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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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러이는 1385년 탕화성에서 태어난 베트남의 군주이자 후 레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명나라의 지배에 저항하여 람선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고, 1428년 대월 왕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순천 연호를 사용했다.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뛰어난 용병술과 게릴라전을 통해 승리했으며, 10년간의 전쟁 끝에 대월의 독립을 이끌었다. 레러이는 재위 기간 동안 균전제와 과거제를 도입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쳤으며, 사후 태조로 묘호가 정해졌다. 그의 업적은 근대 베트남 정치 모델로 활용되었으며,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의 전설 등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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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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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대월의 왕 |
| 재위 기간 | 1428년 4월 29일 ~ 1433년 10월 5일 (5년 159일) |
| 본명 | 레러이 (Lê Lợi/黎利) |
| 묘호 | 태조 (Thái Tổ/太祖) |
| 시호 | 통천계운성덕신공예문영무관명용지홍의지명대효고황제 (Thống Thiên Khải Vận Thánh Đức Thần Công Duệ Văn Anh Vũ Khoan Minh Dũng Trí Hoàng Nghĩa Chí Minh Đại Hiếu Cao Hoàng Đế/統天啓運聖德神功睿文英武寬明勇智弘義至明大孝高皇帝) |
| 연호 | 투언티엔 (Thuận Thiên/順天), 1428년–1433년 |
| 왕조 | 레 왕조 |
| 아버지 | 레코앙 |
| 어머니 | 찐티응옥트엉 |
| 배우자 | 찐티응옥르 팜티응옥쩐 |
| 자녀 | 레뜨테 레태종 |
| 출생일 | 1385년 9월 10일 |
| 출생지 | 탄호아 성, 람선 |
| 사망일 | 1433년 10월 5일 (48세) |
| 사망지 | 하노이, 동킨, 대월 |
| 매장지 | 빈 릉, 람선 |
| 통치 | |
| 이전 | (왕조 수립) |
| 계승 | 레태종 |
| 절 | 태조 (Thái Tổ/太祖) |
| 존호 |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 |
| 기타 정보 | |
| 다른 이름 | 남산동주, 평정왕 |
2. 생애
=== 집안 내력과 출생 ===
레러이는 1385년 8월 6일, 람선(Lam Sơn) 탕화성(Thanh Hóa province) 람장(Lam Giang) 마을의 귀족 가문에서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 쿠앙(Lê Khoáng)은 마을에서 부유한 베트남 귀족이자 지주였지만, 그의 가문이 므엉(Mường)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레러이가 므엉족 군 지도자였다는 가설도 제기되었으나, 최근 레씨 가문의 계보 연구에 따르면, 레러이의 시조는 바이도(Bái Đô)(현재 뚜쑤언현(Thọ Xuân district) 쑤언바이(Xuân Bái) 공동체의 일부) 출신인 레 모이(Lê Mỗi)이며, 레 모이는 다섯 자녀를 두었고, 레 뢰의 증조부인 레 호이(Lê Hối)는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바이도는 역사적으로 므엉족이 정착한 지역이 아니며, 레 뢰의 외가 계보와 관련하여, 외가 또한 수이추(Thủy Chú) 지역 개발을 위해 이주한 경족(Kinh) 출신이므로, 레 뢰는 므엉족이 아닌 경족임이 확인되었다.[2] 레(Lê)/레 뒤이(Lê Duy) 씨족은 수백 년 동안 람선에서 강력한 씨족이었다. 14세기 후반 당시 탕화성(Thanh Hóa)의 람선 지역은 베트남인, 므엉족, 흐몽족, 타이(Tai) 촌락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이 혼재하는 지역이었다.
레러이의 젊은 시절, 명(明)나라의 침략과 점령이 갑자기 일어났다. 두 명의 쩐 왕자가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1408~1414) 동안, 레러이는 명목상 왕실 근위대를 지휘하며 봉기에 참여했다. 쩐 왕자가 패배한 후, 그는 1413년부터 1415년까지 중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후, 그는 응아락(Ngã Lạc) 현 랑선(Lạng Sơn)(현재 빈자현(Bình Gia District), 랑선성(Lạng Sơn Province))의 명나라 식민 통치자를 위해 가정교사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 후 그는 이웃의 강력한 인물과의 불화에 휘말렸고, 그 인물은 그를 명나라에 반역자로 고발했다. 명나라는 그를 그의 마을로 쫓아냈다. 레러이의 딸이 아홉 살 때, 중국 환관 마지(Ma Ji)(1410~1427년 활동)가 그의 부모로부터 딸을 데려가 영락제(Yongle)의 궁궐로 보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 반명 운동의 시작 ===
쩐 왕조는 호꾸이리의 만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호꾸이리가 마침내 찬탈하자 명나라의 영락제는 호꾸이리를 찬탈자로 간주하고 대월을 침략한다. 결국 대월은 패배했고 호꾸이리, 호한트엉 부자는 막투이[56]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승리한 명나라는 대월을 지배한다. 전한때처럼 중국의 복속기가 도래한 것이다.
대월사기전서에는 여리를 '명의 온갖 계략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관직에 손대지 않았으며 후 쩐 왕조의 항명활동이 가망없음을 깨닫고 산림에 은거하고, 지략에 밝은 자를 모집하고 유량민을 모집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명실록에는 여리가 중국에 투항하여 관직을 얻고 암암리에 항명 음모를 꾸몄다는 말도 전해진다.
둘 중 정설은 없지만 여리 자신도 주목할 만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제로 즉위한 여리가 신하들에게 명 복속기 때를 회상하며
"집안 물건들을 다 팔아서 화를 면하길 바랬고, (명에) 음해하는 마음은 일찍이 용서받았다. 의병을 일으킨 행위는 실로 부득이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월사기전서>, 565쪽。)라고 하였다.
레러이는 명의 통치에 맞서 대월을 해방하기 위해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418년 2월[57] 레러이는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평정왕(平定王)이라 칭했다. 레러이 외에도 봉기군이 여럿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명군에게 격파당했다.
=== 람썬 봉기 ===

레러이는 1418년 정월 초하루 다음 날(음력 1월 7일) 명나라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그는 고향인탕화 출신의 여러 명문가, 특히 정씨 가문과 응웬씨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 레러이는 쩐 왕조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활동했다. 쩐 왕조의 친척이 반란의 명목상 지도자로 선택되었지만, 몇 년 안에 쩐 왕조의 옹립자는 제거되었고 레러이 자신이 반란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3]
명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레러이(黎利)는 각지의 호걸들과의 관계 강화와 유민 통합을 추진하여 1418년 2월, 고향인 남산(藍山)에서 “평정왕(平定王, Bình Định Vương)”을 자칭하고, 후일 중신이 될 阮廌(구엔 차이), 장군 레석(黎石), 레유(黎柳) 등과 함께 명에 대한 무장 저항을 개시했다(남산봉기(藍山蜂起))[11][12]. 봉기 초기, 명군은 내상(内大臣) 마기(馬騏)를 파견했으나, 레러이는 매복을 설치하여 이를 격퇴했다[13]. 그러나 봉기 초 레러이의 군대는 병력이 적어 지령산(至靈山)에서 명군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레러이는 “기신(紀信)이 되어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때 기창 동지였던 레라이(黎來)가 미끼가 되겠다고 나서, 그의 희생으로 레러이는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14]
1422년 2월에는 명나라 장군 리빈(李彬)이 병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15] 그러나 같은 해 12월, 레러이(黎利)의 군대는 명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여 포위당하게 되었고, 레러이는 춘추시대의 병법서인 손자병법의 "疾戦則存、不疾戦則亡者、為死地(질전즉존, 불질전즉망자, 위사지)''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명나라 장군 마기(馬騏)와 진지(陳智)를 물리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이후 지령산(至靈山)으로 돌아온 레러이 군대는 2개월 가까이 굶주림에 시달려 채소, 근채, 죽순 등만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16][17] 레러이는 코끼리와 말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나눠주는 등 굶주림을 견디게 했고, 탈영병을 잡아 처형하는 등 군의 규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도 결국 피로에 지쳐 화의를 호소했고, 레러이는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대에 화의를 제안했으며, 명나라 장군들 또한 장기전이 불리하다고 생각했기에 형식적인 화의에 이르렀다.[18] 1423년 여름 무렵, 레러이의 군대는 남산(藍山)으로 귀환했다.[19]
=== 군헌 10조 ===
레러이는 부하들의 규율과 통합을 중시했고 빈틈없이 그 점을 관리했다. 그는 일찍이 '군헌 10조'를 반포하기도 했다.
- 1. 시끄럽게 한 자.
- 2. 함부로 말해서 분위기를 뒤흔든 자.
- 3. 전투에 임했는데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자.
- 4. 전투를 멈추는 깃발을 보았는데도 멈추지 않는 자.
- 5. 후퇴하는 소리를 듣고도 물러서지 않는 자.
- 6. 나태하거나 무리를 떠나 잠적한 자.
- 7. 여색을 밝히고 군인으로써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자.
- 8. 뇌물을 받은 자.
- 9. 사리사욕으로 남의 공과를 뒤바꾼 자.
- 10. 여러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간악하여 도둑질을 일삼은 자.
위 열가지에 해당하는 자는 참수한다.
또한, 레러이는 모든 문무관들에게 말했다.
"하나, 무정하게 대하지 마라. 둘, 업신여기지 마라. 셋. 간사하지 마라."
레러이는 올바른 규칙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과 적대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
=== 명군을 격파하다 ===
명나라의 왕통이 기습하여 여리(黎利)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만여 명이 참살당하는 손해를 입는다.[40][42] 하지만 며칠 뒤 사방에서 반격하여 여리는 창강과 양강을 점령하고 왕통에게 화친을 제안한다. 왕통은 선덕제에게 서신을 전달했고 당시 명군은 대대적인 피해를 감안해 왕통은 급히 화친 요구를 받아들이고 양측이 철군하기로 약속한다.
전쟁이 크게 가라앉은 후 1427년(선덕 2년) 11월 여리는 사절을 보내 쩐까오를 안남왕 책봉을 요구한다.[38] 진고가 안남왕에 정식 책봉되면서 중국의 복속기가 드디어 끝나게 되었다.
