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 (전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나라는 주나라 목왕의 신하 조보의 후손인 조씨가 진나라 안에서 세력을 키워 건국한 국가이다. 춘추 시대 말, 진나라가 조, 위, 한, 지 씨 가문으로 분열될 때 조씨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기원전 403년 주 왕실로부터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조나라는 무령왕 때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나, 이후 진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다 기원전 228년 멸망했다. 조나라에는 조사, 염파, 이목 등 명장들이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학자들이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나라 (전국 시대) - 대왕 가
    대왕 가는 조 도양왕의 아들로, 조나라 멸망 후 대나라를 세웠으나 진나라에 의해 포로로 잡혀 멸망했으며, 그의 옛 성터는 현재 허베이성에 보존되어 있고 만화 《킹덤》에도 등장한다.
  • 조나라 (전국 시대) - 조 유류왕
    조 유류왕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이목을 중용하여 진나라에 맞섰으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이목을 처형하고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유배되었다.
  • 산시성 (산서성)의 역사 - 북한 (십국)
    북한은 오대 십국 시대에 유숭이 건국한 국가로 후한의 부흥을 표방하며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주 및 송나라와 대립하다가 979년 송나라에 멸망했다.
  • 산시성 (산서성)의 역사 - 진 (오대 십국)
    오대십국시대, 이극용과 이존욱이 당나라 계승을 주장하며 세운 진(晉)은 산서성 대부분과 황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후량 멸망 후 후당 건국에 이르렀으며, 주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 내몽골의 역사 - 몽골 제국
    몽골 제국은 1206년 칭기즈 칸에 의해 건국되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동서 교류를 촉진했으나, 몽케 칸 사후 분열되어 쇠퇴하여 멸망한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던 제국이다.
  • 내몽골의 역사 - 판석묘 문화
    판석묘 문화는 기원전 1300년경 자바이칼에서 시작하여 몽골, 중국 북부, 만주 등지에 분포하며, 판석으로 둘러싸인 무덤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및 초기 철기 시대의 고고학 문화이다.
조 (전국)
기본 정보
국명조(趙)
시대전국시대
지위제후국 → 왕국
정부 형태군주제
역사
성립진(晋) 분할 (기원전 403년)
멸망진(秦)에 의해 멸망 (기원전 222년)
주요 사건진 분할
멸망 원인진에 의한 멸망
위치
수도진양, 한단
기원전 260년 조나라의 위치
기원전 260년 조나라의 위치
인물
군주조 헌후 (첫 번째)
조 열후
조 경후
조 성후
조 숙후
조 무령왕
조 혜문왕
조 효성왕
조 도양왕
조 유목왕
조왕 가 (마지막)
재위 기간조 헌후: 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9년 (첫 번째)
조 열후: 기원전 403년 - 기원전 400년
조 경후: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5년
조성후: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조숙후: 기원전 349년 - 기원전 326년
조 무령왕: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조 혜문왕: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6년
조 효성왕: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조 도양왕: 기원전 244년 - 기원전 236년
조 유목왕: 기원전 235년 - 기원전 228년
조왕 가: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마지막)
언어 및 종교
사용 언어(정보 없음)
종교중국 민간 신앙
조상 숭배
통화
통화포전
기타 고대 중국 화폐
기타
이전 국가진나라
이후 국가대나라 , 진나라

2. 역사

조(趙)나라는 주나라 목왕(周穆王)의 신하인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에 봉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조씨 가문은 진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진 문공의 측근 조최(趙衰) 때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조최의 아들 조돈(趙盾)이 진 영공을 시해한 조천(趙穿)을 처벌하지 않아 조씨 가문은 멸족될 위기에 처했으나, 조돈의 손자 조무(趙武)가 복권되면서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춘추시대 말기, 조씨 가문은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여섯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56년, 지씨 가문의 수장 지요(智瑶)가 조씨 가문을 멸하려 하자, 조씨 가문의 수장 조무휼(趙無恤)은 한(韓)나라, 위(魏)나라와 연합하여 지씨 가문을 멸망시키고 진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기원전 403년, 조나라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에 북방 유목민의 복장인 호복(胡服)을 도입하고 기병을 육성하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당시 중국에서는 말을 탈 때 옷이 매우 불편하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주목하여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조나라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조 무령왕은 강력하게 실행하였고, 조나라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되었다.

