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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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학순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가톨릭 신부가 된 인물이다. 1965년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여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85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하였고, 북한에서 한국인 천주교 신부로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1993년 당뇨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뜻을 기려 지학순 정의평화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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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균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통일부 교류협력국 국장, 개성공단사업지원단 단장, 대통령비서실 안보정책비서관 등을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제39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 동성고등학교 (서울) 동문 - 구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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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정은 1943년 안성에서 태어나 5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온 가정에서 성장하여 사제가 되었고,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대행 대주교를 거쳐 2014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생명 존중, 사회 정의, 남북 화해를 위해 활동하다 2021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사임한 대한민국의 천주교 추기경이다.
지학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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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대주교 |
이름 | 지학순 |
직함 | 원주교구 주교 |
교회 | 가톨릭교회 |
교구 | 원주교구 |
임명일 | 1965년 6월 29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김지석 (야고보) |
사제 서품일 | 1952년 12월 15일 |
사제 서품자 | 노기남 주교 |
주교 서품일 | 1965년 6월 29일 |
주교 서품자 | 델 쥬디체 안토니오 대주교 |
출생일 | 1921년 9월 9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중화군 |
선종일 | 1993년 3월 12일 |
선종 장소 | 대한민국 서울 강남성모병원 |
안장지 | 제천 배론성지 성직자묘역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부모 | 지대린 (부), 김대길 (모) |
가족 | 6남매 중 차남(네째) (누이 지용화) |
전직 | 가톨릭 대학 교수 |
학력 | 서울 성신대학(가톨릭 신학대학), 로마 우르바노 신학교 교회법 박사 |
모교 | 동성고등학교 |
좌우명 | 빛이 되라! |
한국어 이름 | 지학순 |
한자 이름 | 池學淳 |
로마자 표기 | Ji Hak-sun |
일본어 가나 | チ・ハクスン |
일본어 이름 | ち がくじゅん |
기타 | |
충주 지씨 | 118,211명 |
2. 생애
1952년 12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1] 1965년 3월 22일, 바오로 6세는 그를 원주교구 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 6월 29일 안토니오 델 지우디체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1] 공동 서품자는 춘천교구의 토마스 F. 퀸란(Thomas F. Quinlan) 주교와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였다.[1]
주교로 봉직하는 동안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 원주문화방송 설립에 앞장서 김지하 등 의식 있는 청년들을 지원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는데, 이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김지하와 연관되어 있었으며,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다른 5명의 사제, 수녀와 함께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4·19 혁명에 동조했으며 도시 빈민의 지도자였고 정권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지지했다.[2] 226일간의 투옥 생활 후 석방된 후에도 한국 민주화의 선구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방문하여 여동생을 만났으며,[4] 한국 전쟁 이후 남북 분단 40년 만에 북한에서 한국인 가톨릭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1993년 3월 12일,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유해는 제천시의 페론 성지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재단법인 지학순 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지학순 정의평화상을 제정했다.
2. 1. 출생과 성장
1921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리(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태어나 1934년 1월 25일에 중화천주교회에서 메리놀선교회 소속 요셉 클먼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소신학교(신학 고등학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48년 3월 함경남도 덕원에 있는 덕원신학교를 다니다가, 1950년 1월 17일 남북 분단 이후 공산 정권하의 북한에서 박해를 피해 친구인 윤공희와 함께 월남하여 서울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했다. 남한으로 탈출하던 중 체포되어 황해도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가족들은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있었다.[4]2. 2. 월남과 사제 서품
1950년 1월 17일 남북 분단 이후 북한에서 공산 정권의 박해를 피해 친구 윤공희와 함께 월남하여 서울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편입했다. 남한으로 탈출하던 중 체포되어 황해도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가족들은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있었다.[4]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2. 3. 사목 활동과 유학
