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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고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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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쿠고강 전투는 1359년 일본 남북조 시대에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가 이끄는 남조 세력과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지지하는 북조 세력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은 가네요시 친왕을 규슈로 파견하여 정서대장군으로 삼았고,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 산에 정서부를 설치하여 북조에 대항했다. 지쿠고강 전투에서 남조는 다자이후를 장악했으나, 이후 북조의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다자이후를 빼앗기면서 규슈에서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전투의 영향으로 다자이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관련 유적과 전설이 남아 있으며, 에도 시대의 라이 산요는 이 전투를 소재로 시를 지었다.

2. 배경

엔겐(延元) 원년(1336년), 고다이고 천황은 황자 가네나가 친왕(8세)을 정서대장군으로 규슈에 파견했고,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산(비샤몬산)에 성을 쌓아 정서부로 삼았다.[1]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 내분인 간오의 교란을 진정시키고 하치만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쇼헤이 9년/분와 3년(1354년)에 남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자 남조에서 북조에 대항할 세력은 규슈의 가네나가 친왕과 기쿠치 일족뿐이었다.[1]

기쿠치 씨는 북조의 규슈 단다이 잇시키 노리우지와 쇼니 요리히사의 충돌에 개입하여 노리우지를 격파하고, 규슈에서 아시카가 세력을 거의 몰아냈다. 그러나 북조 세력이 무너지자 쇼니 씨와 오토모 씨 등은 다시 남조와 적대하게 되었다.[1]

쇼헤이 14년/엔분 4년(1359년) 7월, 가네나가 친왕을 비롯한 남조 세력 약 4만 명은 지쿠고강 북안에 진을 치고, 다자이후를 본거지로 하는 쇼니 요리히사를 비롯한 북조 세력 약 6만 명과 대치하였다.[1]

2. 1. 남조의 규슈 장악 시도

엔겐(延元) 원년(1336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당시 여덟 살 된 황자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将軍)으로 삼아 규슈로 파견하였고, 그를 받드는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가 고라산(高良山)에 성을 쌓고 정서부(征西府)로 하였다.[1] 당시 북조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막부 내부의 파벌 싸움이었던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을 수습하고 하치만 전투(八幡の戦い)에서 승리했으며, 쇼헤이 9년/분나(文和) 3년(1354년)에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가 사망하면서 남조 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무력은 규슈로 파견된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일족뿐이었다.[1]

쇼헤이 14년/엔분(延文) 4년(1359년) 7월,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누키(赤星武貫), 우쓰노미야 사다히사(宇都宮貞久), 구사노 나가유키(草野永幸), 오노 미쓰타카(大野光隆), 니시모다 사누키노카미(西牟田讃岐守) 등 남조 세력 약 4만 명이 지쿠고강 북안에 진을 쳤다.[1] 이들은 다자이후(大宰府)를 본거지로 하고 북조 아시카가 쇼군(足利将軍)을 지지하던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쇼니 나오스케(直資) 부자와 오토모 우지토키(大友氏時), 기이 후유쓰나(城井冬綱) 등 6만 병력과 대치하였다.[1]

2. 2. 북조의 반격과 쇼니 씨의 저항

엔겐(延元) 원년(1336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자신의 여덟 살 된 황자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将軍)으로 삼아 규슈로 파견하였고, 그를 받드는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가 고라산(高良山)에 성을 쌓고 정서부(征西府)로 하였다. 당시 북조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막부 내부 파벌 싸움이었던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을 수습하고 하치만 전투(八幡の戦い)에서 승리했다. 쇼헤이 9년/분나(文和) 3년(1354년)에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가 사망하면서 남조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무력은 규슈로 파견된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일족 뿐이었다.[1]

