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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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현상은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월북한 인물이다. 이후 지리산에서 유격대 활동을 지휘했으며, 한국 전쟁 중 남부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전쟁 후 토벌대에 의해 사망했으며, 북한에서는 애국렬사로 추앙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며, 가족들은 월북하거나 남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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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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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리현상 |
원래 이름 | 李鉉相 |
별명 | 호(號)는 화산(火山) 가명은 로명선(盧明宣) 별칭은 큰 바위 얼굴 선생님 |
![]() (이 사진은 북한 평양 조선혁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
출생일 | 1905년 9월 27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전북특별자치도 금산군 군북면 와부리 |
사망일 | 1953년 9월 17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지리산에서 사살됨 |
학력 | 고창고등보통학교 전퇴 경성 중앙고보 졸업 경성 보성전문학교 법과 중퇴 북조선인민학원 전문학사 |
경력 | 사상가, 독립운동가, 혁명가, 노동운동가, 정치가, 시인, 한시 작가, 군인 조선로동당 당무위원 |
배우자 | 최문기 하수복 |
정당 | 조선로동당 |
군복무 | 조선인민군 지상군 대좌 출신 |
자녀 | 2남 3녀 |
직책 | |
직책 | 민족보위성 예하 조선인민유격대 제2병단장 |
장관 |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일 민족보위상 직무대리 |
주석 | 김두봉 |
총리 | 김일성 |
부주석 | 홍명희 |
임기 | 1949년 1월 1일 ~ 1953년 7월 27일 |
2. 생애
이현상은 1905년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면배는 군북면장과 금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냈으며, 3백 석의 농지를 가진 부농이었다.[1] 이현상 집안은 전주 이씨 가문으로, 태조 이성계의 7대조인 이단신의 후손이었다.[2] 조혼 풍습에 따라 1920년 이웃 무주군 무풍면 출신 최문기와 혼인했다.
1921년 금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접했고, 졸업 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경성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고, 1928년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했으나, 곧 투옥되면서 학업이 중단되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중앙고보 학생 신분으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1927년 상하이로 밀항했다가 귀국, 고향에서 청년 조직을 구성했다.[1] 1928년 보성전문 입학 후 고려공산청년회 등에 가입, 사회운동에 힘썼다.[1]
이후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형무소에서 이재유, 김삼룡을 만나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했다.[1] 1933년 말, 경성트로이카 활동으로 다시 4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 출옥했다. 1939년 경성 콤그룹에서 항일운동을 했으나, 1940년 다시 체포되었다. 1942년 병으로 가석방될 때까지 단식투쟁을 했다.
광복 후 장안파 조선공산당에 대항하는 재건파에 합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및 조직국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남로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7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이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했다가 소련 유학 대신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1] 이후 이주하와 남파되어 지하 활동을 시작했다.[1]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 조선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지휘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인민군과 합류,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 게릴라전을 펼쳤다.[1]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격전을 지휘했다. 1951년 청주시를 기습하고, 덕유산에서 남부군 결성에 합의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강화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1952년 대성리 골짜기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1953년 9월 18일 하동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 창경원과 도로변에 전시되었다. 가족들은 월북하거나 고초를 당해 시신 인수를 거부,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했다.
2. 1. 출생과 어린 시절
이현상은 충청남도 금산군(당시 전라북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출신으로, 군북면장과 금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역임한 이면배(李勉培)와 김씨(? ~ 1975년)의 4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이면배는 3백 석의 농지를 가진 부농이었다.[1] 맏형 이현기(李鉉冀)와 둘째 형 이현석(李鉉奭)은 후에 각각 1924년~26년, 1934년~36년에 군북면장을 역임했다.[1]이현상 집안은 전주 이씨 가문으로, 태조 이성계의 7대조이자, 고려 시대 이의방, 이준의, 이린, 이거 형제의 삼촌인 시중공 이단신의 후손이었다.[2] 그 가계는 군북면에서 가장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농이었다.[2] 아버지 이면배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군북면장을 지냈으며, 이현상은 이면배의 3남 중 막내아들이었다.[2]
이현상은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가 된 1920년에 이웃 무주군 무풍면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최문기와 혼인했다.