여리가 명군과 오랫동안 장기전을 벌이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병술[58]과 베트남 북부의 자연환경에 해박했기 때문이다. 여리는 명의 복병을 치고 공격을 피하며 매번 나란히 대진하였고 명군의 숫자가 여리 세력보다 많았지만 동시에 행군이 멀어 최적의 상태에서 전투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
1424년 말, 주전제(선덕제) 즉위와 황부(黃福) 소식은 레 로이(Lê Lợi)에게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청화(Thanh Hoa) 고지대에서 반군 지도자로 저항 운동을 재개했다. 레 로이는 그의 동지인 응우옌 칙(Nguyễn Chích)을 따라 산악 지대를 통해 남쪽으로 행군하여 응에안(Nghệ An)에 도착하여 퀴쩌우(Quỳ Châu) 지역에서 명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1424년 말까지 레 로이의 반군은 응에안 성의 성도인 빈(Vinh)에 집결해 있던 명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레 로이는 까강(Cả) 삼각주 서쪽 고지대의 소수민족으로부터 수천 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그의 군대는 명나라 편에 가담했던 소수민족 군대를 패퇴시켰다.
1425년, 명나라 조정이 황제의 죽음과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분주한 가운데, 레 로이는 남쪽과 북쪽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남쪽에서는 그의 부하 장군인쩐 응우옌한(Trần Nguyên Hãn)이 현대 꽝빈(Quảng Bình)에서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현대 꽝찌(Quảng Trị)와 투아티엔(Thừa Thiên)을 지나 행군하여 남쪽 땅을 장악했다. 북쪽에서는 레 로이의 군대가 응에안 북부에서 명나라 보급 함대를 격파하고 청화(Thanh Hoa)에서 명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타이도(Tây Đô)를 포위했다. 레 로이의 동지이자 유교 학자인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는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425년 말까지 레 로이의 베트남 반군은 청화(Thanh Hoa)에서 남쪽까지 모든 지역을 해방시키고 그 지역의 모든 명나라 군대를 포위했다.

1426년, 장부(張輔)는 명나라 교지(交趾) 군대의 지휘권을 재개하여 악화되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허락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거절했다.
1426년, 레뢰이(Lê Lợi)는 정 khả(Trịnh Khả), 리 티엔(Lý Triện), 도 비(Đỗ Bí), 류 인 추(Lưu Nhân Chú), 부이 비(Bùi Bị), 딘 레(Đinh Lễ), 응우옌 시(Nguyễn Xí) 등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를 Tây Đô 북쪽 산맥을 통해 홍강 평야로 진출시켜 동관(東關)을 위협하고 운남(雲南)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명나라 군대가 동관을 증원하기 위해 빈(Vinh)에서 소환되자, 레뢰이는 빈을 포위할 일부 군대를 남겨둔 채 북쪽으로 이동하는 명나라 군대를 추격하면서 이동 중에 Thanh Hoa에서 수천 명의 병사를 규합했다. 홍강 삼각주로 진격하면서 그는 Trần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쩐까오(Trần Cảo)를 왕으로 선포했다. 홍강 삼각주의 사람들과 학자들이 그의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그는 명나라를 지지했던 자들에게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촉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을 체포했다. 황부(黃府)의 후임으로 동관에 있던 중국 장군 왕통(王統)은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명나라에 충성하는 지역 주민들이 그에게 저항할 것을 설득했다.
1426년 12월 초, 리 티엔과 딘 레가 이끄는 3,000명의 베트남 반군은 왕통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중국군을 토뜨동(Tốt Động)(하노이 남쪽 32km)에서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수많은 말과 보급품, 무기 등이 베트남군의 손에 들어왔다.
1427년까지, 포로로 잡힌 북부 지역과 무슬림 포로들은 베트남인들에게 포위 공격 기술, 초기 형태의 전차, 비행하는 말이 끄는 수레, 무슬림 트레뷰셋(트레뷰셰트)(회회포(回回砲)), 그리고 중국인들이 "천구(千球) 뇌포(雷砲)"라고 부르는 또 다른 포를 제공했다.
1427년 초까지, 5개의 주요 명나라 요새가 포위되었다. 이들은 동관과 Tây Đô, 홍강 삼각주 남쪽 입구를 지키기 위해 건설된 요새인 고롱(Cổ Long)(남딘(南定)성 부반(Vu Ban) 근처 이옌(Y Yen) 지역에 위치, 동관과 Tây Đô 사이의 도로 상에 위치), 홍강 삼각주 동부를 지키는 지린( Chí Linh) 근처 파라이(Phả Lại)의 요새, 그리고 홍강 삼각주에서 북쪽 국경으로 나가는 길을 지키는 벅장(Bắc Giang) 현대 도시에 있는 증강(Xương Giang) 성채였다. Tây Đô 남쪽의 모든 명나라 주둔군은 항복했다. 레뢰이는 동관과 홍강 건너편에 있는 자림(Gia Lâm) 지역 보데(Bồ Đề)에 본부를 설치했다.
1427년 3월 말, 류성과 무성이 이끄는 약 12만 명의 중국군 증원부대가 운남과 광서에서 교지로 진격해 들어왔다.
처음에 레러이는 명나라 군대를 격리하기 위해 주민들을 랑장, 박장, 뀌화, 뚜옌꽝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류성이 주력 부대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고 레삿, 레냔쭈, 레반린, 딘리엣을 지랑에 배치하는 한편, 레반안과 레리에게 다른 부대를 이끌고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무성의 부대에 대해서는, 그는 Thanh이 경험 많은 장군이며 류성의 결과를 보고 행동할 것임을 알고, 레러이는 팜반사오와 트린카에게 항상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9월, 류성이 이끄는 9만 명의 군대가 지랑에서 패배하고 류성 자신은 처형되었다.
무성은 류성이 죽고 목이 잘린 것을 듣고 놀라 도망쳤다. 팜반사오와 트린카가 추격하여 1만 명의 병사를 죽이고 1천 명의 병사와 말을 사로잡았다.[15]
레러이는 명나라의 교지 지배가 끝났음을 이해했다. 명나라는 교지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심각한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적었다.
쩐까오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레러이는 명나라의 개입의 명분이 되었던 쩐 왕조의 복고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주전제는 더 이상의 개입을 종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황실 군대가 포위당하자 명나라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국의 체면을 유지하려면 포위된 교지 잔여 세력을 증원하거나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명나라가 점령한 xương Giang 성채에 대한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1427년 10월 성채는 레러이에게 함락되었고, 전쟁은 끝났다. 명나라 선덕제는 북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최종 승리 이후, 베트남은 8만 6640명의 명나라 포로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모든 무기를 압수했다.
=== 명을 몰아내다 ===
1427년 9월, 명나라 조정은 전황이 불리함을 알고, 장군 유승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파병했다.[43] 그러나 레라이는 "명나라 군대는 먼 길을 온 탓에 지쳐 있을 것이다. 곧바로 싸우지 말고 더욱 지치도록 기다려야 한다."[44]라고 말하며, 전투 중이던 병사들을 물리고 적을 유인하여 매복을 설치했다. 그리고 유승의 군대가 지릉(현재 랑선성 찌랑현)의 늪지에 들어서자 기습 공격을 가해 유승을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45]
같은 해 11월 22일, 명나라 군대의 왕통 등 수뇌부와 독립군은 동도성 남쪽에서 회맹(회담)을 갖고, 장기간의 포위로 지쳐 있던 명나라 군대는 다시 강화를 요청했다.[46] 명나라 측에서는 산수·마기, 독립군 측에서는 레사제/黎思齊중국어·레인수/劉仁澍중국어·레국정·레여저 등을 각각 상대방 진영에 인질로 보내 강화의 전망이 성립되었다.[47] 황제로 추대했던 진호를 명나라 신하로 삼는 것을 요청하여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왕통 등 명나라 군세는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이렇게 안남 지방은 다시 현지인에 의한 독립 정권이 형성되었다.[48]
==== 대월 재건 ====
항명전쟁이 끝난 후 여씨(黎氏) 일족은 대월의 통치자가 되었고 명과의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실세가 된 여리는 이제 제위를 넘보고 있었고 진고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진고는 1426년(선덕 원년) 여리 세력이 옹립한 쩐 왕조 쩐씨의 괴뢰 군주이다. 문제는 진고가 그냥 찐씨인지 아니면 쩐 왕조의 진짜 후손인지 불명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고를 옹립한 이유는 민심을 모으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명군을 몰아낸 여리는 꼭두각시 군주인 진고를 제거하고 1428년(선덕 3년) 3월 15일 하노이에서 후 레 왕조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진고의 사인에 대해선 도주할 때 조정에 잡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며, 바다의 배를 몰다가 여리에게 쫓겨 죽었다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여리는 국호를 다시 다이비엣(Dai Viet, 大越/대월)이라 정하고, 통킹(東京, 동경 즉 하노이)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국내를 5개 도(道)로 나누어서 행정관을 파견하였고, 사상적 측면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여 장려하였다.


10년간의 전쟁 끝에 1427년, 대월(Đại Việt)은 독립을 되찾았고 명나라는 대월을 공식적으로 독립국(안남, Annam)으로 인정하였다. 1428년 4월 15일, 레 로이(Lê Lợi)는 즉위하여 부흥된 대월 왕국(Dai Viet kingdom)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호를 '''수언 티엔(Thuận-Thiên)'''(順天, 천명을 따름)으로 정하였다.
레 로이의 독립 선언은 중국-베트남 간의 긴장과 베트남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반영하였다.
{{blockquote|
우리 대월은 번영이 넘치는 나라이다.
문명이 최고로 지배하는 곳이다.
산, 강, 국경은 모두 나뉘어져 있다.
관습은 남과 북이 다르다.
조, 딘, 리, 쩐
우리 나라를 건설했고,
한, 당, 송, 원은
그들의 나라를 다스렸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했지만,
영웅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을 우리 역사가 증명한다. "[4]}}
1428년 1월 10일, 황제였던 Trần Hạo(陳暠)가 사망했다. 후대의 주석 등에서는 黎利가 명령하여 처리했다는 설도 기록되어 있다.[49]
같은 해 4월 15일, 黎利는 수도 승룡성(昇龍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순천으로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50]
재상 Nguyễn Cẩn(阮廌) 등의 보좌 아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균전제와 과거제도 도입하여 여러 법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명목상으로 Trần씨(陳氏)의 후예로 옹립했던 Trần Hạo(陳暠)를 살해한 것과 “반란군의 수괴”를 책봉하는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에 임명되는 것에 그쳤고, 재위 중에는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지 못했다. 1433년에 사망했다. 黎元龍이 뒤를 이어 태종(太宗)이 되었다.
