상 송신희(宋申錫)와 손잡고 환관 세력, 특히 왕수징을 제거하려는 비밀 계획을 세웠다. 문종은 계획 추진을 위해 송신희를 재상으로 임명했지만, 왕수징과 그의 책사 정주(鄭注)가 이 음모를 사전에 간파했다. 그들은 송신희가 문종을 폐위하고 문종의 동생 장왕(章王) 이구(李湊)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는 거짓 모함으로 역공을 펼쳤다. 결국 이 첫 번째 환관 제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구와 송신희는 유배되었다.[9]
같은 해인 831년, 토번(吐蕃)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천 절도사였던 이덕유에게 위주(維州, 현재 쓰촨성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를 지키던 토번 장수 싣달무(悉怛謀)가 항복 의사를 전해왔다. 이덕유는 이를 받아들여 위주를 토번 공략의 거점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상 뉴승루는 토번과의 평화 조약을 중시하고 수도 장안에 대한 보복 공격 가능성을 우려하며 항복 수용을 반대했다. 문종은 뉴승루의 의견을 따라 이덕유에게 위주를 토번에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토번은 항복했던 싣달무와 그의 부하들을 학살했고, 이는 큰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9] 이덕유와 뉴승루 중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10]
문종은 환관 세력 제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등을 새로 등용하여 신임했고, 835년(대화 9년) 이들과 다시 한번 환관 숙청을 모의했다. 이번에는 핵심 환관인 왕수징을 자살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으나, 곧이어 환관 전체에 대한 대규모 숙청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환관 세력은 즉각 반격하여 이훈 등을 살해하고 문종 자신마저 궁궐에 유폐시키는 감로의 변을 일으켰다. 이로써 문종의 개혁 시도와 환관 견제 노력은 비극적인 실패로 끝나게 된다.
2. 3. 환관 세력과의 갈등과 감로의 변
당 문종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 관계도 소원했으며, 외척 세력도 미미했다. 이복형 당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환관 왕수징(王守澄) 등 환관 세력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9] 즉위 초기에는 올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여 궁녀 3,000명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 오방응견(五坊鷹犬)을 폐지했으며, 불필요한 관료와 부패 관리 1,200명을 파직하는 등 개혁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곧 환관 세력에게 휘둘렸으며, 환관들은 문종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심지어 가짜 외삼촌을 내세워 황제를 우롱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종의 가짜 외삼촌이 3명이나 등장했다가 발각되어 모두 유배되는 사건도 있었다.황제로서 실권을 거의 가지지 못한 문종은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 친정을 도모했다. 대화 5년(831년)에는 재상 송신석(宋申錫)과 함께 환관 숙청을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문종은 이훈(李訓)과 정주(鄭注) 등을 새롭게 신임하여 등용하고, 이들과 함께 다시 환관 제거를 계획했다.
대화 9년(835년) 겨울, 문종은 이훈, 정주와 함께 환관 숙청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왕수징을 압박하여 자살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왕수징의 장례식을 기회로 삼아 환관들을 한자리에 모아 정주가 이끄는 군대로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주를 질투한 이훈은 문종에게도 알리지 않고 독자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는 왕수징의 장례식 며칠 전인 12월 14일,[1] 한약(韓約) 장군에게 그의 군영 근처 나무에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거짓 보고하게 했다. 이를 빌미로 신책군(神策軍)의 지휘관인 환관 구사량(仇士良)과 어홍지(魚弘志) 등을 유인하여 살해하려 한 것이다.[11]
하지만 구사량과 어홍지는 한약의 군영에 도착했을 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급히 황궁으로 돌아와 문종을 확보했다. 곧바로 환관들은 신책군 병사들을 동원하여 이훈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을 학살하고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재상 가소, 서원유, 왕야 등도 정주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풍상(鳳翔)에 있던 정주 역시 암살당했다.[11] 이 사건은 감로를 이용하여 환관들을 유인하려 했기 때문에 훗날 감로의 변(甘露之變) 또는 감로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12]
감로의 변 실패 이후 문종은 완전히 환관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재상 이식과 정탄, 다른 조정 관료들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다.[11] 836년 봄, 소의(昭義) 절도사 유총검(劉從諫)이 구사량 등 환관들의 죄상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환관들은 잠시 두려움을 느끼고 문종과 재상들에게 어느 정도 자율적인 통치권을 허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문종이 감로의 변으로 희생된 왕야 등 관리들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자, 구사량은 그들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 위수(渭水)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11]
이 사건 이후 문종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 웃음을 잃었고, 공식적인 연회에서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고 한다.[11] 어느 날 그는 궁중 학자 주치(周墀)에게 자신을 고대의 어떤 군주에 비유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주치가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에 비유하며 아첨했지만, 문종은 자신을 주나라의 난왕(赧王)과 후한의 헌제(獻帝)에 비유하며 "난왕과 현제는 모두 무장한 제후들에게 좌우되었지만, 나는 집안의 노예들에게 좌우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나는 그들보다 더 못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3]
