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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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벽제관 전투는 1592년 명나라 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임진왜란 중의 전투이다. 평양성 전투 이후, 명나라 이여송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개성에서 한성으로 진격하려 했고, 이에 맞서 일본군은 반격에 나섰다.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명나라와 일본 양측 모두 승전을 주장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이여송은 전의를 상실하여 명군의 기세가 꺾였고, 이후 강화 협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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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벽제관 전투 |
관련 전쟁 | 임진왜란 |
시기 | 1593년 2월 27일 (음력 1월 27일) |
장소 | 조선 경기도 고양현 벽제관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명나라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및 병력 | |
명나라/조선 지휘관 | 이여송, 천만리, 이여백, 이비어 , 마천총 , 이유승 , 추수경 (명부장), 고언백 |
일본 지휘관 |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깃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다치바나 무네토라, 다치바나 나오쓰구, 나가오카 다다오키 |
명나라/조선 병력 | 5,000명 |
일본 병력 | 선봉대 20,000명, 본대 21,000명 (대부분 전투 미참가) |
피해 규모 | |
명나라/조선 피해 | 불명 |
일본 피해 | 불명 |
일본 정보 | |
일본 전투명 | 碧蹄館の戦い (Hekiteikan no tatakai) |
일본 관련 전쟁 | 문록의 역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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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평양이 함락되고 오토모 요시무네가 전선에서 무단이탈하는 등 일본군은 일시적 혼란 상태에 있었다.[24] 봉행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북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장수들을 한성부(현재의 서울)로 모아 전력을 다시 세우고 벽제관에서 반격을 시도하였다.
평양을 함락한 리 러숭은 리 루바이, 장 씨줘, 양 위안을 8,000명의 군사와 함께 파견하여 개성을 탈환하고,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를 수복했다. 류성룡은 한성에 일본군이 약 1만 명 정도밖에 없다고 주장했다.[4]
군의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등이 농성전을 주장하는 가운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이 역습을 주장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선봉장으로 삼고, 이시다, 오타니는 한성에 남아 병력을 거의 이분하여 벽제관 전투에 임했다.
23일, 개성에서 리 러숭이 한성 공략 작전 회의를 열고 사대수를 정찰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5] 24일, 사대수가 이끄는 명나라 군의 정찰대가 일본군 정찰대(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를 격파하고, 일본군 정찰대는 6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사대수는 이 승리를 리 러숭에게 보고했다. 조선인들로부터 "일본군 정예는 평양에서 궤멸되었고, 한성에는 약병만 남았다"는 보고도 있었기에, 25일, 리 러숭은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했다.
참모본부 편찬 「일본전사·조선역」에서는 실제로 전투를 벌인 일본군 선봉을 2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본대를 2만 1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분 | 지휘관 | 병력 |
---|---|---|
총대장 | 우키타 히데이에 | |
선봉대장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
선봉대 |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나오쓰구 | 3000명[78]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8000명 | |
고바야카와 히데쿠니, 스에모토겐야스, 츠쿠시 히로몬 | 5000명 | |
요시카와 히로이에 | 4000명 | |
선봉대 합계 | 20,000명 | |
본대 (대부분 전투 미참가) | 쿠로다 나가마사 | 5000명 |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쓰구 | 5000명 | |
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 | 3000명 | |
우키타 히데이에 | 8000명 | |
본대 합계 | 21,000명 | |
한성수비 | 고니시 유키나가, 오토모 요시쓰네 | 14,000명 (고니시군은 후퇴 직후) |
명군 측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토라, 다카하시 나오쓰구 등이 이끄는 일본군이 벽제관에서 격돌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이 명군을 패퇴시켰다. 명군의 이여송은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했으나, 부장 이유성이 간신히 구해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 양쪽 모두 승리했다고 주장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참고로, 평양 공격 당시 명군의 병력은 4만 3천여 명, 조선군의 병력은 8천여 명이었다.[79]
3. 전투 과정
23일, 개성에서 이여송이 한성 공략 작전 회의를 열고 사대수를 정찰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5]
24일, 사대수가 이끄는 명나라군 정찰대가 일본군 정찰대(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를 격파하고, 일본군 정찰대는 6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군 정찰대의 전사자 수를 100~1000명으로 기록한 여러 기사가 있다.[26][27][28][29][30][31]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명군이 획득한 수급이 백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2]
평양 함락 등으로 혼란에 빠졌던 일본군은 조선 북부 각지에 주둔하던 장수들을 한성에 집결시켜 전력을 재정비하려 했다. 군의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등은 농성전을 주장했으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24],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은 역습을 주장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선봉장으로 삼고, 이시다, 오타니는 한성에 남아 병력을 거의 이분하여 벽제관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은 다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 형제를 선봉에 배치했다.[33] 새벽 2시경 모리시타 츠리쿠모[34]와 토키 요리요시 등 경병 30명을 먼저 보내 적정을 살폈다. 새벽 6시경 벽제관 남면의 여석령 북쪽 두 곳에 진을 쳤다.
