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요시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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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요시 친왕은 겐무 신정 붕괴 후 고다이고 천황의 명을 받아 규슈로 파견되어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규슈 호족들을 규합하여 아시카가 막부에 대항했으나, 이마가와 사다요에게 다자이후를 빼앗기고 세력을 잃었다.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왜구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지만, 결국 관계가 단절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은 묘켄사에 보협인탑을 봉납한 기록이 있으며, 현재 일본 구마모토현 야시로시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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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요시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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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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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네요시 |
로마자 표기 | Kaneyoshi |
다른 이름 | 가네나가 신노 (かねながしんのう) 세이세이쇼군노미야 (征西将軍宮, せいせいしょうぐんのみや) |
직위 | 일본 국왕 (明朝) |
신분 | |
신분 | 친왕 일품 |
아버지 | 고다이고 천황 |
어머니 | 니조 후지코 (二條藤子, 니조 다메미치 딸) |
배우자 | 기쿠치 다케시게의 딸 |
자녀 | 미나모토노 요시무네 이쿠라노미야? |
주요 직책 | |
주요 직책 | 식부성 경 정서대장군 정이대장군 |
재위 기간 | 1336년-1372년 |
후임 | 요시나리 친왕 |
생애 | |
출생 | 1329년 |
사망 | 1383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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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겐무 신정이 붕괴된 후, 고다이고 천황은 각지에 자신의 아들들을 파견해 아군을 모으고자 했다. 1336년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다이쇼군(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규슈로 보내졌다.
이후 가네요시 친왕은 규슈 각지에서 아시카가 막부와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341년경 사쓰마에 상륙, 다니야마성에서 아시카가 막부파인 시마즈 씨와 대치하면서 규슈 호족들을 끌어들였다. 1348년에는 와이후성에 들어와 정서부(征西府)를 세우고 규슈 공략을 시작하였다. 간노의 소란 등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립하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오고, 쇼니 요리히사가 다다후유를 지원하면서 규슈는 막부, 다다후유, 남조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1352년 다다요시가 사망하고 다다후유가 주고쿠로 돌아간 후, 1359년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요리히사를 격파하고 1361년 다자이후를 점령하는 등 규슈에서 남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막부는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대에 시바 우지쓰네, 시부카와 요시유키를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였으나 규슈 제압은 진전이 없었고, 1367년에는 아직 어렸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고 있던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마가와 사다요(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단다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그 뒤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에 의해 다자이후·하카타는 호쿠초가 탈환하였고,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막부에 굴복하여 규슈는 평정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쇼군(정서장군)의 지위를 요시나리 친왕(고무라카미 천황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지쿠고 야베에서 병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2. 1. 규슈 부임과 세력 확장
겐무 신정이 붕괴된 후, 고다이고 천황은 각지에 자신의 아들들을 파견해 아군을 모으고자 했다.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어린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다이쇼군(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규슈로 보내졌다. 친왕은 고조 요리모토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요국 구스나 섬(현재의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구쓰나 제도)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우쓰노미야 사다야스나 세토 내해의 해적인 구마노 수군의 원조를 받아 몇 년간 머물렀다.[14]랴쿠오 4년/고코쿠 2년(1341년)경 사쓰마에 상륙, 다니야마성에서 북조의 아시카가 막부파인 시마즈씨와 대치하면서 규슈 호족들을 끌어들이는 데 힘을 쏟았다. 히고국의 기쿠치 다케미쓰나 아소 고레토키를 아군으로 끌어들였고, 조와 4년/쇼헤이 3년(1348년)에 와이후성에 들어와 정서부(征西府)를 세우고 규슈 공략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아시카가 막부는 하카타에 진제이소다이쇼(진서총대장)으로 잇시키 노리우지, 닛키 요시나가 등을 배치시켰고, 양자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간노 원년/쇼헤이 5년(1350년), 간노의 소란이라 불리는 막부 내분으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다다요시의 양자(이자 다카우지의 서자)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보내졌다. 지쿠젠 다자이후의 쇼니 요리히사가 이를 지원하여 규슈는 막부와 다다후유, 남조 세력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분카 원년/쇼헤이 7년(1352년) 유폐되어 있던 다다요시가 죽고(다카우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다후유는 주고쿠 지방로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잇시키 노리우지는 쇼니 요리히사를 공격했지만, 요리히사의 지원 요청을 받은 기쿠치 다케미쓰가 다자이후시 근교에서 벌어진 하리즈리하라 전투에서 잇시키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가네요시 친왕은 기쿠치·쇼니 군세를 거느리고 분고국의 오토모 우지야스를 쳐부수고 잇시키 노리우지를 규슈에서 몰아냈다.
