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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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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도의 견인은 택함받은 자가 믿음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이다. 이 용어는 '성도의 보존'과 구분되기도 하며, 칼빈주의에서는 '영원한 안전'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견인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종교개혁 이전과 칼뱅주의 시대에 걸쳐 지지자들이 있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며, 성도의 견인 교리는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구원 확신, 배교 현상 설명, 믿음의 대상, 율법 폐기론 등의 측면에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히브리서의 경고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개신교 교파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도들이 인내하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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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

2. 용어 및 정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견인에 대하여 성경은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한복음 10: 28, 29; 로마서 11: 29; 빌립보서 1: 6; 데살로니가후서 3: 3; 디모데후서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브리서 3: 14; 6: 11; 10: 22; 베드로후서 1: 10).[9]

2. 1. 용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성경은 견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 28, 29; 롬 11: 29; 빌 1: 6; 살후 3: 3; 딤후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 14; 6: 11; 10: 22; 벧후 1: 10).[9]

"성도의 보존"은 선택된 자의 인내를 이 결정하는 역할에 중점을 둔다. 반대로,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의 보존의 결과인 인간의 인내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도의 보존"은 하나님이 선택된 자들을 결정론적으로든 아니든 보존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조건부 보존"으로 알려진 비결정론적 관점은, 신자가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이 신자와의 관계를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주의의 "성도의 인내" 교리에 대한 하나의 실질적인 해석이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그 교리 자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영원한 안전"은 "성도의 인내"의 엄격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용법에서 "영원한 안전"이라는 용어의 신학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일부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안전"이라는 용어를 그들의 인내 교리에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칼빈주의적 형태의 영원한 안전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2. 2. 정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에 대하여 성경은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 28, 29; 롬 11: 29; 빌 1: 6; 살후 3: 3; 딤후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 14; 6: 11; 10: 22; 벧후 1: 10).[9] 성도의 견인 교리는 택함받은 자가 평생 동안 믿음 안에서 인내하여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로 거듭남을 경험한 자들은 끝까지 인내할 택함받은 자들이다.

3. 역사

사도 바울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견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28, 29, 롬 11:29, 빌 1:6, 살후 3:3, 딤후 1:12; 4: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14; 6:11; 10:22, 벧후 1:10).[9]

3. 1. 아우구스티누스의 견인 교리

보티첼리, 산드로. (c. 1480) ''서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387년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결정론적 철학인 스토아주의, 신플라톤주의, 마니교를 따랐다.[9] 개종 후 412년까지는 신학적 결정론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와의 갈등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사상에 특정한 마니교 원리를 재도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특히 유아 세례 논쟁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초기에 스토아주의에 노출되어 세밀한 신적 예정론을 강조한 것도 그의 견해를 형성했다. 마니교 교리에 따르면, 태어나지 않고 세례받지 않은 유아는 육체 때문에 지옥으로 정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부모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세례를 받도록 미리 정하셨으며, 물 세례를 중생과 연결시켰고, 궁극적으로 어떤 유아는 정죄되고 어떤 유아는 칭의되는지를 미리 정하셨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신앙을 유지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여 부도덕한 삶을 사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중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신앙을 유지하고 배교하는 것을 막는 추가적인 견인의 은사(donum perseverantiae|도눔 페르세베란티아이la)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 두 번째 은사가 없으면 기독교인성령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내하지 못하고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견인의 교리를 De correptione et gratia|데 코렉티오네 엣 그라티아la (426–427년경)에서 발전시켰다. 이 교리는 이론적으로 견인의 은사를 받은 선택된 자에게 안전을 제공하지만, 개인은 자신이 그 은사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3. 2. 종교개혁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 구원론 지지자들

