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호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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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호크우드는 1323년경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백년 전쟁에 참전한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용병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백색 용병대의 지휘관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약하며 다양한 세력 간의 분쟁에 개입했고, 카시나 전투, 루비에라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1377년 체세나 학살에 가담하여 비판받기도 했으며,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를 오가며 용병 활동을 펼쳤다. 1394년 피렌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초상화는 파올로 우첼로에 의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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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호크우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존 드 호크우드 |
| 출생 | 1323년경 에식스 |
| 사망 | 1394년 3월 16일 피렌체 |
| 사망 장소 | 피렌체 |
| 별칭 | 조반니 아쿠토 (Giovanni Acuto) |
| 군사 경력 | |
| 복무 | 잉글랜드 왕국 |
| 계급 | 기사 |
| 참여 전쟁 | 백년 전쟁 |
| 지휘한 전투 | 카시나 전투 마리냐노 전투 |
| 기타 | |
| 로마자 표기 | Jon Hokeudeu |
| 이탈리아어 표기 | Giovanni Acuto (조반니 아쿠토) |
2. 생애
존 호크우드는 1323년경 잉글랜드 에식스주 시블 헤딩햄에서 길버트 호크우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5] 그의 부친 길버트 호크우드는 무두장이이자 소지주였으며, 시블 헤딩햄과 핀칭필드에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6] 이탈리아식 이름인 아쿠토(Acuto)가 '바늘처럼 날카로운'이라는 뜻으로 잘못 번역되어, 그의 아버지가 재단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6]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 필리포 빌라니는 그의 어머니가 숲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호크우드"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7] 그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재단사 견습생으로 일했다.
존 호크우드는 잉글랜드 출신으로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16] 에드워드 3세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16] 그는 장궁병으로 복무했으며,크레시 전투(1346년)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푸아티에 전투 이후에는 백색 기병대에 합류하여 1361년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1363년에는 대장이 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백년전쟁 참전 경력은 1360년 브레티니 가조약(후의 칼레 조약)이 체결되어 휴전 기간에 들어감에 따라 끝을 맺게 된다.
1360년 브레티뉴 조약 이후 많은 용병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호크우드는 그중 하나인 백색용병대(혹은 잉글랜드 용병대)에 합류하여 지휘관이 되었다.[16] 이 용병대는 프랑스 동부에서 결성되어 샹파뉴, 부르고뉴를 거쳐 아비뇽으로 이동했다. 1360년 12월 28일이나 29일 밤에 퐁생트스프리를 점령하고 3개월 동안 점령하여 장 2세 국왕의 몸값 지불을 위한 세금 징수를 차단했다. 인노켄티우스 6세 교황은 평화를 모색했으나, 용병대는 교황의 요청에 불응하여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1361년 3월, 용병대와 교황은 "피레네 산맥 너머 스페인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위해 싸우는 계약을 맺고 평화를 이루었다.
1360년대 초, 호크우드는 독일인 용병 대장 알베르트 슈텔츠를 대신하여 백의단[15]의 지휘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363년, 호크우드와 그의 부대는 몬페라토 변경백의 용병이 되어,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와의 알프스 전투를 지휘했다.
1362년, 몬페라토 후작을 도와 사보이 백작 및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16] 1364년에는 피사와 피렌체 간의 전쟁에서 피사군 사령관을 맡았다.[16] 카시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는데, 이는 전장의 지형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군대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영웅적인 저항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젊고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372년 6월 2일, 루비에라 전투에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16] 양측은 공식적인 휴전 상태였으나, 실제로는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호크우드는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고, 교황군은 1200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더 큰 규모였다. 호크우드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기습하여 고위 장교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는 호크우드의 지휘 능력을 보여주지만,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375년, 토스카나를 약탈하여 팔성인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16] 교황으로부터 급료를 받지 못하자 아에밀리아 가도를 따라 토스카나와 피렌체로 진군했다. 토스카나 사절과의 휴전 대가로 13만 플로린을 받았다. 여러 지역을 행군하며 돈을 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약탈이 교황의 명령 하에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이는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방어 동맹으로 이어졌고, 시에나, 피사, 루카, 아레초, 요하나 1세 (나폴리) 여왕도 동맹에 가입했다.