그 뒤 쇼니 요리히사가 막부 편으로 돌아서자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누키,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구사노 나가유키, 니시무다 사누키노카미 등의 남조 측은 겐분 4년/쇼헤이 14년(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오호바루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고안 원년/쇼헤이 16년(1361년) 규슈의 거점이었던 다자이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 위치한 미야노진 신사는 지쿠고 강 전투 당시 가네요시 친왕이 진을 쳤던 부지에 세워진 신사로 전하고 있으며, 신사 경내에는 친왕이 아미타불상 한 구와 함께 심어 모셨다고 전하는 매화나무가 남아 있다. 현지에서는 쇼군 매화(將軍梅)라고 불리고 있는 이 나무는 수령 600년 이상이며, 구루메시에서 가장 큰 매화나무로 꼽히는데, 다른 매화가 2월 하순에 만개하는 것과는 달리 쇼군 매화는 3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만개한다.[16]
막부는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대에 시바 우지쓰네·시부카와 요시유키를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였으나 규슈 제압은 진전이 없었고, 조지 6년/쇼헤이 22년(1367년)에는 아직 어렸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고 있던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마가와 사다요(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단다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2. 2. 아시카가 막부와의 항쟁
겐무 신정이 붕괴된 후, 고다이고 천황은 각지에 자신의 아들들을 파견하여 아군을 모으고자 했다. 1336년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다이쇼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되어 규슈로 보내졌다. 가네요시는 고조 요리모토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요국 구스나 섬(忽那島)[14]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우쓰노미야 사다야스나 세토 내해의 해적 구마노 수군의 원조를 받아 몇 년간 머물렀다.1341년경 사쓰마에 상륙, 다니야마 성(谷山城)에서 아시카가 막부파인 시마즈 씨와 대치하면서 규슈 호족들을 끌어들이는데 힘을 쏟아 히고의 기쿠치 다케미쓰나 아소 고레토키를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1348년에 와이후 성(隈府城)에 들어와 정서부(征西府)를 세우고 규슈 공략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아시카가 막부는 하카타에 진제이소다이쇼(鎮西総大将)로 잇시키 노리우지, 닛키 요시나가 등을 배치시켰고, 양자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1350년, 간노의 소란이라 불리는 막부 내분으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다다요시의 양자(이자 다카우지의 서자)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보내졌다. 지쿠젠 다자이후의 쇼니 요리히사가 이를 지원하여 규슈는 막부와 다다후유, 남조 세력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1352년 유폐되어 있던 다다요시가 죽고(다카우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다후유는 주고쿠로 돌아간다. 이를 계기로 잇시키 노리우지는 쇼니 요리히사를 공격했지만 요리히사의 지원요청을 받은 기쿠치 다케미쓰가 다자이후 근교에서 벌어진 하리즈리하라 전투(針摺原の戰い)에서 잇시키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어 가네요시 친왕은 기쿠치·쇼니 군세를 거느리고 분고의 오토모 우지야스를 쳐부수고 잇시키 노리우지를 규슈에서 몰아낸다.
그 뒤 쇼니 요리히사가 막부 편으로 돌아서자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누키,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구사노 나가유키, 니시무다 사누키노카미 등의 남조 측은 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오호바루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1361년 규슈의 거점이었던 다자이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막부는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대에 시바 우지쓰네, 시부카와 요시유키를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였으나 규슈 제압은 진전이 없었고, 1367년에는 아직 어렸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고 있던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마가와 사다요(이마가와 료슌)를 규슈 단다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그 뒤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에 의해 다자이후·하카타는 호쿠초가 탈환하였고,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막부에 굴복하여 규슈는 평정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쇼군의 지위를 요시나리 친왕(고무라카미 천황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지쿠고 야베(矢部)에서 병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2. 3. 이마가와 사다요와의 대립
겐무 신정이 붕괴된 후, 고다이고 천황은 각지에 자신의 아들들을 파견해 아군을 모으고자 했다. 1336년(엔겐 원년/겐무 3년), 어린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다이쇼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되어 규슈로 보내졌다. 가네요시는 고조 요리모토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요국 구스나 섬([14])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우쓰노미야 사다야스나 세토 내해의 해적 구마노 수군의 원조를 받아 몇 년간 머물렀다.1341년경 사쓰마에 상륙한 가네요시 친왕은 다니야마 성(谷山城)에서 호쿠초(北朝)의 아시카가 막부파인 시마즈 씨(島津氏)와 대치하면서 규슈 호족들을 끌어들이는데 힘을 쏟았다. 히고의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나 아소 고레토키(阿蘇惟時)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1348년 와이후 성(隈府城)에 들어 와서 정서부(征西府)를 세우고 규슈 공략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아시카가 막부는 하카타에 진제이소다이쇼(鎮西総大将)로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닛키 요시나가(仁木義長) 등을 배치시켰고, 양자는 공방을 주고 받았다.