문종은 이미 아들인 장각태자(莊恪太子) 이영과 강왕(蔣王) 이종검(李宗倹)을 잃은 상태였다. 감로의 변 이후 환관 구사량 등은 문종이 후계자로 삼았던 조카 진왕(陳王) 이성미(李成美)마저 살해하고, 문종의 이복동생인 영왕(潁王) 이감(李瀍)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개성 5년(840년), 유폐되었던 문종은 3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일설에는 환관에 의해 독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2. 4. 당쟁의 심화
당 문종(文宗) 초기에는 아버지 당 목종(穆宗)과 형 당 경종(敬宗) 시기의 낭비를 바로잡고 절약과 근면한 통치, 신하들과의 소통을 통해 태평성대를 이루려 노력했다. 그는 겸손하고 비판에 귀 기울였으나, 결단력이 부족하여 재상들의 건의를 수용했다가도 번복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평가된다.[4]그러나 문종 시대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끊이지 않는 군사적 충돌과 심화되는 당쟁이었다. 경종 말기부터 시작된 횡해절도사(橫海) 이동결(李同捷)의 반란은 문종 즉위 후에도 이어져 조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문종은 주변 여러 도의 군대를 동원해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829년에 이르러서야 이우(李祐) 장군이 이동결을 패배시켰다.[4][9] 이동결의 패배 이후, 위보절도사(魏博) 사선성(史憲誠)이 조정에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선성을 살해하고 하금도(何進滔)를 추대했다. 조정은 재정 고갈로 인해 추가적인 군사 행동을 포기하고 하금도를 절도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9] 또한 829년 말에는 남조(南詔)가 서천절도사(西川) 두원영(杜元穎)의 실책을 빌미로 침입하여 청두(成都) 근방까지 진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종은 두원영을 유배 보내고 남조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남조군은 수만 명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9]
이러한 혼란 속에서 830년경부터 조정 내에서는 우이당쟁(牛李黨爭)으로 알려진 파벌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이종민(李宗閔)과 뉴승루(牛僧孺) (뉴당(牛黨))는 정적인 이덕유(李德裕) (이당(李黨))와 그의 지지자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종민은 환관 세력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9]
문종은 강력한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고, 송신희(宋申錫)와 함께 환관의 권력을 약화시킬 비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환관 왕수징(王守澄)과 그의 책사 정주(鄭注)가 이 계획을 눈치채고, 오히려 송신희가 문종의 동생인 장왕(章王) 이구(李湊)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는 거짓 모함을 꾸몄다. 결국 송신희와 이구는 유배되었고, 환관 세력은 더욱 공고해졌다.[9]
831년에는 우이당쟁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위주(維州)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서천절도사였던 이덕유는 토번(吐蕃)의 장수 싣달무(悉怛謀)가 위주를 바치며 항복하자 이를 받아들여 토번 공략의 거점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상 뉴승루는 토번과의 평화 조약을 이유로 항복 수용을 반대했고, 문종은 뉴승루의 의견을 따랐다. 결국 위주는 토번에 반환되었고, 싣달무와 그의 부하들은 토번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이덕유와 뉴승루 중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지에 대해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9][10]
832년, 문종은 아들 이용을 황태자로 책봉했다.[9] 위주 사건 이후 여론이 뉴승루에게 불리해지자 그는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833년 이덕유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덕유는 이종민 파벌을 공격하여 많은 관료들을 좌천시켰고, 이종민 자신도 수도를 떠나 산남서도(山南西道) 절도사로 부임했다.[9]
하지만 문종이 중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의술에 능했던 정주가 문종의 신임을 얻으며 상황이 다시 변했다. 정주와 환관 이훈(李訓, 이전 이름은 이중언)은 이덕유를 견제하기 위해 이종민을 다시 재상으로 불러들이고 이덕유를 진해절도사(鎮海)로 좌천시켰다. 당쟁의 폐해에 염증을 느낀 문종은 "황하(黃河) 북쪽의 산적(군벌)을 제거하는 것은 쉽지만, 조정 관리들 사이의 파벌 싸움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이덕유는 이후 추가적인 모함을 받아 더욱 먼 곳으로 유배되었고, 그를 변호하려던 재상 노수마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11] 그러나 돌아온 이종민도 정주와의 갈등 끝에 다시 유배되었고, 이훈과 정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 시기 재상은 이훈, 가소, 서원유, 왕야 등이었다.[11]
한편, 문종은 이훈, 정주와 함께 환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왕수징을 자살하게 만든 뒤, 그의 장례식을 기회로 삼아 환관들을 일망타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훈은 정주마저 제거하려는 욕심에 독자적으로 계획을 변경하여 835년 12월 14일[1], 감로(甘露)가 내렸다는 거짓 보고를 이용해 환관들을 유인하려 했다. 이 사건이 바로 감로의 변이다. 하지만 환관 구사량 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반격에 나서면서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구사량 등은 군대를 동원해 이훈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들을 학살하거나 체포했으며, 가소, 서원유, 왕야 등도 정주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정주 역시 암살당했다.[11][12]
감로의 변 이후 문종은 완전히 환관들의 통제 하에 놓였고, 재상 이식과 정탄 등은 실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11] 836년, 소의(昭義)절도사 유총검(劉從諫)이 환관들의 죄상을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구사량 등 환관들이 잠시 두려움을 느껴 문종과 재상들에게 약간의 자율성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실권은 환관들에게 있었다. 문종이 감로의 변으로 희생된 관리들의 장례를 치르려 하자 구사량은 그 시신들을 파내 강물에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1]
이 사건 이후 문종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 웃음을 잃었고, 자신을 주나라의 난왕이나 후한의 헌제보다 못한 처지라고 한탄했다. 그는 집안의 노예(환관)들에게 휘둘리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 난왕과 현제는 모두 무장한 제후들에게 좌우되었지만, 나는 집안의 노예들에게 좌우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나는 그들보다 더 못하다.