기원전 260년의 전국 칠웅 (영어)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아들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권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章)의 후계 다툼으로 인해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 이후 조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인상여, 염파, 조사 등의 명장들이 활약하여 진나라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냈으나,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에 대패하여 병력 대부분을 잃고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러나 조나라 백성들의 일치단결과 평원군의 외교적 노력으로 위나라, 초나라의 지원군을 얻어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에도 조나라는 높은 문화를 유지하여 공손룡, 추연 등 뛰어난 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우경, 극자, 방난 등 조나라 출신 학자들도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효성왕은 순자와 임무군을 초빙하여 군사에 대해 논의하는 등 인재 등용에 힘썼다.

유묘왕 때에는 명장 이목흉노를 격퇴하고 진나라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곽개의 모함으로 이목이 처형되면서 조나라는 급격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목 (청나라 그림). 진의 침공을 격퇴한 것은 이목과 초나라의 항연 두 사람뿐이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장수 왕전에게 수도 한단이 함락되고 유묘왕이 포로로 잡히면서 조나라는 멸망하였다. 조나라 왕족 조가(趙嘉)가 지역에서 대왕을 칭하며 저항했으나,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2. 1. 건국 이전

목왕(周穆王)의 신하인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조씨(趙氏)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보는 그 후 조씨를 칭하였다. 조씨 일족은 진나라(晉)의 신하가 되었다. 진 문공(晉文公)의 측근이었던 조 성자 조최(趙成子 趙衰)는 높은 관직에 올라 조씨 가문을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조최의 아들 조 선자 조돈(趙宣子 趙盾)이 진 영공을 죽인 종제 조천(趙穿)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조 장자 조삭(趙莊子 趙朔) 사후에 조씨 가문은 극씨와 난씨의 참소로 제거되었다. 이후 조 장자의 아들 조 문자 조무(趙文子 趙武)가 진 경공 17년(기원전 583년)에 복권되어 춘추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육경(六卿) 중 하나가 되었다. 조 간자 조앙(趙簡子 趙鞅) 대에 범씨와 중항씨가 몰락하여 조, 위, 한, 지 네 가문만 남았다. 기원전 456년, 육경 중 세력이 강했던 지씨 일족의 수장 지양자 지요(智襄子 智瑶)는 한씨, 위씨 일족을 거느리고 조씨 가문을 멸족하려 하였다. 이에 조씨 가문의 수장 조 양자 조무휼(趙襄子 趙無恤)은 한호(韓虎), 위구(魏駒)에게 "지씨는 탐욕스러워, 우리 조씨가 멸족된 뒤에는 당신들 차례다"라고 말하며 설득에 성공하였다. 세 가문은 역공을 가하여 지씨 가문을 멸망시켰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씨, 한씨, 위씨 세 가문이 나누어 각각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었다.

2. 2. 삼진 분립과 전국 시대

주나라 목왕을 섬긴 명마부 조보가 조성에 봉해진 것이 조씨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그 후, 조씨는 진(晋)나라를 섬겼고, 진나라 문공의 측근이었던 조쇠 (조성자) 이후 크게 번성하여, 춘추 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대신 가문 육경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상 조순 (조선자) 사후, 조씨는 전제를 꺼려 숙청을 당해, 조순의 손자 조무 (조문자)가 재흥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몰락한다. 기원전 456년, 육경 중에서도 최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씨 당주 지요 (지양자)가 한씨, 위씨를 이끌고 조씨를 멸망시키려 했다. 조씨의 당주 조무휼 (조양자)는 한씨의 한호 (한강자), 위씨의 위구 (위환자)에게 "지씨는 탐욕스러우니 내가 멸망한 후에는 당신들의 차례다"라고 배반을 암시하여, 이에 성공한다. 삼가(三家)에게 공격받은 지씨는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 한, 위의 삼자가 나누어 각각 독립했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조, 한, 위는 정식으로 제후가 된다.

