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안골왜성
1. 개요
창원 안골왜성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견제하고 장기간 주둔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에 축조한 18개의 왜성 중 하나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동망산 정상에 위치하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담당했다. 성의 둘레는 594m이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일본식 성곽 양식으로, 산의 지형을 활용하여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배치하고 해자를 설치하여 바닷길을 이용하도록 설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 수군이 주둔하다가 폐성되었으며,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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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창원 안골왜성 (昌原 安骨倭城) |
|---|---|
|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동 산27번지 외 |
| 종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지 |
| 면적 | 19,208m² |
| 필지 수 | 31필 |
| 지정일 | 1998년 11월 13일 |
| 소유자 | 기획재정부 외 |
| 관리자 | 창원시 |
| 시대 | 조선 |
|---|
| 명칭 (구) | 웅천안골리성 (熊川安骨里城) |
|---|---|
| 지정 번호 (구) | 사적 53호 |
| 지정일 (구) | 1963년 1월 21일 |
| 해제일 (구) | 1997년 1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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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된 대한민국의 사적 -
소쇄원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소쇄원은 양산보가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며 1520년대 후반부터 1530년대 중반에 걸쳐 건립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돋보이는 원림이자 추월정, 광풍각, 대봉대 등의 건물과 아름다운 계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가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어 현재 양산보의 15대손이 관리하며 학술 연구와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다. -
해제된 대한민국의 사적 -
울산왜성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울산에 축성한 왜성으로, 도산왜성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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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금정산성은 부산, 양산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조선 중기부터 존재했으며 낙동강 하구와 동래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숙종 때 개축되었고 현재 일부 복원되어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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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화리성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운화리에 위치한 운화리 성지는 대운산 지맥을 따라 타원형으로 축조되었으며, 자연석과 흙으로 쌓은 높이 2~3m의 성벽과 석단 시설을 통해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산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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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
순천왜성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호남 공략 거점으로 삼아 순천에 약 3개월 만에 축조한 왜성으로, 남해안 왜성들을 연결하는 군사 요충지였으며 현재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왜교성 전투와 축성 방식으로도 주목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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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울산에 축성한 왜성으로, 도산왜성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이다.
2. 역사
1593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같은 해 2월경 서울에 결집한 장수들 사이에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다. 이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축성을 담당한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이고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가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2.1. 축성 배경
1593년 1월 27일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고,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보급이 어려워지자, 해상에서 조선 수군을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담당하였고, 이들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갔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2.2. 축성 과정
1593년 1월 27일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같은 해 2월경 서울에 결집한 장수들 사이에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다.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군사적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담당하였고, 축성 후에는 이들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가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2.3. 임진왜란 이후
1593년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은 충돌을 피하며 강화 분위기로 돌아섰으며, 동년 2월경에는 서울에 결집한 제 장수들 사이에 경상남도 연안지대의 성곽 축성이 계획되었다. 이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수군을 해상에서 억제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충지에 18개소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안골왜성도 이때 축성되었으며, 축성을 담당한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이고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을 주기로 수비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제포진의 첨절제사 진영을 안골왜성에 두었다가 1625년 인조 3년에 옮겨가고, 다시 가덕진 소속의 수군만호 진영을 두었다. 안골왜성은 조선 수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뒤에는 폐성이 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3. 구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있는 이 성은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졌다.
성의 둘레는 594m,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성곽이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혼마루를 이루고, 비탈을 깎아내면서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노보리이시가키)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하였는데, 해안으로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왜성이 가지는 특징이다.
3.1. 지형적 특징
창원 안골왜성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졌다. 성의 둘레는 594m,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성곽이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혼마루를 이루고, 비탈을 깎아내면서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노보리이시가키)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하였는데, 해안으로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왜성이 가지는 특징이다.
3.2. 성곽 구조
3.3. 해자
4. 발굴 조사
발굴조사구역은 시굴조사 결과 확인된 토축벽은 위치상으로 볼 때, 창원 안골왜성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삼지환의 골짜기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곡륜부 내의 등석원 일부로 추정된다. 이러한 곡륜은 조사구역 내에서 3개소가 확인되었다. 조사대상지 가장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1곡륜을 기준으로 4m가량 떨어져서 제2곡륜이 위치하고 있으며 굴호와 함께 제3곡륜이 확인되고 있다. 제2곡륜의 경우 부분적으로 유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4.1. 발굴 현황
발굴조사구역은 시굴조사 결과 확인된 토축벽은 위치상으로 볼 때, 창원 안골왜성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삼지환의 골짜기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곡륜부 내의 등석원 일부로 추정된다. 이러한 곡륜은 조사구역 내에서 3개소가 확인되었다. 조사대상지 가장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1곡륜을 기준으로 4m가량 떨어져서 제2곡륜이 위치하고 있으며 굴호와 함께 제3곡륜이 확인되고 있다. 제2곡륜의 경우 부분적으로 유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