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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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사상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한족 중심주의 또는 중화민족을 의미하며, 중국 문명이 세계 최고라는 믿음에 기반한 사상이다. 고대에는 주변 민족을 '오랑캐'로 여기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변화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유교적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으며, 중화주의 체제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변국들은 조공 관계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은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 이후 서구 열강의 등장과 일본의 부상으로 중화사상은 쇠퇴했지만, 중국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현대에도 다양한 논쟁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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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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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개념 | 중국 중심의 세계관 또는 이념 |
특징 | 중국 문명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 |
관련 용어 | 화이관 중화주의 대중화주의 한족 중심주의 |
역사적 맥락 | |
기원 | 고대 중국 문명 발전과 함께 형성 |
발전 | 중국 왕조들의 외교 및 정치적 질서의 기반으로 작용 |
영향 |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광범위한 영향 미침 |
외교 및 정치 | |
조공 체제 |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 |
천자 사상 | 중국 황제를 세계의 중심 지도자로 인식 |
주변 국가 | 중국에 대한 조공을 통해 국제적 지위 인정 |
문화적 측면 | |
문화 우월주의 | 중국 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것으로 간주 |
문명 중심 | 중국을 문명의 중심으로 여김 |
주변 문화 | 주변 문화를 미개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간주 |
현대적 관점 | |
비판 | 서구 중심주의와 함께 문화적 편견의 일종으로 비판받음 |
영향력 | 현대 중국의 민족주의 및 외교 정책에 영향 |
참고 문헌 | |
Tan Chung | On Sinocentrism: A Critique |
School of Contemporary Chinese Studies | Beneath the Facade of China |
코토뱅크 | 華夷思想 -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
교토 대학 문학부 동양사 연구실 | 東洋史辞典 (초판, 1971) |
2. 역사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은 민족 중심주의의 한 형태로서 한족 사회와 문화의 중심주의를 의미하거나, 청나라 멸망까지 한국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현대적 개념인 ''中華民族''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19세기에 종말을 고하고 20세기에 여러 차례 타격을 입어 현재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널리 퍼져 있지 않다.[1]
근대 이전에는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으로 보고, 외부 민족이나 외국을 다양한 정도로 야만인으로 간주하는 화이 이분법이 있었다.[3][4]
중국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 문서를 참고하라.
2. 1. 고대
고대 중국에서 중화사상은 한족 사회와 문화의 중심주의를 의미하는 민족 중심주의의 한 형태로 나타났다. 중국의 황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천하를 대표하는 '''천자'''라고 칭했다.[63] 이 황제가 다스리는 조정의 문화와 사상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졌다.[63]
초기에는 북방 유목 문화에 대해 한족의 농경 문화가 우월함을 의미했다.[61] 춘추전국시대 이후로는 「시경」, 「한비자」, 「여씨춘추」 등의 고전에 나타난 “천하의 모든 것, 왕의 땅이 아닌 것은 없고, 땅의 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은 없다”라는 왕토왕민사상처럼, 유교 예교문화의 왕도 정치[63]에 기반하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최고로 여겼다.
이러한 체제에서 덕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이(夷)'''라고 불렀다. '''이(夷)'''는 도에서 벗어난 짐승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불렀다.[61] 이(夷)의 기준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천자의 덕이나 예가 미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이동하는 변동적인 개념이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어리석고 옷도 제대로 입지 않거나 짐승 가죽을 걸치고 질서도 없다고 생각하여, 사방의 이민족을 '''사이(四夷)'''라는 멸칭으로 불렀다.[65][66]
- 동이(東夷): 고대에는 중국 대륙 연안 지역을 가리켰고, 이후에는 일본, 조선 등 동방의 여러 나라를 가리켰다.
- 서융(西戎): 서역이라고 불린 여러 나라를 가리킨다.
- 북적(北狄): 흉노, 선비, 거란, 달단, 몽골 등 북방의 여러 나라를 가리킨다.
- 남만(南蠻):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남쪽에서 건너온 서양인을 가리킨다.
중화 세계에서는 사이(四夷)가 변방에 살기 때문에 중화 문명의 영향과 혜택을 받지 못한 화외의 백성이며, 언젠가 중화 문명에 교화되어 문명화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을 교화하여 중화 문명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중화 세계의 책무라고 여겨졌으며, 특히 황제는 자신의 덕으로 주변 민족을 교화하여 문명으로 이끈다고 생각되었다. 맹자는 이를 “하(夏)로 이(夷)를 변화시킨다”라고 말했다.