기쿠치 씨는 쇼헤이 8년/분나 2년(1353년) 2월 북조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와 다자이노쇼니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의 충돌에 개입하여 이듬해까지 노리우지를 세 차례에 걸쳐 격파했다. 쇼헤이 11년/엔분 원년(1356년) 10월 부젠 국에서 벌어진 전투를 끝으로 노리우지는 규슈 제압을 단념하고 교토로 귀환하였으며, 2년 뒤 1월에 노리우지의 아들로 후임 단다이가 된 다다우지(直氏)마저 물리치고 11월에는 휴가(日向)의 하타케야마 다다아키(畠山直顕)를 격파해 규슈에서 아시카가 세력을 거의 일소시켰다. 그러나 규슈 단다이 등 북조 세력이 무너지자 전통적으로 규슈 지역을 지배하던 쇼니 씨나 앞서 기쿠치 씨에게 굴복했던 오토모 씨 등은 다시금 남조와 적대하게 되었다.[1]

엔분 4년/쇼헤이 14년 7월,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쓰라(赤星武貫), 우쓰노미야 사다히사(宇都宮貞久), 구사노 나가유키(草野永幸), 오노 미쓰타카(大野光隆), 니시모다 사누키노카미(西牟田讃岐守) 등 남조 세력 약 4만 명이 지쿠고강 북안에 진을 치고, 다자이후(大宰府)를 본거지로 하고 북조 아시카가 쇼군을 지지하던 쇼니 요리히사 · 다다스케(直資) 부자와 오토모 우지토키(大友氏時), 기이 후유쓰나(城井冬綱) 등 6만 명과 대치하였다.[1]

7월 19일 기쿠치 군세가 지쿠고강을 건너 쇼니측으로 진격했고, 이에 쇼니 군세가 오호바라로 물러나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고, 드디어 8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양군의 주력이 격돌한다. 무로마치 시대의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는 이 전투에서 정서부 병력 4만 가운데 사상자는 3천 정도였고, 쇼니측의 6만 기(騎) 가운데 2만 1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격렬한 전투 와중에 쇼니 요리히사의 아들 다다히사도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가네요시 친왕도 세 곳에 중상을 입었으며 기쿠치 다케미쓰도 부상을 입었다. 패배한 북조군은 다자이후로 퇴각하였는데 승리한 남조측도 기쿠치 다케미쓰의 조카 다케아키(武明)나 일족 사람인 아카보시 다케쓰라 등이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이들을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1]

3. 전투의 경과

1336년(엔겐 원년) 고다이고 천황은 여덟 살 된 황자 가네요시 친왕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규슈로 파견했고,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산에 성을 쌓고 정서부로 하였다. 당시 북조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 내부의 파벌 싸움이었던 간노의 소란을 수습하고 하치만 전투에서 승리, 1354년(쇼헤이 9년/분나 3년)에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면서 남조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무력은 규슈로 파견된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일족 뿐이었다.

1353년(쇼헤이 8년/분나 2년) 2월, 기쿠치 씨는 북조의 규슈 단다이 잇시키 노리우지와 다자이노쇼니 쇼니 요리히사의 충돌에 개입하여 이듬해까지 노리우지를 세 차례에 걸쳐 격파했다. 1356년(쇼헤이 11년/엔분 원년) 10월, 부젠 국에서 벌어진 전투를 끝으로 노리우지는 규슈 제압을 단념하고 교토로 귀환했으며, 2년 뒤 1월에 노리우지의 아들로 후임 단다이가 된 다다우지마저 물리치고 11월에는 휴가국의 하타케야마 다다아키를 격파해 규슈에서 아시카가 세력을 거의 일소시켰다. 그러나 규슈 단다이 등 북조 세력이 무너지자 전통적으로 규슈 지역을 지배하던 쇼니 씨나 앞서 기쿠치 씨에게 굴복했던 오토모 씨 등은 다시금 남조와 적대하게 되었다.