==== 치적 ====
레러이는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들을 펼쳤다. 교육에 관해선 경성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 각 부로에 학당을 설치해 유학을 가르쳤으며 과거 시험을 개최하였고 종교별로 시험 제도도 만들었다.[50] 율령의 경우엔 당대의 형벌을 참고하여 태질, 장형, 징역, 유배, 사형으로 구분했으며 자수한 경우 감형하는 경우도 생각하였다. 또한 공이 없는 자가 토지를 점유하고, 개국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는 경작할 토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균전법을 제정해 빈부의 불균형을 완화시켰다.[50]
군사의 경우 항명전쟁이 끝난 뒤 당시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인원을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또 전 군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며 한 명이 귀농하고 넷이 근무하는 등의 교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신의 통치기간에도 봉기가 일어나자 친정하여 정벌했다.

레 로이는 명나라 선덕제(宣德帝, Xuande Emperor)가 1431년 대월(Dai Viet)의 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대월을 공식적으로 재건했다. 대신 레 로이는 명나라 황실에 외교 서한을 보내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을 약속하고, 책봉을 받기 위해 5만 냥의 금을 바쳤다. 명나라 황실은 조선 왕조 시대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봉건적 관계를 수락했다.
레 로이는 수도 탕롱(Thăng Long)의 이름을 동경(Đông Kinh)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나중에 통킹(Tonki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4세기 후반에 발전된 구체제를 기반으로 베트남 정부의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했다. 또한 그는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쩐 응우옌 한(Tran Nguyen Han), 레 삿(Lê Sát),팜 반 사오(Pham Van Sao), 정 카(Trịnh Khả)와 같은 오랜 동지이자 장군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
레 정부는 베트남의 기반 시설, 즉 도로, 다리, 운하를 재건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기여한 병사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다. 그는 과거 제도를 부활시키고 우수한 행정 법규를 제정했다. 평화가 회복되면서 군 복무에서 해방된 사람들, 비엣족이 아닌 병사들도 포함하여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했고, 이는 쌀 생산량 증가로 이어져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특히 해안 지역에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내부 정치는 레 로이의 신임하는 고문들의 계급을 빠르게 몰락시켰다. Trần Nguyên Hãn은 반역 혐의 조사를 위해 수도로 압송되던 중 자살했고, Phạm Văn Xảo는 1432년 처형되었으며, 5년간 섭정으로 통치한 Lê Sát는 1438년 처형되었다.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는 1442년에 처형되었는데(레 타이 통의 죽음에 연루되었거나 책임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정 카(Trịnh Khả)만이 노년까지 살아남았지만 1451년에 처형되었다.
==== 외교 관계 ====
명나라와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안남국왕으로 새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했다. 명은 처음엔 쩐씨를 왕으로 생각하여 불응했으나 여러 차례 요구하자 1431년 정식 안남국왕으로 책봉받았다. 명과의 관계는 형식상으론 제후국 책봉이나, 대월은 자주적이며 절대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외교였다.
여리가 황제가 되기 전, 1427년(선덕 2년) 참파인이 와서 방물을 조공하자 후 레 왕조(레러이 세력)는 점차 참파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 사용 칭호 ====
여리가 생전에 쓰던 호칭은 5개가 있었고 총 호칭들은 다음과 같다.
- 평정왕(平定王) - 항명운동때 사용한 자칭 왕호.
- 대월 황제 -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
-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順天承運睿文英武大王) - 존호.
- 남산동주(藍山洞主) - 아호.
- 안남국왕(安南國王) - 중국 (명나라)에서 봉해준 작호.
==== 사망 ====
1433년 (순천 6년) 8월 22일 레러이는 정침(正寢)에서 사망하였다.[59] 향년 49세였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산에 매장되었고 사후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능의 이름은 영릉(永陵)이며 제위는 차남인 여원룡이 이었다.
2. 1. 집안 내력과 출생
레러이는 쩐히엔(영덕왕) 창부 9년[51], 뇌양 주산[52]에서 베트남의 청화로 양강현 람썬(清化路 梁江縣 藍山鄉)의 호족 가문 레코앙[53]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러이의 증조부 레호이[54]는 이곳을 지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여 정착했고, 3년 뒤 실제로 자신의 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독자적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레호이의 아들 레딘[55]이 그의 자리를 계승할 땐 가문을 따르는 자들이 천 여명에 도달했다고 한다.[54]레러이는 1385년 8월 6일, 람선(Lam Sơn) 탕화성(Thanh Hóa province) 람장(Lam Giang) 마을의 귀족 가문에서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 쿠앙(Lê Khoáng)은 마을에서 부유한 베트남 귀족이자 지주였지만, 그의 가문이 므엉(Mường)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레러이가 므엉족 군 지도자였다는 가설도 제기되었으나, 최근 레씨 가문의 계보 연구에 따르면, 레러이의 시조는 바이도(Bái Đô)(현재 뚜쑤언현(Thọ Xuân district) 쑤언바이(Xuân Bái) 공동체의 일부) 출신인 레 모이(Lê Mỗi)이며, 레 모이는 다섯 자녀를 두었고, 레 뢰의 증조부인 레 호이(Lê Hối)는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바이도는 역사적으로 므엉족이 정착한 지역이 아니며, 레 뢰의 외가 계보와 관련하여, 외가 또한 수이추(Thủy Chú) 지역 개발을 위해 이주한 경족(Kinh) 출신이므로, 레 뢰는 므엉족이 아닌 경족임이 확인되었다.[2] 레(Lê)/레 뒤이(Lê Duy) 씨족은 수백 년 동안 람선에서 강력한 씨족이었다. 14세기 후반 당시 탕화성(Thanh Hóa)의 람선 지역은 베트남인, 므엉족, 흐몽족, 타이(Tai) 촌락 등 다양한 민족 집단이 혼재하는 지역이었다.
레러이의 젊은 시절, 명(明)나라의 침략과 점령이 갑자기 일어났다. 두 명의 쩐 왕자가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1408~1414) 동안, 레러이는 명목상 왕실 근위대를 지휘하며 봉기에 참여했다. 쩐 왕자가 패배한 후, 그는 1413년부터 1415년까지 중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후, 그는 응아락(Ngã Lạc) 현 랑선(Lạng Sơn)(현재 빈자현(Bình Gia District), 랑선성(Lạng Sơn Province))의 명나라 식민 통치자를 위해 가정교사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 후 그는 이웃의 강력한 인물과의 불화에 휘말렸고, 그 인물은 그를 명나라에 반역자로 고발했다. 명나라는 그를 그의 마을로 쫓아냈다. 레러이의 딸이 아홉 살 때, 중국 환관 마지(Ma Ji)(1410~1427년 활동)가 그의 부모로부터 딸을 데려가 영락제(Yongle)의 궁궐로 보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후쩐(陳朝) 말기인 1385년 9월 10일, 량강현 람산향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다.[7] 당시 조정이었던 후쩐에서는 당시 황제였던 순종이 胡聖偶중국어의 아버지인 외척 호계려에 의해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인 소제에게 젠양(禪讓)을 강요한 호계려가 황위를 찬탈하여 호조를 열었으나, 당시 중국 왕조였던 명(明)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안남은 명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제4차 북속기).
이때 레러이의 명(明)에 대한 대응은 대월 측과 명 측의 사료에 따라 다르다. 대월 측 사료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서는 "명의 지배 하에 들어간 후, 대월 백성에게는 노역과 항복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레러이는 관작으로 회유하거나 실력으로 협박하는 등 명나라 사람들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8]"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명 측 사료인 『명실록(明實錄)』에서는 "레러이는 표면적으로 명에 항복하고 순찰 활동을 하면서 실제로는 명에 대한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10]
2. 2. 반명 운동의 시작
쩐 왕조는 호꾸이리의 만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호꾸이리가 마침내 찬탈하자 명나라의 영락제는 호꾸이리를 찬탈자로 간주하고 대월을 침략한다. 결국 대월은 패배했고 호꾸이리, 호한트엉 부자는 막투이[56]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승리한 명나라는 대월을 지배한다. 전한때처럼 중국의 복속기가 도래한 것이다.대월사기전서에는 여리를 '명의 온갖 계략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관직에 손대지 않았으며 후 쩐 왕조의 항명활동이 가망없음을 깨닫고 산림에 은거하고, 지략에 밝은 자를 모집하고 유량민을 모집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명실록에는 여리가 중국에 투항하여 관직을 얻고 암암리에 항명 음모를 꾸몄다는 말도 전해진다.
둘 중 정설은 없지만 여리 자신도 주목할 만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황제로 즉위한 여리가 신하들에게 명 복속기 때를 회상하며
"집안 물건들을 다 팔아서 화를 면하길 바랬고, (명에) 음해하는 마음은 일찍이 용서받았다. 의병을 일으킨 행위는 실로 부득이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월사기전서>, 565쪽。)라고 하였다.
레러이는 명의 통치에 맞서 대월을 해방하기 위해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418년 2월[57] 레러이는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평정왕(平定王)이라 칭했다. 레러이 외에도 봉기군이 여럿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명군에게 격파당했다.
레러이는 1418년 정월 초하루 다음 날(음력 1월 7일) 명나라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그는 고향인탕화 출신의 여러 명문가, 특히 정씨 가문과 응웬씨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 레러이는 쩐 왕조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활동했다. 쩐 왕조의 친척이 반란의 명목상 지도자로 선택되었지만, 몇 년 안에 쩐 왕조의 옹립자는 제거되었고 레러이 자신이 반란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3]
명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레러이(黎利)는 각지의 호걸들과의 관계 강화와 유민 통합을 추진하여 1418년 2월, 고향인 남산(藍山)에서 “평정왕(平定王, Bình Định Vương)”을 자칭하고, 후일 중신이 될 阮廌(구엔 차이), 장군 레석(黎石), 레유(黎柳) 등과 함께 명에 대한 무장 저항을 개시했다(남산봉기(藍山蜂起))[11][12].
레러이는 부하들의 규율과 통합을 중시했고 빈틈없이 그 점을 관리했다. 그는 일찍이 '군헌 10조'를 반포하기도 했다.
- 1. 시끄럽게 한 자.
- 2. 함부로 말해서 분위기를 뒤흔든 자.
- 3. 전투에 임했는데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자.
- 4. 전투를 멈추는 깃발을 보았는데도 멈추지 않는 자.
- 5. 후퇴하는 소리를 듣고도 물러서지 않는 자.
- 6. 나태하거나 무리를 떠나 잠적한 자.