중화(中華)라는 명칭은 “화하(華夏)”라는 고대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호칭은 하(夏), 화(華), 또는 화하(華夏)라고 불렸다. “화(華)”는 화려함, “하(夏)”는 번성함을 의미하며, 중국인들이 자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용했던 말이었다.[63]
중화와 이적을 엄격하게 구분한 문헌 중 현재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것은 『춘추』이다. 『춘추』에서는 주 초기의 예악을 제도화하고, 이적 기원의 문화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대에 춘추학이 이론화되는 과정에서 중화사상도 “사이(四夷)”와 같은 범주가 생겨나 이론화되었다.
전국 말기의 순자는 유가의 이상 국가인 상이나 주의 화이 질서에 대해, 중원의 왕이 다스린 땅을 중심으로 기내, 기외, 후, 위, 만, 이, 용, 적의 순서로 500리 간격의 동심원 구조이며, 원근에 따라 각각에 적합한 제도로 귀복시켰다고 설명했다.[69][70]
2. 2. 춘추전국시대 ~ 수·당 시대
춘추전국시대 이후, 시경, 한비자, 여씨춘추 등의 고전에는 "천하의 모든 것은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의 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은 없다"는 왕토왕민사상이 나타난다. 이는 유교의 왕도 정치[63]에 기반하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최고로 여기고, 그 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이(夷)'''라고 불렀다. '''이(夷)'''는 도에서 벗어난 짐승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으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불렸다.[61] 이(夷)의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천자의 덕이나 예의 영향, 문화 발전에 따라 변동하는 개념이었다.중화(中華)는 문명(華)의 중심을 뜻하며, 문명권을 의미하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발전한 엘리트 의식이었다. 스스로를 문명(華)이라 칭하며, 문명(華) 밖의 모든 비중화를 오랑캐(夷)로 여겼다.
춘추는 중화와 이적을 엄격하게 구분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춘추에서는 주 초기 예악을 제도화하고, 이적 기원의 문화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말기 순자는 상이나 주의 화이 질서를 설명하면서, 중원의 왕이 다스리는 땅을 중심으로 500리 간격의 동심원 구조를 제시하고, 원근에 따라 각각에 적합한 제도로 귀복시켰다고 설명했다.[69][70]
신의 황제 왕망은 전한의 관습을 고쳐 흉노와 고구려 왕을 후로 강등시키려 했으나, 이들 나라의 반발을 샀다.
수의 양제와 당의 태종은 중화와 이적의 융합 정책을 펼쳤다. 태종은 630년 3월, 중화 황제와 더불어 사이(四夷) 족장들의 추천을 받아 칸의 지위에도 올랐다. 수·당 시대에는 서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국 문화를 중시했고, 외국인이 궁정에서 등용되는 일도 흔했다.[71]
2. 3. 송·원·명·청 시대
송나라 때 주자학에서는 화이(華夷)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한족의 송나라를 '중화'로, 북방의 요나라와 금나라를 '이적(夷狄)'으로 규정했다.[72][73][74] 이는 오대십국 시대 이후 한족 왕조가 북방 민족에게 굴욕적인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반발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도 이러한 화이 질서가 강조되었다.[75]원나라는 몽골족 중심의 지배 체제를 유지했기에, 한족의 중화사상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명나라는 한족 왕조였으므로 중화사상이 다시 강화되었다. 명나라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주변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취급하는 전통적인 중화 질서를 유지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지만,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괄하는 통치 방식을 택했다. 청 황제는 만주족에게는 팔기의 지도자, 한족에게는 중화 천자, 몽골족에게는 대한, 티베트 불교도에게는 문수보살의 화신 등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졌다. 옹정제는 대의각매록에서 순 임금과 주나라 문왕이 '이(夷)' 출신임을 들어, 출신보다 덕(德)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중화 지배를 정당화했다.[63] 또한 변발 강요와 같은 정책과 함께 과거 제도를 유지하고 한족 지식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등 중화 문화를 존중하는 정책을 펼쳐 한족의 반발을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영국과의 대등 외교를 거절하는 등 중화 중심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중화 질서가 흔들리자, 양무운동과 같은 중체서용적 근대화 노력이 있었지만, 일청전쟁 패배 이후 제도와 사상 면에서 근대화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화이 질서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약화와 혁명 사상의 유입으로 한족의 민족주의적 중화사상은 오히려 강화되어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루쉰은 광인일기, 아Q정전 등을 통해 중화사상에 갇힌 현실 인식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최근의 '신청사(新清史)' 연구는 청나라를 만주족 왕조로 보고, 한족 중심의 '한화' 논쟁보다는 중앙 유라시아적 체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신청사'의 학술적 성과는 인정하면서도, '한화' 부정에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77]
2. 4. 근대