무령왕 시대에 강성해지면서 주 왕조 아래에 봉건된 제후 중 하나에서 주 왕을 대신하는 왕을 칭하게 되었다.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기사'''를 도입한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짧은 옷에 긴 바지, 가죽 신을 신거나 발을 감쌌으며, 옷의 소매를 작게 하여 활동하기 편하게 만든 복장이다[7]. 당시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헐렁한 깃의 옷을 입고, 전쟁 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전사가 되었지만, 말을 타기에는 이 옷이 매우 불편했다.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강함에 주목하여 자국에도 이것을 도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문명을 상징하는 전차를 타는 전사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부하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에 직접 올라타는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나라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무령왕은 강권으로 실행하게 했고, 조나라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298년,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아들 혜문왕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쥐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이설 있음), 혜문왕과 공자 장(章) 사이의 후계자 다툼으로 인해 주부가 유폐되어 굶어 죽자, 조(趙)의 절정 시대는 끝나고, 진(秦)의 공세에 위협받게 된다. 인상여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예를 들어, 기원전 270년의 알여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잠시 동안은 버텼지만, 인상여가 은퇴한 후 기원전 260년의 장평 전투에서 진(秦)의 장군 백기에게 대패하여, 그 병력의 대부분 (전사 5만, 갱살 40만으로 알려짐)을 잃자 조(趙)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듬해, 진(秦)군이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기 때문에, 민중이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는 등 멸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조(趙)의 민중이 일치단결한 데다가, 전국 사군 중 한 명이자 재상이었던 평원군에 의해 신릉군과 초의 춘신군 등의 원군을 불러들여 격퇴했다.

장평 전투 이후 군사적으로는 쇠퇴했지만, 조(趙)는 여전히 높은 문화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유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특기할 만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으로 모인, 명가 (논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공손룡과, 음양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추연이 있다[8]. 또한, 공손룡과 같은 시대의 조(趙) 출신 학자로는, 역사서 『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이나[8], 『극자지언』에 언행록을 엮은 극자[9] (연(燕)으로 이주하여 장군이 된 극신인가?), 종횡가·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환[10]이 있다. 또한,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樂瑕公)과 낙신공(樂臣公) (전한상국 조참은 낙신공의 손자)도, 조(趙) 멸망 직전까지 조(趙)에 머물렀다[11]. 장평 전투에서 실수를 범한 효성왕도, 조(趙)의 유가순자와 초(楚)의 병가 임무군을 초빙하여 군사에 대해 논전을 벌이게 하는[12] 등, 적극적으로 인재 등용에 나선 흔적이 보인다.

2. 3. 진나라와의 항쟁과 멸망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다. 당시 중국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 자락이 긴 옷을 입었으며,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웠기에 말을 타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주목하여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려 했다. 전차를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에 직접 타는 훈련을 시켰다. 조나라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되었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아들 혜문왕에게 물려주고 주부(主父)라고 자칭하며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 章)의 후계 다툼이 일어나 무령왕이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 조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이 되었다. 인상여, 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이 등장하여 당분간 버텼지만, 인상여가 사망한 후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에게 대패하여 병력 대부분을 잃고 급격히 약해졌다.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군이 수도 한단에 진군하여 백성이 굶주리고 아이들도 죽어가는 등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조나라 백성이 일치단결하고 평원군위나라 신릉군과 초나라 춘신군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 군사적으로 쇠퇴했지만, 조나라는 여전히 높은 문화를 유지하여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다. 평원군의 식객인 명가공손룡음양가추연이 대표적이다.[8] 조나라 출신 학자로는 역사서 『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8] 언행록 『극자지언(劇子之言)』을 남긴 극자,[9] 종횡가병가 저작을 남긴 방난이 있으며,[10]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렀다.[11] 효성왕도 유가 학자 순자와 초나라 출신 병법가 임무군을 불러 군사에 대해 묻는 등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다.[12]

유묘왕 때에는 흉노 국경선을 지킨 명장 이목이 있어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 공격을 막은 장수는 초나라 항연과 이목뿐이었다.

그러나 이목도 유류왕의 총신 곽개의 참언으로 죽었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이 함락되고 유류왕이 사로잡혀 조나라는 멸망하였다. 왕족 조가(趙嘉)가 지역으로 피하여 대왕을 칭하고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연나라와 함께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되었다.

3. 정치

조(趙)나라는 전국 시대의 정치적, 군사적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에 호복(胡服)을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호복은 북방 유목 민족의 복장으로, 말을 타고 싸우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이는 당시 중국 사대부들의 전통적인 복장과 전투 방식과는 다른 혁신적인 변화였다.[7]

조 무령왕은 기원전 298년에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에 발생한 후계 다툼으로 인해 조 무령왕이 유폐되고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나라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이후 조나라는 진(秦)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인상여, 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이 조나라를 지탱했지만,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에게 대패하면서 조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진나라 군은 조나라 수도 한단까지 진격해 왔으나, 조나라 백성들의 저항과 평원군나라 신릉군과 초나라 춘신군에게 요청한 원군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장평 전투 이후에도 조나라는 수준 높은 문화를 유지하며 명가공손룡, 음양가추연 등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조 효성왕순자와 임무군을 등용하여 군사에 대해 논의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조 유류왕 시기에는 명장 이목흉노와의 국경선을 지키며 진나라 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목은 곽개의 참언으로 죽임을 당했고, 기원전 228년 진나라 장수 왕전의 공격으로 수도 한단이 함락되면서 조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왕족 조가가 대 지역에서 대왕을 칭하며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와 함께 완전히 멸망했다.