오전 10시경, 고양원에 명군이 좌·우·중앙의 3개 부대로 밀려왔다. 일본군 선봉대는 전군을 벽제관 남면의 망객연에 매복시키고, 동시에 삼면 포위 작전을 진행했다. 오전 11시경, 정면에 나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군 선봉 두 부대 중, 명군의 화살 앞에 선 아와야 카게오 부대가 후퇴를 시작하자 명군은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노우에 카게사다 부대가 측면을 공격했고, 시미즈 카게하루도 철포대로 사격하여 명군은 대혼란에 빠졌다.[52][53]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부장 다치바나 시게이에[54]에게 철포대를 이끌고 세 번 사격하게 하고, 다카하시군과 함께 많은 군기를 휘날리며 북을 울려[55] 전군이 일제히 좌측에서 적진을 강습했다.[56] 고바야카와 히데카쓰, 모리 모토야스[57], 지쿠시 히로카도 부대가 우측에서 측면 공격을 가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본대[58]와 요시카와 히로이에[59], 안코쿠지 에케이[60],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 토가와 타쓰야스와 구니토미 사다쓰구[61], 하나부사 마사히데도 정면에서 진격하여 명군 선봉을 격파하고 북쪽 벽제관에 있던 이여송의 본대에 육박하여 정오에 격전이 벌어졌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가신의 금갑 장 안동 상구[64]와 일기토를 벌여 이여송 자신도 낙마했으나, 이여매의 화살을 맞고 상구는 전사했다. 낙마한 이여송은 고바야카와 히데카쓰의 부장 이노우에 카게사다의 부대에 몰렸으나, 측근 이유성이 방패가 되어 이를 막았고, 이여매, 이여백 등이 구출했다. 이여송의 친위대도 이유성 등 80여 명이 전사했다. 명군 부총병 양원이 화군(화기 장비 부대)을 이끌고 원군으로 달려와 전열을 회복하고 방어에 힘썼으나,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협소한 지형에서 삼면에서 포위되는 형세가 되자 오후 1시경 붕괴하기 시작했다.[65]
결국 일본군 본대의 본격적인 전투 참여를 기다리지 않고 정오경에는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일본군은 후퇴하는 명군을 벽제관 북쪽 고개인 회음령에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추격하다가 추격을 멈췄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세는 더 북쪽 호미리까지 추격하여 오후 5시까지 한성으로 철수했다. 명군은 개성까지 후퇴했다.
3. 1. 전술 및 전략
조다수, 조성훈, 고언백이 이끄는 3,000명의 명나라 선봉대는 주지 전위문(덴에몬)이 이끄는 약 500명의 일본군과 맞붙었다. 명나라 군대는 일부러 후퇴하여 일본군을 유인한 뒤, 포격과 역습으로 100명을 사살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후퇴했고,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나라군 우익을 공격했다. 기병이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은 다치바나는 200명의 화승총 병사들이 후방에서 사격 지원을 하는 동안 산으로 후퇴하여 명나라군의 추격을 막았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하여 일본군의 병력은 15,000명으로 늘어났고, 명나라 정찰대는 후퇴했다. 이와 동시에 이여송도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후퇴하는 병사들로부터 일본군의 상황을 전해 들은 이여송은 병력의 절반만 이끌고 돌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여송의 1,000명 기병은 벽제관 주변 언덕을 점령하고 있던 아와야 가게나오의 3,000명 병력과 마주쳐 로켓 공격을 퍼부었다. 아와야는 조총 사격으로 맞섰지만, 빠른 기병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분지형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노우에 가게사다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좌익을 공격했으며, 아와야는 정면에서 공격해 왔다.