19세기 들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일본 제국이 메이지 유신을 거쳐 청나라를 제1차 중일전쟁에서 패배시키면서, 중화사상에 기반한 정치 관계와 중국 중심의 문화적 우월성 신념(특히 서구에 대한)은 쇠퇴했다.[46] 그 결과, 중국은 평등한 독립국가들의 베스트팔렌 체제를 채택했다.[46]근대 이전 시대에는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으로 보고, 외부 민족이나 외국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는 화이 이분법이 있었다.[3][4]
중국 중심주의적 태도와 유럽인(Europeans) 사이의 역사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공식적인 만남 중 하나는 1792년에서 1793년에 걸쳐 영국의 마카르트니 사절단이 베이징에 영구적인 영국 대표부를 설치하고 공식적인 무역 관계를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47] 중국 황제가 영국의 구애를 거절하고 영국이 황제에게 복종의 예(kowtow)를 거부한 일은 영국과 중국 민간 전승에서 전설이 되었다. 영국이 마카르트니를 공식 대사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썼다.[46]
> 천하를 다스리는 천朝(Celestial Empire)는 단지 정부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우리는 기발한 물건을 결코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당신 나라의 제품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왕이여, 당신이 수도에 누군가를 남겨두도록 요청하는 것에 관해서는, 그것은 천朝(Celestial Empire)의 규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 우리는 또한 그것이 당신 나라에 전혀 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청말에 국가 민족 사상과 중화 사상이 결합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량치차오 등에 의해 제창되었고, 중화민국에서도 청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 영토와 함께 청나라를 구성했던 만주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도 중화민족으로 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청말 민국 초기에 독립한 몽골과 티베트에서는 거부되었고, 위구르도 나중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3. 중화주의 체제 (Sinocentric System)
중화주의 체제(Sinocentric system)는 근대 서구식 베스트팔렌 체제가 동아시아에 도입되기 전까지 지배적이었던 국제 관계의 위계적 체제였다. 이 체제의 중심에는 왕조에 의해 통치되는 중국이 있었는데, 이 왕조는 천명을 얻었다고 여겨졌다. 유교적 도덕과 예의로 구별되는 이 "천자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이라고 여겼으며, 중국 황제는 전 세계 유일한 합법적인 황제(천하(天下) 모든 땅)로 여겨졌다.[5]
이러한 국제 관계 체제하에서는 중국만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다른 국가들은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6] 중국 황제는 천자로 여겨졌다.
중심지의 확인과 왕조 계승의 정통성은 모두 이 체제의 필수적인 측면이었다. 원래 중심지는 중원과 동의어였는데, 이 지역은 수세기에 걸친 침략과 정복을 통해 확장되었다. 왕조 계승은 때때로 해석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는데, 예를 들어 남송 시대에는 통치 왕조가 전통적인 중심지를 북방 이민족에게 잃었다. 중심지 밖에는 여러 개의 동심원이 있었다. 지역 소수 민족은 "외국"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 조정의 인정을 받는 토사(土司)라고 불리는 그들의 원주민 지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중국 관료 제도에서 면제되었다.
이 원 밖에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중국이 종주권을 행사하는 조공국이 있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이들 국가가 여러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동남쪽 오랑캐(1급)에는 한국, 일본, 류큐 왕국, 베트남, 태국, 참파, 자바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이 포함되었다. 두 번째 동남쪽 오랑캐 그룹에는 술루, 말라카, 스리랑카 등이 포함되었다.[7] 이들 중 많은 국가는 현대에는 독립 국가이다.
일부 조공국이 자체 조공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은 복잡해졌다. 라오스는 베트남의 조공국이었고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쳤다. 쓰시마섬 또한 한국의 고려와 조선 왕조의 조공국이었다.
조공국 원 밖에는 중국과 무역 관계를 맺은 국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은 마카오의 임대한 영토에서 중국과 무역할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조공 체제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청나라의 대만 통치 기간 동안 일부 청나라 관리들은 아직 완전히 경작되고 개발되지 않고 청나라 정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은 대만(포르모사)의 지역을 가리켜 화외지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9]
중화주의는 정치적 국제 관계 체제로 간주되지만, 경제적 측면도 중요했다. 중화주의 조공 무역 체제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국제 무역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틀을 제공했다. 중국과 무역하기를 원하는 국가는 중국 군주와 종주-종속 관계를 맺어야 했다. 해당 통치자의 책봉(冊封) 후, 사절단은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고, 그 대가로 회사(回賜)를 받았다. 이들 사절단에 동행하는 상인들이 무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증이 발급되었다. 국경과 특정 항구에서도 무역이 허용되었다. 이 중화주의 무역 지대는 은을 통화로 사용하고 중국 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이 책정되었다.