3. 1. 역대 군주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복장으로, 당시 중국 사대부들이 입던 헐렁하고 옷자락이 긴 옷이나 전차를 이용한 전투 방식과는 달리, 말을 타고 싸우기에 적합한 복장이었다.[7]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주목하여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자,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에 직접 타는 훈련을 시켰다. 조나라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조 무령왕은 이를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 확대에 기여하였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 章)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져 무령왕이 유폐되고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진(秦)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인상여, 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이 등장하여 조나라를 지탱했지만, 인상여가 사망한 후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에게 대패하여 조나라 병력 대부분을 잃고 급격히 약화되었다.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 군은 수도 한단까지 진격해 왔고, 백성들이 굶주리고 아이들까지 죽어가는 등 멸망 직전에 몰렸으나, 조나라 백성들의 일치단결과 평원군나라 신릉군과 초나라 춘신군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진나라 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장평 전투 이후 조나라는 군사적으로 쇠퇴했지만, 수준 높은 문화를 유지하여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명가를 대표하는 공손룡, 음양가를 대표하는 추연,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 종횡가와 병가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의의 친족 악하공 등이 조나라에서 활동했다. 조 효성왕 또한 순자와 초나라 출신 병법가 임무군을 등용하여 군사에 대해 논의하는 등 인재 등용에 힘썼다.

조 유류왕 시기에는 흉노와의 국경선을 지키던 명장 이목이 진나라 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당시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장수는 초나라의 항연과 이목뿐이었다. 그러나 이목은 유류왕의 총신 곽개의 참언으로 죽임을 당했고, 기원전 228년 진나라 장수 왕전의 공격으로 수도 한단이 함락되면서 유류왕이 사로잡히고 조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왕족 조가가 대 지역에서 대왕을 칭하며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연나라와 함께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3. 1. 1. 삼진 분립 전의 조씨 종주

대수시호재위 년수재위 기간
1성자쇠/최(衰)15년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2년
2선자돈(盾)21년기원전 621년 ~ 기원전 601년
3장자삭(朔)4년기원전 600년 ~ 기원전 597년
4문자무(武)43년기원전 583년 ~ 기원전 541년
5경숙성(成)23년기원전 540년 ~ 기원전 518년
6간자앙(鞅)42년기원전 517년 ~ 기원전 476년
7양자무휼(無恤)50년기원전 475년 ~ 기원전 425년
8환자가(嘉)1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424년
9헌자완(浣)15년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9년



주(周)나라 목왕을 섬긴 명마부 조보가 조성에 봉해진 것이 조씨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그 후, 조씨는 진(晋)나라를 섬겼고, 진나라 문공의 측근이었던 조쇠(조성자) 이후 크게 번성하여, 춘추 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대신 가문 육경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상 조순(조선자) 사후, 조씨는 전제를 꺼려 숙청을 당해, 조순의 손자 조무(조문자)가 재흥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몰락한다. 기원전 456년, 육경 중에서도 최대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씨 당주 지요(지양자)가 한씨, 위씨를 이끌고 조씨를 멸망시키려 했다. 조씨의 당주 조무휼(조양자)는 한씨의 한호(한강자), 위씨의 위구(위환자)에게 "지씨는 탐욕스러우니 내가 멸망한 후에는 당신들의 차례다"라고 배반을 암시하여, 이에 성공한다. 삼가(三家)에게 공격받은 지씨는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 한, 위의 삼자가 나누어 각각 독립했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조, 한, 위는 정식으로 제후가 된다.