2. 2. 학창 시절
1921년 금산읍내에 있는 금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처음 접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고창군에 있는 사립 명문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학적부에 따르면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데'가 있는 성격이었다.1925년 경성부로 유학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고, 1928년에는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보성전문에 입학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투옥되면서 학업은 중단되었다.
2. 3. 일제 강점기 활동
이현상은 1926년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중앙고보 학생 신분으로 참여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6월 10일 중앙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을 했지만,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이 사건으로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했다.[1]1927년 봄, 상하이로 밀항하여 약 석 달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여 고향 금산에서 청년 조직을 구성했다. 1928년 보성전문에 입학했지만, 학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김복진과 면담하여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고려공청의 외곽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서무부장으로도 선출되었고, 신간회와 서울청년회에도 가입했다.[1] 이후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형무소에서 이재유, 김삼룡을 만나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했다.[1]
1933년 말, 경성트로이카 조직이 서울 지역의 파업과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을 때, 이현상도 4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 출옥했다. 1939년 경성 콤그룹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하였으나, 1940년 다시 체포되었다. 1942년 10월, 병으로 가석방될 때까지 20여 일간 단식투쟁을 했다고 전해진다. 가석방 이후에는 덕유산으로 은둔했다.
2. 3. 1. 항일 및 노동 운동
1926년 중앙고보 재학 중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에 학생 신분으로 참여했고, 시위를 주도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6월 10일 거사 당일에 중앙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을 한 끝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1]이 사건으로 이현상은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했다. 1927년 봄에 상하이로 밀항하여 약 석 달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여 고향 금산에서 청년 조직을 구성했다. 1928년 보성전문에 입학하고도 학업보다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김복진과 면담하여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고려공청의 외곽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서무부장으로도 선출되었고, 신간회와 서울청년회에도 가입했다.[1]
그러나 고려공청과 학생과학연구회가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면서 이현상도 체포되어 두 번째로 구속되었다.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형무소 복역 중 이재유와 김삼룡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이현상, 이재유, 김삼룡은 뜻이 맞는 동지가 되어 출소 직후인 1933년 초에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벌였다.[1]
2. 3. 2. 일제 강점기 후반
1933년 말 경성트로이카 조직이 서울 지역의 공장 파업을 조종하고 동맹휴학을 일으키며 활동하던 중 대거 체포되었을 때 이현상도 함께 붙잡혔다. 일 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에야 출옥했다. 세 번째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중일 전쟁이 일어났고, 많은 운동가들이 체포되거나 전향하여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1939년 경성 콤그룹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하였다. 경성콤그룹이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발행하고 전국적인 노동조직을 갖추어 가던 중, 대대적인 검거사태가 벌어지면서 1940년 이현상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이때는 전시체제가 강화되어 시국이 크게 경색된 시점으로, 구속된 이들 중 다수가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병을 얻었다. 이현상도 복역 2년 만인 1942년 10월에 병으로 가석방되었다. 당시 이현상은 20여 일간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병보석으로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고 한다. 가석방된 이후 덕유산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지냈다.
2. 4. 광복 후
이현상은 광복 직후 장안파 조선공산당에 대항하는 재건파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및 조직국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남로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7년 전평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이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했다가 소련 유학을 준비했으나, 이상조와의 마찰로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 이후 이주하와 함께 남파되어 지하 활동을 시작했다.[1]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으며, 조선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지휘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상하다 인민군과 합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후방 게릴라전을 펼쳤다.[1] 인천 상륙 작전 이후에는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유격전을 지휘했다. 1951년 청주시를 기습하고, 덕유산에서 남부군 결성에 합의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강화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1952년 대성리 골짜기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이 되었다.
2. 4. 1. 군정기 활동

이현상은 광복 직후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장안파 조선공산당에 대항하는 재건파에 합류했다. 재건파는 곧 장안파를 무력화시키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으며, 이현상은 중앙위원과 조직국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말에는 박헌영과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이 핵심 간부를 맡은 남로당도 결성되었다.