이후 전투의 진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주요 전투"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3. 1. 양측의 전력

1336년(엔겐 원년), 고다이고 천황규슈에 황자 가네요시 친왕(8세)을 정서대장군으로 파견했고, 친왕을 받드는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산(비샤몬노타케)에 성을 쌓아 정서부로 삼았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 내부의 파벌 싸움이었던 간노의 소란을 수습하고 하치만 전투에서 승리, 1354년(쇼헤이 9년/분나 3년)에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면서 남조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무력은 규슈로 파견된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일족 뿐이었다.

1359년(쇼헤이 14년/엔분 4년) 7월,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쓰라,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구사노 나가유키, 오노 미쓰타카, 니시모다 사누키노카미 등 남조 세력 약 4만 명이 지쿠고강 북안에 진을 쳤다. 다자이후를 본거지로 하고 북조 아시카가 쇼군을 지지하던 쇼니 요리히사 · 쇼니 다다스케 부자와 오토모 우지토키, 기이 후유쓰나 등 6만 병력과 대치하였다.

3. 2. 주요 전투

1359년 7월, 가네요시 친왕기쿠치 다케미쓰를 비롯한 남조 세력 약 4만 명은 지쿠고강 북안에 진을 쳤다. 이들은 다자이후를 본거지로 아시카가 쇼군을 지지하던 쇼니 요리히사 · 다다스케 부자와 오토모 우지토키, 기이 후유쓰나 등 6만 명의 북조 군세와 대치하였다.

7월 19일, 기쿠치 군세가 지쿠고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하자, 쇼니 군세는 오호바라(大保原)로 물러나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8월 6일과 7일, 양측 주력 부대가 격돌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의 군담소설 《태평기》에 따르면, 남조 측은 4만 명 중 3천 명, 북조 측은 6만 기(騎) 중 2만 1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쇼니 요리히사의 아들 다다히사가 전사하고,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도 부상을 입었다. 남조 측 역시 기쿠치 다케미쓰의 조카 다케아키(武明)와 아카보시 다케쓰라 등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어, 다자이후로 퇴각하는 북조 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3. 3. 전투의 결과

무로마치 시대의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정서부 병력 4만 명 가운데 3천 명 정도가 전사했고, 쇼니 측 6만 기(騎) 가운데에서는 2만 1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격렬한 전투 와중에 쇼니 요리히사의 아들 다다히사도 전사했으며, 가네요시 친왕은 세 곳에 중상을 입었고, 기쿠치 다케미쓰 역시 부상을 입었다. 패배한 북조군은 다자이후로 퇴각했으나, 승리한 남조 측도 기쿠치 다케미쓰의 조카 다케아키(武明)와 일족인 아카보시 다케쓰라 등이 전사하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

1361년 8월, 가네요시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의 남조 정서부는 다자이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요리히사는 다자이후의 아리토모 산성(有智山城)으로 쫓겨나 교토에서 은거했다. 이후 1372년 8월, 북조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부임해 온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에 의해 다자이후가 다시 북조의 수중에 넘어갈 때까지 규슈에서 정서부는 세력을 떨쳤다.

4. 전투의 영향

고다이고 천황1336년(엔겐 원년) 규슈에 황자 가네나가 친왕(8세)을 정서대장군으로 파견했고, 친왕을 받드는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산(비샤몬산)에 성을 쌓아 정서부로 삼았다.[1]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 내분인 간오의 교란을 진정시키고 하치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1354년(쇼헤이 9년/분와 3년)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자, 남조 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수 있는 무력 세력은 규슈의 가네나가 친왕과 기쿠치 일족뿐이었다.[1]

1359년(쇼헤이 14년/엔분 4년) 7월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 쇼니 나오스케는 전사했고, 남조 측 가네나가 친왕과 기쿠치 다케미쓰도 부상당했으며, 양군을 합쳐 5,400여 명이 전사했다.[1] 패배한 쇼니군은 다자이후로 도망갔고, 이후 규슈는 이마가와 사다요가 규슈 탄다이로 파견될 때까지 약 13년간 남조에 의해 통치되었다.[1]