중화주의 모델은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 열강과의 접촉, 특히 아편전쟁 이후까지는 심각하게 도전받지 않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근세 이전 시대의 중국과 다른 제국들 사이의 지속적인 접촉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중국은 쇠퇴기를 넘어 붕괴 직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중화주의 조공국 체제는 베스트팔렌 다국가 체제로 대체되었다.[10]
3. 1. 주변국과의 관계
중화사상은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지배적인 체제였다. 일본 (아스카 시대에 중국과의 종번 관계를 끊고 스스로를 동등하고 독립적인 문화로 간주[5]), 한국, 류큐 왕국,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은 중국의 종속국으로 여겨졌다. 이들 국가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조공 관계를 맺었다.[5] 중화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은 화외지지(化外之地), 즉 "문명 밖의 땅"으로 불렸다.이 체제하에서 중국만이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다른 국가들은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6] 일본이 통치자를 "천황"(天皇일본어; "천상의 군주")이라고 부른 것은 이 원칙에 대한 반역이었다.
중화주의는 경제적 측면도 중요했다. 조공 무역 체제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국제 무역을 위한 틀을 제공했다. 중국과 무역하기를 원하는 국가는 중국 군주와 종주-종속 관계를 맺어야 했다. 책봉(冊封) 후, 사절단은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고, 그 대가로 회사(回賜)를 받았다. 이들 사절단에 동행하는 상인들이 무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증이 발급되었다.
중화주의 모델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유럽 열강과의 접촉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후반에는 베스트팔렌 다국가 체제로 대체되었다.[10]
하지만, 각국의 중화 체제에 대한 반응에는 차이가 있었다.
- '''한국''': 조선은 중국과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에 안보적 배경에서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국내의 적대국과의 항쟁에서 유리한 입장을 얻거나, 유교와 그에 따른 화이관을 받아들이고 중화에 동화하여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길을 선택했다.[80] 스스로를 “중국(대중화)과 함께 중화를 형성하는 일부(소중화)”로 여기려 했다.
- '''일본''':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안녕을 묻는다"라는 국서를 보내어 중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는 일본이 스스로를 중국과 동등한 독립적인 문화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 '''베트남''': 베트남은 스스로를 중국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남쪽 산과 강의 지배자는 남쪽의 황제"라는 리트엉끼엣(Lý Thường Kiệt)의 시 구절처럼, 중국을 북쪽, 베트남을 남쪽으로 하여 대등한 관계를 강조했다.[84] 레 중흥기와 응우옌 왕조는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채택했다. 1805년 자륭제(Gia Long)는 베트남을 "중국(中國)"이라 칭했고,[15] "베트남인과 오랑캐는 명확한 경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16]
- '''기타 국가''': 버마는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다른 문자 체계를 사용했다. 중국은 버마를 속국으로 여겼지만, 버마의 기록에는 버마가 자신을 중국과 동등한 국가로 여겼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버마는 자신을 "아우"로, 중국을 "형"으로 간주했다.[40] 태국은 수(Sui) 왕조부터 19세기 중엽 청(Qing) 왕조의 태평천국 운동까지 중국의 조공국이었다.[5]
3. 1. 1. 한국
삼국시대 이전까지 한국의 남부 국가들은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지배하며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안전했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중국과 동등한 최고 국가로 여기며 주변 국가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체제를 채택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중국의 동부 영토를 계속 정복하면서 598년부터 614년까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이는 참패로 끝났고, 주로 618년 수나라 멸망에 기여했다. 이러한 중국의 수많은 패배는 고구려의 민족적 우월 의식을 높였고, 중국 영토로의 추가 확장이 계속되었다.668년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한반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 신라는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조공 체제를 더욱 쉽게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자처한 고려에 신라가 복속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약화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고려가 송나라를 이상화하고 적극적으로 문화적 동화를 추구했다.[11] 이러한 관계는 몽골의 침입과 몽골의 송나라 정복으로 두 왕조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2] 30년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고려와 몽골은 마침내 평화를 맺었고,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원나라가 약해지자 고려는 군사 작전을 통해 원나라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주권을 회복했다.