1947년에 전평의 허성택, 박세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 일제 아래 악명 높은 고문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6월 25일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에 김원봉에 대해 평가한 글을 게재하여, 일제 강점기 동안 보여준 김원봉의 비타협적 투쟁과 군사적 업적을 높게 평했다. 남로당은 이 글이 발표된 직후에 군사부를 신설해 유격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 4. 2. 남북협상 참여와 월남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1] 5월 이현상은 연석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하하지 않고 38선 이북에 남아 소련 유학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어를 배웠다.[1] 그러나 이북에서 북로당의 이상조와 마찰을 빚으면서 유학 계획은 좌절되고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했다.[1] 평양 인근 강동군에 설치된 이 학교는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었다.[1]교육을 마친 뒤 이주하와 함께 단독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에 잠입해 활동할 것을 명령받았다.[1] 이현상은 월남하여 지하 활동에 들어갔다.[1]
2. 4. 3. 유격대 활동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었고 남은 부대원들은 이현상의 지휘 아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파된 유격대도 조선인민유격대의 제1병단과 제3병단으로 가세하였고, 통칭 지리산유격대로 불리는 이현상 부대는 제2병단으로 명명되었다.[1]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지리산에서의 유격대 활동으로 많은 병력을 잃은 이현상 휘하의 부대는 북상했다. 그러던 중 7월 말에 남하하던 인민군 정규부대와 만났고, 이후 다시 남진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1]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방에서 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1]
2. 4. 4. 한국전쟁과 남부군 지휘
인천 상륙 작전 후 조선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은 남한 지역 6개 도당 위원장 회의를 소집하여 유격대들을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유격전을 펼치도록 하였다. 이현상은 '로명선'이라는 가명으로 남부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현상은 등사기로 기관지 《승리의 길》을 발행했다.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142명을 석방시켰다.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 도중 사망하자 이현상의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 피난민 등 2,000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1,000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00명이던 대원이 150명으로 줄어들었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2. 5. 사망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 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하기도 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9월 17일로 추정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여 일 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의 가족은 월북했지만 남한에 있던 그의 어머니 김씨는 1975년에 사망했다. 그의 연인 하수복은 1990년대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하수복의 아들은 외삼촌의 손에 성장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한다.
3. 사후
이현상은 죽음 이후 여러 의혹과 논란에 휩싸였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과 함께, 그의 행적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3.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가
북한은 이현상에게 제1호 렬사증을 추서하고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조성하였다. 이현상은 애국렬사릉에 가장 먼저 묻힌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도 추서되었다.4. 가족
이현상은 1남 3녀를 두었다. 부인 최문기와 자녀, 셋째 형의 가족 등 대부분은 전쟁 중 이현상이 북한으로 보냈다.
이름 | 관계 | 설명 |
---|---|---|
최문기 | 부인 | 1972년에 사망해 혁명렬사릉에 있는 이현상의 가묘에 홀로 묻혔다.[1] |
이극 | 아들 | 모스크바 유학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정년퇴직 후 인민대학습당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
이무영 | 맏딸 | 중앙당학교 졸업 후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조선로동당에서 일했다. |
이문영 | 둘째 딸 |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
이상진 | 막내딸 | 북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북한 첫 여성 일등서기관이 되어 경공업 분야를 담당했다. 김대중 방북 때 만수대의사당을 직접 안내했다. |
하수복과의 아들 | 아들(유복자) | 지리산에서 빨치산 간호병 하수복과의 사이에서 낳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이현상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사법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교사로 일했다.[1] |
대한민국에는 이현상의 어머니와 둘째 형수만 남았다. 이들은 이현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생활하다 사망했다. 특히 1975년 사망한 어머니는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훼손되기도 했다.
5. 이현상의 시
다음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하며 창작한 한시이다.[2]
智異風雲當鴻動|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중국어
伏劍千里南走越|남쪽으로 천 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중국어
一念何時非祖國|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중국어
胸有萬甲心有血|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중국어[2]
참조
[1]
서적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07-07-30
[2]
뉴스
지리산에 새겨진 좌파게릴라 혹은 지사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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