한편, 5,000명의 일본군이 조다수가 이끄는 후퇴하는 명나라군을 공격했다. 이노우에와 아와야의 병력은 고바야카와와 다치바나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명나라군을 포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여송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양원은 이여송이 남겨둔 1,000명의 기병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이여송의 후퇴를 도왔다.
이여송은 말이 총에 맞아 쓰러져 죽을 뻔했지만, 이유성이 자신의 몸으로 이여송을 보호했다. 이여송의 형인 이여매가 공격자의 말을 쏘아 쓰러뜨렸다.
전투는 오전 늦게부터 정오까지 이어졌다. 결국 이여송은 병력 수에서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선봉에 다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 형제를 배치했고,[33] 새벽 2시경 모리시타 츠리쿠모[34]와 토키 요리요시 등 경병 30명을 먼저 보내 적정을 살폈다. 새벽 6시경 벽제관 남면의 여석령 북쪽 두 곳에 진을 쳤다. 선봉 500명을 이끈 토키 요리미치[35]와 우치다 마사츠구[36]는 적은 수의 군기를 세워 사대수가 이끄는 명군 2000명을 속여 진격하게 유인하여, 월천고개 남면에서 요리미치 등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종모와 직차의 본대 2000명은 선봉인 요리미치 등과 중진 700명의 오노 시게유키[37], 요네타비 시게히사[38]가 진영을 바꿀 때, 직차[39]와 토지 시게야스[40]를 선두에 세워 측면에서 적 후위인 고언백의 조선군 수천 명을 기습하여 격퇴했고, 종모는 기병 800명을 이끌고 명·조선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했다. 이때 일본군은 적군 7000명과 조우했다.[41]
토키 요리미치, 우치다 마사츠구, 야스다 쿠니쓰구[42] 등은 돌격을 감행하여 창을 던져 수십 기를 격파했고,[43] 명·조선군을 중앙 돌파하여 회전 돌파했지만, 토지 무네나오[44]는 강궁으로 20여 명의 적병을 사살하며 지원했으나,[45] 요리미치가 이여매의 독화살을 맞고, 귀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고,[46][47][48] 이케베 에이세이[49]도 요리미치 부상 후 선봉대의 지휘를 임시로 맡아 중진과 교대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일 추격전에서 전사했다. 소수였던 입화·다카하시군은 분전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월천고개 북쪽 오른쪽에서 병사들을 쉬게 한 후, 이후 소하가와 타카카게 등 일본군 선봉대가 도착하자, 피로한 입화군을 후방으로 물리고 서쪽의 소환산으로 이동했다.[50]
오전 10시경, 고양원에 명군이 좌·우·중앙의 3개 부대로 밀려왔다. 일본군 선봉대는 전군을 벽제관 남면의 망객연에 매복시키고, 동시에 삼면 포위 작전을 진행하여 입화, 다카하시[51]와 기카와 히로이에가 좌측, 고바야카와 히데카쓰, 모리 모토야스, 지쿠시 히로카도와 우키타 히데이에가 우측으로 우회 진격했다. 오전 11시경, 정면에 나선 타카카게군 선봉 두 부대 중, 명군의 화살 앞에 선 아와야 카게오 부대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신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를 시작하자 명군은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부대인 이노우에 카게사다 부대가 그 측면을 돌아 공격했고, 이노우에 부대에 있던 시미즈 카게하루도 철포대로 사격하여 명군은 대혼란에 빠졌다.[52][53]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부장인 다치바나 시게이에[54]에게 철포대를 이끌고 세 번 사격하게 하고, 다카하시군과 함께 많은 군기를 휘날리며 북을 울려[55] 전군이 일제히 좌측에서 적진을 강습했다.[56] 고바야카와 히데카쓰, 모리 모토야스[57], 지쿠시 히로카도 부대가 우측에서 측면 공격을 가했고, 타카카게 본대[58]와 요시카와 히로이에[59], 안코쿠지 에케이[60],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 토가와 타쓰야스와 구니토미 사다쓰구[61], 하나부사 마사히데도 정면에서 진격하여 명군 선봉을 격파하고 북쪽 벽제관에 있던 이여송의 본대에 육박하여 정오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입화군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자 우사미 민부가 분전하여 두 개의 투구를 획득했다.[62] 또한, 입화 가신의 금갑 장 안동 상구[64]와 일기토를 벌여 이여송 자신도낙마했으나, 이여매의 화살을 맞고 상구는 전사했다. 낙마한 이여송은 소하가와의 부장 이노우에 카게사다의 부대에 몰렸으나, 측근 이유성이 방패가 되어 이를 막았고, 이여매, 이여백 등이 구출했다. 이여송의 친위대도 이유성 등 8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에 명군 부총병 양원이 화군(화기 장비 부대)을 이끌고 원군으로 달려와 전열을 회복하고 방어에 힘썼으나,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협소한 지형에서 삼면에서 포위되는 형세가 되자 붕괴를 시작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65]
