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까오 (후 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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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쩐까오는 1426년 레러이에 의해 옹립된 후 쩐 왕조의 황제이다. 그의 초명은 호옹이며, 거지의 아들이었으나 쩐 예종의 조카를 자칭했다. 레러이는 명나라 세력을 몰아낸 후 쩐 왕조 부흥을 명분으로 그를 황제로 옹립했으며, 연호는 티엔킹이었다. 1427년 명나라로부터 안남 국왕으로 책봉되었으나, 1428년 레러이에 의해 살해되었고, 레러이는 이후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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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까오 (후 쩐 왕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쩐까오 |
한자 표기 | 陳暠 |
다른 이름 | 호옹 (胡翁) |
칭호 | 대월 황제 |
재위 기간 | 1426년 – 1428년 |
시대 | 천경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1428년 |
매장지 | 미상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기타 | |
휘 | 쩐까오 (陳暠), 쩐적 (陳翟)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종교 | 미상 |
2. 생애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쩐까오의 초명은 호 옹(Hồ Ông|호옹vi)이며, 거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예종의 조카를 자칭했다[2].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는 민심이 아직 쩐 왕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명나라의 세력을 몰아낸 후의 명분으로 쩐씨를 황제로 옹립할 것을 생각했다. 쩐까오는 레러이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며,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결국 레러이에게 살해되었다.
2. 1. 출신과 옹립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쩐까오는 '''호옹'''(Hồ Ông|호옹vi)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거지(걸인)의 아들이었고, 예종의 조카를 자칭했다고 한다.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는 민심이 아직 쩐 왕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명나라의 세력을 몰아낸 후의 명분으로 쩐씨를 황제로 옹립할 것을 생각했다. 선덕 원년 11월(1426년 12월)에 쩐까오는 레러이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고[3], 연호를 티엔킹으로 고쳤다.2. 2. 명나라와의 관계
1427년, 레러이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티엔킹 황제(쩐까오) 책봉을 요청했다.[4] 1428년 1월 3일(음력 12월 17일), 쩐까오는 명나라 선덕제로부터 안남국왕에 봉해졌다.[3][5]2. 3. 최후
1428년, 쩐까오는 레러이에 의해 살해되었다.[6] 쩐까오가 마항(현재의 응에안성)까지 도망쳤다가 레러이의 부하에게 붙잡혀 동관성에서 독약을 마셨다는 설, 꼬롱 아이에서 레러이의 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어 유해가 덤불 속에 버려졌다는 설, 레러이가 "나는 백전하여 천하를 얻었다, (쩐)까오가 황제의 지위에 있는 것은 나 덕분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꼬 아이로 도망쳤지만 결국 레러이에게 살해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쩐까오를 살해한 레러이는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열었다.[6]참조
[1]
서적
An introduction to Vietnam
Vietnam. Bộ ngoại giao
1969
[2]
서적
明史
[3]
서적
ベトナム史略
[4]
논문
1963
[5]
서적
明実録
[6]
서적
ベトナム史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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