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데버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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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데버넌트는 17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 총장이었다. 그는 도르트 회의에 잉글랜드 교회를 대표하여 참석했으며, 칭의와 성화의 관계, 예정론, 유아 세례 등에 대한 독자적인 신학적 견해를 제시했다. 특히,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중간 지점을 모색하며, 소뮈르 학파의 영향을 받아 가설적 보편주의적 견해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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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데버넌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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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직함 | 솔즈베리 주교 |
직무 | |
교구 | 솔즈베리 |
착좌 | 1621년 |
임기 종료 | 1641년 |
이전 | 로버트 타운슨 |
이후 | 브라이언 두파 |
다른 직책 | 레이디 마거릿 신학 교수 |
개인 정보 | |
출생 이름 | 존 데버넌트 |
출생 | 1572년 |
출생지 | 런던 |
사망 | 1641년 |
사망지 | 솔즈베리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종교 | 잉글랜드 교회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퀸스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
직업 | 성직자 |
2. 생애
그는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597년에는 같은 대학의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 1614년부터 1621년까지는 총장을 지냈다.[1] 1609년부터는 레이디 마가렛 신학 교수로 활동했다. 1618년에는 제임스 1세의 명에 따라 도르트 신조 회의에 잉글랜드 교회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때 사무엘 워드 (학자), 조셉 홀 (주교), 조지 칼튼 (주교) 등과 함께 참석했다.
존 데버넌트의 신학은 칼뱅주의 전통에 속하면서도 특정 쟁점에서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도르트 회의에 영국 대표단으로 참여하여 예정론 논쟁, 특히 그리스도의 속죄 범위 문제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모든 개개인을 위해 죽었다는 입장을 취하며[2], 극단적인 알미니우스주의와 초칼뱅주의 사이에서 중간적인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3] 이 과정에서 소뮈르 학파의 견해와 일부 유사성을 보였으나,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4][5]
3. 신학
또한 데버넌트는 개신교 교파들의 통합을 추구했던 존 듀리의 노력에 공감하며 지지를 표했다.[6] 예정론과 관련해서는 알미니우스주의 성향의 신학자 새뮤얼 호드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세례에 대해서는, 특히 유아 세례가 원죄의 죄책을 사하며 유아에게 칭의, 성화, 양자됨의 객관적 상태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견해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7][8] 그의 신학 사상은 여러 저작을 통해 전해지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Dissertatio de Morte Christi|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논문lat은 그의 신학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3. 1. 칭의와 성화의 관계
존 데버넌트는 칭의와 성화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 성화에 이르는 과정이며, 칭의와 성화는 마치 동료처럼 함께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칭의가 성화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10] 또한 칭의의 과정에 있어서 의의 전가(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옮겨지는 것)가 죄 사함보다 앞선다고 보았다.[10]
데버넌트는 자신의 골로새서 주석에서 성화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죄를 죽이는 실천(죄죽임)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부어진(주입된) 은혜로부터 비롯되며, 이것은 내적인 또는 습관적인 죄죽임이라고 불린다'고 기술했다. 여기서 '습관(habit)'이라는 개념을 성화와 연결했는데, 이는 당시 다른 여러 신학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관점이었다.[11]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데버넌트는 칭의, 성화, 양자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친구이자 도르트 신조 작성에 함께 참여했던 새뮤얼 워드와 마찬가지로, 모든 세례받은 유아는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을 용서받는다고 믿었다. 그는 이것이 유아에게 주어지는 칭의, 성화, 양자됨을 구성한다고 보았다.[7] 데버넌트에 따르면, 유아 세례를 통해 받는 용서는 은혜가 주관적으로 작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유아의 객관적인 상태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이 객관적인 상태만으로는 완전한 칭의에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유아가 성장하여 스스로 믿음을 갖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버넌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가 도르트 신조에서 명확히 밝힌 성도의 견인(신자가 구원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교리)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 교리는 주관적인 은혜의 작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8]
3. 2. 예정론 논쟁
도르트 회의에서 성공회 대표단 내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범위에 대한 신학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 한 편에서는 데버넌트, 워드, 마르티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고 믿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칼턴, 고드, 발칸퀄은 그리스도가 모든 종류의 사람으로 구성된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죽었다고 믿었다.[2] 논의 결과, 데버넌트의 입장에 가까운 방향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데버넌트는 노골적인 알미니우스주의와 영국에서 일부가 선호했던 초칼뱅주의(Supralapsarianism)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 했다. 그는 소뮈르 신학에서 그러한 길을 찾았고, 의도와 충분성 모두의 의미에서 일반적인 속죄, 십자가의 일반적인 축복, 조건부 구원이라는 아미랄두스주의(Amyraldianism)의 가설적 보편주의적 견해를 옹호했다. 이 모든 견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선의의 구원의 제안이라는 신학적 견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3]
다른 해석은 데버넌트가 소뮈르 학파와 모세 아미로의 견해와 구별된다고 본다.[4] 프랑스 아미랄두스주의자들이 도르트 신조에 참석한 영국 대표단의 견해를 인용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을 때, 데버넌트는 자신의 견해와 아미랄두스주의의 견해를 구별하는 Sententiam suam de controversia inter theologos Gallos|프랑스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에 관하여lat라는 논문을 통해 해명을 제시했다.[5]
데버넌트는 개신교를 통합하려는 존 듀리의 목표에 공감하여 그를 옹호하는 글을 썼고, 이는 나중에 제라드 브란트에 의해 인용되었다.[6]
예정론에 관해서 그는 알미니우스주의 성공회 신자 새뮤얼 호드와 논쟁을 벌였다.