이리하여 일본군 본대의 본격적인 전투 참여를 기다리지 않고 정오경에는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고, 타카카게 등 일본군은 후퇴하는 명군을 벽제관 북쪽 고개인 회음령에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추격하다가 추격을 멈췄지만, 종모와 히데이에의 군세는 더 북쪽 호미리까지 추격하여 오후 5시까지 한성으로 철수했다. 명군은 개성까지 후퇴했다.
오노 시게유키[66], 고구시 시게시게[67], 오노 규하치로[68], 토지 시게야스, 이마무라 기헤이, 이노우에 헤이지, 호아시 사헤이, 야나세 신스케도 전사했고, 종모는 이 격전에서 기마까지 피투성이가 되고, 두 개의 투구를 안장 사방에 붙였고, 칼은 휘어져 칼집에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요코야마 가게노리, 가쓰라 고자에몬, 우쓰미 오니노조, 가라마 야헤이, 데지마 오노스케, 유아사 신에몬, 요시다 다자에몬, 하라 마고자에몬, 와타누키 토지로도 전사했다.
'''일본군'''
참모본부 편찬 「일본전사·조선역」에서는 실제로 전투를 벌인 일본군 선봉을 2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본대를 2만 1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분로쿠의 역의 다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의 병력(군역 수)는 통설로 약 3천 명으로 여겨지지만, 인부 등 비전투원이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75][76] 그리고 당시 출진한 여러 다이묘들은 대부분 군역 수 미만의 병력으로 출병하는 것이 상례였으며, 타치바나 군의 참전 병력은 1500명 정도로 추정된다.[77]
총대장-우키타 히데이에·선봉대장-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대 | 지휘관 | 병력 |
---|---|---|
선진 | 다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 | 3,000명[78] |
2진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8,000명 |
3진 | 고바야카와 히데카네·모리 모토야스·쓰쿠시 히로카도 | 5,000명 |
4진 | 요시카와 히로이에 | 4,000명 |
합계 | 20,000명 |
'''본대'''(대부분은 전투 미참가)
부대 | 지휘관 | 병력 |
---|---|---|
선진 | 구로다 나가마사 | 5,000명 |
2진 | 이시다 미쓰나리·마스다 나가모리·오타니 요시쓰구 | 5,000명 |
3진 | 가토 미쓰야스·마에노 나가야스 | 3,000명 |
4진 | 우키타 히데이에 | 8,000명 |
합계 | 21,000명 |
'''한성수비'''
'''명군'''
참모본부 편찬 「일본전사·조선역」에서는 명군 선봉을 2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평양 공격 당시 명군의 병력은 4만 3천여 명, 조선군의 병력은 8천여 명이었다.[79]
3. 2. 주요 전투 장면
주지 전위문(덴에몬)이 이끄는 일본군 약 500명과 조다수, 조성훈, 고언백이 이끄는 명나라 선봉대 3,000명이 처음 맞붙었다.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유인하여 포격과 역습으로 100명을 사살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명나라 군대 우측을 공격했지만, 기병 부족으로 큰 피해를 보고 후퇴했다.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일본군 병력은 15,000명으로 늘었고, 명나라 정찰대는 후퇴했다. 이여송도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후퇴하는 병사들에게서 일본군의 상황을 듣고 절반만 이끌고 돌격했다. 이여송의 기병 1,000명은 벽제관 주변 언덕을 점령하던 아와야 가게나오의 병력 3,000명과 맞붙어 로켓 공격을 퍼부었다. 아와야는 조총으로 대응했으나, 기병의 빠른 진격을 막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이노우에 가게사다가 이끄는 병력 3,000명에게 좌익을 공격당하고, 아와야에게는 정면 공격을 받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일본군 5,000명이 조다수가 이끄는 후퇴하는 명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이노우에와 아와야의 병력은 고바야카와와 다치바나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명나라 군을 포위하려 북쪽으로 이동했다. 불리함을 파악한 이여송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양원은 이여송이 남겨둔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이여송의 후퇴를 도왔다.