837년 이후 조정에서는 다시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당(李黨)으로 분류되는 정탄과 진이행이, 우당(牛黨)으로 분류되는 양사부와 이각과 대립하며 국정은 파행을 거듭했다.[13][14]
후계 문제도 불안정했다. 황태자 이용은 838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문종이 총애하던 양귀비(楊貴妃)의 모함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으며, 일부에서는 문종의 암묵적인 승인 하에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3][15] 양귀비는 문종의 동생인 안왕(安王) 이융(李溶)을 태자로 추천했으나 재상 이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문종은 839년 말, 당 경종의 아들인 진왕(陳王) 이청매(李澄美)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840년 봄, 문종이 위독해지자 환관 구사량과 우홍지(虞弘志)는 문종의 의사와는 달리 영왕(穎王) 이찬(李瀍)을 새로운 태자로 추대했다. 문종이 사망한 후 이찬이 즉위하여 당 무종이 되었으며, 폐위된 이청매와 양귀비, 안왕 이융 등은 자살을 강요당했다.[13]
2. 5. 죽음
감로의 변 이후 문종은 깊은 실의에 빠져 웃음을 잃었으며, 큰 잔치에서도 침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전해진다.[11] 어느 날 그는 학사 주치(周墀)에게 자신을 주나라의 난왕이나 후한의 헌제에 비유하며, 이들 망국의 군주들조차 외부 제후들에게 압박받았지만 자신은 집안의 노복인 환관들에게 억압받고 있다며 자신의 처지가 그들보다 못하다고 눈물 흘리며 한탄하기도 했다.[13]개성 4년(839년)에는 중풍 증세가 악화되어 조회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듬해인 개성 5년(840년) 봄, 병세가 위독해지자 문종은 신임하던 환관 유홍익(劉弘逸)과 설길릉(薛季稜)을 시켜 재상 이규와 양사부(楊嗣復)를 불러들여 당시 황태자였던 경종의 아들 진왕(陳王) 이성미의 후사를 부탁하려 했다.[13]
그러나 당시 궁궐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구사량과 우홍지(虞弘志)는 문종이 자신들과 상의 없이 이성미를 황태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이규 등 재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종의 이름으로 조서를 위조하여, 이성미가 너무 어리다는 구실로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문종의 이복동생인 영왕(潁王) 이찬(李瀍)을 새로운 황태자로 삼았다.[13]
문종은 이러한 환관들의 농간 직후인 840년 대명궁(大明宮) 태화전(太和殿)에서 3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일설에는 환관들에 의해 독살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문종 사후 황위에 오른 무종은 즉위 직후, 폐위된 황태자 이성미와 문종이 총애했던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다.[13]
3. 연호
문종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西曆) | 827년 | 828년 | 829년 | 830년 | 831년 | 832년 | 833년 | 834년 | 835년 | 836년 |
간지 (干支) | 정미(丁未)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경술(庚戌) | 신해(辛亥) | 임자(壬子) | 계축(癸丑)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연호 (年號) | 보력(寶曆) 3년 대화(大和)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개성(開成) 원년 |
문종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
서력 (西曆) | 837년 | 838년 | 839년 | 840년 | ||||||
간지 (干支) | 정사(丁巳) | 무오(戊午) | 기미(己未) | 경신(庚申) | ||||||
연호 (年號) | 2년 | 3년 | 4년 | 5년 |
4. 외교 관계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룸)
4. 1. 일본과의 관계
838년(개성 3년) 견당사로 임명된 후지와라노 쓰네쓰구藤原常嗣|후지와라 노 쓰네쓰구일본어는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그 해 7월 초 양주(揚州)에 도착했다. 10월에 양주를 출발한 견당사 일행은 12월 3일 장안에 도착했으며, 해를 넘겨 839년(개성 4년) 1월 13일 대명궁의 인덕전(麟徳殿)에서 문종을 알현했다. 이 당시 상황은 사절단과 동행했던 승려 엔닌円仁|엔닌일본어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후지와라노 쓰네쓰구의 입당은 중국에 파견되어 실제로 임무를 완수한 마지막 견당사가 되었다.한편, 문종은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여 헤이안쿄平安京|헤이안쿄일본어에서 온 외교 사절단을 통해 전달하기도 했다. 이 사절단은 839년 귀국하면서 문종의 서한을 닌묘 천황에게 전달했다.[17]