- 7. 여색을 밝히고 군인으로써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자.
- 8. 뇌물을 받은 자.
- 9. 사리사욕으로 남의 공과를 뒤바꾼 자.
- 10. 여러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간악하여 도둑질을 일삼은 자.
위 열가지에 해당하는 자는 참수한다.
또한, 레러이는 모든 문무관들에게 말했다.
"하나, 무정하게 대하지 마라. 둘, 업신여기지 마라. 셋. 간사하지 마라."
레러이는 올바른 규칙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과 적대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
2. 2. 1. 람썬 봉기
레러이는 명의 통치에 맞서 대월을 해방하기 위해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418년 2월[57] 레러이는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평정왕(平定王)이라 칭했다. 레러이 외에도 봉기군이 여럿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명군에게 격파당했다.명은 레러이가 봉기를 일으키자 마기(馬騏)를 파견하여 정벌을 시도했다. 그러자 레러이는 명군을 낙수(洛水)로 유인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복병들로 명군을 물리친다. 이후 레러이는 영산(靈山)으로 이동하다가 명군의 추격을 받아 자신의 세력 사람들 일부분이 명의 포로로 붙잡힌다.
레러이는 잔병을 이끌며 영산에 주둔하였고 1419년부터 24년까지 약 5년간 영산, 남산을 주요 거점으로 삼아 여러번 잔병을 이끌고 명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이 때 레러이는 개국공신이 되는 응우옌짜이의 귀순을 받는다.
1425년 (홍희 원년) 행군 기간에 레러이는 연도(沿道)에 있던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레러이 세력이 행차하는 곳 마다 성을 포위, 힘을 합쳐 백성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명군이 점령했던 지역들은 레러이가 다시 수복하였다. 명군의 주력이 예안성(乂安城)에만 집중되어 있고 다른곳은 방어가 약하다는 점을 알아채고 레러이는 시선을 돌려 신평(新平), 순화(順化)를 공략한다.
당시 레러이 세력은 베트남 중부를 점령하고 동도(東都)로 출병하여 1426년 10월과 11월 사이(선덕 원년) 명군과의 전투에서 명군을 가로막아 명군의 세력이 몇 개의 포위된 도시에만 세력권이 한정되게 만들었다. 응우옌짜이, 찐카, 쩐응우옌한, 레삿, 팜반싸오, 딘리엣, 레응언등 휘하 참모, 장수들과 함께 계속 항전해 끝내 명나라에게 승리하고, 명나라 군대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레러이는 1418년 정월 초하루 다음 날(음력 1월 7일) 명나라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그는 고향인탕화 출신의 여러 명문가, 특히 정씨 가문과 응웬씨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초기 레러이는 쩐 왕조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활동했다. 쩐 왕조의 친척이 반란의 명목상 지도자로 선택되었지만, 몇 년 안에 쩐 왕조의 옹립자는 제거되었고 레러이 자신이 반란의 의심할 여지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3]
1422년 2월에는 명나라 장군 리빈(李彬)이 병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15] 그러나 같은 해 12월, 레러이(黎利)의 군대는 명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여 포위당하게 되었고, 레러이는 춘추시대의 병법서인 손자병법의 "疾戦則存、不疾戦則亡者、為死地(질전즉존, 불질전즉망자, 위사지)''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명나라 장군 마기(馬騏)와 진지(陳智)를 물리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이후 지령산(至靈山)으로 돌아온 레러이 군대는 2개월 가까이 굶주림에 시달려 채소, 근채, 죽순 등만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16][17] 레러이는 코끼리와 말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나눠주는 등 굶주림을 견디게 했고, 탈영병을 잡아 처형하는 등 군의 규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도 결국 피로에 지쳐 화의를 호소했고, 레러이는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대에 화의를 제안했으며, 명나라 장군들 또한 장기전이 불리하다고 생각했기에 형식적인 화의에 이르렀다.[18] 1423년 여름 무렵, 레러이의 군대는 남산(藍山)으로 귀환했다.[19]
명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던 레러이(黎利)는 각지의 호걸들과의 관계 강화와 유민 통합을 추진하여 1418년 2월, 고향인 남산(藍山)에서 “평정왕(平定王, Bình Định Vương)”을 자칭하고, 후일 중신이 될 阮廌(구엔 차이), 장군 레석(黎石), 레유(黎柳) 등과 함께 명에 대한 무장 저항을 개시했다(남산봉기(藍山蜂起))[11][12]. 봉기 초기, 명군은 내상(内大臣) 마기(馬騏)를 파견했으나, 레러이는 매복을 설치하여 이를 격퇴했다[13]. 그러나 봉기 초 레러이의 군대는 병력이 적어 지령산(至靈山)에서 명군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레러이는 “기신(紀信)이 되어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때 기창 동지였던 레라이(黎來)가 미끼가 되겠다고 나서, 그의 희생으로 레러이는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14]
2. 2. 2. 명군을 격파하다
명나라의 왕통이 기습하여 여리(黎利)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만여 명이 참살당하는 손해를 입는다.[40][42] 하지만 며칠 뒤 사방에서 반격하여 여리는 창강과 양강을 점령하고 왕통에게 화친을 제안한다. 왕통은 선덕제에게 서신을 전달했고 당시 명군은 대대적인 피해를 감안해 왕통은 급히 화친 요구를 받아들이고 양측이 철군하기로 약속한다.전쟁이 크게 가라앉은 후 1427년(선덕 2년) 11월 여리는 사절을 보내 쩐까오를 안남왕 책봉을 요구한다.[38] 진고가 안남왕에 정식 책봉되면서 중국의 복속기가 드디어 끝나게 되었다.
여리가 명군과 오랫동안 장기전을 벌이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병술[58]과 베트남 북부의 자연환경에 해박했기 때문이다. 여리는 명의 복병을 치고 공격을 피하며 매번 나란히 대진하였고 명군의 숫자가 여리 세력보다 많았지만 동시에 행군이 멀어 최적의 상태에서 전투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
1424년 말, 주전제(선덕제) 즉위와 황부(黃福) 소식은 레 로이(Lê Lợi)에게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청화(Thanh Hoa) 고지대에서 반군 지도자로 저항 운동을 재개했다. 레 로이는 그의 동지인 응우옌 칙(Nguyễn Chích)을 따라 산악 지대를 통해 남쪽으로 행군하여 응에안(Nghệ An)에 도착하여 퀴쩌우(Quỳ Châu) 지역에서 명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1424년 말까지 레 로이의 반군은 응에안 성의 성도인 빈(Vinh)에 집결해 있던 명나라 군대를 몰아냈다. 레 로이는 까강(Cả) 삼각주 서쪽 고지대의 소수민족으로부터 수천 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그의 군대는 명나라 편에 가담했던 소수민족 군대를 패퇴시켰다.
1425년, 명나라 조정이 황제의 죽음과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분주한 가운데, 레 로이는 남쪽과 북쪽으로 군대를 이끌었다. 남쪽에서는 그의 부하 장군인쩐 응우옌한(Trần Nguyên Hãn)이 현대 꽝빈(Quảng Bình)에서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현대 꽝찌(Quảng Trị)와 투아티엔(Thừa Thiên)을 지나 행군하여 남쪽 땅을 장악했다. 북쪽에서는 레 로이의 군대가 응에안 북부에서 명나라 보급 함대를 격파하고 청화(Thanh Hoa)에서 명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타이도(Tây Đô)를 포위했다. 레 로이의 동지이자 유교 학자인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는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425년 말까지 레 로이의 베트남 반군은 청화(Thanh Hoa)에서 남쪽까지 모든 지역을 해방시키고 그 지역의 모든 명나라 군대를 포위했다.
1426년, 장부(張輔)는 명나라 교지(交趾) 군대의 지휘권을 재개하여 악화되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허락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거절했다.
1426년, 레뢰이(Lê Lợi)는 정 khả(Trịnh Khả), 리 티엔(Lý Triện), 도 비(Đỗ Bí), 류 인 추(Lưu Nhân Chú), 부이 비(Bùi Bị), 딘 레(Đinh Lễ), 응우옌 시(Nguyễn Xí) 등 장군들이 이끄는 군대를 Tây Đô 북쪽 산맥을 통해 홍강 평야로 진출시켜 동관(東關)을 위협하고 운남(雲南)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명나라 군대가 동관을 증원하기 위해 빈(Vinh)에서 소환되자, 레뢰이는 빈을 포위할 일부 군대를 남겨둔 채 북쪽으로 이동하는 명나라 군대를 추격하면서 이동 중에 Thanh Hoa에서 수천 명의 병사를 규합했다. 홍강 삼각주로 진격하면서 그는 Trần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쩐까오(Trần Cảo)를 왕으로 선포했다. 홍강 삼각주의 사람들과 학자들이 그의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그는 명나라를 지지했던 자들에게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촉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을 체포했다. 황부(黃府)의 후임으로 동관에 있던 중국 장군 왕통(王統)은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명나라에 충성하는 지역 주민들이 그에게 저항할 것을 설득했다.
1426년 12월 초, 리 티엔과 딘 레가 이끄는 3,000명의 베트남 반군은 왕통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중국군을 토뜨동(Tốt Động)(하노이 남쪽 32km)에서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수많은 말과 보급품, 무기 등이 베트남군의 손에 들어왔다.
1427년까지, 포로로 잡힌 북부 지역과 무슬림 포로들은 베트남인들에게 포위 공격 기술, 초기 형태의 전차, 비행하는 말이 끄는 수레, 무슬림 트레뷰셋(트레뷰셰트)(회회포(回回砲)), 그리고 중국인들이 "천구(千球) 뇌포(雷砲)"라고 부르는 또 다른 포를 제공했다.
1427년 초까지, 5개의 주요 명나라 요새가 포위되었다. 이들은 동관과 Tây Đô, 홍강 삼각주 남쪽 입구를 지키기 위해 건설된 요새인 고롱(Cổ Long)(남딘(南定)성 부반(Vu Ban) 근처 이옌(Y Yen) 지역에 위치, 동관과 Tây Đô 사이의 도로 상에 위치), 홍강 삼각주 동부를 지키는 지린( Chí Linh) 근처 파라이(Phả Lại)의 요새, 그리고 홍강 삼각주에서 북쪽 국경으로 나가는 길을 지키는 벅장(Bắc Giang) 현대 도시에 있는 증강(Xương Giang) 성채였다. Tây Đô 남쪽의 모든 명나라 주둔군은 항복했다. 레뢰이는 동관과 홍강 건너편에 있는 자림(Gia Lâm) 지역 보데(Bồ Đề)에 본부를 설치했다.
