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효문왕
1. 개요
진 효문왕 영주는 진 소양왕의 둘째 아들이자 선태후의 손자로, 기원전 251년 소양왕 사후 진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3일 만에 사망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과 관련하여, 고령으로 즉위했다는 설과, 여불위가 아들 진 장양왕을 옹립하기 위해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된다. 효문왕은 5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 자초(진 장양왕)는 훗날 진 시황제를 낳았다.
| 이름 | 효문왕 |
|---|---|
| 휘 | 영주 |
| 다른 이름 | 식 |
| 재위 기간 | 기원전 250년 11월 12일 – 기원전 250년 11월 14일 |
|---|---|
| 전임자 | 소양왕 |
| 후임자 | 장양왕 |
| 출생 | 기원전 302년 |
|---|---|
| 사망 | 기원전 250년 11월 14일 (51–52세) |
| 부친 | 소양왕 |
| 모친 | 당태후 |
| 배우자 | 화양태후 하희 |
| 자녀 | 자희 장양왕 |
| 봉호 | 왕 |
|---|---|
| 시호 | 효문왕 |
| 왕가 | 영 |
| 왕조 | 진 |
| 묘 | 수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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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50년 사망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하다 카르타고에 포로로 잡힌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강화 조약 협상 임무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해 로마의 애국심과 용기의 상징으로 칭송받았으나, 현대에는 그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기원전 250년 사망 -
공손룡
공손룡은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변론가이자 철학자로, 명가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백마비마설'과 '견백론' 등의 독특한 논리를 통해 이름과 실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논리학과 변론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진나라의 왕 -
진 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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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왕 -
진 혜문왕
진 혜문왕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효공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상앙의 변법을 유지하며 국력을 강화하고 장의를 등용해 주변국들을 공략했으며, 기원전 324년부터 왕을 칭하고 파촉 지역을 정복하여 국력을 크게 확장했다. -
기원전 3세기 중국의 군주 -
진 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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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중국의 군주 -
전한 고제
진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초한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고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민생 안정에 힘썼다.
2. 생애
진 소양왕의 치세에 관하여 특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는 많은 추측을 낳았는데,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의견은, 그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이미 연로했다는 것이다. 그의 전임자인 소양왕은 55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진 효문왕 영주의 붕어에 관한 음모론에는 여불위가 효문왕을 독살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는 효문왕의 아들 자초(장양왕)가 단지 3년만 다스렸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이론이다.
효문왕은 진 소양왕과 당후의 둘째 아들이자 선태후의 손자였다.
그는 진나라의 왕으로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했으며, 즉위한 지 3일 만에 사망했다.
그의 짧은 재위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매우 고령이었다는 것이다(그의 아버지는 50년 이상 통치했다).
그러나 음모론으로, 여불위가 다음 왕인 진 장양왕을 옹립하기 위해 왕을 독살했거나, 적어도 죽음을 재촉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장양왕이 3년밖에 재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기원전 267년, 소양왕의 장자인 애태자가 인질로 있던 위에서 사망했다.
기원전 265년, 소양왕의 후계 태자로 안국군이 선택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명 이상의 자식이 있었고, 그중에는 훗날 태자가 되는 이인도 있었다. 이인은 어머니인 하희가 안국군에게 미움을 받아 조의 인질로 버려졌다. 그것을 본 거상 여불위가 이인에게 투자하여 조나라에서의 명성을 높였고, 안국군에게도 총애를 받았지만, 자식이 없었던 화양부인에게 여불위가 양자로서 명성이 있는 이인을 들이도록 조언했고, 이를 화양부인이 안국군에게 전하여 안국군은 태자로 이인을 지명했다.
이후 이인은 진나라가 기원전 258년부터 기원전 257년에 걸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했을 때 처형될 뻔했지만, 여불위의 도움으로 한단을 탈출하여 진나라로 귀국했다. 화양부인을 만나 이름을 자초로 개명했다.
