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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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무령왕은 기원전 4세기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왕으로,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숙후 사망 후 조후의 지위를 계승했으며,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왕을 칭하지 않고 군으로 불리기를 고집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유목 민족의 복장과 기병술을 받아들였고,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맏아들 조장의 반란으로 인해 갇혀 굶어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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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무령왕 | |
|---|---|
| 기본 정보 | |
![]() | |
| 성 | 영 (嬴) |
| 씨 | 조 (趙) |
| 휘 | 옹 (雍) |
| 시호 | 무령왕 (武靈王) |
| 왕조 | |
| 왕가 | 영 (嬴) |
| 왕조 | 조 |
| 통치 | |
| 즉위 전 | 숙후 |
| 재위 기간 | 기원전 318년–기원전 299년 |
| 후계자 | 혜문왕 |
| 작위 승계 (조나라) | 조나라의 군주 |
| 재위 기간 (왕) | 기원전 323년–기원전 318년 |
| 즉위 전 (왕) | 새로운 칭호 |
| 후계자 (왕) | 공석 (다음: 혜문왕) |
| 작위 승계 (조나라) | 조나라의 후 |
| 재위 기간 (후) | 기원전 325년–기원전 323년 |
| 즉위 전 (후) | 숙후 |
| 후계자 (후) | 왕으로 즉위 |
| 개인 정보 | |
| 출생 | 알 수 없음 |
| 사망 | 기원전 295년 |
| 부친 | 조 숙후 |
| 배우자 | 한씨 부인 오맹요 (혜후) |
| 자녀 | 조장 (안양군) 조 혜문왕 조승 (평원군) 조포 (평양군) |
2. 생애
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호복기사'''를 받아들였다. 이는 북방 유목 민족의 전술을 모방한 것으로, 전사 한 명이 직접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방식이었다. 당시 중화 세계의 귀족 전사들은 세 명의 전사가 전차를 이용해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가 길고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생긴 옷은 말을 타는데 매우 불편했다. 따라서 호복기사에는 유목민들이 말을 타는 데 적합한 바지 형태의 복장, 즉 호복(胡服)을 입을 필요가 있었다.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신하들에게 제안했을 때, 비의는 즉시 찬성했지만, 무령왕의 숙부였던 공자성은 중화사상에 기반하여 유목민의 문화를 야만스럽게 여기며 반대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끈질긴 설득을 통해 조나라에 호복기사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중국의 다른 나라에서도 기병 기술이 실시되었다.[6]
기원전 298년, 무령왕은 태자였던 공자 장(章)을 폐하고 공자 하(훗날 혜문왕)를 태자로 세운 뒤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스스로를 '주보(主父)'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기원전 295년, 폐태자가 된 공자 장에 대한 연민을 느낀 주보는 장을 조나라 북쪽 대군의 군주로 삼으려 했다. 이를 계기로 공자 장은 혜문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주보에게 도망쳤다. 주보는 그를 숨겨주었지만, 혜문왕 측의 이태와 공자성이 주보의 저택을 포위했다. 공자 장은 결국 그 안에서 죽었고, 이태 등은 주보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석 달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주보는 자신의 궁에 갇힌 채 굶어 죽었다.[7]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기원전 326년, 조 숙후가 죽자 조후(趙侯)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무령왕은 어려서 숙후를 섬기던 비의가 자문했다.[3]기원전 319년, 여러 나라가 제후의 칭호를 버리고 천자와 같은 왕(王)을 칭하기 시작했지만, 무령왕은 "조에 아무런 실질적 이득이 없다"며 군(君)이라 불리기를 원했다. 아들 혜문왕 시대부터 왕을 칭하면서 무령왕에게도 왕호가 추증되었다.
기원전 315년, 연이 대혼란에 빠져 군주가 없어지자, 무령왕은 연의 공자 직(職)을 불러 조의 후원으로 연의 군주로 세우려 했으나, 연에서는 소왕이 즉위하였다.
기원전 311년, 무령왕은 미녀의 꿈을 꾸고 주변에 들려주었는데, 오광(吳廣)이 자신의 딸 맹요가 꿈에 나타난 미녀와 같다며 바쳤다. 무령왕은 맹요를 총애하여 공자 하(何)를 낳았고, 그는 훗날 혜문왕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310년, 교외에 야대(野臺)를 지었는데, 중산국과 제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이는 그 나라를 정복할 야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2. 2. 주변국과의 관계
기원전 318년, 조는 초, 한, 위, 연과 함께 진을 공격했지만 함곡관에서 패했다(함곡관 전투). 이 무렵, 여러 나라들이 잇달아 왕호를 칭했지만, 무령왕은 "조에는 그 실질이 없다"며 군(君)으로 불리게 했다.[3] 아들인 혜문왕 시대부터 다시 왕호를 사용했고, 아버지의 시호에도 왕호를 보냈다.기원전 315년, 이웃 나라인 연이 대혼란에 빠져 군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무령왕은 낙지를 사자로 삼아 한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연의 공자 직(公子職)을 초청하여 조(趙)의 후원을 붙여 연의 군주로 세우려 했지만, 연에서는 소왕이 군주가 되었다.[4]
기원전 310년, 무령왕은 교외에 야외 단을 만들어 그곳에서 중산과 제를 바라보았다. 이는 이들 나라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로, '''호복기사'''를 받아들였다. 중화 세계의 귀족 전사들은 전통적으로 세 명의 전사가 마부와 궁사, 과에 의한 백병전을 분담하는 전차전을 펼쳤다. 반면 북방 유목 민족은 전사가 직접 말 한 마리에 타서 활을 쏘는 전법을 사용했다. 호복기사는 이 유목 민족의 전법을 흉내 내려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들은 밑단이 길고 하부가 스커트 형태인 옷을 입었는데, 이는 승마에 매우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호복기사에는 유목 민족의 승마에 적합한 바지식 복장(호복)을 입을 필요가 있었다.