1427년 3월 말, 류성과 무성이 이끄는 약 12만 명의 중국군 증원부대가 운남과 광서에서 교지로 진격해 들어왔다.
처음에 레러이는 명나라 군대를 격리하기 위해 주민들을 랑장, 박장, 뀌화, 뚜옌꽝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류성이 주력 부대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고 레삿, 레냔쭈, 레반린, 딘리엣을 지랑에 배치하는 한편, 레반안과 레리에게 다른 부대를 이끌고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무성의 부대에 대해서는, 그는 Thanh이 경험 많은 장군이며 류성의 결과를 보고 행동할 것임을 알고, 레러이는 팜반사오와 트린카에게 항상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9월, 류성이 이끄는 9만 명의 군대가 지랑에서 패배하고 류성 자신은 처형되었다.
무성은 류성이 죽고 목이 잘린 것을 듣고 놀라 도망쳤다. 팜반사오와 트린카가 추격하여 1만 명의 병사를 죽이고 1천 명의 병사와 말을 사로잡았다.[15]
레러이는 명나라의 교지 지배가 끝났음을 이해했다. 명나라는 교지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심각한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적었다.
쩐까오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레러이는 명나라의 개입의 명분이 되었던 쩐 왕조의 복고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주전제는 더 이상의 개입을 종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황실 군대가 포위당하자 명나라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국의 체면을 유지하려면 포위된 교지 잔여 세력을 증원하거나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명나라가 점령한 xương Giang 성채에 대한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1427년 10월 성채는 레러이에게 함락되었고, 전쟁은 끝났다. 명나라 선덕제는 북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최종 승리 이후, 베트남은 8만 6640명의 명나라 포로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모든 무기를 압수했다. 이 패배는 역사가 벤 키어넌에 의해 초기 명나라 제국이 겪은 가장 큰 정책적 재앙으로 여겨진다.
1422년 2월에는 명나라 장군 리빈(李彬)이 병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15] 그러나 같은 해 12월, 레러이(黎利)의 군대는 명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여 포위당하게 되었고, 레러이는 춘추시대의 병법서인 손자병법의 "疾戦則存、不疾戦則亡者、為死地(질전즉존, 불질전즉망자, 위사지)"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명나라 장군 마기(馬騏)와 진지(陳智)를 물리치는 등 분전했다. 그러나 이후 지령산(至靈山)으로 돌아온 레러이 군대는 2개월 가까이 굶주림에 시달려 채소, 근채, 죽순 등만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16][17] 레러이는 코끼리와 말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나눠주는 등 굶주림을 견디게 했고, 탈영병을 잡아 처형하는 등 군의 규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도 결국 피로에 지쳐 화의를 호소했고, 레러이는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대에 화의를 제안했으며, 명나라 장군들 또한 장기전이 불리하다고 생각했기에 형식적인 화의에 이르렀다.[18] 1423년 여름 무렵, 레러이의 군대는 남산(藍山)으로 귀환했다.[19]
명나라의 진지(陳智)는 많은 소와 말, 생선, 소금, 곡물, 농기구 등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레러이(黎利)는 금은 보화를 가진 사신을 보내 이에 응답했다.[20] 그러나 레러이가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안 진지는 사신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21] 이를 안 레러이는 분노를 드러내고 마침내 병사들과 함께 완강히 저항할 것을 선서했다.[22]
1424년 겨울, 레러이(黎利)는 현지 주민이면서 명나라에 관리로 일하고 있던 琴彭(금팽)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琴彭(금팽)이 이를 거절하자 레러이(黎利)는 병사들을 이끌고 琴彭(금팽) 등 1,000여 명이 농성하는 삭산(柵山)을 포위했다. 이후 琴彭(금팽)의 행적은 대월(大越) 측과 명나라 측 사료에 따라 기록이 다르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명나라 장군 方正(방정)·산수(山寿) 등은 구원에 나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화해를 권유했고,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안 琴彭(금팽)은 항복했다. 레러이(黎利)는 이를 받아들이고 병사들에게 항복자 학살을 엄격히 금했지만, 琴彭(금팽)은 후에 반란을 일으켜 주살당했다고 한다.[24] 반면 『명사(明史)』에 따르면, 구원을 얻지 못한 琴彭(금팽)은 조정에 곤경을 호소했고, 상황을 알게 된 선종(宣宗)(선덕제(宣德帝))은 진지(陳智) 등 현지 장수를 질책하고 긴급 구원을 명령했으나, 칙명이 도착하기 전에 함락되어 琴彭(금팽)은 처형당했다.[25]
레 라이(黎利)는 낌퐁(琴彭)을 함락시킨 후 현지 주민들을 달래어 일부를 군대에 편입시키고, 게안(乂安) 공략에 착수했다.[26] 명나라 선종(宣宗)은 관리 산수(山壽)를 보내 회유를 시도했으나, 레 라이는 이를 거절하고 게안을 공격하여 계략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다.[27] Trần Chí(陳智) 등은 게안성으로 후퇴하여 고성(籠城)했으나,[28] 이듬해 레 라이는 병사들을 각지의 주현에 파견하여 게안성을 포위했다.[29]
같은 해 4월, 명나라 안평백(安平伯) 이안(李安, 李安 (明朝))이 수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매복으로 이들을 격퇴했다.[30] 같은 해 5월, 명군이 게안으로 원군을 파견하자, 이 틈을 타 서도(西都, 타이도) 성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간파한 레 라이는 딩례(丁禮, 丁禮)(본래 성은 丁으로 레 라이로부터 성을 받았다.) 등 정예 2,000명을 선발하여 파견, 서도성을 함락시켰다.[31]
1426년 8월, 레 라이는 명군의 정예병이 모두 게안성에 집결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도(東都, 돈도) 주변의 각 거점은 모두 방비가 허술하다고 판단, 각 거점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다.[32] Trần Chí 또한 동관성(東關城)에서 고립되어, 게안성을 지키는 이안(李安), 방정(方正)에게 게안성을 버리고 구원에 오도록 서장을 보냈다.[33] 이안(李安)과 방정(方正)은 Thái Phúc(蔡福, 蔡福 (明))을 성의 방어에 남겨두었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여러 장수를 주둔시켜 게안성마저 제압했다.[34]
명나라 조정은 1426년 10월, 성산후 왕통을 지휘관으로 삼아 5만 명의 보병과 5천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동도의 여러 성을 구원하도록 했다.[35] 명군의 병력은 기존 병력과 구원군을 합쳐 10만 명에 달했다.
같은 해 11월, 레라이는 진나라의 후예를 자칭하는 진고를 황제로 옹립했다.[38](천경제)
같은 해 12월, 레라이는 병사들에게 약탈 등의 행위를 금지하고 스스로 감독하여 동도성 공격에 나섰다.[39]
2. 2. 3. 군헌 10조
레러이는 부하들의 규율과 통합을 중시했고 빈틈없이 그 점을 관리했다. 그는 일찍이 '군헌 10조'를 반포하기도 했다.- 1. 시끄럽게 한 자.
- 2. 함부로 말해서 분위기를 뒤흔든 자.
- 3. 전투에 임했는데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자.
- 4. 전투를 멈추는 깃발을 보았는데도 멈추지 않는 자.
- 5. 후퇴하는 소리를 듣고도 물러서지 않는 자.
- 6. 나태하거나 무리를 떠나 잠적한 자.
- 7. 여색을 밝히고 군인으로써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자.
- 8. 뇌물을 받은 자.
- 9. 사리사욕으로 남의 공과를 뒤바꾼 자.
- 10. 여러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간악하여 도둑질을 일삼은 자.
위 열가지에 해당하는 자는 참수한다.
또한, 레러이는 모든 문무관들에게 말했다.
"하나, 무정하게 대하지 마라. 둘, 업신여기지 마라. 셋. 간사하지 마라."
레러이는 올바른 규칙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과 적대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
2. 3. 명을 몰아내다
## 대월 재건항명전쟁이 끝난 후 여씨(黎氏) 일족은 대월의 통치자가 되었고 명과의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실세가 된 여리는 이제 제위를 넘보고 있었고 쩐까오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쩐까오는 1426년(선덕 원년) 여리 세력이 옹립한 쩐 왕조 쩐씨의 괴뢰 군주이다. 문제는 진고가 그냥 찐씨인지 아니면 쩐 왕조의 진짜 후손인지 불명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고를 옹립한 이유는 민심을 모으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명군을 몰아낸 여리는 꼭두각시 군주인 쩐까오를 제거하고 1428년(선덕 3년) 3월 15일 하노이에서 후 레 왕조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진고의 사인에 대해선 도주할 때 조정에 잡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며, 바다의 배를 몰다가 여리에게 쫓겨 죽었다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여리는 국호를 다시 다이비엣(Dai Viet, 大越/대월)이라 정하고, 통킹(東京, 동경 즉 하노이)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국내를 5개 도(道)로 나누어서 행정관을 파견하였고, 사상적 측면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여 장려하였다.
10년간의 전쟁 끝에 1427년, 대월(Đại Việt)은 독립을 되찾았고 명나라는 대월을 공식적으로 독립국(안남, Annam)으로 인정하였다. 1428년 4월 15일, 레 로이(Lê Lợi)는 즉위하여 부흥된 대월 왕국(Dai Viet kingdom)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호를 '''수언 티엔(Thuận-Thiên)'''(順天, 천명을 따름)으로 정하였다.
레 로이의 독립 선언은 중국-베트남 간의 긴장과 베트남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반영하였다.
{{blockquote|
우리 대월은 번영이 넘치는 나라이다.
문명이 최고로 지배하는 곳이다.
산, 강, 국경은 모두 나뉘어져 있다.
관습은 남과 북이 다르다.
