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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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흥은 남월의 2대 왕으로, 명왕 조영제의 아들이자 한단 교씨의 아들이다. 기원전 115년에 아버지 조영제가 죽자 남월왕으로 즉위했으며, 어머니를 태후로 삼았다.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여가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했으며, 시호는 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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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의 제2대 왕인 조말은 무왕 조타의 손자이며, 즉위 초 민월의 침공으로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교류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입조를 중단했고, 광저우에서 발견된 그의 무덤에서 옥새를 통해 이름이 '조말'임이 확인되었다. - 광저우시 출신 - 홍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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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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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왕조 | |
왕국 | 남월 |
성씨 | 조(趙) |
이름 | |
휘 | 조흥 |
한자 | 趙興 |
로마자 표기 | Zhao Xing |
베트남어 | Triệu Hưng |
시호 | 애왕(哀王) |
시호 (한자) | 趙哀王 |
시호 (베트남어) | Triệu Ai Vương |
재위 기간 | |
재위 | 기원전 115년 – 기원전 112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조영제 |
어머니 | 구황후 |
계승 | |
이전 | 조영제 |
이후 | 조건덕 |
사망 | |
사망일 | 기원전 112년 |
2. 생애
명왕 조영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단 교씨(樛氏)이다. 기원전 115년에 아버지 왕이 사망하자, 남월의 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교씨를 태후로 삼았다.
2. 1. 즉위와 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115년, 아버지 명왕 조영제가 사망하자 조흥이 남월의 왕위를 계승했다. 조흥의 어머니 교씨는 태후가 되었다. 한나라는 조흥에게 입조를 재촉하기 위해 태후의 옛 애인이었던 안국소계를 사신으로 파견했다. 태후는 다시 안국소계와 내통하며 조흥에게 입조를 권했다.기원전 113년, 한 무제는 안국소계를 보내 조흥과 구태후를 황제 알현을 위해 장안으로 소환했다. 한족 출신인 구태후는 남월인들에게 적대적으로 여겨졌고, 안국소계와의 부정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둘의 관계가 재개되었다고 믿었다. 구태후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두려워하여 왕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을 것을 촉구했다. 조흥은 이에 동의하여 남월과 한나라의 관계를 3년에 한 번씩 한나라 조정에 방문하고 국경에 있는 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정상화할 것을 제안했다.
여가는 재상으로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가문은 조흥이나 구태후보다 더 인맥이 넓었다. ''사기''와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여가는 낙월 부족의 우두머리였고, 창오의 진왕과 결혼으로 연결되었으며, 그의 친족 70명 이상이 남월 조정의 여러 곳에서 관료로 일했다. 여가는 한나라 사신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이는 구태후를 분노하게 했다. 구태후는 연회에서 그를 죽이려 했으나 조흥에 의해 저지당했다.
재상 여가는 여러 차례 조흥에게 간언했지만, 조흥은 듣지 않았다. 태후는 여가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연회를 열어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여가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위기를 모면했다.
2. 2. 여가의 반란과 죽음
기원전 113년, 한 무제는 안국소계를 보내 조흥과 구태후를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소환했다. 한족 출신인 구태후는 남월인들에게 적대적으로 여겨졌으며, 그녀가 조영제와 결혼하기 전에 안국소계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안국이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은 둘이 관계를 재개했다고 믿었다. 구태후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두려워하여 왕과 신하들에게 한나라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을 것을 촉구했다. 조흥은 이에 동의하여 남월과 한나라의 관계를 3년에 한 번씩 한나라 조정에 방문하고 국경에 있는 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정상화할 것을 제안했다.여가는 재상으로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가문은 조흥이나 구태후보다 더 인맥이 넓었다. ''사기''와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여가는 낙월 부족의 우두머리였고, 창오의 진왕과 결혼으로 연결되었으며, 그의 친족 70명 이상이 남월 조정의 여러 곳에서 관료로 일했다. 여가는 한나라 사신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이는 구태후를 분노하게 했다. 구태후는 연회에서 그를 죽이려 했으나 조흥에 의해 저지당했다. 구태후는 다음 달에 여가를 죽이기 위해 조정에서 충분한 지지를 모으려 했다.
기원전 112년, 상황에 대한 소식이 한 무제에게 전해지자, 그는 장참에게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월로 원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장참은 평화라는 명분으로 너무 많은 병력을 보내고, 한나라의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너무 적은 병력을 보내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선언하며 임무 수행을 거부했다. 전 제북의 재상인 한천추는 여가를 체포하기 위해 원정을 이끌겠다고 자원했다. 한천추가 한-남월 국경을 넘자, 여가는 쿠데타를 일으켜 조흥, 구태후, 그리고 수도에 있던 모든 한나라 사신을 살해했다. 조흥의 동생인 조건덕은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었다.
조흥의 묘호는 ''사기''와 ''한서'' 모두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역사 텍스트인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조흥의 시호는 '''애왕'''이었다.
2. 3. 사후
조흥의 묘호는 ''사기''와 ''한서'' 모두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역사 텍스트인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조흥의 시호는 '''애왕'''(哀王)이었다.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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