5. 가계
- '''조부''' : 헌종(憲宗) 장무황제(章武皇帝) 이순(李純)
- '''조모''' : 의안황후(懿安皇后) 곽씨(郭氏)
- '''부친''' : 목종(穆宗) 문혜황제(文惠皇帝) 이항(李恒)
- '''모친''' : 정헌황후(貞獻皇后) 소씨(蕭氏)
5. 1. 후비
봉호(시호) | 별칭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숙비(淑妃) | 왕씨(王氏) | |||
덕비(德妃) | 왕씨(王氏) | ? ~ 838년 | ||
현비(賢妃) | 양씨(楊氏) | ? ~ 840년 | 홍농 양씨 | |
현비(賢妃) | 유씨(劉氏) | |||
대궁인(宮人) | 비란(飛鸞) | |||
소궁인(宮人) | 경봉(輕鳳) |
- '''덕비 왕씨(德妃 王氏)''' (? ~ 838년)
- * 장각황태자 이용(莊恪皇太子 李永) (? ~ 838년, 장남)
- '''현비 양씨(賢妃 楊氏)''' (? ~ 840년, 홍농 양씨)
- '''숙비 왕씨(淑妃 王氏)'''
- '''현비 유씨(賢妃 劉氏)'''
- '''곽씨(郭氏)'''
- '''생모 미상'''
- * 강왕 이종검(蔣王 李宗儉, 차남)
- * 흥당공주(興唐公主)
- * 서평공주(西平公主)
- * 낭녕공주(郎寧公主) (? ~ 866년, 넷째 딸)
- * 광화공주(光化公主)
5. 2. 황자
wikitext순서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장남 | 황태자 | 장각(莊恪) | 이영(李永) | ? ~ 838년 | 덕비 왕씨 | 요절함.[18] |
차남 | 장왕(蔣王) | 이종검(李宗儉) | ? ~ ? | 불명 | 요절함. |
5. 3. 황녀
6. 평가
문종은 황제의 칙령을 내려 이백의 시, 장욱의 서법, 배민의 검술을 "대당 제국의 3대 기적"으로 선포하였다.[16]
837년, 문종이 의뢰하여 유학 경전의 본문과 주석을 돌비에 새겨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사업이 귀족들을 위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國子監|궈즈지앤중국어)에서 완료되었다.[13]
개성 4년(839년), 문종은 풍비(중풍)가 악화되어 조회에 나가지 못하고 사정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어느 날 학사를 불러 "나는 옛 천자 중 누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직학사 주덕승이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과 같으십니다."라고 대답하자, 문종은 다시 "주(周)의 赧왕이나 후한(後漢)의 헌제와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주나라의 난왕과 후한의 헌제는 모두 정치적으로 무력하여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군주들이었다. 주덕승은 깜짝 놀라 폐하께서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문종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난왕과 헌제는 제후들에게 외부에서 억압받았지만, 나는 환관들에게 내부에서 억압받는다. 그러니 나는 그들만도 못하다." 이 말을 들은 주덕승은 땅에 엎드려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신당서(新唐書)』 권 207 열전 132 환자 구사량, 권 182 열전 107 주덕승)
7. 등장 작품
- 황제와 나의 비밀~궤중미인~ (가칭, 櫃中美人|궤중미인중국어) (2018년, 중국, 배우: 주걸륜(周杰倫))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db1x.sinica.e[...]
[2]
서적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17上
[3]
서적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17下
[4]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43
[5]
서적
Old Book of Tang
zh:s:舊唐書/卷16
[6]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38
[7]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37
[8]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41
[9]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44
[10]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45
[12]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zh:s:資治通鑑/卷246
[14]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6]
서적
New Book of Tang
[17]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
문서
노왕(魯王)
[19]
문서
출가하여 도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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