도르트에서 대표로 함께 활동했던 친구 새뮤얼 워드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에서 데버넌트는 모든 세례받은 유아가 세례에서 원죄의 죄책을 용서받고, 이것이 유아 세례의 칭의, 성화 및 양자됨을 구성한다는 견해(워드와 공유)를 지지한다.[7]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유아 세례의 용서는 은혜의 주관적인 작용과 별개로 유아의 객관적인 상태를 포함하며, 유아가 나중에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면 칭의에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이 도르트에서 명확히 밝힌 성도의 견인 교리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의도된 "견인"은 주관적인 은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8]
데버넌트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논문"(Dissertatio de Morte Christilat)은 1831년 조시아 올포트(Josiah Allport)에 의해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그의 주석의 부록으로 출판되었다. 골로새서 주석은 "논문" 없이 2005년 배너 오브 트루스 트러스트(Banner of Truth Trust)에서 재판되었고, "논문"은 2006년 퀸타 프레스(Quinta Press)에서 재출판되었다.
3. 3. 소뮈르 학파와의 관계
도르트 총회에서는 성공회 대표단 내에서도 신학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
: 한 편에서는 데버넌트, 새뮤얼 워드, 마티아스 마르티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죽었다고 믿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조지 칼턴, 토머스 고드, 월터 발칸퀄은 그리스도가 모든 종류의 사람으로 구성된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죽었다고 믿었다.[2]
논의 끝에 이루어진 타협안은 데버넌트의 입장을 더 많이 반영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데버넌트의 견해에 대한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데버넌트는 노골적인 알미니우스주의와 영국에서 일부가 선호했던 초자연주의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 했다. 그는 소뮈르 신학에서 그러한 길을 찾았고, 의도와 충분성 모두의 의미에서 일반적인 속죄, 십자가의 일반적인 축복, 조건부 구원이라는 아미랄디안의 가설적 보편주의적 견해를 옹호했다. 이 모든 견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선의의 구원의 제안이라는 신학적 견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3]
하지만 다른 해석에서는 데버넌트의 입장이 소뮈르 학파나 모세 아미로의 견해와는 구별된다고 본다.[4] 실제로 프랑스의 아미랄디안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 영국 대표단의 견해를 인용하자, 데버넌트는 "프랑스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와 아미랄디안의 견해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5]
데버넌트는 개신교 교파들의 통합을 추구했던 존 듀리의 목표에 공감하여 그를 지지하는 글을 썼으며, 이 글은 훗날 제라드 브란트에 의해 인용되기도 했다.[6] 예정론 문제에 있어서는 알미니우스주의 성향의 성공회 신학자 새뮤얼 호드와 논쟁을 벌였다.
도르트 총회에서 함께 대표로 활동했던 친구 새뮤얼 워드에게 보낸 편지(날짜는 미상)에서 데버넌트는 모든 세례받은 유아가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을 용서받으며, 이것이 유아 세례에서의 칭의, 성화, 그리고 양자됨을 구성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워드와 공유하는 입장이었다.[7] 데버넌트에 따르면, 유아 세례를 통한 죄의 용서는 은혜의 주관적인 작용과는 별개로 유아의 객관적인 상태 변화를 의미하지만, 유아가 자라서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칭의를 완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견해가 도르트 신조에서 명확히 한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성도의 견인은 주관적인 은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8]
데버넌트의 저작 Dissertatio de Morte Christi|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논문lat은 1831년 조시아 올포트에 의해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그의 골로새서 주석 부록으로 출판되었다. 골로새서 주석은 이 논문 없이 2005년에 Banner of Truth Trust에서 재판되었으며(ISBN 0 85151 909 1),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논문"은 2006년 Quinta Press에서 다시 출판되었다(ISBN 978-1-89785-627-7).
4. 저서
- The Death of Christeng : 골로새서 주석
참조
[1]
acad
[2]
서적
King James VI and I and the Reunion of Christendom
1997
[3]
웹사이트
Davenant and the Westminster Assembly
http://www.prca.org/[...]
[4]
학위논문
Tensions Within International Calvinism: The Debate on the Atonement at the Synod of Dort
Stanford University
1974
[5]
서적
The British delegation and the Synod of Dort (1618–1619)
Boydell Press
2005
[6]
PDF
http://dare.ubvu.vu.[...]
[7]
기타
Epistola Davenantii in Vindiciae Gratiae Sacramentalis
1650
[8]
웹인용
“The Epistle of Davenant.”
http://www.joelgarve[...]
2011-01-06
[9]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10]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11]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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