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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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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찐꼬이는 찐끼엠의 장남으로, 준덕후로 봉해졌다. 1570년 찐끼엠 사후 군대를 통솔했으나, 주색에 빠져 동생 찐뚱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막 왕조에 투항하여 충량후가 되었다. 막 왕조에서 사망 후 후 레 왕조로 영구가 이송되었고, 찐뚱에 의해 태위와 충군공으로 추증되었다. 찐꼬이의 후손들은 후 레 왕조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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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찐꼬이의 초상화
찐꼬이의 초상화
전체 이름찐꼬이 (Trịnh Cối/鄭檜)
다른 이름충량후 (Trung Lương Hầu/忠良侯)
충군공 (Trung Quận Công/忠郡公)
달의공 (Đạt Nghĩa Công/達義公)
사후 작위충량공 (忠國公)
통치 정보
작위찐 주의 군주
통치 기간1570년 – 1572년
즉위1570년 3월 24일
퇴위1570년 9월 15일
전임자찐 끼엠 (Trịnh Kiểm/鄭檢)
후임자찐 뚱 (Trịnh Tùng/鄭松)
가문
가문찐 주
부친찐 끼엠 (Trịnh Kiểm/鄭檢)
모친라이 티 응옥 비 (Lại Thị Ngọc Vi) / 라이 티 응옥 쩐 (Lại Thị Ngọc Chẩn)
배우자라이 티 응옥 뇨 (Lại Thị Ngọc Nho)
출생과 사망
출생지후 레 왕조 베트남, 타인호아 성, 빈록 현, 사오 선 마을, 빈훙 코뮌
사망일1584년 10월 7일 (후 레 왕조 꽝흥 7년 음력 9월 4일)
사망지막 왕조 안남, 하노이 (동경)
종교
종교불교

2. 생애

찐꼬이는 찐끼엠의 첫째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민심을 잃었다.[1] 1570년, 동생 찐뚱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고, 막 왕조에 투항하였다.[2] 1584년 막 왕조에서 사망한 후, 후 레 왕조로 유해가 송환되었으며, 레 세종에 의해 태위(太尉) 및 충군공(忠郡公)으로 추증되었다. 찐꼬이의 후예들은 후 레 왕조에서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찐꼬이는 사오선 마을, 빈훙 사, 빈록 현, 탄호아 읍 (현재 탄호아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찐끼엠의 장남이었으며 '''준덕후'''(俊德侯)라는 작위를 받았다.[1]

1570년 2월, 찐끼엠이 사망하자 레안통은 찐꼬이에게 새로운 작위 '''달응이어'''(義達公)와 함께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일부 관리와 장군들은 찐꼬이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의 동생 찐뚱을 지지했다. 같은 해 4월, 레껍데, 찐빈티에우, 찐박, 판꽁틱은 부하들과 함께 찐뚱의 집으로 가서 쿠데타를 계획하라고 조언했다. 처음 찐뚱은 고통스러운 척하며 거절했지만, 이내 완전히 동의했다.[1]

2. 2. 찐 주의 군주

찐꼬이는 찐끼엠의 첫째 아들로, '''준덕후'''(Tuấn Đức Hầu|준덕후vie)로 봉해졌다.[1]

1570년 2월, 아버지 찐끼엠이 사망하면서 찐꼬이가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찐꼬이는 주색에 빠져 사졸들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다. 같은 해 4월 2일, 레껍데, 찐빈티에우, 찐바 등은 병변을 일으켜 찐꼬이의 동생 찐뚱을 군주로 세우고, 레 영종을 만뢰책으로 데려갔다. 찐꼬이는 군사를 이끌고 찐뚱과 대치했으나, 막 왕조의 병사와 찐뚱의 군대 사이에 끼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1570년 8월, 막 왕조는 찐끼엠의 사망과 찐꼬이, 찐뚱의 대립 소식을 듣고 막낀디엔을 보내 남하했다. 찐꼬이는 막낀디엔과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항복하여 '''충량후'''(忠良侯)로 봉해졌다.[2] 이후 충군공(忠郡公)으로 승작되었다.

1584년 9월, 찐꼬이는 막 왕조에서 사망했다. 막 왕조는 찐꼬이의 영구와 가족을 후 레 왕조로 돌려보냈다. 찐뚱은 찐꼬이의 영구를 안장하고 레 세종에게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찐꼬이에게 태위(太尉), '''충군공'''(忠郡公)을 추증하고 아들 찐섬에게 상복을 입도록 허락했다. 이후 다시 '''달의공'''(達義公)으로 추봉되었다.

찐꼬이의 후예들은 후 레 왕조에서 향시에 참가하여 향공(鄕貢)에 합격하기도 했다. 찐단(鄭檀)은 지부(知府)에 이르렀고, 찐똔(鄭樽)은 해방(該房)의 봉사(奉祀)가 되었다.