조, 딘, 리, 쩐
우리 나라를 건설했고,
한, 당, 송, 원은
그들의 나라를 다스렸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했지만,
영웅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을 우리 역사가 증명한다. "[4]}}
레 라이(黎利)는 낌퐁(琴彭)을 함락시킨 후 현지 주민들을 달래어 일부를 군대에 편입시키고, 게안(乂安) 공략에 착수했다.[26] 명나라 선종(宣宗)은 관리 산수(山壽)를 보내 회유를 시도했으나, 레 라이는 이를 거절하고 게안을 공격하여 계략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다.[27] Trần Chí(陳智) 등은 게안성으로 후퇴하여 고성(籠城)했으나,[28] 이듬해 레 라이는 병사들을 각지의 주현에 파견하여 게안성을 포위했다.[29]
같은 해 4월, 명나라 안평백(安平伯) 이안(李安, 李安 (明朝))이 수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매복으로 이들을 격퇴했다.[30] 같은 해 5월, 명군이 게안으로 원군을 파견하자, 이 틈을 타 서도(西都, 타이도) 성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간파한 레 라이는 딩례(丁禮, 丁禮)(본래 성은 丁으로 레 라이로부터 성을 받았다.) 등 정예 2,000명을 선발하여 파견, 서도성을 함락시켰다.[31]
1426년 8월, 레 라이는 명군의 정예병이 모두 게안성에 집결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도(東都, 돈도) 주변의 각 거점은 모두 방비가 허술하다고 판단, 각 거점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다.[32] Trần Chí 또한 동관성(東關城)에서 고립되어, 게안성을 지키는 이안(李安), 방정(方正)에게 게안성을 버리고 구원에 오도록 서장을 보냈다.[33] 이안(李安)과 방정(方正)은 Thái Phúc(蔡福, 蔡福 (明))을 성의 방어에 남겨두었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여러 장수를 주둔시켜 게안성마저 제압했다.[34]
1427년 9월, 명나라 조정은 전황이 불리함을 알고, 장군 유승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파병했다.[43] 그러나 레라이는 "명나라 군대는 먼 길을 온 탓에 지쳐 있을 것이다. 곧바로 싸우지 말고 더욱 지치도록 기다려야 한다."[44]라고 말하며, 전투 중이던 병사들을 물리고 적을 유인하여 매복을 설치했다. 그리고 유승의 군대가 지릉(현재 랑선성 찌랑현)의 늪지에 들어서자 기습 공격을 가해 유승을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45]
같은 해 11월 22일, 명나라 군대의 왕통 등 수뇌부와 독립군은 동도성 남쪽에서 회맹(회담)을 갖고, 장기간의 포위로 지쳐 있던 명나라 군대는 다시 강화를 요청했다.[46] 명나라 측에서는 산수·마기, 독립군 측에서는 레사제/黎思齊중국어·레인수/劉仁澍중국어·레국정·레여저 등을 각각 상대방 진영에 인질로 보내 강화의 전망이 성립되었다.[47] 황제로 추대했던 진호를 명나라 신하로 삼는 것을 요청하여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왕통 등 명나라 군세는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이렇게 안남 지방은 다시 현지인에 의한 독립 정권이 형성되었다.[48]
1428년 1월 10일, 황제였던 Trần Hạo(陳暠)가 사망했다. 후대의 주석 등에서는 黎利가 명령하여 처리했다는 설도 기록되어 있다.[49]
같은 해 4월 15일, 黎利는 수도 승룡성(昇龍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순천으로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50]
재상 Nguyễn Cẩn(阮廌) 등의 보좌 아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균전제와 과거제도 도입하여 여러 법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명목상으로 Trần씨(陳氏)의 후예로 옹립했던 Trần Hạo(陳暠)를 살해한 것과 “반란군의 수괴”를 책봉하는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에 임명되는 것에 그쳤고, 재위 중에는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지 못했다. 1433년에 사망했다. 黎元龍이 뒤를 이어 태종(太宗)이 되었다.
## 치적
레러이는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들을 펼쳤다. 교육에 관해선 경성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 각 부로에 학당을 설치해 유학을 가르쳤으며 과거 시험을 개최하였고 종교별로 시험 제도도 만들었다.[50] 율령의 경우엔 당대의 형벌을 참고하여 태질, 장형, 징역, 유배, 사형으로 구분했으며 자수한 경우 감형하는 경우도 생각하였다. 또한 공이 없는 자가 토지를 점유하고, 개국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는 경작할 토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균전법을 제정해 빈부의 불균형을 완화시켰다.[50]
군사의 경우 항명전쟁이 끝난 뒤 당시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인원을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또 전 군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며 한 명이 귀농하고 넷이 근무하는 등의 교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신의 통치기간에도 봉기가 일어나자 친정하여 정벌했다.
레 로이는 명나라 선덕제(宣德帝, Xuande Emperor)가 1431년 대월(Dai Viet)의 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대월을 공식적으로 재건했다. 대신 레 로이는 명나라 황실에 외교 서한을 보내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을 약속하고, 책봉을 받기 위해 5만 냥의 금을 바쳤다. 명나라 황실은 조선 왕조 시대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봉건적 관계를 수락했다.
레 로이는 수도 탕롱(Thăng Long)의 이름을 동경(Đông Kinh)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나중에 통킹(Tonki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4세기 후반에 발전된 구체제를 기반으로 베트남 정부의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했다. 또한 그는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쩐 응우옌 한(Tran Nguyen Han), 레 삿(Lê Sát),팜 반 사오(Pham Van Sao), 정 카(Trịnh Khả)와 같은 오랜 동지이자 장군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
레 정부는 베트남의 기반 시설, 즉 도로, 다리, 운하를 재건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기여한 병사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다. 그는 과거 제도를 부활시키고 우수한 행정 법규를 제정했다. 평화가 회복되면서 군 복무에서 해방된 사람들, 비엣족이 아닌 병사들도 포함하여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했고, 이는 쌀 생산량 증가로 이어져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특히 해안 지역에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내부 정치는 레 로이의 신임하는 고문들의 계급을 빠르게 몰락시켰다. Trần Nguyên Hãn은 반역 혐의 조사를 위해 수도로 압송되던 중 자살했고, Phạm Văn Xảo는 1432년 처형되었으며, 5년간 섭정으로 통치한 Lê Sát는 1438년 처형되었다.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는 1442년에 처형되었는데(레 타이 통의 죽음에 연루되었거나 책임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정 카(Trịnh Khả)만이 노년까지 살아남았지만 1451년에 처형되었다.
1428년 1월 10일, 황제였던 Trần Hạo(陳暠)가 사망했다.[49]
같은 해 4월 15일, 레러이는 수도 승룡성(昇龍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後黎朝)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순천으로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50]
재상 Nguyễn Cẩn(阮廌) 등의 보좌 아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균전제와 과거제도 도입하여 여러 법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명목상으로 Trần씨(陳氏)의 후예로 옹립했던 Trần Hạo(陳暠)를 살해한 것과 “반란군의 수괴”를 책봉하는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에 임명되는 것에 그쳤고, 재위 중에는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지 못했다.
## 외교 관계
명나라와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안남국왕으로 새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했다. 명은 처음엔 쩐씨를 왕으로 생각하여 불응했으나 여러 차례 요구하자 1431년 정식 안남국왕으로 책봉받았다. 명과의 관계는 형식상으론 제후국 책봉이나, 대월은 자주적이며 절대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외교였다.
여리가 황제가 되기 전, 1427년(선덕 2년) 참파인이 와서 방물을 조공하자 후 레 왕조(레러이 세력)는 점차 참파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 사용 칭호
여리가 생전에 쓰던 호칭은 5개가 있었고 총 호칭들은 다음과 같다.
- 평정왕(平定王) - 항명운동때 사용한 자칭 왕호.
- 대월 황제 -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
-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順天承運睿文英武大王) - 존호.
- 남산동주(藍山洞主) - 아호.
- 안남국왕(安南國王) - 중국 (명나라)에서 봉해준 작호.
## 사망
1433년 (순천 6년) 8월 22일 레러이는 정침(正寢)에서 사망하였다.[59] 향년 49세였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산에 매장되었고 사후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능의 이름은 영릉(永陵)이며 제위는 차남인 여원룡이 이었다.
2. 3. 1. 대월 재건
항명전쟁이 끝난 후 여씨(黎氏) 일족은 대월의 통치자가 되었고 명과의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실세가 된 여리는 이제 제위를 넘보고 있었고 진고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진고는 1426년(선덕 원년) 여리 세력이 옹립한 쩐 왕조 쩐씨의 괴뢰 군주이다. 문제는 진고가 그냥 찐씨인지 아니면 쩐 왕조의 진짜 후손인지 불명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고를 옹립한 이유는 민심을 모으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명군을 몰아낸 여리는 꼭두각시 군주인 진고를 제거하고 1428년(선덕 3년) 3월 15일 하노이에서 후 레 왕조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진고의 사인에 대해선 도주할 때 조정에 잡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며, 바다의 배를 몰다가 여리에게 쫓겨 죽었다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여리는 국호를 다시 다이비엣(Dai Viet, 大越/대월)이라 정하고, 통킹(東京, 동경 즉 하노이)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국내를 5개 도(道)로 나누어서 행정관을 파견하였고, 사상적 측면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여 장려하였다.
10년간의 전쟁 끝에 1427년, 대월(Đại Việt)은 독립을 되찾았고 명나라는 대월을 공식적으로 독립국(안남, Annam)으로 인정하였다. 1428년 4월 15일, 레 로이(Lê Lợi)는 즉위하여 부흥된 대월 왕국(Dai Viet kingdom)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호를 '''수언 티엔(Thuận-Thiên)'''(順天, 천명을 따름)으로 정하였다.
레 로이의 독립 선언은 중국-베트남 간의 긴장과 베트남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반영하였다.
{{blockquote|
우리 대월은 번영이 넘치는 나라이다.
문명이 최고로 지배하는 곳이다.
산, 강, 국경은 모두 나뉘어져 있다.
관습은 남과 북이 다르다.