1375년 팔성인 전쟁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를 위해 피렌체와 대립했다. 12월에 치타디카스텔로 반란을 진압하려다 도시를 점령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1376년 2월 12일, 교황 총독의 명령으로 파엔차로 갔으나, 급료를 받지 못해 도시를 약탈했다. 피렌체는 호크우드에게 뇌물을 주고 연금과 용서를 제안했지만, 호크우드는 교황 측에 남았다.
1377년, 체세나 학살에 가담하여 비판받았다.[16] 무기를 내려놓은 시민들에게 용서를 약속하는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 불려왔으나, 호크우드와 그의 부하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공격했다. 이후 호크우드는 교황의 봉사를 그만두고 밀라노, 피렌체 및 그 동맹국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수년 동안, 그는 백의단과 함께 여러 고용주 밑에서 싸우며 진영을 바꿨다. 1364년에는 피사를 위해 피렌체와 싸웠고, 1369년에는 페루자를 도와 교황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1370년에는 몬페라토 후작에게 고용되어 밀라노의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o Visconti) 진영에서 싸웠고, 1372년에는 비스콘티가(Visconti)를 위해 이전 고용주였던 몬페라토 후작과 싸웠다. 그 후 한동안 교황을 섬겼다.
호크우드는 높은 명성을 얻었고, 레·아쿠토(l'acuto, "날카로운 자")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에서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라고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유동적인 정치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 국가는 무역을 중시하여 상비군 대신 용병을 고용했다. 호크우드는 종종 자신의 고용주의 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양쪽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등의 일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는 보수를 유지하기 위해 세력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용주들은 호크우드가 자신의 적을 위해 일하지 않도록 그를 포섭하기도 했다.
호크우드는 돈을 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주가 보수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 계약 파기와 약탈을 무기로 위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로마냐 지방의 토지와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몬테키오 베스포니(Montecchio Vesponi) 성을 샀다. 그러나 호크우드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계약서를 읽게 한 후 서명했다고 한다.
1377년, 호크우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의 명으로 체세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체세나 시민의 목숨을 보장했지만, 제네바의 로베르 추기경(후의 아비뇽 반교황 클레멘스 7세)이 모두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직후, 그는 반교황파 세력인 밀라노로 갈아탔고,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 도니아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비스콘티가와의 관계는 불화로 인해 곧 파탄났고, 그 후 호크우드는 피렌체에 가담했다.
1381년에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로부터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다. 1387년, 호크우드는 포르리의 조반니 오르델라피와 싸우고 있던 파도바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베로나 군대의 지휘를 맡아 승리했다(카스타냐롤 전투).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불화로 인해 피렌체에 가담했다.[16]
1387년에는 카스타냐로 전투에서 베로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6]
1390년에서 1392년까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피렌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존 호크우드는 1394년 3월 17일 피렌체 자택에서 사망했다.[16] 3월 20일 장례식이 거행된 후 두오모에서 성대한 매장 의식이 치러졌다.[16] 원래는 대리석 묘를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1436년, 메디치 가문은 파올로 우첼로에게 호크우드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그림 속 호크우드는 회색빛 녹색 말을 타고 지휘관의 지팡이를 들고 부분적으로 갑옷을 착용한 모습이다. 우첼로는 '테라 베르데(terra verde)'라는 기법을 사용했다.[16] 라틴어 비문에는 "Ioannes Acutus eques brittanicus dux aetatis suae cautissimus et rei militaris peritissimus habitus est" ("존 호크우드, 영국 기사, 당대 가장 신중한 지도자이자 군사 전문가로 여겨졌다")라고 적혀 있다.[16]
호크우드는 영국 시블 헤딩엄(Sible Hedingham)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도 기념되고 있다.[16]
1390년 피렌체의 총사령관이 되어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싸웠고, 아디제 강까지 후퇴하기도 했다. 그 해 호크우드는 야코포 델 베르메가 이끄는 밀라노군으로부터 피렌체를 지켰다.