같은 해, 진의 무왕이 사망하자, 무령왕은 연에 있던 공자 직을 보내 진의 군주로 삼았다. 이가 소양왕이다.
기원전 296년, 무령왕은 이전까지 여러 차례 공격하여 반쯤 정복했던 중산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판도에 넣었다.
2. 3. 호복기사(胡服騎射) 도입
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호복기사'''를 도입했다.[6] 호복기사는 북방 유목 민족의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사 한 사람이 직접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전법이었다. 이는 세 명의 전사가 마부, 활쏘기, 창을 사용한 백병전을 분담하던 기존의 전차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또한,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가 길고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생긴 옷은 말을 타는데 불편했기 때문에, 호복기사에는 유목민들이 말을 타는 데 적합한 바지 형태의 복장인 호복(胡服)을 입어야 했다.[1]무령왕이 이를 신하들에게 알렸을 때, 비의는 즉시 찬성했지만, 무령왕의 삼촌이었던 공자성은 반대했다.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유목민을 '오랑캐'라 깔보면서 직접 말에 타는 것을 야만스러운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령왕과 비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적었고 공자 성의 반대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령왕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에 이익을 주기 위해 옛것을 모방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설득하여 조나라에 호복기사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중국의 다른 나라에서도 기병 기술이 실시되었다.[6]
무령왕의 호복기사 도입은 조나라 군대의 전투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같은 해, 조나라는 중산을 공격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2]
2. 4. 영토 확장
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도입했다. 호복기사는 북방 유목 민족의 기마 전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차 대신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 소매가 길고 치마처럼 생긴 전통 의복 대신 유목민들이 말을 타는 데 적합한 바지 형태의 복장인 호복(胡服)을 입도록 했다.[6]무령왕의 이러한 정책은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무령왕의 삼촌인 공자 성(成)은 유목민의 문화를 야만스럽게 여겨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끈질긴 설득을 통해 호복기사를 조나라에 도입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다른 중국 국가들에도 기병 기술이 전파되었다.[6][7]
기원전 296년, 무령왕은 내몽고 지역에 대한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중산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다.[8]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격파하고 현재의 후허하오터 지역에 운중, 안문, 대의 3군을 설치했으며, 허타오 지역을 가로지르는 장성을 쌓았다.
2. 5. 퇴위와 죽음
기원전 298년, 무령왕은 태자였던 공자 장(章)을 폐하고 공자 하를 태자로 세운 뒤 하에게 양위하였지만, 스스로 「주보(主父)」라 일컬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그대로 유지했다.[7] 주보는 내몽고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기원전 296년, 중산국을 완전히 격파하여 멸망시키고 판도를 넓혔다.[8]그러나 기원전 295년, 폐태자된 공자 장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느끼게 된 주보는 장을 조의 북쪽에 설치했던 대군의 군주로 삼아주려 했고, 이때 공자 장은 혜문왕에 대한 반란을 결심한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장은 가까스로 주보에게로 달아났으며 주보는 이를 숨겨주었는데, 혜문왕측의 이태(李兌)와 공자 성(成)이 주보의 저택을 포위한 가운데 공자 장은 끝내 그 안에서 죽었다. 왕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주보 자신에게 병사를 들이댄 꼴이었으므로 이태나 공자 성은 포위를 풀게 되면 주보에 의해 자신들이 살해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포위를 석 달이 되도록 풀지 않았고, 결국 주보는 자신의 궁에 유폐된 채 굶어 죽고 말았다.[7]
3. 평가
사마천은 무령왕을 가리켜 "후계만 감싸다 굶어 죽어서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라고 엄하게 평가했다.[5]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221 BC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03-13
[2]
간행물
Wars with the Xiongnu: A Translation of the [[Zizhi Tongjian]]
2009
[3]
서적
『世界歴史大系 中国史1』
山川出版社
[4]
문서
史記
[5]
문서
『[[史記]]』「趙世家」
[6]
웹인용
일반게시판 > 열국지평설 > 춘추전국시대의 전투방식-하
http://www.yangco.ne[...]
2019-05-09
[7]
웹사이트
::사마천의 사기세계::
http://giant.x-y.net[...]
[8]
뉴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7) - 수수께끼의 나라 선우·중산
http://www.dokdo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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