3. 1. 2. 삼진 분립 후의 조나라 군주

중국어나라의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수시호재위 년수재위 기간
추존헌후완(浣)15년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0년
1열후적(籍)9년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2무공
무후
13년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3경후장(章)12년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5년
4성후종(種)25년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5숙후어(語)24년기원전 349년 ~ 기원전 326년
6무령왕옹(雍)27년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7혜문왕하(何)33년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6년
8효성왕단(丹)21년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9도양왕언(偃)9년기원전 244년 ~ 기원전 236년
10유류왕천(遷)8년기원전 235년 ~ 기원전 228년
11(嘉)6년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2년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에 호복기사를 도입했다. 호복은 북방 유목 민족의 복장으로, 짧은 옷에 긴 바지를 입고 가죽 신을 신거나 발을 감싸는 형태였다. 이는 당시 중국 사대부들이 입던 헐렁한 옷과 전차를 이용한 전투 방식과는 달리, 말을 타고 싸우기에 적합한 복장이었다.[7]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강함에 주목하여 호복을 도입했고, 이는 조나라 군사력 강화와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4. 군사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기사'''를 도입한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짧은 옷에 긴 바지, 가죽 신을 신거나 발을 감쌌으며, 옷의 소매를 작게 하여 활동하기 편하게 만든 복장이다.[7] 당시 중국에서는 사대부가 헐렁한 깃의 옷을 입고, 전쟁 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전사가 되었지만, 말을 타기에는 이 옷이 매우 불편했다.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강함에 주목하여 자국에도 이것을 도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문명을 상징하는 전차를 타는 전사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부하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에 직접 올라타는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나라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무령왕은 강권으로 실행하게 했고, 조나라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298년,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아들 혜문왕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계속 쥐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이설 있음), 혜문왕과 공자 장(章) 사이의 후계자 다툼으로 인해 주부가 유폐되어 굶어 죽자, 조(趙)의 절정 시대는 끝나고, 진(秦)의 공세에 위협받게 된다. 인상여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예를 들어 기원전 270년의 알여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잠시 동안은 버텼지만, 인상여가 은퇴한 후 기원전 260년의 장평 전투에서 진(秦)의 장군 백기에게 대패하여, 그 병력의 대부분 (전사 5만, 갱살 40만으로 알려짐)을 잃자 조(趙)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듬해, 진(秦)군이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기 때문에, 민중이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는 등 멸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조(趙)의 민중이 일치단결한 데다가, 전국 사군 중 한 명이자 재상이었던 평원군에 의해 신릉군과 초의 춘신군 등의 원군을 불러들여 격퇴했다.

장평 전투 이후 군사적으로는 쇠퇴했지만, 조(趙)는 여전히 높은 문화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유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특기할 만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으로 모인, 명가 (논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공손룡과, 음양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추연이 있다[8]。 또한, 공손룡과 같은 시대의 조(趙) 출신 학자로는, 역사서 『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이나[8], 『극자지언』에 언행록을 엮은 극자[9] (연(燕)으로 이주하여 장군이 된 극신인가?), 종횡가·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환[10]이 있다. 또한,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樂瑕公)과 낙신공(樂臣公) (전한상국 조참은 낙신공의 손자)도, 조(趙) 멸망 직전까지 조(趙)에 머물렀다[11]。 장평 전투에서 실수를 범한 효성왕도, 조(趙)의 유가순자와 초(楚)의 병가 임무군을 초빙하여 군사에 대해 논전을 벌이게 하는[12] 등, 적극적으로 인재 등용에 나선 흔적이 보인다.

기원전 236년, 진나라는 중화 통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조나라 장군 방난이 연을 침공하여[13], 국내가 허술해진 틈을 노려 조나라를 침공했다. 총대장은 왕전[14], 부장은 환의, 말단 장수는 양단화이다[15]。 먼저 업 주변의 9개 성을 함락하고[15], 전군을 1개 부대로 묶어 갈여와 로양을 함락했다[15]。 18일 후, 왕전은 군량 문제로 인해 군대의 10분의 2에 해당하는 정예 부대를 이끌고 업과 안양을 함락했다[15][16]

기원전 234년, 환의는 평양으로 직행했다[17]。 조나라는 호첩을 장수로 삼아 평양을 구원하러 보냈고, 진군과 싸웠다[17]。 진군은 조나라 장수 호첩을 죽이고, 10만 명의 조나라 병사를 평양 성 밖에서 참수했다[17]。 이듬해 기원전 233년, 환의는 다시 출병하여 의안·평양·무성 3개 성을 빼앗고, 다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그 장수를 죽였다[18]。 이 두 전투에서 조나라는 10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19]。 그 때문에 유묘왕은 북변에서 공을 세운 이목을 중앙으로 불러 대장군으로 임명했다[23]