2. 3. 권력 투쟁과 막 왕조 투항

찐끼엠이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찐꼬이가 뒤를 이어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사졸들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다.[1] 1570년, 레껍데, 찐빈티에우 등은 병변을 일으켜 찐꼬이의 동생 찐뚱을 군주로 세우고 레 영종을 만뢰책(萬賴冊)으로 데려갔다. 찐꼬이는 찐뚱과 대치하였으나, 막 왕조막낀디엔이 남하하자 이에 패배하고 투항하여 막 왕조로부터 '''충량후'''(忠良侯)로 봉해졌다.[2]

1584년, 찐꼬이가 막 왕조에서 사망하자, 막 왕조는 그의 영구를 후 레 왕조로 돌려보냈다. 레 세종은 찐꼬이에게 태위(太尉), '''충군공'''(忠郡公)을 추증하였다.

2. 4. 막 왕조에서의 생활과 죽음

찐끼엠이 죽은 후, 찐꼬이는 그의 뒤를 이어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사졸들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다.[1] 1570년, 레껍데, 찐빈티에우 등은 병변을 일으켜 찐꼬이의 동생 찐뚱을 군주로 세우고 레 영종을 만뢰책으로 데려갔다. 찐꼬이는 막 왕조의 병사와 찐뚱의 군대 사이에 끼어 양쪽에서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자,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병사를 나누어 각처를 지키게 했다.

같은 해 8월, 막 왕조는 찐끼엠이 죽고 찐꼬이와 찐뚱이 대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막낀디엔을 보내 남하하게 했다. 찐꼬이는 막낀디엔과 교전했으나 패배했고, 항복하여 막 왕조로부터 '''충량후'''(忠良侯)에 봉해졌으며, 이후 충군공(忠郡公)으로 승작되었다.[1]

1584년 9월, 찐꼬이는 막 왕조에서 사망했다. 막 왕조는 그의 영구를 후 레 왕조로 돌려보냈고, 찐뚱은 그의 영구를 안정군 안산에 안장했다. 레 세종은 찐꼬이에게 태위(太尉), '''충군공'''(忠郡公)을 추증하고, 그의 아들 찐섬에게 상복을 입도록 허락했다. 이후 다시 '''달의공'''(達義公)으로 추봉되었다.[1]

3. 사후 평가

찐꼬이는 막 왕조에 항복한 뒤 후 레 왕조 기록에서 경시되었고, 찐씨 가문 연대기에서는 후 레 왕조의 지도자로조차 인정받지 않았다. 응우옌 왕조 기록에서만 인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영주 찐짱(찐뚱의 아들)은 시호 '''충국공'''(忠國公)이라는 시호를 수여했다.[2]

1584년 9월, 찐꼬이가 막 왕조에서 사망하자, 막 왕조는 찐꼬이의 영구를 후 레 왕조로 돌려보냈다. 찐뚱은 그의 영구를 안정군(安定軍) 안산(安山) 오른쪽에 안장했고, 레 세종에게 상소하여 찐꼬이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찐꼬이에게 태위(太尉), '''충군공'''(忠郡公)을 추증했고, 아들 찐섬(鄭𣛧)에게 상복을 입도록 허락했다. 이후 다시 '''달의공'''(達義公)으로 추봉되었다.

4. 가족 관계

찐꼬이는 찐끼엠의 첫째 아들로, 준덕후(俊德侯)로 봉해졌다. 1570년 찐끼엠이 사망한 후 찐꼬이가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나, 주색에 빠져 사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Tuấn Đức Hầu|준덕후vi[1]

같은 해 4월, 레껍데(黎及第), 찐빈티에우(鄭永紹), 찐바(鄭栢), 판꽁띡(潘公績) 등이 병변을 일으켜 찐꼬이의 동생 찐뚱을 군주로 세우고, 레 영종을 만뢰책(萬賴冊)으로 데려왔다. 찐꼬이는 막 왕조의 병사와 찐뚱의 군대 사이에 갇히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584년 9월, 찐꼬이가 막 왕조에서 사망하자 막 왕조는 그의 영구를 후 레 왕조로 돌려보냈다. 찐뚱은 레 세종에게 상소하여 찐꼬이의 죄를 사면받고 태위(太尉), 충군공(忠郡公)을 추증받았다. 이후 다시 달의공(達義公)으로 추봉되었다.Trung Quận Công|충군공viĐạt Nghĩa Công|달의공vi[2]

찐꼬이의 후예들은 후 레 왕조에서 향시에 참가하여 향공(鄕貢)에 합격하기도 했다. 찐단(鄭檀)은 지부(知府)에 이르렀고, 그의 먼 현손 찐똔(鄭樽)은 해방(該房)의 봉사(奉祀)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uộc tranh hùng giữa Trịnh Tùng với Trịnh Cối | Tạp chí Quê Hương Online | Ủy ban Nhà nước về người Việt Nam ở nước ngoài http://quehuongonlin[...] 2013-02-27
[2] 웹사이트 Vụ tranh chấp giữa Trịnh Tùng và Trịnh Cối http://www.vusta.vn/[...] 2017-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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