조, 딘, 리, 쩐
우리 나라를 건설했고,
한, 당, 송, 원은
그들의 나라를 다스렸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했지만,
영웅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을 우리 역사가 증명한다. "[4]}}
레 라이(黎利)는 낌퐁(琴彭)을 함락시킨 후 현지 주민들을 달래어 일부를 군대에 편입시키고, 게안(乂安) 공략에 착수했다.[26] 명나라 선종(宣宗)은 관리 산수(山壽)를 보내 회유를 시도했으나, 레 라이는 이를 거절하고 게안을 공격하여 계략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었다.[27] Trần Chí(陳智) 등은 게안성으로 후퇴하여 고성(籠城)했으나,[28] 이듬해 레 라이는 병사들을 각지의 주현에 파견하여 게안성을 포위했다.[29]
같은 해 4월, 명나라 안평백(安平伯) 이안(李安, 李安 (明朝))이 수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매복으로 이들을 격퇴했다.[30] 같은 해 5월, 명군이 게안으로 원군을 파견하자, 이 틈을 타 서도(西都, 타이도) 성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간파한 레 라이는 딩례(丁禮, 丁禮)(본래 성은 丁으로 레 라이로부터 성을 받았다.) 등 정예 2,000명을 선발하여 파견, 서도성을 함락시켰다.[31]
1426년 8월, 레 라이는 명군의 정예병이 모두 게안성에 집결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도(東都, 돈도) 주변의 각 거점은 모두 방비가 허술하다고 판단, 각 거점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다.[32] Trần Chí 또한 동관성(東關城)에서 고립되어, 게안성을 지키는 이안(李安), 방정(方正)에게 게안성을 버리고 구원에 오도록 서장을 보냈다.[33] 이안(李安)과 방정(方正)은 Thái Phúc(蔡福, 蔡福 (明))을 성의 방어에 남겨두었으나, 레 라이의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여러 장수를 주둔시켜 게안성마저 제압했다.[34]
1427년 9월, 명나라 조정은 전황이 불리함을 알고, 장군 유승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파병했다.[43] 그러나 레라이는 "명나라 군대는 먼 길을 온 탓에 지쳐 있을 것이다. 곧바로 싸우지 말고 더욱 지치도록 기다려야 한다."[44]라고 말하며, 전투 중이던 병사들을 물리고 적을 유인하여 매복을 설치했다. 그리고 유승의 군대가 지릉(현재 랑선성 찌랑현)의 늪지에 들어서자 기습 공격을 가해 유승을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45]
같은 해 11월 22일, 명나라 군대의 왕통 등 수뇌부와 독립군은 동도성 남쪽에서 회맹(회담)을 갖고, 장기간의 포위로 지쳐 있던 명나라 군대는 다시 강화를 요청했다.[46] 명나라 측에서는 산수·마기, 독립군 측에서는 ··레국정·레여저 등을 각각 상대방 진영에 인질로 보내 강화의 전망이 성립되었다.[47] 황제로 추대했던 진호를 명나라 신하로 삼는 것을 요청하여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왕통 등 명나라 군세는 본국으로 귀환하였고, 이렇게 안남 지방은 다시 현지인에 의한 독립 정권이 형성되었다.[48]
1428년 1월 10일, 황제였던 Trần Hạo(陳暠)가 사망했다. 후대의 주석 등에서는 黎利가 명령하여 처리했다는 설도 기록되어 있다.[49]
같은 해 4월 15일, 黎利는 수도 승룡성(昇龍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순천으로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50]
재상 Nguyễn Cẩn(阮廌) 등의 보좌 아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균전제와 과거제도 도입하여 여러 법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명목상으로 Trần씨(陳氏)의 후예로 옹립했던 Trần Hạo(陳暠)를 살해한 것과 “반란군의 수괴”를 책봉하는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에 임명되는 것에 그쳤고, 재위 중에는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지 못했다. 1433년에 사망했다. 黎元龍이 뒤를 이어 태종(太宗)이 되었다.
2. 3. 2. 치적
레러이는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들을 펼쳤다. 교육에 관해선 경성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 각 부로에 학당을 설치해 유학을 가르쳤으며 과거 시험을 개최하였고 종교별로 시험 제도도 만들었다.[50] 율령의 경우엔 당대의 형벌을 참고하여 태질, 장형, 징역, 유배, 사형으로 구분했으며 자수한 경우 감형하는 경우도 생각하였다. 또한 공이 없는 자가 토지를 점유하고, 개국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는 경작할 토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균전법을 제정해 빈부의 불균형을 완화시켰다.[50]군사의 경우 항명전쟁이 끝난 뒤 당시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인원을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또 전 군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며 한 명이 귀농하고 넷이 근무하는 등의 교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신의 통치기간에도 봉기가 일어나자 친정하여 정벌했다.
레 로이는 명나라 선덕제(宣德帝, Xuande Emperor)가 1431년 대월(Dai Viet)의 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대월을 공식적으로 재건했다. 대신 레 로이는 명나라 황실에 외교 서한을 보내 중국의 속국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을 약속하고, 책봉을 받기 위해 5만 냥의 금을 바쳤다. 명나라 황실은 조선 왕조 시대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봉건적 관계를 수락했다.
레 로이는 수도 탕롱(Thăng Long)의 이름을 동경(Đông Kinh)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나중에 통킹(Tonki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4세기 후반에 발전된 구체제를 기반으로 베트남 정부의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했다. 또한 그는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쩐 응우옌 한(Tran Nguyen Han), 레 삿(Lê Sát),팜 반 사오(Pham Van Sao), 정 카(Trịnh Khả)와 같은 오랜 동지이자 장군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
레 정부는 베트남의 기반 시설, 즉 도로, 다리, 운하를 재건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기여한 병사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다. 그는 과거 제도를 부활시키고 우수한 행정 법규를 제정했다. 평화가 회복되면서 군 복무에서 해방된 사람들, 비엣족이 아닌 병사들도 포함하여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했고, 이는 쌀 생산량 증가로 이어져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특히 해안 지역에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내부 정치는 레 로이의 신임하는 고문들의 계급을 빠르게 몰락시켰다. Trần Nguyên Hãn은 반역 혐의 조사를 위해 수도로 압송되던 중 자살했고, Phạm Văn Xảo는 1432년 처형되었으며, 5년간 섭정으로 통치한 Lê Sát는 1438년 처형되었다. 응우옌 자이(Nguyễn Trãi)는 1442년에 처형되었는데(레 타이 통의 죽음에 연루되었거나 책임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정 카(Trịnh Khả)만이 노년까지 살아남았지만 1451년에 처형되었다.
1428년 1월 10일, 황제였던 Trần Hạo(陳暠)가 사망했다.[49]
같은 해 4월 15일, 레러이는 수도 승룡성(昇龍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 레 왕조(後黎朝)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순천으로 연호를 개원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50]
재상 Nguyễn Cẩn(阮廌) 등의 보좌 아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균전제와 과거제도 도입하여 여러 법전의 정비에 힘썼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명목상으로 Trần씨(陳氏)의 후예로 옹립했던 Trần Hạo(陳暠)를 살해한 것과 “반란군의 수괴”를 책봉하는 것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 반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권서안남국사(權署安南國事)”에 임명되는 것에 그쳤고, 재위 중에는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지 못했다.
2. 3. 3. 외교 관계
명나라와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안남국왕으로 새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했다. 명은 처음엔 쩐씨를 왕으로 생각하여 불응했으나 여러 차례 요구하자 1431년 정식 안남국왕으로 책봉받았다. 명과의 관계는 형식상으론 제후국 책봉이나, 대월은 자주적이며 절대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외교였다.여리가 황제가 되기 전, 1427년(선덕 2년) 참파인이 와서 방물을 조공하자 후 레 왕조(레러이 세력)는 점차 참파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2. 3. 4. 사용 칭호
여리가 생전에 쓰던 호칭은 5개가 있었고 총 호칭들은 다음과 같다.- 평정왕(平定王) - 항명운동때 사용한 자칭 왕호.
- 대월 황제 -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
-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順天承運睿文英武大王) - 존호.
- 남산동주(藍山洞主) - 아호.
- 안남국왕(安南國王) - 중국 (명나라)에서 봉해준 작호.
2. 3. 5. 사망
1433년 (순천 6년) 8월 22일 레러이는 정침(正寢)에서 사망하였다.[59] 향년 49세였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산에 매장되었고 사후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능의 이름은 영릉(永陵)이며 제위는 차남인 여원룡이 이었다.3. 평가
3. 1. 당대 신하들의 평가
당대의 신하들은 강대국이자 주군국인 명나라를 이기고 독립에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한 입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명나라의 형벌은 부당하여 오랫동안 민심을 잃었습니다. 명제(明帝)는 포악한데 반해 폐하께선 인(仁)으로 혁명을 일으켰기에 성공한 것입니다.」
10년이 걸친 장기전을 통해 뛰어난 용병술과 게릴라전으로 숫자가 몇 배나 많은 명군을 이긴 것은 대월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현대 베트남에서도 여태조는 민족 영웅으로 여겨지며 명과 자주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던 주군을 시해하고 항명운동 때 힘을 합친 공신들을 시기해 처형하는 등 도덕적인 면에서 결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명의 말단 관직을 지냈고 항명운동의 이유가 단순 명으로부터 독립 의지로 비롯된 게 아닌 점에서 여태조가 항명을 시작한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2. 사관의 평가
태조 께서는 즉위한 이래로, 법률 제정, 제례 확립, 관직 설치 등 여러 업적을 쌓아 정세를 태평하게 하였다.[60] 그러나 잦은 처형은 단점으로 기록되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세력을 이어받았으나 변란을 당했지만, 뜻이 깊어 산림에 은거하면서도 명의 부조리에 분개하여 귀순해 오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의병을 모아 혁명을 계획하고,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복병을 두고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파하고,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쳤다. 명군이 항복하여 독립을 이루었고, 점성국 등이 조공해왔으며, 10년 만에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황제의 의병 중 무고한 이를 죽인 이가 없었고, 현명함으로 강자를 제압했으며, 적은 수로 명군에 대적하여 결국 승리하였으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으며, 그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질 정도가 되었다.3. 3. 근-현대 사학자들의 평
진중김은 여리에 대해 구국 영웅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가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했고, 질투심과 견제로 공신들을 죽인 토사구팽은 문제가 있다고 평했다.베트콩 학자들은 그를 항명 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강직하고 정의로운 애국자로 평가했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위협 세력이 되는 호족을 거느린 점과 명과의 대등한 외교 관계를 세운 것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토지, 식량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 점을 아쉽다고 평가했으며, 이러한 문제는 후여조 최고의 명군 성종대에 이르러 해결된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레러이에 대해서는 그의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시와 노래가 지어졌다. 레러이는 정의롭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지도자의 완벽한 구현으로 여겨진다.[5] 베트남의 모든 도시에는 주요 거리 중 하나가 레러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 있지만, 하노이에서는 레 타이 토(Lê Thái Tổ) 거리이다.[6] 투안티엔 키엠/Thuận Thiên Kiếmvi (순천검/Thuận Thiên Kiếmvi)이라 불리는 마검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온다. 순천검은 호수에 사는 정령으로부터 받은 검으로, 이를 뽑으면 신비한 힘으로 적군은 전의를 잃고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쳤다고 한다. 레러이(黎利)는 순천검을 휘두르며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후 레 왕조 대월을 건국했다. 전쟁 후 순천검은 정령의 사자인 黿에게 맡겨져 호수로 돌려보내졌다.