조선 왕조(1392~1910)는 한국 사회에 한국 유교 이상과 교리를 확립하는 것을 장려했고, 다시 기꺼이 중화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중화(華)로 여겨졌던 명나라 이후, 청나라의 침입으로 문화적 문명이 붕괴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지배적인 만주족은 한국인들에게 이(夷) 즉 오랑캐로 여겨졌다.[13] 명나라는 마지막 진정한 중화 문화(中華)로 여겨졌다.[14]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패배시킨 후, 청나라의 쇠퇴와 함께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중화주의는 더욱 약해졌다. 특히 해외 유학을 한 일부 한국인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서구 문명을 근대화와 연결시켰다.[11]
조선은 중국과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에 안보적 배경에서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국내의 적대국과의 항쟁에서 유리한 입장을 얻거나, 유교와 그에 따른 화이관을 받아들이고 중화에 동화하여 자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길을 선택했다.[80] 스스로를 “중국(대중화)과 함께 중화를 형성하는 일부(소중화)”로 여기려 했다.
3. 1. 2. 일본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에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안녕을 묻는다"라는 국서를 보내어 중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는 일본이 스스로를 중국과 동등한 독립적인 문화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화개혁(645)을 통해 중국식 체제를 도입하고, 일본의 중국 사절단이 폐지될 때까지(894년) 중국 문화의 영향을 일본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받았다.무로마치 시대(1401년)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중단되었던 조공 체제를 재개하고, 중국 황제에게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서 당신의 신하"라고 칭하며 조공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 무역은 강호(勘合) 무역(tally trade)[36]이라고 불렸으며, 1551년까지 19차례의 사절단 파견을 통해 지속되었다.
몽골이 이끄는 원나라 시대에 일본은 중국을 더 이상 진정한 중국 땅으로 여기지 않았고,[39] 이후 "중국", "화하"라는 이름을 자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39]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1593)을 일으켜 명나라 정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에도 시대에는 고쿠가쿠(국학) 연구가 등장하여 신도를 중심으로 일본 고유 문화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미토가쿠를 설립하여 유교 사상에 따라 천황 중심의 통일된 국가관을 확립하고자 했다.
일부 주자학자들은 일본 황실의 연속성과 청나라의 만주식 문화 강요를 이유로 일본이 중국 문화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야마가 소코는 『중조사실』에서 일본이 유교적 관점에서 중국보다 우월하며 "중국(中国)"이라는 이름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했다.
일본은 "중화민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20세기 초에는 중국을 '支那'(支那중국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1. 3. 베트남
베트남(대월)은 중국과 밀접하면서도 때로는 갈등을 겪는 관계였다. 10세기 독립 이후에도 중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베트남은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행정, 건축, 철학, 종교, 문학 등 중국 문화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였고, 한자(Chữ Hán)를 국가 문자로 사용했다. 베트남 상인들은 한자와 유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5]베트남은 스스로를 중국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남쪽 산과 강의 지배자는 남쪽의 황제"라는 리 떠엉 키엣(Lý Thường Kiệt)의 시 구절처럼, 중국을 북쪽, 베트남을 남쪽으로 하여 대등한 관계를 강조했다.[84]
레 중흥기와 응우옌 왕조는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채택했다. 1805년 자륭제(Gia Long)는 베트남을 "중국(中國)"이라 칭했고,[15] "베트남인과 오랑캐는 명확한 경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16] 민망제(Minh Mạng)는 소수 민족에게 문화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17] 베트남인들은 스스로를 한인(漢人)이라 칭하고, 중국계 베트남인을 청인(清人)이라 불렀다.[18] 캄보디아는 "상류 오랑캐의 나라"라고 불렸다.[19] 베트남은 중국 모델을 모방하여 주변국에 조공을 요구하고, 베트남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19]
민망제(Minh Mạng)는 크메르족, 참족 등 소수 민족을 중국화하고, 베트남을 유교와 한나라의 유산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하며, 베트남인을 한인(Hán nhân)이라 칭했다.[20] "야만적인 습관이 사라지고 한족 풍습에 감염될 것"이라 선언하며, 크메르족과 산악 부족에게 동화 정책을 강요했다.[21][22] 응우옌 영주 응우옌 푹 추는 베트남인을 "한인"이라 칭했다.[23] 응우옌 왕조는 중국식 의복을 강요했고,[24][25][26][27][28][29] 바이 흐몽족은 바지를 입게 되었다.[30] 명나라 전통 한족 의복이 베트남인에게 착용되었고, 아오자이(Áo dài)는 중국식 의복에 주름을 추가하여 만들어졌다.[32] 1774년 응우옌 푹 콰트(Nguyễn Phúc Khoát)는 중국식 의복을 강제했다.[33]
19세기 프랑스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베트남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한자(Chữ Hán)와 죽놈(Chữ Nôm) 문자 사용을 중단했다.
베트남 역사에서 자국과 중국을 남국과 북국, 자국민과 중국인을 남인과 북인으로 구분하여 대비시키며 양국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대월사기전서』를 비롯한 베트남 왕조의 정사에는 중국에 대한 조공과 중국으로부터의 책봉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조공 사신 파견에 대해서는 “송나라처럼”, “청나라처럼” 등으로 표현되어 동등한 외교 관계로 간주하고 있다.