이 공적으로 피렌체 시민권과 연금을 얻었다. 70세가 넘은 호크우드는 피렌체 교외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망 직전 고향인 에식스로 귀환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394년 3월 16일(17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사망하여 피렌체 대성당에서 국장이 치러졌다.[16] 이후 리처드 2세는 그의 유해를 잉글랜드로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유해는 잉글랜드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호크우드의 아들은 잉글랜드의 에식스로 이주했다.[16]
사후 호크우드는 피렌체 등을 지켜낸 기사로서의 평가와, 체세나 등에서 학살을 저지른 살육자로서의 평가를 모두 받았다. 그의 고향인 헤딩엄에는 호크우드 기념 예배당과 호크우드 로드가 있으며, 로마냐에는 Strada Aguta가 있다. 1592년에는 리처드 존슨이 저서에서 중요 인물 9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16]
2. 1. 초기 생애
존 호크우드는 1323년경 잉글랜드 에식스주 시블 헤딩햄에서 길버트 호크우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5] 그의 부친 길버트 호크우드는 무두장이이자 소지주였으며, 시블 헤딩햄과 핀칭필드에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6] 이탈리아식 이름인 아쿠토(Acuto)가 '바늘처럼 날카로운'이라는 뜻으로 잘못 번역되어, 그의 아버지가 재단사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6]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 필리포 빌라니는 그의 어머니가 숲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호크우드"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7] 그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재단사 견습생으로 일했다.2. 2. 백년전쟁 참전
존 호크우드는 잉글랜드 출신으로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16] 에드워드 3세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16] 그는 장궁병으로 복무했으며,크레시 전투(1346년)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 참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푸아티에 전투 이후에는 백색 기병대에 합류하여 1361년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1363년에는 대장이 되었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백년전쟁 참전 경력은 1360년 브레티니 가조약(후의 칼레 조약)이 체결되어 휴전 기간에 들어감에 따라 끝을 맺게 된다.2. 3. 이탈리아에서의 용병 활동
1360년 브레티뉴 조약 이후 많은 용병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호크우드는 그중 하나인 백색용병대(혹은 잉글랜드 용병대)에 합류하여 지휘관이 되었다.[16] 이 용병대는 프랑스 동부에서 결성되어 샹파뉴, 부르고뉴를 거쳐 아비뇽으로 이동했다. 1360년 12월 28일이나 29일 밤에 퐁생트스프리를 점령하고 3개월 동안 점령하여 장 2세 국왕의 몸값 지불을 위한 세금 징수를 차단했다. 인노켄티우스 6세 교황은 평화를 모색했으나, 용병대는 교황의 요청에 불응하여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1361년 3월, 용병대와 교황은 "피레네 산맥 너머 스페인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위해 싸우는 계약을 맺고 평화를 이루었다.1360년대 초, 호크우드는 독일인 용병 대장 알베르트 슈텔츠를 대신하여 백의단[15]의 지휘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363년, 호크우드와 그의 부대는 몬페라토 변경백의 용병이 되어,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와의 알프스 전투를 지휘했다.
1362년, 몬페라토 후작을 도와 사보이 백작 및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16] 1364년에는 피사와 피렌체 간의 전쟁에서 피사군 사령관을 맡았다.[16] 카시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는데, 이는 전장의 지형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군대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영웅적인 저항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젊고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372년 6월 2일, 루비에라 전투에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16] 양측은 공식적인 휴전 상태였으나, 실제로는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호크우드는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고, 교황군은 1200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더 큰 규모였다. 호크우드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기습하여 고위 장교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는 호크우드의 지휘 능력을 보여주지만,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375년, 토스카나를 약탈하여 팔성인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16] 교황으로부터 급료를 받지 못하자 아에밀리아 가도를 따라 토스카나와 피렌체로 진군했다. 토스카나 사절과의 휴전 대가로 13만 플로린을 받았다. 여러 지역을 행군하며 돈을 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약탈이 교황의 명령 하에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이는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방어 동맹으로 이어졌고, 시에나, 피사, 루카, 아레초, 요하나 1세 (나폴리) 여왕도 동맹에 가입했다.
1375년 팔성인 전쟁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를 위해 피렌체와 대립했다. 12월에 치타디카스텔로 반란을 진압하려다 도시를 점령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1376년 2월 12일, 교황 총독의 명령으로 파엔차로 갔으나, 급료를 받지 못해 도시를 약탈했다. 피렌체는 호크우드에게 뇌물을 주고 연금과 용서를 제안했지만, 호크우드는 교황 측에 남았다.
1377년, 체세나 학살에 가담하여 비판받았다.[16] 무기를 내려놓은 시민들에게 용서를 약속하는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 불려왔으나, 호크우드와 그의 부하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공격했다. 이후 호크우드는 교황의 봉사를 그만두고 밀라노, 피렌체 및 그 동맹국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수년 동안, 그는 백의단과 함께 여러 고용주 밑에서 싸우며 진영을 바꿨다. 1364년에는 피사를 위해 피렌체와 싸웠고, 1369년에는 페루자를 도와 교황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1370년에는 몬페라토 후작에게 고용되어 밀라노의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o Visconti) 진영에서 싸웠고, 1372년에는 비스콘티가(Visconti)를 위해 이전 고용주였던 몬페라토 후작과 싸웠다. 그 후 한동안 교황을 섬겼다.