1350년(간노 원년/쇼헤이 5년), 간노의 소란이라 불리는 막부 내분으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그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다다요시의 양자(이자 다카우지의 서자)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보내졌다. 지쿠젠 다자이후의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가 이를 지원하여 규슈는 막부와 다다후유, 남조 세력이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1352년(분카 원년/쇼헤이 7년) 유폐되어 있던 다다요시가 죽고 다다후유는 주고쿠로 돌아간다. 이를 계기로 잇시키 노리우지는 쇼니 요리히사를 공격했지만 요리히사의 지원요청을 받은 기쿠치 다케미쓰가 다자이후 근교에서 벌어진 하리즈리하라 전투(針摺原の戰い)에서 잇시키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어 가네요시 친왕은 기쿠치 ・ 쇼니 군세를 거느리고 분고의 오토모 우지야스(大友氏泰)를 쳐부수고 잇시키 노리우지를 규슈에서 몰아낸다.
그 뒤 쇼니 요리히사가 막부편으로 돌아서자 기쿠치 다케미쓰, 아카보시 다케누키(赤星武貫), 우쓰노미야 사다히사(宇都宮貞久), 구사노 나가유키(草野永幸), 니시무다 사누키노카미(西牟田讚岐守) 등의 남조측은 1359년(겐분 4년/쇼헤이 14년) 지쿠고 강 전투(筑後川の戰い), 오호바루 전투(大保原の戰い)에서 이를 격파하고, 1361년(고안 원년/쇼헤이 16년) 규슈의 거점이었던 다자이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막부는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대에 시바 우지쓰네·시부카와 요시유키를 규슈 단다이로 임명하였으나 규슈 제압은 진전이 없었고, 1367년(조지 6년/쇼헤이 22년)에는 아직 어렸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고 있던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이마가와 사다요(이마가와 료슌了俊)을 규슈 단다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그 뒤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에 의해 다자이후·하카타는 호쿠초가 탈환하였고,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막부에 굴복하여 규슈는 평정되었다. 가네요시 친왕은 세이세이쇼군(征西將軍)의 지위를 요시나리 친왕(良成親王, 고무라카미 천황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지쿠고 야베에서 병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3. 명나라와의 관계
1369년, 명 왕조는 왜구 세력 진압을 「일본국왕」에게 명했다. 홍무제는 국서를 통해 왜구의 해적행위를 방치하면 군사를 보내 「국왕」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네요시 친왕은 명의 사절 17명 가운데 5명을 살해하고, 양재와 오문화 등 2명을 3개월 간 구류했다. 왜구는 산동, 절강, 복건 일대에서 계속 기승을 부렸다.[17]
1370년, 명은 다시 조질 등을 통해 가네요시 친왕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명사》는 가네요시 친왕이 조질을 위압적으로 대하며 죽이려 했으나, 조질의 위세에 눌려 승려 조래를 명에 보내 신하를 칭하는 국서와 함께 말, 방물을 바치고 명주·태주에서 잡혀갔던 70여 명을 송환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명사》의 해당 내용이 조질의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고, 기록의 사실성을 의심한다.[17]
명은 가네요시 친왕을 '양회(良懷)'라는 이름으로 '일본국왕'에 책봉했지만, 1372년 책봉을 위해 하카타에 도착했던 명나라 사신은 이마가와 료슌에게 잡혀 가네요시 친왕에게 책봉 문서를 전달하지 못했다.[17]
1381년 명 태조의 고압적인 국서에 대해 '일본국왕 양회'가 정면으로 응수했다는 내용이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18]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도발적인 회신을 받은 명 태조는 격노해 일본을 치려다 과거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단념했다고 한다. 비슷한 문장이 명대의 기록인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에도 기록되어 있다.[19]
1387년, 일본에서 사자로 왔던 승려 여요(如瑤)가 호유용의 모반을 지지하고 무기를 숨겨 홍무제를 죽이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명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명 왕조는 가네요시 친왕을 「일본국왕」에 책봉한 이후, 가네요시 친왕의 세력이 쇠퇴하고 1372년에 책봉사절이 가네요시 친왕에게 가지 못했음에도, 「양회」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한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감합무역을 시작할 무렵 건문제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될 때까지, 북조나 시마즈 우지히사 등도 명에 사절을 보낼 경우 「일본국왕 양회」라는 이름을 사칭해야 했다. 요시미쓰도 책봉 전까지 명 왕조로부터 「자국의 신하 책봉을 받은 자로써 양회와 일본의 국왕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자」로 간주되었고, 외교관계 수립 상대로 인식되지 못했다.[17]