이여송은 말이 총에 맞아 쓰러져 거의 죽을 뻔했으나, 이유성이 자신을 희생하여 보호했다. 이여송의 형 이여매가 공격자의 말을 쏘아 쓰러뜨렸다.
전투는 오전 늦게부터 정오까지 이어졌다. 결국 이여송은 수적으로 열세여서 후퇴했다.
4. 전투 결과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이 격돌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이 명군을 패퇴시켰다. 이여송은 포위되어 거의 죽을 뻔했으나, 부장 이유승이 간신히 구해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 양쪽 모두 승리했다고 주장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명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5]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일부 조선인들은 이여송을 로상직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여송은 부하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는데, 왕필제는 이여송이 부하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음료를 제공하지 않고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평양성을 먼저 점령한 이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여송은 책임을 문관인 송응창에게 돌렸다.[6]
이 전투에서 명군은 기병 중심이었으나, 벽제관의 좁은 계곡 지형과 전날 밤 내린 비로 인한 진흙탕 때문에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리한 전장 환경으로 인해 명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11]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여송이 이끌었던 북방 기병이 화기를 갖추지 않고 날카롭지 못한 단검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일본군은 3, 4척의 날카로운 장검을 가진 보병이었기 때문에 명군이 크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이여송은 개성, 나아가 평양까지 후퇴했으며,[73] 무력으로 일본군을 격퇴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으로 전환했다. 일본군 역시 3월에 명군에게 한성 근교 용산의 군량창을 불태워져[74]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이시다 미쓰나리, 소니시 유키나가 등이 명과의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
4. 1. 피해 규모
벽제관 전투에서 양측의 피해 규모에 대한 기록은 자료마다 차이를 보인다.일본 측 자료는 명나라 군의 피해를 6,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일본군의 피해는 수백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6] 1593년 3월 23일 일본군 집계에 따르면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는 1,133명(혹은 1,132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부대는 290명으로, 원래 병력 3,300명에서 1,800명이 감소했다. 다치바나 부대는 이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6]
명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명군 전사자 264명, 부상자 49명, 말 276마리 손실을 보고했다. 다른 명나라 장군 오위산은 일본군 사상자 120명, 명군 사상자 1,500명으로 추정했다. 조선 측 기록에서는 윤근수가 양측 사상자 300명, 이덕형이 양측 사상자 500~600명으로 추정했다.[6][7][8][2][9]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군 전사자 120명, 명군 사상자 1,500명으로 기록된 기사와,[15] 양측 사상자가 500~600명이라는 기사가[22] 함께 존재한다.