호크우드는 높은 명성을 얻었고, 레·아쿠토(l'acuto, "날카로운 자")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에서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라고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유동적인 정치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 국가는 무역을 중시하여 상비군 대신 용병을 고용했다. 호크우드는 종종 자신의 고용주의 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양쪽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등의 일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는 보수를 유지하기 위해 세력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용주들은 호크우드가 자신의 적을 위해 일하지 않도록 그를 포섭하기도 했다.
호크우드는 돈을 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주가 보수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 계약 파기와 약탈을 무기로 위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로마냐 지방의 토지와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몬테키오 베스포니(Montecchio Vesponi) 성을 샀다. 그러나 호크우드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계약서를 읽게 한 후 서명했다고 한다.
1377년, 호크우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의 명으로 체세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체세나 시민의 목숨을 보장했지만, 제네바의 로베르 추기경(후의 아비뇽 반교황 클레멘스 7세)이 모두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직후, 그는 반교황파 세력인 밀라노로 갈아탔고,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 도니아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비스콘티가와의 관계는 불화로 인해 곧 파탄났고, 그 후 호크우드는 피렌체에 가담했다.
1381년에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로부터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다. 1387년, 호크우드는 포르리의 조반니 오르델라피와 싸우고 있던 파도바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베로나 군대의 지휘를 맡아 승리했다(카스타냐롤 전투).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불화로 인해 피렌체에 가담했다.[16]
1387년에는 카스타냐로 전투에서 베로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6]
1390년에서 1392년까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피렌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3. 1. 백색용병대 지휘
1360년 브레티뉴 조약 이후 많은 용병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는데, 호크우드는 그중 하나인 백색용병대(혹은 잉글랜드 용병대)에 합류하여 지휘관이 되었다.[16] 이 용병대는 프랑스 동부에서 결성되어 샹파뉴, 부르고뉴를 거쳐 아비뇽으로 이동했다. 1360년 12월 28일이나 29일 밤에 퐁생트스프리를 점령하고 3개월 동안 점령하여 장 2세 국왕의 몸값 지불을 위한 세금 징수를 차단했다. 인노켄티우스 6세 교황은 평화를 모색했으나, 용병대는 교황의 요청에 불응하여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1361년 3월, 용병대와 교황은 "피레네 산맥 너머 스페인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에서 교황을 위해 싸우는 계약을 맺고 평화를 이루었다.1360년대 초, 호크우드는 독일인 용병 대장 알베르트 슈텔츠를 대신하여 백의단[15]의 지휘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363년, 호크우드와 그의 부대는 몬페라토 변경백의 용병이 되어,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이 시뇨리아 체제를 구축)와의 알프스 전투를 지휘했다.
2. 3. 2. 이탈리아 여러 세력 간의 분쟁 개입
1362년, 몬페라토 후작을 도와 사보이 백작 및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16] 1364년에는 피사와 피렌체 간의 전쟁에서 피사군 사령관을 맡았다.[16] 카시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는데, 이는 전장의 지형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군대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영웅적인 저항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젊고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372년 6월 2일, 루비에라 전투에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16] 양측은 공식적인 휴전 상태였으나, 실제로는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호크우드는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고, 교황군은 1200명의 기병과 보병으로 더 큰 규모였다. 호크우드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기습하여 고위 장교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는 호크우드의 지휘 능력을 보여주지만,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375년, 토스카나를 약탈하여 팔성인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16] 교황으로부터 급료를 받지 못하자 아에밀리아 가도를 따라 토스카나와 피렌체로 진군했다. 토스카나 사절과의 휴전 대가로 13만 플로린을 받았다. 여러 지역을 행군하며 돈을 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약탈이 교황의 명령 하에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이는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방어 동맹으로 이어졌고, 시에나, 피사, 루카, 아레초, 요하나 1세 (나폴리) 여왕도 동맹에 가입했다.
1375년 팔성인 전쟁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를 위해 피렌체와 대립했다. 12월에 치타디카스텔로 반란을 진압하려다 도시를 점령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1376년 2월 12일, 교황 총독의 명령으로 파엔차로 갔으나, 급료를 받지 못해 도시를 약탈했다. 피렌체는 호크우드에게 뇌물을 주고 연금과 용서를 제안했지만, 호크우드는 교황 측에 남았다.