1010년 이공온(李公蘊)이 하노이에 도읍을 정한 것을 칭찬하는 내용에서 하노이의 지리적 이점을 통해 이씨 왕조가 송에 저항하고 참파를 평정할 수 있었고, 이후 역대 제왕들도 중국에 대항할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81]
1285년 원의 침입 기록에는 진평중(陳平仲)이 원나라 군대에 사로잡혀 왕작을 받고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차라리 남쪽의 귀신이 되더라도 북쪽의 왕은 되지 않겠다”라고 외치며 원나라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사실과,[82] 1370년 즉위한 쩐조(陳朝)의 쩐예종(陳藝宗)이 전대 양일례(楊日禮)의 국제가 송의 국제를 따르지 않은 것은 “남북은 각각 그 나라의 천자이다”라는 이유 때문이라며 의복, 악장 등을 “북속”에 맞추는 것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83]
1329년경에 편찬된 국가 제사를 받는 신들의 업적을 기록한 월전유령집(越甸幽靈集)에서도 리조(李朝) 인종 때(1076년) 송나라 군대가 침입했을 때, "남국의 산천에는 남쪽의 임금이 계시니, 하늘의 명령에 따라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 어찌 역적들이 침범하여 왔는가? 너희들은 패배의 허황됨을 보라."라는 시가 들렸다고 전해지며, “남국의 산천에는 남쪽의 임금이 있다”라는 구절이 북국과 북쪽의 임금과의 대비를 암시하고 있다.[84]
레조(黎朝)에서 유교의 예제와 과거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집권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중국을 “북국”으로, 자신들을 “남국”으로 하는 국가 의식(“남국 의식”)이 형성되었고, 중국 세계로부터의 독립이 의도되었다. 명나라 군대 철수 후인 1428년, 레조를 건국한 레러이(黎利)의 명에 따라 유학자 응우옌짜이(阮廌)가 편찬한 『평오대고(平吳大誥)』에서 "우리 대월국은 실로 문헌의 나라이니, 산천의 영역이 이미 깊어 남북의 풍속 또한 다르다. 조정리쩐이 우리 나라를 처음 건설한 이후, 한(漢), 당(唐), 송(宋), 원(元)은 각각 일방의 천자가 되었으니, 강약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하더라도, 영웅은 세상에 아직 부족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베트남은 “문헌의 나라”(문명국)이며 오랑캐의 땅이 아니며, 지리와 영역은 중국과 다르고 풍속 또한 남(베트남)과 북(중국)이 다르다. 이는 중국 세계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자신을 문명인(“경인”), 주변의 이민족을 오랑캐(“토인”)로 하는 중화사상이 전개되었다. 이 “경인”이 오늘날 베트남의 주요 민족인 킨족의 명칭 유래이다.[85] 그러나 카오방을 거점으로 정씨 정권에 저항하던 막경우(莫敬宇)가 1677년 정군에 쫓겨 중국령 진안주를 “내지 진안주”로 표기하거나,[86] 베트남 유학자 중 한 명인 레귀돈(黎貴惇)이 북부 정씨가 남부 광남 원씨를 무너뜨린 것을 서술한 『무변잡록』에서 중국을 “상국”(대명, 대청 모두)이라고 부르는 등, 조선과 마찬가지로 사대주의의 측면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어려움도 있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나 라오스와 같은 “소국”을 황제의 덕이 미치는 번속국으로 여기고, 샴과 같은 강국과는 동등한 외교를 의미하는 “방교” 관계를 유지했다. 19세기 응우옌 왕조(阮朝)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도 국내에서는 조공이 아니라 동등한 “방교”라고 했다. 또한 응우옌조 명제 시대 캄보디아 지배에서는 행정 단위와 관직을 베트남식으로 하고, 사찰을 파괴하여 유교의 사당을 짓는 등의 동화 정책을 채택했다.[85]
이러한 의식은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서도 지속되었고, 1920년대까지 베트남인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인식에는 중국(中華)인 베트남에서 볼 때 다른 민족을 오랑캐 통치라는 틀에서 산악 민족을 조직하려고 했던 판보이쩌우(潘佩珠)와 같은 개혁파부터 베트남인 우선설을 주장하는 개량파까지 있었다. 1930년대까지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문헌에서도 “베트남 민족”이라고 할 때는 킨족만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 점은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40년대 초의 노선에서는 베트남이라는 틀은 킨족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다른 소수 민족을 포괄하는 틀이 되었다.[85]
베트남의 남북 분단이 초래한 북베트남의 중국 의존 구도는 중국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근대 민족주의의 원류에서 태어난 공산주의자들을 다시 중국으로 끌어들이고, 모택동 사상은 베트남 노동당 당규약에서 보편적 모델로 받아들여졌지만, 그 후 중국의 문화 대혁명 이후의 혼란과 60년대부터의 “베트남 모델” 제창,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격화는 베트남 역사관을 국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중국 역대 왕조의 침략에 대항하여 킨족을 중심으로 주변 민족이 결집한 “베트남 국민”이 매우 초기 단계에서 형성되었다고 여겨지고, 베트남이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는 측면은 완전히 부정되고, 4천 년의 애국주의 전통이 베트남 혁명의 추진력이라는 생각이 1970년 발행된 당의 정사에 기록되었다. 이러한 킨족을 중심으로 주변 민족을 결합하려는 경향은 남북 통일 후 중국계 주민을 둘러싼 문제가 되어 보트피플과 같은 비극을 낳게 된다.[85]
3. 1. 4. 기타 국가