기원전 233년, 환의는 진군을 이끌고 동쪽의 상당으로 진군하여 태행산을 넘어 조나라 깊숙한 곳으로 침입하여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20], 적려와 의안(현재의 허베이성고성구 서남쪽)을 점령했다[20]。 이목이 이끄는 조나라 군대와 진군은 의안 부근에서 대치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진군은 크게 패배했고[23], 환의가 이끄는 진군 중 소수는 포위망에서 탈출하여 진나라로 퇴각했다[23]。 또한, 《전국책》에 따르면 환의는 전사했다고 한다[21]。 조나라는 진나라에 점령당했던 땅을 되찾았다. 그 공로로 이목은 '''무안군'''에 봉해졌다[22][23][24]

기원전 232년, 진왕 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침공했다[25]。 군대는 업성에 도착했고, 그 후 태원에 도착했다[25]。 진군은 낭맹과 번오를 점령했지만[26], 이목이 진군을 격파했다[26]。 게다가 이목은 진나라로부터 ·의 국경까지 영토를 되찾았다[27]

기원전 229년, 나라와의 연합도 정보가 새어나가 가뭄지진 재해[28][29]를 틈타 진나라가 침공했다. 왕전에게 매수된 유묘왕이 총애하는 중신 곽개 또는 한창[30]의 참언으로 인해, 진군을 격퇴해 온 이목이 살해되었다. 또한, 사마상도 해임되었다[31]。 유묘왕은 조총·안취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여 맞이했지만 패배했고, 조총은 전사했다.

조나라의 주요 장군은 다음과 같다.

이름
조사
방훤
염파
이목
사마상
악승
조괄
호첩


5. 문화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다. 당시 중국의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자락이 긴 옷을 입었으며,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형태였고 말을 타고 싸우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싶었다. 이에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혔고 말에 직접 타는 훈련을 하였다. 조나라의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되었다.

장평 전투 이후에는 군사적으로 쇠퇴했지만,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다. 유명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名家)를 대표하는 인재인 공손룡과 음양가를 대표하는 인재인 추연이 있었다. 조나라 출신의 학자로는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虞卿),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劇子), 종횡가, 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龐煖)이 있으며,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렀다. 장평 전투에서 패배한 효성왕도 유학자 순자와 초나라 출신 병법가 임무군(臨武君)을 불렀고 군사에 대하여 물어보는 등 인재 등용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있었지만, 엘리트 문화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했다. 기원전 4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경의 우공 편에는 중국이 9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고유한 민족과 특산물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의 중심 주제는 동명의 현자 우왕의 여행과 각 지역의 독특한 물품을 수도에 공물로 보내는 것을 통해 이 9개의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에서도 문화와 물리적 환경의 이러한 지역적 차이점을 논의했다.[2]

그러한 텍스트 중 하나는 오자병법으로, 전국 시대의 군사적 논문으로, 위나라의 무후가 다른 국가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요청에 응하여 쓰여졌다. 이 저작이 귀속된 오기는 정부와 백성의 본성이 그들이 거주하는 물리적 환경 및 영토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2]

그는 조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6. 사회

한단 인근의 거대한 조나라 왕릉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각 지역마다 고유한 풍습과 문화가 있었지만, 엘리트 문화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했다. 기원전 4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경의 우공 편에는 중국이 9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고유한 민족과 특산물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의 중심 주제는 동명의 현자 우왕의 여행과 각 지역의 독특한 물품을 수도에 공물로 보내는 것을 통해 이 9개의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에서도 문화와 물리적 환경의 이러한 지역적 차이점을 논의했다.[2]

그러한 텍스트 중 하나는 오자병법으로, 전국 시대의 군사적 논문으로, 위나라의 무후가 다른 국가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요청에 응하여 쓰여졌다. 이 저작이 귀속된 오기는 정부와 백성의 본성이 그들이 거주하는 물리적 환경 및 영토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2]

그는 조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7. 외교 관계

조 무령왕 시대에 조나라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로, 당시 중국 사대부들의 헐렁한 옷과 달리 말을 타고 싸우기에 매우 편리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주목하여 조나라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기마병 훈련을 실시했다. 조나라 경대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 무령왕은 이를 강력히 실행하여 조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혜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주부(主父)라 칭하며 실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 章)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나 무령왕이 유폐되어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이 되었다.

인상여, 염파, 조사와 같은 명장들이 등장하여 조나라를 지탱했지만,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에 대패하여 병력 대부분을 잃고 급격히 약화되었다.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 군이 수도 한단까지 진격해 왔으나, 조나라 백성들의 일치단결과 재상 평원군위나라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진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 군사력은 쇠퇴했지만, 조나라는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유지하여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를 대표하는 공손룡, 음양가를 대표하는 추연 등이 대표적이다. 조나라 출신 학자로는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 종횡가와 병가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이 있으며,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학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렀다. 효성왕도 유가 학자 순자와 초나라 출신 병법가 임무군을 등용하여 인재 등용에 힘썼다.