《명사》에는 1376년에 '일본국왕 양회'(가네요시 친왕)가 승려 규정용 등을 보내 명에 공물을 바치며 왜구 피해에 대해 사과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쿠마 시게오는 당시 남조의 기쿠치 세력이 쫓기고 있던 상황에서 가네요시 친왕이 명에 사절을 보낼 겨를은 없었고, 규슈의 다른 세력들이 '일본국왕 양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명 왕조와의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3. 1. 명나라의 책봉과 갈등
1369년, 명 왕조는 왜구 세력 진압을 「일본국왕」에게 명했다. 홍무제는 국서를 통해 왜구의 해적행위를 방치하면 군사를 보내 「국왕」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네요시 친왕은 명의 사절 17명 가운데 5명을 살해하고, 양재와 오문화 등 2명을 3개월 간 구류했다.[17] 왜구는 산동, 절강, 복건 일대에서 계속 기승을 부렸다.1370년, 명은 다시 조질 등을 통해 가네요시 친왕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명사》는 가네요시 친왕이 조질을 위압적으로 대하며 죽이려 했으나, 조질의 위세에 눌려 승려 조래를 명에 보내 신하를 칭하는 국서와 함께 말, 방물을 바치고 명주·태주에서 잡혀갔던 70여 명을 송환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명사》의 해당 내용이 조질의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고, 기록의 사실성을 의심한다.[17]
명은 가네요시 친왕을 '양회(良懷)'라는 이름으로 '일본국왕'에 책봉했지만, 1372년 책봉을 위해 하카타에 도착했던 명나라 사신은 이마가와 료슌에게 잡혀 가네요시 친왕에게 책봉 문서를 전달하지 못했다.[17]
1381년 명 태조의 고압적인 국서에 대해 '일본국왕 양회'가 정면으로 응수했다는 내용이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1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도발적인 회신을 받은 명 태조는 격노해 일본을 치려다 과거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단념했다고 한다. 비슷한 문장이 명대의 기록인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에도 기록되어 있다.[19]
1387년, 일본에서 사자로 왔던 승려 여요(如瑤)가 호유용의 모반을 지지하고 무기를 숨겨 홍무제를 죽이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명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명 왕조는 가네요시 친왕을 「일본국왕」에 책봉한 이후, 가네요시 친왕의 세력이 쇠퇴하고 1372년에 책봉사절이 가네요시 친왕에게 가지 못했음에도, 「양회」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한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감합무역을 시작할 무렵 건문제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될 때까지, 북조나 시마즈 우지히사 등도 명에 사절을 보낼 경우 「일본국왕 양회」라는 이름을 사칭해야 했다. 요시미쓰도 책봉 전까지 명 왕조로부터 「자국의 신하 책봉을 받은 자로써 양회와 일본의 국왕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자」로 간주되었고, 외교관계 수립 상대로 인식되지 못했다.[17]
《명사》에는 1376년에 '일본국왕 양회'(가네요시 친왕)가 승려 규정용 등을 보내 명에 공물을 바치며 왜구 피해에 대해 사과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쿠마 시게오는 당시 남조의 기쿠치 세력이 쫓기고 있던 상황에서 가네요시 친왕이 명에 사절을 보낼 겨를은 없었고, 규슈의 다른 세력들이 '일본국왕 양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명 왕조와의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3. 2. 강경한 외교와 단절
1369년, 중국 명 왕조는 당시 고려 및 명을 포함한 동아시아 해안에서 약탈행위를 일삼던 왜구 세력의 진압을 「일본국왕」에게 명했는데, 홍무제의 국서를 가지고 양재(楊載) 등이 일본으로 와서 가네요시 친왕을 만났다. 국서의 내용은 일본측이 더 이상 왜구의 해적행위를 방치한다면 명 왕조에서 군사를 보내 해적을 멸하고 일본으로 와서 「국왕」을 체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가네요시 친왕은 명의 사절 17명 가운데 5명을 살해했고, 양재와 오문화(吳文華) 등 2명을 3개월 간 구류하였다. 왜구는 여전히 명의 산동, 절강, 복건 일대에서 기승을 부렸다.[17]1381년 명 태조로부터 전해진 고압적인 내용의 국서에 대해 '일본국왕 양회'가 정면으로 응수했다는 내용이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1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도발적인 회신을 받은 명 태조는 격노해 일본을 치려다 과거 원의 일본 원정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단념했다고 한다.