버마는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다른 문자 체계를 사용했다. 중국은 버마를 속국으로 여겼지만, 버마의 기록에는 버마가 자신을 중국과 동등한 국가로 여겼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버마는 자신을 "아우"로, 중국을 "형"으로 간주했다.[40]태국은 수(Sui) 왕조부터 19세기 중엽 청(Qing) 왕조의 태평천국 운동까지 중국의 조공국이었다.[5]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대에 원(Yuan) 왕조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다.[41] 19세기 중국 학자 위위안은 태국이 중국의 동남아시아 조공국 중 가장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국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태국이 임진왜란 (일본의 조선 침략(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98)))과 아시아 본토 침략을 막기 위해 일본을 직접 공격할 것을 제안했던 사실과 명(Ming) 왕조에 대한 다른 충성 행위들을 그 이유로 언급했다.[42] 태국은 중국 이민자들을 환영했으며, 이들은 상업과 무역을 장악하고 정부 고위직에 진출했다.[43]
마지막 스리랑카 왕국인 칸디 왕국(1469–1815)은 중국과 중요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코테 왕국(1412–1597)은 명나라와 상당한 교류를 했다. 코테의 건국자 6세 파라크라마바후는 통치 기간 동안 명나라와 중요한 동맹을 맺어 이 지역에 주목할 만한 정치적,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 동맹으로 감폴라의 비라 알라케스바라가 6세 파라크라마바후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이는 중국 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44]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6세 파라크라마바후의 정통성은 명나라 조정의 선출 과정을 통해 강화되었다. 그는 영락제에 의해 지명되었고, 이후 정화 제독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화의 강력한 함대의 존재로 인해 확실해졌다.[44] 이러한 협력은 명나라와 코테 왕국 사이의 경제적 상호 작용이 증가하는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6세 파라크라마바후는 중국으로 최소 다섯 차례의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코테 해역 내 해적 행위 중단을 확인했다.[44] 6세 파라크라마바후 통치 기간의 주목할 만한 유산은 갈레 삼개국어 비문 설치로, 이는 두 국가 간의 상호 작용을 증명하는 유물이다.[44] 스리랑카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조공 체제 하에서 ''원이''(먼 이방인; 遠夷)로 간주되었다.[45][46]
4. 문화적 중화사상
문화적 중화사상은 중국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거나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는 이웃 국가들을 중국 문화의 단순한 분파로 여기는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4]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지리적 측면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최초의 세계 지도를 발표했을 때 중국인들의 반응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마테오 리치의 지도가 중국을 서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한 것에 대해 "전적으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49][48]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시대에는 중국 문화계에 서양에서 들어오는 지식은 이미 과거 중국에 존재했던 것이라는 '서학중원'(西學中源) 사상이 있었다.[46] 이는 고대 중국 학문의 권위뿐만 아니라 서양 학문의 권위를 높여 당시 중국인들에게 더 잘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방법이었다.[46] 청일전쟁 이전까지 일부 지식인들은 유럽에서 들어오는 과학과 기술이 실제로는 잃어버린 고대 중국 지식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20세기 초부터 이러한 생각을 버렸다.[46]
중화사상은 이 지역의 정치, 문화적 핵심이었다. 전통적인 중국어와 한자 문자 체계, 유교 사회 및 가족 질서의 이념적 틀, 법률 및 행정 시스템, 불교 및 역사 편찬술은 중국 본토, 한반도(한국 유교), 베트남에서 사용되었다.[49]
자민족중심주의로서의 중화사상은 한족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중국 황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천하를 대표하는 “'''천자'''”라고 칭했다. 이 황제가 다스리는 조정의 문화와 사상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졌다.[63] 이민족이나 외국의 침입에 대해서는 격렬한 배외주의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63]
초기에는 북방 유목 문화에 대해 한족의 농경 문화가 우월함을 의미했다.[61] 춘추전국시대 이후로는 「시경」, 「한비자」, 「여씨춘추」 등의 고전에 나타난 “천하의 모든 것, 왕의 땅이 아닌 것은 없고, 땅의 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것은 없다”라는 왕토왕민사상처럼, 유교의 왕도 정치[63]에 기반하여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최고로 여겼다. 그리고 그 덕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이(夷)'''라고 불렀다. 이(夷)는 도에서 벗어난 짐승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으며,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불렀다.[61] 이(夷)의 기준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천자의 덕이나 예가 미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변동하는 개념이었다.