1921년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에 있는 덕원신학교에 다녔다. 남북 분단 후에는 38선을 넘어 서울의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이후 부산, 청주 등에서 주임 사제를 역임하고, 로마의 우르바노 대학교에 유학하여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주교 서품을 받고, 같은 해 신설된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3. 성직자 생활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15일, 피난지였던 부산 대청동 성당에서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6] 이후 거제포로수용소 종군 신부, 부산, 청주 등에서 본당 신부로 사목하다가, 로마 우르바노 신학교로 유학하여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1. 원주교구장 임명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던 해,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되어 신설되면서 지학순은 주교로 서품되었고,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1] 1965년 3월 22일, 바오로 6세는 그를 원주교구 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 6월 29일 안토니오 델 지우디체 주교에 의해 주교 서품을 받았다.[1] 공동 서품자는 춘천교구의 토마스 F. 퀸란(Thomas F. Quinlan) 주교와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였다.[1]3. 2. 사회 참여와 민주화 운동
1968년 원주 지역사회 문화활동의 전당인 가톨릭센터를 설립하는 등 천주교 주교로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 원주문화방송 설립에 40% 지분을 갖고 참여하여 방송을 통한 복음 전파와 지역사회 언론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으며, 김지하 등 의식 있는 청년들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원주문화방송을 둘러싼 부정에 분개하여 1971년 10월 원주시 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 내 사제, 수도자, 평신도와 함께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3일 동안 열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주교의 지도 아래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사회악과 부정부패에 저항한 큰 사건이었다.1972년 9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추대되었고, 10월에는 가톨릭 노동청년회, 가톨릭 평신도 도지사직 전국협의회,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 여성연합회 총재주교를 맡아 교회 안팎에서 힘없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 옹호에 나섰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던 중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다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이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을 내어 지지했다. 다음날 석방되어 수녀원에 연금되었으나 7월 23일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내외신 기자 앞에서 발표하고 다시 체포되었다. 1974년 8월 9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주교의 체포와 투옥은 한국 천주교가 집단적으로 정의 구현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4년 10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출범하였다. 226일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된 후에도 한국 민주화의 지주로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석방 후에도 에큐메니컬 운동 단체인 ‘한국교회 사회 선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인권 옹호에 적극 나섰다.[2]
3. 3. 민청학련 사건과 투옥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다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6]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을 내어 지지했다.[6] 다음날 석방되어 수녀원에 연금되었으나 7월 23일 ‘유신 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내외신 기자 앞에서 발표하고 다시 체포되었다.[6] 1974년 8월 9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주교의 체포와 투옥은 한국 천주교가 집단적으로 정의구현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6]1974년 10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출범하였다.[6] 226일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되었다.[6] 박정희 정권 반대 세력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다른 5명의 사제, 수녀와 함께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2] 실제로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6]
3. 4. 남북 화해와 통일 노력
1985년 남북한 정부의 합의에 따른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을 방문하여 35년 만에 누이동생 지용화를 만났으며,[4] 분단 40년 만에 북한에서 한국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5] 이때 여동생에게 여러 차례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여동생은 "천국을 믿다니!"라며 거부 반응을 보였고, 그는 놀라 "네가 완전히 빨갱이들에게 세뇌당했구나!"라며 한탄했다고 한다.[5] 1991년에는 남북한 장애인 걷기 운동 본부장을 맡는 등 사회복지에도 적극적이었다.3. 5. 선종과 추모
1993년 3월 12일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선종하였다. 유해는 제천 배론성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6]선종 후,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단법인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제정하였다. 4주기 추모미사와 함께 제1회 정의평화상이 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 주어졌다.[6]
4. 저서
제목 | 출판사 | 연도 | 비고 |
---|---|---|---|
내가 겪은 공산주의 | 가톨릭출판사 | 1976년 | 경향잡지, 제62권 제1호(1970년 1월호) ~ 제64권 제3호(1972년 3월호) 연재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왜 왔읍니까? | 뿌리깊은나무 | 1984년 | |
정의가 강물처럼 | 형성사 | 1984년 | |
나의 인생길의 아름다운 명상 | 반석문화사 | 1992년 | 한경직 공저 |
참조
[1]
웹사이트
Bishop Daniel Tji Hak Soun
http://www.catholic-[...]
2015-11-05
[2]
뉴스
A Catholic Bishop in Korea On Trial for Aiding Dissent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74-08-02
[3]
웹사이트
(74)충주 지씨(忠州池氏)-118,211명
http://www.seoulecon[...]
2022-08-16
[4]
웹사이트
http://www.ucanews.c[...]
[5]
웹사이트
首脳会談後の南北関係 韓国の声49号
http://www.eonet.ne.[...]
[6]
웹인용
지학순 주교의 삶, 약력
https://web.archive.[...]
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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