1387년 일본에서 사자로 왔던 승려 여요(如瑤)가 승상 호유용의 모반을 지지하였으며 화약과 도검 등의 병장기를 숨겨두고 홍무제를 죽이려던 음모가 있었음이 발각되어, 명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3. 3. 감합 무역 이전의 외교
1369년, 중국 명 왕조는 왜구 세력의 진압을 「일본국왕」에게 명하였는데, 홍무제의 국서를 가지고 양재 등이 일본으로 와서 가네요시 친왕을 만났다. 국서에는 일본측이 왜구의 해적행위를 방치하면 명나라 군대를 보내 해적을 멸하고 일본으로 와서 「국왕」을 체포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가네요시 친왕은 명의 사절 17명 가운데 5명을 살해했고, 양재와 오문화(吳文華) 등 2명을 3개월 간 구류하였다. 왜구는 여전히 명의 산동, 절강, 복건 일대에서 기승을 부렸다.[17]1370년 명 왕조로부터 다시 한 번 똑같은 내용의 국서가 조질 등을 통해 가네요시 친왕에게 전달되었다. 《명사》는 이때 가네요시 친왕이 "신하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며 책망하는 명의 국서에 발끈하여 조질을 위압적으로 대하면서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조질의 위세에 눌려 승려 조래(祖來)를 파견하여 명의 황제 앞으로 신하를 칭한 내용의 국서와 함께 말과 방물(方物)을 바치고 명주·태주에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70여 명을 송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명사》의 해당 내용은 조질의 귀국 뒤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았으며, 기록의 사실성을 의심하였다.[17]
1381년 명 태조로부터 전해진 고압적인 내용의 국서에 대해 '일본국왕 양회'가 정면으로 응수했다는 내용이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1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도발적인 회신을 받은 명 태조는 격노해 일본을 치려다 과거 원의 일본 원정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단념했다고 한다. 덧붙여 비슷한 문장이 명대의 기록인 《수역주자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19] 명 태조가 왜국(일본)에 장수를 파견하여 공순의 뜻이 없음을 책망하니 왜왕(가네요시 친왕)이 불손한 문구의 답장을 보냈다는 것이다.
1387년, 승려 여요(如瑤)가 호유용의 모반을 지지하였으며 화약과 도검 등의 병장기를 숨겨두고 홍무제를 죽이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명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4. 와카
무네요시 친왕의 『이화집』 말미에 중무경 친왕(中務卿親王) 가네요시 규슈노미야(懷良 九州宮)의 작품으로, 겐무 2년(1335년) 9월 24일에 진제이(鎭西)에서 편의로 지었다는 설명과 함께 다음 2수의 와카가 실려 있다.
- 日にそへて のかれんとのみ 思ふ身に いとゝうき世の ことしけきかな
- しるやいかに よを秋風の 吹からに 露もとまらぬ わかこゝろかな
첫 번째 와카는 준칙찬(准勅撰) 와카 모음집인 『신엽화가집』에 실리기도 했다.[21]
가네요시 친왕은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군사적 성과가 돋보이며, 당대에 영지 하나 없이 규슈 통일에 거의 가까웠을 정도로 패업을 쌓은 명장이었다. 그러나 다자이후를 정복하고 명과의 교역을 시작한 전성기 무렵조차도 세상을 떠나 은둔하고자 하는 와카를 읊곤 하였다.[21]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와카의 명문이었던 니조파의 피를 이어받아 본래 성격은 문인에 가까운 내성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21]
규슈라는 중앙에서 떨어진 지역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두 수의 와카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20] 가네요시 친왕의 와카 능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예전부터 존재했다.[21] 그러나 모리 시게아키는 단지 기록이 남지 못했을 뿐이며, 어머니 니조 후지코의 뛰어난 가재(歌才)로 보건대 실제로는 가네요시 친왕도 와카에 재능이 있어 많은 노래를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21]
가네요시 친왕이 임종을 앞두고 읊었다는 와카는 다음과 같다.