중화(中華)는 화(華), 즉 문명의 중심이며 문명권을 의미하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발전한 엘리트 의식이다. 스스로를 화(華)라고 칭하면서, 대조되는 이(夷), 즉 비문명이 화(華)의 밖에 필요하게 되었고, 모든 비중화는 그들의 사상적으로 이(夷), 즉 오랑캐로 여겨졌다.
중화(中華)라는 명칭은 “화하(華夏)”라는 고대 명칭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호칭은 하(夏), 화(華), 또는 화하(華夏)라고 불렸다. “화(華)”는 화려함, “하(夏)”는 번성함을 의미하며, 중국인들이 자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용했던 말이었다.[63] 여기서부터 문화가 발달한 지역, 도읍을 의미하게 되었다.[63]
만주족이 지배층이었던 청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중화민족 민족주의를 구축한 장병린은 “화하(華夏)”를 국토의 명칭이자 지명이면서 동시에 종족의 명칭이라고 설명했다.[68]
중국의 사전 『사해(辞海)』도 “중화(中華)”가 민족의 명칭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국토적 명칭을 가리키는 것에 대해, 한족의 발상지가 황하 유역이고, 국도도 황하 남북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곳이 나라의 중앙이 되어 “중원(中原)”이나 “중국”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중국”도 이민족인 만이(蠻夷), 용적(戎狄)과는 안과 밖의 관계, 지역의 원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4. 1. 비판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은 중화사상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 손꼽힌다.[53] 이 소설의 주인공 아Q는 잦은 굴욕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정신 승리'를 했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인물로 묘사된다.[53] 이는 당시 중국 사회에 만연했던 그릇된 우월 의식과 현실 도피적인 태도를 풍자한 것이다.명나라 건국 공신 유기는 중국인과 비중국인이 다르지만 평등하다는 생각을 지지했다.[52] 그는 중국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52]
중국 불교 신자들은 중화사상의 주요 비판 세력이었다. 이들은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중국 중심적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50] 승려 지의(538~597년)는 중국을 '震旦(Zhendan, Zhèndàn)'이라 불렀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चीनस्थान| translit=cīnasthāna |label=nonesa을 음역한 것이다.[50] 또한, '한(漢)나라의 땅'이라는 뜻의 '한궈(漢國)'라는 표현도 사용했다.[50]
5. 현대적 의의와 논쟁
현대 중국에서 중화사상은 민족 중심주의의 한 형태로 나타나며, 한족 사회와 문화의 중심주의를 강조한다.[1] 이는 과거 중국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으로 보고, 외부 민족을 야만인으로 간주했던 화이 이분법[3][4]과 연결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화사상에 기반한 국제 질서는 서구 열강의 압력과 일본 제국의 부상으로 인해 약화되었다.[46] 특히, 제1차 중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면서 베스트팔렌 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46] 현대 중국 외교 정책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지만,[54] 일부 역사가들은 중국 정부 내에 중화사상 신념을 고수하는 인물들이 있다고 주장한다.[55]
중국 민족주의는 중화사상과 유사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통일되고 강력한 중국 국가라는 개념에 중점을 둔다. 중화사상은 한족 중심의 자민족중심주의로, 중국 황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상이다.[63] 이는 이민족 침입에 대한 배외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63]
타이완과 홍콩에서는 중화사상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홍콩에서는 홍콩 민족주의가 부상하며, 홍콩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홍콩 민족론이 나타나고 있다.[90] 타이완에서도 타이완 독립파를 중심으로 중화민족주의에 대한 반발이 존재한다.[91] 이등휘 전 총통은 타이완이 민주 국가이므로 중화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대립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2]
하지만 현대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을 그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97] 전직 외교관인 궁가쿠니히코는 현재 중국 교과서에 "중화사상"이 없고,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것이 중국뿐 아니라 다른 개발도상국에도 나타나는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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