5세기와 16세기의 종교 개혁 사이 아우구스티누스구원론을 지지한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고트샬크 (808년경–868년), 라트람누스 (868년 사망), 토마스 브래드워딘 (1300–1349), 리미니의 그레고리 (1300–1358), 존 위클리프 (1320년대 – 1384), 요한 루흐라트 폰 베젤 (1481년 사망),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1498), 요한 폰 슈타우피츠 (1460–1524).[9]

3. 3. 칼뱅주의 견인 교리의 발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에 대하여, 성경은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28, 29, 롬 11:29, 빌 1:6, 살후 3:3, 딤후 1:12; 4: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14; 6:11; 10:22, 벧후 1:10).[9]

다른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존 칼빈(1509–1564)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구원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칼빈의 구원론은 테오도르 베자와 다른 신학자들에 의해 더욱 다듬어지고 체계화되었다. 이후 반대되는 ''반대 명제 다섯 조항''에 대응하여 제2차 도르트 신조(1618–1619) 동안 명확히 정리되었다. 칼빈주의 견인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앙 고백에 나타나 있는데, 그 예로 람베스 조항(1595), 도르트 신조(1618-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6)이 있다.

4. 칼뱅주의 예정론의 결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성경은 견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 28, 29; 롬 11: 29; 빌 1: 6; 살후 3: 3; 딤후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 14; 6: 11; 10: 22; 벧후 1: 10).[9]

정통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 결정론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 본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섭리로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이 정하셨다"고 한다.

구원에 관하여, 칼뱅은 개인이 구원받을지 멸망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라고 명백히 가르쳤다. 그는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 관하여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은 영생을, 다른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받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 그리고 각각이 이러한 목적 중 하나를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이나 죽음을 위해 예정되었다고 말한다"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인간의 행위 또한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 이에 따라 칼뱅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옹호하며, 택함 받은 자의 무조건적인 보존을 주장했다.

5. 성도의 견인 교리의 실천적 해석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견인에 대하여 성경은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로마서 11장 29절, 빌립보서 1장 6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 디모데후서 1장 12절, 4장 18절에서 직접적으로 입증한다.[9]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브리서 3장 14절, 6장 11절, 10장 22절, 베드로후서 1장 10절).[9]

칼뱅주의 진영에서는 "성도의 견인"에 관해 두 가지 실천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한 가지 해석은 "덧없는 은혜"와 같이 외견상 배교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여, 신자들에게 생애 동안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른 해석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며, 신자들이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영원한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이미 16세기에 관찰되었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서 비롯된 두 가지 관점에 직면했다. 그는 첫 번째 관점을 "절망"(desperatio|데스페라티오la), 두 번째 관점을 "안전"(securitas|세쿠리타스la)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영원한 안전"에 대한 성도의 견인 해석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명시적으로 정죄되었다.

5. 1.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거부하는 해석

칼뱅주의에 따르면, 배교는 진정한 기독교인에게는 불가능하다.[9]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끝까지 인내함으로써만 증명된다. 이는 개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결정적인 배교를 보이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일반 은총이 유효한 부르심과 그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할 수 없는 효과를 포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은혜가 일시적인 개념(때로는 "덧없는 은혜"라고 함)을 제시했는데, 이는 타락자 안에서 잠시 나타나 작용하다가 사라진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성령은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할 수 없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들의 삶에서 가시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일시적인 은혜는 테오도르 베자, 윌리엄 퍼킨스, 존 오웬, A. W. 핑크, 로레인 보에트너와 같은 후기 칼뱅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지식은 이론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덧없는 은혜"와 같은 명백한 배교에 대한 설명을 인정하여, 살아있는 동안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신자에게 제공하는 것을 피한다.