유류왕 때에는 흉노로부터 국경선을 지킨 명장 이목이 있어 진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장수는 초나라의 항연과 이목뿐이었다. 그러나 이목은 유류왕의 총신 곽개의 참언으로 죽임을 당했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이 함락되고 유류왕이 사로잡히면서 조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왕족 조가(趙嘉)가 지역에서 대왕(代王)을 칭하며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기원전 222년 연나라와 함께 완전히 멸망했다.

전국 시대 말기, 조나라는 강력한 진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기원전 287년, 위나라와 맺은 진나라에 대한 동맹이 시작되었지만, 기원전 273년 화양 전투에서 패배로 끝났다. 이후의 투쟁은 기원전 260년의 장평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위나라와 초나라 군대가 한단을 구원했지만, 조나라는 이 전투에서 막대한 군사적 손실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1]

기원전 229년, 진나라 장군 왕전이 이끄는 침략에 이목과 그의 부관 사마상(司馬尚)이 기원전 228년까지 저항했다. 이목은 전국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이었고, 왕전 또한 진전을 이루지 못하여 침략은 교착 상태로 끝났다. 진나라 황제 진 시황은 조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이목을 제거해야 함을 깨닫고 조나라 지도자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려 했다. 조나라 왕 유미는 음모에 넘어가 이목의 사형을 명령하고 사마상을 해임했다. 이목의 후임자 조총은 왕전에게 즉시 패배했다. 진나라는 유미왕을 사로잡았고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전왕의 이복 동생인 가 왕자는 에서 가왕으로 선포되었고, 마지막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 대항했다. 이 정권은 기원전 222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해에 진나라 군대가 그를 사로잡고 대에서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1]

초의 진승오광의 예를 따른 오신이라는 반란자가 스스로 조나라 왕을 칭했다. 오신은 나중에 그의 부하 이량, 장이 및 진여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나라의 전직 관리였으며 조나라 왕족인 조헐을 조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기원전 206년, 초나라의 반란 영주 항우진나라를 격파하고 자신을 포함한 17명의 다른 영주들을 왕으로 만들었으며, 조헐을 대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진여는 조헐이 장이로부터 조나라 영토를 되찾는 것을 도왔고, 이에 조헐은 진여를 대나라의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205년, 대나라의 진여의 부하 하설유방의 장군 한신과 장이에게 패배했다. 진여는 기원전 204년에 한신에게 패배했고, 이후 조헐은 한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유방은 조나라를 장이에게 주었다.[1]

기원전 154년, 조는 조왕 유수(劉遂)가 이끌었고, 새로 즉위한 한나라 제6대 황제에 대항하는 실패한 칠국지란에 참여했다.[1]

7. 1. 주변국과의 관계

조씨는 진나라 안에서 수 세기 동안 세력을 키웠으며, 기원전 5세기 중반에는 백적 국가 대를 합병하기도 했다.

춘추 시대 말, 진나라는 세 명의 강력한 대신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조씨 가문의 족장인 조양자였다. 기원전 403년, 왕은 조나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한나라와 위나라와 함께 다른 두 국가의 존재도 인정했다. 사마광을 시작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인정을 전국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전국 시대 초기에 조나라는 비교적 약한 국가였다. 넓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북쪽 국경은 동호, 숲 호, 루번, 흉노 등 북방 유목 민족에게 자주 시달렸다. 조나라는 위나라의 군사력이나 제나라의 부를 갖추지 못했고, 그들 사이의 투쟁에서 소모품이 되었다. 기원전 354년에는 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여 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계릉 전투에서 제나라가 크게 승리하여 조나라의 남쪽 국경에 대한 위협을 줄였다.