'''비디오 게임'''
-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II HD: 라이즈 오브 더 라자스''에는 레러이를 묘사한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캠페인이 포함되어 있다.
- 일본 비디오 게임 "히어로 * 센키 WW"에는 레러이의 여성 버전이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 베트남 MMORPG 비디오 게임 ''순천검''의 이름은 레러이의 전설적인 검에서 따온 것이다.
'''애니메이션'''
- 일본 애니메이션 "페이트/그랜드 오더 x 히무로의 우주: 7명의 가장 강력한 위대한 인물들 편".
==== 하노이 환검호 전설 ====
하노이에 있는 호안키엠 호수(還劍湖, 환검호)의 이름 유래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레 러이가 한창 명나라에 맞서 전쟁 중일 때 호수에서 황금 거북이가 입에 용왕이 준 검[61]을 물고 나타나서 그에게 주었고, 레 러이는 이 검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이기고 자신이 대월의 황제가 되었으며, 그 뒤에 다시 호수에서 만난 거북에게 용왕의 검을 돌려주었다고 한다.[61]
2000년에 환검호에서 하연덕(何廷德)이란 학자가 새로운 자라 종을 발견했는데 이 자라를 환검자라라 칭했으며 종소명을 'Rafetus leloii'라 칭했는데 종소명의 leloii는 태조의 휘에서 따온 것이다.
레 로이(Lê Lợi)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의 마법의 검에 관한 것이다. 아서 왕(King Arthur)과 그의 검 엑스칼리버(Excalibur)와 마찬가지로, 레 로이는 놀라운 힘을 지닌 마법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용왕(Vietnamese: Long Vương)으로부터 '하늘의 뜻(The Will of Heaven)(Thuận Thiên)'이라고 새겨진 검을 얻었다고 한다. 검은 칼날과 칼자루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탕화(Thanh Hóa)성에서 레 로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레 떤(Lê Thận)이라는 어부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그의 어망에 무거운 것이 걸렸는데, 그것은 검의 잃어버린 칼날이었다. 그는 칼날을 집으로 가져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집 구석에 두었다. 몇 년 후, 레 떤은 레 로이의 반란군에 합류하여 빠르게 계급을 올랐다. 어느 날, 장군이 레 떤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 구석에 있던 칼날이 갑자기 밝은 빛을 발했다. 레 로이는 칼날을 들고 순천(Thuận Thiên, 하늘의 뜻)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어느 날, 적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레 로이는 벵갈보리 나무 가지에서 이상한 빛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에 올라가 보니 귀중한 보석으로 장식된 칼자루를 발견했다. 이전에 발견했던 칼날을 기억해 낸 그는 칼날을 꺼내 칼자루에 끼웠다. 딱 맞았다. 하늘이 그에게 땅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임무를 맡겼다고 믿은 레 로이는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그의 깃발 아래로 모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법의 검은 그에게 계속해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야기들은 검의 최후에 대해 대체로 일치한다. 중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 로이는 하노이(Hanoi)의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금귀(Kim Quy)가 배와 왕에게 다가왔고, 인간의 목소리로 용왕(Long Vương)에게 마법의 검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레 로이는 검을 칼집에서 뽑아 거북이 쪽으로 던졌다. 거북이는 놀라운 속도로 입을 벌리고 이빨로 공중에서 검을 낚아챘다. 거북이는 입에 빛나는 검을 물고 물속으로 다시 내려갔다. 레 로이는 검이 용왕에게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호수의 이름을 현재 하노이에 있는 호안끼엠 호(Hoan Kiem Lake)(호안끼엠 호, 호수로 돌아온 검)로 바꿨다.
==== 근대 베트남의 정치 모델 ====
레러이의 업적은 근대에도 전해져 각 정치 세력의 선전, 정치용 모델이 되었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프랑스군을 격파한 지 조금 지나서 자신을 위해 같이 싸워준 군대들에게 레태조, 쯩 자매, 조구, 쩐흥다오, 응우옌반후에같은 명장을 들어 그들의 공을 본받고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또한 미국이 지지하는 반공조직들이 레러이가 외적을 물리친 것을 인용해 반공의식을 대중에게 선전했다고 했다.
==== 관련 지명 ====
현 베트남의 몇몇 대도시엔 일부 거리들이 레러이의 이름으로 지어져 있으며, 호찌민 시의 거리 하나는 레러이가(黎利街)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4. 1. 하노이 환검호 전설
하노이에 있는 호안키엠 호수(還劍湖, 환검호)의 이름 유래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레 러이가 한창 명나라에 맞서 전쟁 중일 때 호수에서 황금 거북이가 입에 용왕이 준 검[61]을 물고 나타나서 그에게 주었고, 레 러이는 이 검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이기고 자신이 대월의 황제가 되었으며, 그 뒤에 다시 호수에서 만난 거북에게 용왕의 검을 돌려주었다고 한다.[61]2000년에 환검호에서 하연덕(何廷德)이란 학자가 새로운 자라 종을 발견했는데 이 자라를 환검자라라 칭했으며 종소명을 'Rafetus leloii'라 칭했는데 종소명의 leloii는 태조의 휘에서 따온 것이다.
레 로이(Lê Lợi)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의 마법의 검에 관한 것이다. 아서 왕(King Arthur)과 그의 검 엑스칼리버(Excalibur)와 마찬가지로, 레 로이는 놀라운 힘을 지닌 마법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용왕(Vietnamese: Long Vương)으로부터 '하늘의 뜻(The Will of Heaven)(Thuận Thiên)'이라고 새겨진 검을 얻었다고 한다. 검은 칼날과 칼자루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탕화(Thanh Hóa)성에서 레 로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레 떤(Lê Thận)이라는 어부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그의 어망에 무거운 것이 걸렸는데, 그것은 검의 잃어버린 칼날이었다. 그는 칼날을 집으로 가져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집 구석에 두었다. 몇 년 후, 레 떤은 레 로이의 반란군에 합류하여 빠르게 계급을 올랐다. 어느 날, 장군이 레 떤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 구석에 있던 칼날이 갑자기 밝은 빛을 발했다. 레 로이는 칼날을 들고 순천(Thuận Thiên, 하늘의 뜻)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어느 날, 적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레 로이는 벵갈보리 나무 가지에서 이상한 빛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에 올라가 보니 귀중한 보석으로 장식된 칼자루를 발견했다. 이전에 발견했던 칼날을 기억해 낸 그는 칼날을 꺼내 칼자루에 끼웠다. 딱 맞았다. 하늘이 그에게 땅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임무를 맡겼다고 믿은 레 로이는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그의 깃발 아래로 모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법의 검은 그에게 계속해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이야기들은 검의 최후에 대해 대체로 일치한다. 중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 로이는 하노이(Hanoi)의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금귀(Kim Quy)가 배와 왕에게 다가왔고, 인간의 목소리로 용왕(Long Vương)에게 마법의 검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레 로이는 검을 칼집에서 뽑아 거북이 쪽으로 던졌다. 거북이는 놀라운 속도로 입을 벌리고 이빨로 공중에서 검을 낚아챘다. 거북이는 입에 빛나는 검을 물고 물속으로 다시 내려갔다. 레 로이는 검이 용왕에게 돌아갔음을 인정하고 호수의 이름을 현재 하노이에 있는 호안끼엠 호(Hoan Kiem Lake)(호안끼엠 호, 호수로 돌아온 검)로 바꿨다.
레 로이에 대해서는 그의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시와 노래가 지어졌다. 레 로이는 정의롭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지도자의 완벽한 구현으로 여겨진다.[5] 베트남의 모든 도시에는 주요 거리 중 하나가 레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 있지만, 하노이에서는 레 타이 토(Lê Thái Tổ) 거리이다.[6] 투안티엔 키엠/Thuận Thiên Kiếmvi (순천검/Thuận Thiên Kiếmvi)이라 불리는 마검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온다. 순천검은 호수에 사는 정령으로부터 받은 검으로, 이를 뽑으면 신비한 힘으로 적군은 전의를 잃고 공황 상태에 빠져 도망쳤다고 한다. 레러이(黎利)는 순천검을 휘두르며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후 레 왕조 대월을 건국했다. 전쟁 후 순천검은 정령의 사자인 黿에게 맡겨져 호수로 돌려보내졌다.
4. 2. 근대 베트남의 정치 모델
레러이의 업적은 근대에도 전해져 각 정치 세력의 선전, 정치용 모델이 되었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프랑스군을 격파한 지 조금 지나서 자신을 위해 같이 싸워준 군대들에게 레태조, 쯩 자매, 조구, 쩐흥다오, 응우옌반후에같은 명장을 들어 그들의 공을 본받고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또한 미국이 지지하는 반공조직들이 레러이가 외적을 물리친 것을 인용해 반공의식을 대중에게 선전했다고 했다.4. 3. 관련 지명
현 베트남의 몇몇 대도시엔 일부 거리들이 레러이의 이름으로 지어져 있으며, 호찌민 시의 거리 하나는 레러이가(黎利街)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5. 가족
레러이는 증조부 레호이, 증조모 응우옌 티 응옥주옌, 조부 레딘, 조모 응우옌 티 꾸앗, 부친 레코앙, 모친 찐 티 응옥트엉 사이에서 태어났다. 맏형은 소효대왕 레혹, 동생은 홍유왕 레쯔이다. 레러이의 5세손은 후 레 왕조 제15대 황제 영종(레 주이 방)이다.
레러이의 부인으로는 공자황태후 팜 티 응옥쩐, 신비 찐 티 루, 혜비 팜 티 응히에우, 정숙비 쩐 티 응옥히엔이 있다. 공자황태후는 레 태종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레러이는 아들로 군애왕 레뜨떼와 태종 레응우옌롱을 두었다. 딸로는 공주 레 티 다오누와 장자공주 레 티 응옥쩌우가 있다.
6. 연호
wikitable
| 태조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
|---|---|---|---|---|---|---|---|
| 서력 (西曆) | 1428년 | 1429년 | 1430년 | 1431년 | 1432년 | 1433년 | |
| 간지 (干支)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경술(庚戌) | 신해(辛亥) | 임자(壬자) | 계축(癸丑) | |
| 연호 (年號) | 순천(順天)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참조
[1]
웹사이트
Lê, Lợi King of Vietnam 1385-1433
http://www.worldcat.[...]
worldca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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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ê Lợi có phải là người Mường?
https://tienphong.vn[...]
2008-02-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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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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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plus Travel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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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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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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