1377년, 체세나 학살에 가담하여 비판받았다.[16] 무기를 내려놓은 시민들에게 용서를 약속하는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 불려왔으나, 호크우드와 그의 부하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공격했다. 이후 호크우드는 교황의 봉사를 그만두고 밀라노, 피렌체 및 그 동맹국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수년 동안, 그는 백의단과 함께 여러 고용주 밑에서 싸우며 진영을 바꿨다. 1364년에는 피사를 위해 피렌체와 싸웠고, 1369년에는 페루자를 도와 교황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1370년에는 몬페라토 후작에게 고용되어 밀라노의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o Visconti) 진영에서 싸웠고, 1372년에는 비스콘티가(Visconti)를 위해 이전 고용주였던 몬페라토 후작과 싸웠다. 그 후 한동안 교황을 섬겼다.
호크우드는 높은 명성을 얻었고, 레·아쿠토(l'acuto, "날카로운 자")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에서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라고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유동적인 정치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 국가는 무역을 중시하여 상비군 대신 용병을 고용했다. 호크우드는 종종 자신의 고용주의 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양쪽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등의 일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는 보수를 유지하기 위해 세력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용주들은 호크우드가 자신의 적을 위해 일하지 않도록 그를 포섭하기도 했다.
호크우드는 돈을 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주가 보수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 계약 파기와 약탈을 무기로 위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로마냐 지방의 토지와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몬테키오 베스포니(Montecchio Vesponi) 성을 샀다. 그러나 호크우드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계약서를 읽게 한 후 서명했다고 한다.
1377년, 호크우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의 명으로 체세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체세나 시민의 목숨을 보장했지만, 제네바의 로베르 추기경(후의 아비뇽 반교황 클레멘스 7세)이 모두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직후, 그는 반교황파 세력인 밀라노로 갈아탔고,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 도니아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비스콘티가와의 관계는 불화로 인해 곧 파탄났고, 그 후 호크우드는 피렌체에 가담했다.
1381년에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로부터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다. 1387년, 호크우드는 포르리의 조반니 오르델라피와 싸우고 있던 파도바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베로나 군대의 지휘를 맡아 승리했다(카스타냐롤 전투).
2. 3. 3. 피렌체와의 관계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불화로 인해 피렌체에 가담했다.[16]1387년에는 카스타냐로 전투에서 베로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6]
1390년에서 1392년까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피렌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4. 말년
존 호크우드는 1394년 3월 17일 피렌체 자택에서 사망했다.[16] 3월 20일 장례식이 거행된 후 두오모에서 성대한 매장 의식이 치러졌다.[16] 원래는 대리석 묘를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1436년, 메디치 가문은 파올로 우첼로에게 호크우드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그림 속 호크우드는 회색빛 녹색 말을 타고 지휘관의 지팡이를 들고 부분적으로 갑옷을 착용한 모습이다. 우첼로는 '테라 베르데(terra verde)'라는 기법을 사용했다.[16] 라틴어 비문에는 "Ioannes Acutus eques brittanicus dux aetatis suae cautissimus et rei militaris peritissimus habitus est" ("존 호크우드, 영국 기사, 당대 가장 신중한 지도자이자 군사 전문가로 여겨졌다")라고 적혀 있다.[16]호크우드는 영국 시블 헤딩엄(Sible Hedingham)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도 기념되고 있다.[16]
1390년 피렌체의 총사령관이 되어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싸웠고, 아디제 강까지 후퇴하기도 했다. 그 해 호크우드는 야코포 델 베르메가 이끄는 밀라노군으로부터 피렌체를 지켰다.
이 공적으로 피렌체 시민권과 연금을 얻었다. 70세가 넘은 호크우드는 피렌체 교외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망 직전 고향인 에식스로 귀환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394년 3월 16일(17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사망하여 피렌체 대성당에서 국장이 치러졌다.[16] 이후 리처드 2세는 그의 유해를 잉글랜드로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유해는 잉글랜드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호크우드의 아들은 잉글랜드의 에식스로 이주했다.[16]
사후 호크우드는 피렌체 등을 지켜낸 기사로서의 평가와, 체세나 등에서 학살을 저지른 살육자로서의 평가를 모두 받았다. 그의 고향인 헤딩엄에는 호크우드 기념 예배당과 호크우드 로드가 있으며, 로마냐에는 Strada Aguta가 있다. 1592년에는 리처드 존슨이 저서에서 중요 인물 9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16]
3. 가족 관계
호크우드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첫 번째 아내는 잉글랜드인으로 추정되며, 딸 안티오키아를 낳았다. 안티오키아는 에식스의 코지셜 가문과 결혼했다. 앨리스 코지셜을 통해 호크우드는 인치퀸 백작의 조상이 되었다.