정서대장군 가네나가 친왕이 포진한 장소는 미야노진(후쿠오카현구루메시미야노진)이라 명명되었다.[1] 쇼군 후지, 오호, 마에후시, 다카미시타 등 지쿠고강 전투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지명과 사적이 후쿠오카현 오고리시에 있다.[1]

기쿠치 다케미쓰가 전투 후 피 묻은 태도를 씻은 강이 있는 지역은 지쿠고 국 다치아라이(현 후쿠오카현 미이군다치아라이정)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

5. 전투 관련 유적 및 전설

지쿠고강 인근에는 대장총(大將塚), 천인총(千人塚), 오만기총(五萬騎塚) 등 당시 전사자들을 묻은 곳으로 알려진 무덤들이 남아 있다. 지쿠고강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후쿠오카현 미이군(三井郡) 다치아라이가와(太刀洗川, 칼 씻은 강)는 기쿠치 다케미쓰가 피 묻은 자신의 칼을 이곳에서 씻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5]

오고리시에는 오호(大保), 마부시(前伏), 다카미시타(高見下) 등 전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들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5. 1. 미야노진과 쇼군 매화

고다이고 천황엔겐 원년(1336년) 황자 가네나가 친왕(8세)을 정서대장군으로 규슈에 파견했고, 친왕을 받드는 기쿠치 다케미쓰는 고라산(비샤몬산)에 성을 쌓아 정서부로 삼았다.[5]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 내분인 간오의 교란을 진정시키고 하치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쇼헤이 9년/분와 3년(1354년)에 남조의 지주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자, 남조 측에서 북조에 대항할 수 있는 무력 세력은 규슈의 가네나가 친왕과 기쿠치 일족뿐이었다.

정서대장군(정서장군궁) 가네요시 친왕이 진을 쳤다는 곳은 현대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미야노진(宮ノ陣)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는 미야노진 신사가 있다. 경내에는 친왕이 아미타불상 한 그루와 함께 땅에 심었다는 수령 6백 년의 매화나무도 남아 있으며, 쇼군 매화라 불리는 이 매화는 2월 하순에 만개하는 다른 매화들과는 달리 3월 초순부터 만개한다.[5] 구루메 시와 인접한 오고리시 소재 오나카토미 신사(大中臣神社) 경내에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가네요시 친왕이 치료를 받았다는 전승이 있는 쇼군 등나무(将軍藤)라는 이름의 등나무도 남아 전하고 있다.[6]

5. 2. 오나카토미 신사와 쇼군 등나무

일본 오고리시(小郡市)에 있는 오나카토미 신사(大中臣神社) 경내에는 지쿠고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가네요시 친왕이 치료를 받았다는 쇼군 등나무(将軍藤)가 전해진다.[6] 이와 관련하여 오호(大保), 마부시(前伏), 다카미시타(高見下) 등의 지명들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5. 3. 문학 작품

에도 시대라이 산요는 지쿠고강 전투의 치열함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5]

참조

[1] 웹사이트 KIKUCHI DIGITAL ARCHIVES 資料ID:b00031 菊池武光 https://da.library-k[...] 2020-01-22
[2] 웹사이트 KIKUCHI DIGITAL ARCHIVES 資料ID:b00031 菊池武光 https://da.library-k[...] 2020-01-22
[3] 문서 筑後川の戦い・川中島の戦い・関ヶ原の戦い
[4] 문서 《시가 문서》(志賀文書) 및 《태평기》 권33에서는 전장을 '''오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하라란 '''오호바루'''(大保原), '''오고오노'''(大郡野), '''야마쿠마바루'''(山隈原)를 포함하는 평야의 총칭이다(衫本尙雄 《菊池氏三代》 吉川弘文館, 1966).
[5] 웹사이트 계절의 꽃과 수목(규슈관광추진기구) https://www.welcomek[...]
[6] 웹사이트 将軍藤 福岡観光地検索 https://www.crossr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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