5. 2.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지지하는 해석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견인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9]

  •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 로마서 11장 29절
  • 빌립보서 1장 6절
  •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
  • 디모데후서 1장 12절, 4장 18절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브리서 3장 14절, 6장 11절, 10장 22절, 베드로후서 1장 10절).[9]

익명(17세기) 존 칼빈의 초상화


존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관에 크게 의존했다. 칼빈은 4페이지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할 정도로 그를 존경했으며, 자신을 칼빈주의자가 아닌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인내하도록 선택된 자"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루터보다 이 가능성에 대해 더 낙관적이었다. 칼빈은 선택된 자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그레고리오 1세가 '우리가 부르심만을 알고 선택은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확신의 가능성은 개인의 내적 성찰에 근거하여 후기 칼빈주의 신학자들도 표현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646)은 이러한 확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8세기 초(超)칼빈주의는 추종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내적 성찰을 장려했으며, 이 개념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칼빈주의 진영 내에서 무조건적인 영원한 안전의 기초를 형성한다.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신자는 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체계를 받아들인다. 그 후, 자기 성찰을 통해 성령의 영적 영향을 분별한다. 이러한 내적 성찰은 자신의 예정된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도의 인내라는 개념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인내를 믿도록 유도할 수 있다.

"성도의 인내" 교리에 대한 이 실천적 해석이 개혁 기독교 내에서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교리 자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영원한 안전"은 "성도의 인내"와 엄격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개신교 내에서 "영원한 안전"은 종종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신학적 중요성 때문에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 초 조지아에서 시작된 원시 침례교와 같은 단체들은 강력한 칼빈주의 신념으로 인해 이 형태의 영원한 안전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칼뱅주의 진영에서 "성도의 견인"에 관해 두 가지 실질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한 가지 해석은 "덧없는 은혜"와 같은 외견상 배교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여, 신자들에게 생애 동안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른 해석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며, 신자들이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영원한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이미 16세기에 관찰되었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서 비롯된 두 가지 관점에 직면했다. 그는 첫 번째 관점을 "절망"(desperatiola), 두 번째 관점을 "안전"(securitasla)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영원한 안전"에 대한 성도의 견인 해석은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에 의해 명시적으로 정죄되었다.

6. 반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요한복음 10장 28절, 29절
  • 로마서 11장 29절
  • 빌립보서 1장 6절
  • 데살로니가후서 3장 3절
  • 디모데후서 1장 12절, 4장 18절


안명준 교수는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3장 14절, 6장 11절, 10장 22절, 베드로후서 1장 10절).[9]

하지만 성도의 견인 교리는, 신자가 구원 확신을 가질 수는 있으나 끝까지 견뎌야 자신이 선택받았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자유 은혜 신학 지지자들, 성도의 조건부 보존 옹호자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점을 비판한다. 또한 배교 현상 설명의 모순, 믿음의 대상에 대한 긴장, 율법폐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 등 다양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6. 1. 구원 확신의 어려움

칼뱅주의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인은 배교가 불가능하지만, 끝까지 인내해야만 진정한 기독교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1] 이는 개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배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일반 은총이 유효한 부르심과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하기 어려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은혜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은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4]

성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하기 어려운 효과를 만들어, 삶에서 가시적인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6] 이러한 일시적인 은혜는 테오도르 베자, 윌리엄 퍼킨스,[7] 존 오웬,[8] A. W. 핑크,[9] 로레인 보에트너와 같은 후기 칼뱅주의 신학자들도 지지했다. 이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확신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달리, 선택받은 자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후기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개인의 내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646)에도 나타난다. 18세기 초(超)칼빈주의는 내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도록 장려했고, 19세기에도 이러한 경향이 이어졌다.

