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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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좌승조는 후한 말 공융을 섬긴 인물이다. 지모가 밝고 유의손과 함께 청렴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공융에게 중용되지 못했다. 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받은 공융에게 원소나 조조에게 의탁할 것을 권했으나, 공융이 이를 거부하고 좌승조를 죽였다.

좌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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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좌승조는 후한 시대 사람으로, 공융(孔融)을 섬겼다. 그는 지모가 밝고, 동료 유의손(劉義遜)과 함께 청렴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공융은 이들을 곁에 두면서도 중용하지 않고, 오히려 재능이 부족한 왕자법(王子法)과 유공자(劉孔慈)를 더 신임했다.

초평(初平) 3년(192년), 황건적(黃巾賊)의 잔당 관해(官亥)가 쳐들어오자, 공융은 도창현(都昌縣)으로 피신했다. 당시 공융은 세력이 약했음에도 다른 세력과 손잡지 않았는데, 좌승조는 원소(袁紹)나 조조(曹操)와 같이 힘 있는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공융은 원소와 조조를 한(漢) 왕실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겼기에, 좌승조의 말에 분노하여 그를 죽였다.

공융이 좌승조와 유의손을 중용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좌승조가 처형된 이유와 공융이 평소 한나라에 충성심을 보였던 것을 보면, 좌승조와 유의손은 공융과는 달리 현실적인 선택을 중시했기 때문에 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2.1. 공융의 빈객

공융(孔融)을 섬겼다.

지모가 밝았으며, 동료 유의손(劉義遜)과 함께 청렴한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공융은 유의손과 좌승조를 항상 칭찬했지만 중용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말만 그럴듯할 뿐 별 재능이 없는 왕자법(王子法)과 유공자(劉孔慈)를 중용하였다. 공융은 "그들은 민심을 얻고 있으니 잃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초평(初平) 3년(192년), 황건적(黃巾賊) 잔당 관해(官亥)의 공격을 받은 공융은 도창현(都昌縣)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공융은 약소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세력과도 제휴를 맺지 않았는데, 좌승조는 원소(袁紹)나 조조(曹操) 등 강한 쪽에 붙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원소와 조조를 장차 한(漢) 왕실을 뒤엎으려 하는 인물로 보고 있었던 공융은 이 말에 분노하여 좌승조를 죽였다.

공융이 좌승조와 유의손을 중용하지 않은 이유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최후와 평소 한나라의 충신임을 자부하던 공융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좌승조와 유의손은 복고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공융과 달리 시류에 영합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소외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료인 유의손은 공융에게 실망하여 도망쳤다.

2.2. 현실적인 조언과 죽음

공융(孔融)을 섬겼다.

지모가 밝았으며, 동료 유의손(劉義遜)과 함께 청렴한 인재라는 평이 있었다. 공융은 유의손과 그를 항상 칭찬했지만 절대로 중히 쓰지 않았고, 오히려 말만 그럴듯할뿐 별 재능이 없는 왕자법(王子法)과 유공자(劉孔慈)를 중용하였다.

초평(初平) 3년(192년), 황건적(黃巾賊) 잔당 관해(官亥)의 공격을 받은 공융은 도창현(都昌縣)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공융은 약소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세력과도 제휴를 맺지 않았는데, 좌승조는 원소(袁紹)나 조조(曹操) 등 강한 쪽에 붙으라고 권하였다. 원소와 조조를 장차 한(漢)왕실을 뒤엎으려 하는 인물로 보고 있었던 공융은 이 말에 분노하여 좌승조를 죽였다.

공융이 좌승조와 유의손을 중용하지 않은 이유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최후와 평소 한나라의 충신임을 자부하던 공융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좌승조와 유의손은 복고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공융과 달리 시류에 영합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소외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의손과 함께 청렴한 준재라는 평판을 얻어 북해국 공융에게 초빙되었지만, 고문 자리에 머물렀을 뿐 중용되지는 못했다. 공융은 "그들은 민심을 얻고 있으니 잃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조조, 원소, 공손찬과 같은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지만, 공융은 약소 세력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2.3. 죽음의 이유

좌승조는 공융을 섬겼다. 지모가 밝았으며, 동료 유의손과 함께 청렴한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공융은 유의손과 좌승조를 항상 칭찬했지만 중히 쓰지는 않았다.

초평 3년(192년), 황건적 잔당 관해의 공격을 받은 공융은 도창현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공융은 약소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세력과도 제휴를 맺지 않았는데, 좌승조는 원소조조 등 강한 쪽에 붙으라고 권하였다. 원소와 조조를 장차 한(漢) 왕실을 뒤엎으려 하는 인물로 보고 있었던 공융은 이 말에 분노하여 좌승조를 죽였다.

공융이 좌승조와 유의손을 중용하지 않은 이유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좌승조의 최후와 평소 한나라의 충신임을 자부하던 공융의 성향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좌승조와 유의손은 복고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공융과 달리 시류에 영합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소외된 것으로 여겨진다.

3. 소설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