1377년, 호크우드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사생아 딸인 도니나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으며, 도니나는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도니나와의 사이에서 1남 3녀(자넷, 캐서린, 안나, 존)를 두었다.
호크우드는 여러 정부와 사생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된 사생아로는 존과 토마스 호크우드가 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존 호크우드는 교활하고 잔혹한 인물로 묘사된다.[10] 그의 교활함은 위장 후퇴, 매복, 허위 정보 사용 등의 전술에서 드러난다. 1391년 밀라노 영토에서 도망치기 전, 호크우드는 다음 날 전장에서 만나자는 상대의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진영을 철수하고 뒷길로 도망쳐 적을 속였다. 또한, 부대 일부를 숲에 배치하여 추격하는 적을 함정에 빠뜨리기도 했다.그의 군대는 여성을 강간하고 농민을 살해했으며, 적을 잔혹하게 해체하는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10] 이러한 행위로 인해 호크우드의 종교적 신앙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산 갈가노 수도원과 같은 수도원과 성지를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아비뇽의 교황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원정 중 미사를 위한 휴대용 제단을 요청한 점으로 보아 신을 완전히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프리 트리즈는 고용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그의 끈기 있는 노력을 들어 "충성심"을 그의 주요 특징으로 제시한다.[10] 그러나 호크우드는 계약을 어기거나 고용주에게 불복종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례로, 그는 두 번이나 밀라노 군대를 버리기도 했다.[10]
5. 대중문화 속의 존 호크우드
아서 코난 도일의 1891년 소설 《백색 회사》는 존 호크우드와 그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느슨하게 구성되었다.[11] 매리언 폴크 안젤로티는 1911년에 《존 호크우드 경: 이탈리아의 백색 회사 이야기》라는 소설을 썼으며, 이후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어드벤처』 잡지에 호크우드에 관한 단편 소설 8편을 발표했다. 소설과 8편의 단편 소설은 최근에 처음으로 한 권으로 묶여 출판되었다.[11]
고든 딕슨은 존 호크우드를 등장인물로 하여 언급하는 『차일드 사이클』이라는 여러 편의 소설 시리즈를 썼다. 여기에는 『최종 백과사전』(1984)과 『찬트리 길드』(1988)가 포함된다. 잭 러드로우(David Donachie의 필명)는 2016년에 호크우드의 삶에 대한 알려진 사실을 통합한 소설 『호크우드』를 썼다.[13] 토미이 오오츠카의 만화 『호크우드』[14]는 주인공을 존 호크우드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이름, 직업, 군사적 기량을 부분적으로 따왔다.
존 호크우드는 코르부스 벨리의 미니어처 워게임 인피니티에서 백색 회사 용병 집단을 이끄는 인물이기도 하다. 1985년 폴 버호벤 감독의 허구적인 역사 영화 《플레시 앤 블러드》는 1501년을 배경으로 하며, 실존 인물 존 호크우드 사후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시대를 다룬다. 잉글랜드 용병 대장 "호크우드" 역에는 잭 톰슨이 출연한다.
6. 한국과의 연관성 (추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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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ohn Hawkwood: An English Mercenary in Fourteenth-Century Ital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
기타
[3]
서적
John Hawkwood: An English Mercenary in Fourteenth Century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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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Future-forward museum
https://www.theflore[...]
2013-01-3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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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wkwood, Sir John (D. 1394), military commander
https://www.oxford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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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Devil's Broker
Fourth Estate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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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logia
Giov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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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John Hawkwood
[9]
서적
Captains of Fortune
Thomas Y. Cromwell Company
[10]
서적
Condottiere: Soldiers of Fortune
Holt, Rinehart, and Win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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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Black Death: The Saga of Sir John Hawkwood and the Adventures of the White Company
Black Dog Books
2010
[12]
서적
The Red Velvet Turnshoe
John Murray
2009
[13]
서적
Hawkwood
Allison & Busby
2016
[14]
서적
ホークウッド
メディアファクトリー
2011
[15]
기타
[16]
서적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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