기원전 251년 윤9월, 아버지 소양왕이 훙거하고 안국군이 효문왕이 되었으며, 화양부인이 화양후, 자초가 태자가 되었다. 또한 어머니인 당팔자에게 당태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문왕 원년(기원전 250년) 10월 기해,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했지만, 3일 후에 53세로 훙거했다.
2.1. 즉위 전
기원전 267년, 소양왕의 장자인 애태자가 인질로 있던 위에서 사망했다. 기원전 265년, 소양왕의 후계 태자로 안국군이 선택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명 이상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훗날 태자가 되는 이인도 있었다. 이인은 어머니인 하희가 안국군에게 미움을 받아 조의 인질로 버려졌다. 이를 본 거상 여불위가 이인에게 투자하여 조나라에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안국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자식이 없었던 화양부인에게 여불위가 양자로서 명성이 있는 이인을 들이도록 조언했고, 이를 화양부인이 안국군에게 전하여 안국군은 태자로 이인을 지명했다.
이후 이인은 기원전 258년부터 기원전 257년에 걸쳐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했을 때 처형될 뻔했지만, 여불위의 도움으로 한단을 탈출하여 진나라로 귀국했다. 화양부인을 만나 이름을 자초로 개명했다.
2.2. 짧은 치세와 의문의 죽음
소양왕이 55년간 왕위에 있었고, 효문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이미 연로했다는 것이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는 의견이다. 그러나 여불위가 다음 왕인 진 장양왕을 옹립하기 위해 왕을 독살했거나, 적어도 죽음을 재촉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장양왕이 3년밖에 재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의해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진 소양왕 40년( 기원전 267년), 소양왕의 장자인 애태자가 인질로 있던 위에서 사망했다. 소양왕 42년( 기원전 265년), 소양왕의 후계 태자로 안국군이 선택되었다. 안국군에게는 20명 이상의 자식이 있었고, 그중에는 훗날 태자가 되는 이인도 있었다. 이인은 어머니인 하희가 안국군에게 미움을 받아 조의 인질로 버려졌다. 거상 여불위가 이인에게 투자하여 조나라에서의 명성을 높였고, 안국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자식이 없었던 화양부인에게 여불위가 양자로서 명성이 있는 이인을 들이도록 조언했고, 이를 화양부인이 안국군에게 전하여 안국군은 태자로 이인을 지명했다.
이후 이인은 진나라가 소양왕 49년( 기원전 258년)부터 소양왕 50년( 기원전 257년)에 걸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했을 때 처형될 뻔했지만, 여불위의 도움으로 한단을 탈출하여 진나라로 귀국했다. 화양부인을 만나 이름을 자초로 개명했다.
소양왕 56년( 기원전 251년) 윤9월, 아버지 소양왕이 훙거하고 안국군이 효문왕이 되었으며, 화양부인이 화양후, 자초가 태자가 되었다. 효문왕 원년( 기원전 250년) 10월 기해,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했지만, 3일 후에 53세로 훙거했다.
3. 가족 관계
진 효문왕의 모후는 당태후(추존) 팔자(八子) 당씨(소양왕 후궁)이다. 왕후는 화양부인이나 자녀는 없었다. 후궁으로는 하희태후가 있으며, 하희태후는 태자 장양왕을 낳았다. 장양왕은 훗날 진 시황제가 되는 아들을 두었다. 효문왕의 형제로는 태자 도(소양왕 장남)가 있었다. 왕비로는 화양태후(華陽太后) 미(芈)씨 웅(熊)씨가 있었는데, 초 출신으로 초나라 왕족이었다. 또한, 하태후(夏太后) 하씨는 태자 이인(異人)의 어머니였다. 아들로는 자혜(子傒)와 태자 이인(太子異人)이 있었는데, 이인은 자초(子楚)로 개명하고 진 장양왕으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