조나라는 조 무령왕(기원전 325-299년)의 군사 개혁 전까지 약세를 유지했다. 조나라 군인들은 족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기병 궁수로 교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胡服騎射|húfúqíshè중국어) 이 개혁은 훌륭하고 실용적인 전략으로, 중국 국가의 첨단 기술과 초원 유목민의 전술을 통해 조나라의 기병은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그 결과, 조나라는 가장 큰 위협인 제나라와 더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조나라는 오랜 전쟁 끝에 기원전 295년에 중산을 정복하고, 이웃 국가인 위나라, 연나라, 진나라로부터 영토를 병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 시기에 조나라 기병은 초나라에 대한 후기 작전에서 때때로 제나라를 침략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염파, 조사, 이목 등 뛰어난 군사 지휘관들이 조나라에서 활약했다. 염파는 진나라에 맞서 조나라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사는 동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연나라 침공을 이끌었다. 이목은 조-흉노 전쟁에서 조나라를 흉노로부터 방어했고, 이후 진나라에 맞서 조나라를 방어했다.[1]

7. 2. 진나라와의 관계

진 문공의 측근인 조 성자 조최(趙成子 趙衰)가 높은 관직에 오르면서 조씨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조최의 아들 조 선자 조돈(趙宣子 趙盾)이 진 영공을 죽인 종제 조천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조 장자 조삭(趙莊子 趙朔) 사후에 조씨 가문은 제거되었다. 이후 조 장자의 아들 조 문자 조무(趙文子 趙武)가 기원전 583년에 복권되어 춘추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로 다스리는 육경(六卿) 중에 하나가 되었다. 조 간자 조앙(趙簡子 趙鞅) 대에 범씨와 중항씨가 몰락해 조, 위, 한, 지 네 가문만 남았다.[1]

기원전 456년 육경 중에 세력이 강했던 지씨 일족의 수장인 지양자 지요(智襄子 智瑶)가 한씨, 위씨 일족을 거느리고 조씨 가문을 멸족하게 하려고 하였다. 조씨 가문의 수장인 조 양자 조무휼(趙襄子 趙無恤)은 한호, 위구에게 "지씨는 탐욕스러워, 우리 조씨가 멸족된 뒤에는 당신들 차례다"라고 말하면서 설득에 성공한다. 세 가문에 역공당하여 지씨 가문은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씨, 한씨, 위씨의 세 가문이 나누었고 각각 독립하였다. 그 후에 기원전 403년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었다.[1]

조씨는 진나라 안에서 수 세기 동안 세력을 축적해 왔는데, 여기에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백적 국가 대를 합병한 것도 포함된다.[2] 춘추 시대 말, 진나라는 세 명의 강력한 대신들 사이에서 진나라 분할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조씨 가문의 족장인 조양자였다. 기원전 403년, 왕은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마광을 시작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인정을 전국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2]

8. 주요 인물

참조

[1] 서적 From Destiny to Dao: A Survey of Pre-Qin Philosophy in China https://books.google[...] Silkroad Press 2016
[2] 서적 The Early Chinese Empires : Qin and Han https://archive.org/[...]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中國古代的星象系統 (54): 天市左垣、市樓 http://aeea.nmns.edu[...] 2006-06-23
[4] 문서 北方中西星名對照表
[5] 웹사이트 Hercules https://penelope.uch[...]
[6] 웹사이트 Capricornus https://penelope.uch[...]
[7] 서적 中国服装史 五千年の歴史を検証する 白帝社
[8] 문서 史記「平原君虞卿列伝」
[9] 문서 史記「孟子荀卿列伝」
[10] 문서 漢書「芸文志」
[11] 문서 史記「楽毅列伝」
[12] 문서 荀子議兵篇
[13] 문서 史記 巻四十三 趙世家
[14] 문서 史記 巻七十三 白起王翦列傳
[15] 문서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
[16] 위키 秦滅趙之戦 http://www.hudong.co[...] Hudong Baike
[17] 문서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
[18] 문서 史記 巻四十三 趙世家
[19] 문서 史記 巻八十一 廉頗藺相如列傳
[20] 문서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
[21] 문서 戦国策 巻二十一 趙策四 http://www.chinesecl[...]
[22] 문서 資治通鑑 巻六 秦紀一
[23] 문서 史記 巻八十一 廉頗藺相如列傳
[24] 문서 史記 巻四十三 趙世家
[25] 문서 史記 巻六 秦始皇本紀
[26] 문서 史記 巻四十三 趙世家
[27] 문서 史記 巻八十一 廉頗藺相如列傳
[28] 웹사이트 HKChinese culture http://hk.chiculture[...] 2009-01-18
[29] 서적 Beijing a Concise History Routledge
[30] 위키소스 戰國策黃丕烈札記/秦/五#文信侯出走
[31] 웹사이트 秦滅韓和破趙 http://www.ccnt.com.[...] 中華文化信息网 2014-01-03
[32] 서적
[33] 문서 史記趙世家
[34] 문서 史記趙世家
[35] 문서 代 (戦国)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