영원한 안전은 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들이고, 자기 성찰을 통해 성령의 영향을 분별하며, 자신의 예정된 선택을 믿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원한 안전"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20세기 초 원시 침례교와 같은 단체들은 강력한 칼빈주의 신념으로 인해 영원한 안전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신자가 구원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끝까지 견뎌야 자신이 선택받았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점은 자유 은혜 신학 지지자들과 성도의 조건부 보존 옹호자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6. 2. 배교 현상 설명의 모순

칼뱅주의에 따르면, 배교는 진정한 기독교인에게는 불가능하다.[1]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끝까지 인내함으로써만 증명된다.[2] 이는 개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결정적인 배교를 보이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일반 은총이 유효한 부르심과 그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할 수 없는 효과를 포함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칼빈은 은혜가 일시적인 개념(때로는 "덧없는 은혜"라고 함)을 공식화했는데, 이는 타락자 안에서 잠시 나타나 작용하다가 사라진다.[3][4][5][6] 이 개념에 따르면, 성령은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구별할 수 없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7] 그들의 삶에서 가시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8]

일시적인 은혜는 나중에 테오도르 베자, 윌리엄 퍼킨스,[9] 존 오웬, A. W. 핑크, 로레인 보에트너와 같은 후기 칼뱅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지식은 이론적으로 살아있는 동안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덧없는 은혜"와 같은 명백한 배교에 대한 설명을 인정하여, 살아있는 동안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신자에게 제공하는 것을 피한다. 여러 개혁 신학자들이 구원에 대한 비절대적 확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성도의 견인 교리 내에서, 최종적인 배교 현상은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덧없는 은혜"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개념은 성령께서 자발적으로 일시적인 믿음과 관련된 "열매"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칼빈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설명을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에 반하며 전반적인 계시와 모순된다고 본다.

6. 3. 믿음의 대상에 대한 긴장

존 칼빈은 어거스틴주의 종교관에 크게 의존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는 신자들이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인내하도록 선택된 자"에 속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2] 칼빈은 루터보다 이 가능성에 대해 더 낙관적이었으며,[4] 선택된 자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시사했다.[5]

이러한 확신의 가능성은 개인의 내적 성찰에 근거하여 후기 칼빈주의 신학자들도 표현했다.[6]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언급되었다.[7][8] 18세기에는 초(超)칼빈주의가 추종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수단으로 내적 성찰을 장려했다.[9] 이 개념은 19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칼빈주의 진영 내에서 무조건적인 영원한 안전의 기초를 형성한다.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신자가 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 체계를 받아들인 후, 자기 성찰을 통해 성령의 영적 영향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성찰은 자신의 예정된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도의 인내라는 개념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인내를 믿도록 유도할 수 있다.

"성도의 인내" 교리에 대한 이 실천적 해석이 개혁 기독교 내에서 "영원한 안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용어는 교리 자체와 동의어가 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영원한 안전"은 "성도의 인내"와 엄격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더 넓은 개신교 내에서 "영원한 안전"은 종종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신학적 중요성 때문에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현재의 예수에 대한 믿음과 과거의 사건, 즉 선택에 대한 믿음 사이의 긴장감을 강조한다. 그들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 현재 예수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데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진정한 믿음은 독특해야 하며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6. 4. 율법폐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

존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와 달리, 선택받은 자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았다.[4]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도 나타나 있다.[7][8] 18세기 초(超)칼빈주의는 신자들이 자신의 선택 여부를 알기 위해 내적 성찰을 하도록 장려했고,[9] 19세기에도 이러한 경향이 이어졌다.

이러한 확신은 칼빈주의 진영 내에서 무조건적인 영원한 안전의 기초가 된다. 그 과정은 먼저 칼빈주의 체계를 받아들인 후, 자기 성찰을 통해 성령의 영향을 분별하여 자신의 예정된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인내를 믿도록 유도할 수 있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이러한 실천적 해석은 "영원한 안전"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20세기 초까지 "영원한 안전"은 "성도의 인내"와 엄격하게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개신교 내에서 "영원한 안전"은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하므로,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 초 조지아에서 시작된 원시 침례교와 같은 단체들은 강력한 칼빈주의 신념으로 인해 이러한 형태의 영원한 안전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성도의 견인"에 대한 실제적인 해석은, 개인이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으면 거부할 수 없이 견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개인이 역동적인 성화를 포기하고 정적인 율법 폐기론적 관점을 따르게 할 수 있다.