- 雲井にものぼるべき身のさはなくて 雲雀の床に音をのみぞなく
5. 묘소
가네요시 친왕의 묘소로 전해지는 곳은 여러 곳이 있으나, 일본 궁내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묘소는 구마모토 현 야시로 시에 있는 묘소이다. 메이지 시대에 야시로 시에 위치한 야시로 궁에 가네요시 친왕이 합사되었다. 1928년에는 가고시마 현 다니야마 시에 가네요시 친왕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다니야마 신사가 건립되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archive.org/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1
[2]
문서
阿蘇家文書
[3]
문서
阿蘇家文書
[4]
문서
阿蘇家文書
[5]
웹사이트
懐良親王御墓(八代市HP)
http://www.city.yats[...]
2015-01-12
[6]
문서
明太祖実録
[7]
문서
明史
[8]
문서
殊域周咨錄
[9]
문서
後醍院系図
[10]
문서
가네요시 친왕의 생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쇼헤이(正平) 3년/조와(貞和) 4년([[1348년]]) 6월 23일자 고조 요리모토 문서(五條賴元文書, 「阿蘇家文書」『南北朝遺文九州編三卷』2482)에서 가네요시가 「성인」(成人)이라고 되어 있어서, 모리 시게아키(森茂曉)는 당시의 「성인」이란 나이 20세 정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고 보았고, 이로부터 역산하여 겐토쿠 원년(1329년)으로 추측하였다(森 2019, pp. 119–122).
[11]
문서
덴주 7년/고와 원년(1381년) 초두에 가네요시 친왕 자신의 어머니의 31주기를 맞아 묘켄지(妙見寺)라는 절에 보협인탑(寶篋印塔)을 봉납한 적이 있는데, 이때까지는 가네요시 친왕이 살아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묘켄지의 절터는 일본 구마모토 현 [[야시로 시]](八代市) 묘켄 정(妙見町)에 있었으며, 보협인탑은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는데, [[1916년]](다이쇼 5년)에 다구치(田口)라는 사람이 샘물을 파다가 발견하였다고 한다(森 2019, pp. 306–309). 또한 고와 3년/에이토쿠(永德) 3년([[1383년]]) 3월 27일(양력 4월 30일을 가네요시 친왕의 사망 시점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모리 시게아키에 따르면 이는 [[에도 시대]](江戶時代) 후기 [[구마모토번]](熊本藩)의 의사였던 다나카 모토카쓰(田中元勝)가 「征西大將軍宮譜」(『肥後文獻叢書』六、隆文館、1910년 수록)에서 언급한 것으로, 모토카쓰가 「만수사과거장」(萬壽寺過去帳)이라는 내용물을 동호인으로부터 구전으로 들었다고 하는 것이 근거가 되고 있으며, 모토카쓰 자신이 그 자료를 직접 본 것도 아니다. 나아가 [[1940년]]에 오카 시게마사(岡茂政)가 「萬壽寺過去帳に就て―征西大將軍御薨去時日發見の唯一文書―」라는 논문에서 「만수사과거장」이라는 문서는 [[분고국]](豊後國) 만수사(萬壽寺)에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어, 일본에서 가네요시 친왕 연구에 있어서 고전이 된 후지타 아키라(藤田明)의 저작 『정서장군궁』(征西將軍宮)에서도 가네요시 친왕의 훙거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다(森 2019, pp. 270–272).
[12]
문서
고다이고인 계도
[13]
문서
지금의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県) [[기쿠치시]](菊池市)의 기쿠치 성 유적.
[14]
문서
지금의 일본 [[에히메현]](愛媛県) [[마쓰야마시]](松山市) 구스나 제도(忽那諸島).
[15]
웹사이트
懐良親王の征西府跡(일본어)
https://kumamoto-mus[...]
[16]
웹사이트
久留米の観光スポット(일본어)
https://welcome-kuru[...]
[17]
간행물
栗林宣夫 〈日本国王良懐の遣使について〉
[18]
문서
明史
[19]
문서
殊域周咨錄
[20]
문서
森 2019, pp. 295–298.
[21]
문서
森 2019, pp. 29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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