7. 논쟁적인 주석적 측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견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 28, 29, 롬 11: 29, 빌 1: 6, 살후 3: 3, 딤후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 14; 6: 11; 10: 22, 벧후 1: 10).[9]

7. 1. 히브리서의 경고 구절

히브리서에 나오는 몇몇 경고 구절, 특히 히브리서 6:4-6과 히브리서 10:26-39는 선택받은 자는 무조건적으로 보존된다는 칼뱅주의 교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1] 이러한 구절에 대한 논쟁은 문제의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며, 다음과 같은 주요 해석들이 제시된다.[2]

  • 가설적 견해: 경고는 진실하지만 가설적인 것으로, 신자들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고 인내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다.[3]
  • 현상학적-거짓 신자 견해: 경고는 실제적이며, 실제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신자가 아니다.[4]
  • 현상학적-참된 신자 견해: 경고는 실제로 죄를 범할 수 있는 참된 신자들에게 주어진다.[5]
  • 언약 공동체 견해: 경고는 개별 신자가 아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날 때 하나님이 언약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6]


더 적은 수의 몇 가지 해석들이 있다. 한 가지는 경고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영원한 상급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7] 다른 하나는 경고가 유대교로 개종한 유대인 기독교인을 가리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8]

7. 2. 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칼뱅주의적 해석

"가설적 견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일시적으로 신앙에서 물러서는 사람들을 묘사할 수 있지만, 신앙의 영구적인 상실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1] 이 해석은 비칼뱅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2][3]

"현상학적-거짓 신자 견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중생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그분의 은혜로부터 혜택을 받았지만 여전히 회의론자로 남아있는 불신자들을 지칭한다.[4] 이 견해 또한 비칼뱅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5][6]

7. 3. 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비칼뱅주의적 해석

오로페자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박해에 직면했으며, 저자는 일부 신자들이 진정한 개종 경험에도 불구하고 배교자가 되었음을 인정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현재의 청중에게 과거의 은혜와 믿음을 확인하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관심과 태만을 지속한다면 그들 또한 떨어져 나갈 수 있으며, 배교에 대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1]

일부는 회복 불가능한 배교 해석을 주장하는 반면,[2] 다른 사람들은 재생된 기독교인의 배교는 가능하지만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체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맥나이트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나님의 은혜 기간을 초과하여 회복 불가능한 배교, 즉 사람이 사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회복 가능한 배교가 아닌 회복 불가능한 배교를 묘사한다고 제안한다.[3]

8. 다양한 개신교 교파의 견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9]

성경은 견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 28, 29; 롬 11: 29; 빌 1: 6; 살후 3: 3; 딤후 1: 12; 4: 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 14; 6: 11; 10: 22; 벧후 1: 10).[9]

여러 개신교 교파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재세례파 신학은 전통적으로 성도의 조건적 견인을 가르친다.
  • 루터교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는다.
  • 알미니안주의자는 성도의 조건적 보존을 가르친다.
  • 자유 은혜 옹호자들은 신자들이 영원한 안전을 약속받았지만, 인내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일시적인 징계와 상실을 겪게 된다.

9. 성경에서 견인교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이다. 견인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인내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에 대하여, 성경은 직접적으로 입증한다(요 10:28, 29; 롬 11:29; 빌 1:6; 살후 3:3; 딤후 1:12; 4:18). 안명준 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견인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히 3:14; 6:11; 10:22; 벧후 1:10).[9]

참조

[1] 서적 試練の中の信仰
[2] 서적 試練の中の信仰
[3] 서적 試練の中の信仰
[4] 서적 カルヴィン主義予定論
[5] 서적 新改訳聖書
[6] 서적 予定論と一般恩寵
[7] 서적 山上の説教
[8] 서적 기독교 신학개론
[9] 서적 한눈에 보는 성경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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