이여송의 친위대 중 이유승 등 용사 80여 명이 전사했고,[71] 이여송의 가정인 이문승도 전사했다.[72]
징비록에는 이여송이 파주로 돌아간 후 패배를 감추려 했으나, 기력이 크게 꺾였고, 밤에는 신뢰하던 가정(이문승)의 전사를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태워 1만 마리 가량의 말을 죽였다고 하나, 이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전쟁 전체의 말 희생자 수를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5]
5. 평가 및 영향
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모두 태웠다. 이로 인해 며칠 만에 약 1만 마리의 말이 죽었다고 하나, 이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전쟁 전체의 말 희생자 수를 포함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5]
벽제관 전투 실패 후, 일부 조선인들은 이여송을 노상직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여송은 자신의 부하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왕필제는 이여송이 부하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음료를 제공하지 않고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평양성 성벽에 처음으로 올라선 자들에게 약속했던 돈이나 벼슬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여송은 책임을 문관인 송응창에게 돌렸다.[6]
17세기 중반 이후 출판된 ''조선정벌기''와 ''조선군기 이야기'' 시리즈(임진왜란 이야기)와 같은 일본 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군인 6,000명 또는 10,000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93년 3월 23일 일본군의 집계에 따르면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는 1,133명(다른 자료에는 1,132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부대는 290명이었는데, 원래 병력 3,300명에서 1,800명이 감소했다. 다치바나 부대는 전역의 나머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명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명나라 군대가 264명 사망, 49명 부상, 말 276마리가 죽었다고 보고했다. 다른 명나라 장군 오위산은 일본군 120명, 명나라 군대 1,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관리 윤근수는 양측 모두 300명의 사상자를, 또 다른 조선 관리 이덕형은 양측 모두 500~6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했다.[6][7][8][2][9]
5. 1. 전술적 평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꽤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않았으면 완패할 뻔했다는 평가가 있다.5. 2. 전략적 영향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이여송은 전의를 상실하여 명군의 기세가 꺾였고, 개성, 나아가 평양까지 후퇴했으며,[73] 무력에 의한 일본군 격퇴 방침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일본군도 3월에 명군에게 한성 근교 용산의 군량창이 불태워졌고,[74] 식량 조달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병량 면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장기전이 어려워져,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명과의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6. 각 국의 기록
각국의 기록에 따르면, 벽제관 전투에 대한 평가는 각 나라마다 차이를 보인다.
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모두 태웠다.[5] 17세기 중반 이후에 출판된 ''조선정벌기''와 ''조선군기 이야기'' 시리즈(임진왜란 이야기)와 같은 일본 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군인 6,000명 또는 10,000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7][8][2][9]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등은 농성전을 주장하였으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24]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은 역습을 주장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선봉장으로 삼고, 이시다, 오타니는 한성에 남아 병력을 거의 이분하여 벽제관 전투에 임했다. 1593년 3월 23일 일본군의 집계에 따르면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는 1,133명(다른 자료에는 1,132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부대는 290명이었는데, 원래 병력 3,300명에서 1,800명이 감소했다. 다치바나 부대는 전역의 나머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3일, 개성에서 이여송이 한성 공략 작전 회의를 열고 사대수를 정찰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5] 24일, 사대수가 이끄는 명나라 군의 정찰대가 일본군 정찰대(주요 지휘관은 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를 격파하고, 일본군 정찰대는 6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사대수는 이 승리를 개성의 이여송에게 보고했다. 조선인들로부터 "일본군 정예는 평양에서 궤멸되었고, 한성에는 약병만 남았다"는 보고도 있었기에, 25일, 이여송은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했다.
6. 1. 조선
징비록에 따르면, 이여송이 파주에 진군하여 벽제관 남쪽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개성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평양이 수복되자 대동강 이남의 일본군은 모두 도망쳤고,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고자 류성룡에게 군량과 마초를 준비하라고 했다.[5]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모두 태웠는데, 이로 인해 며칠 만에 약 1만 마리의 말이 죽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벽제관 전투 패배 후, 일부 조선인들은 이여송을 로상직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여송은 부하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는데, 왕필제는 이여송이 부하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음료를 제공하지 않고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평양 성벽에 처음으로 올라선 자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여송은 책임을 문관인 송응창에게 돌렸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일본군 전사자 120명, 명군 사상자 1,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15] 다른 기사에는 양측 사상자가 500~600명이라고 한다.[22] 또 다른 기사에는 "천병(중국군)은 단검, 기마, 무화기가 없었고, 도로가 험하고 진흙이 깊어 달릴 수 없었다. 반면 적(일본군)은 긴 칼을 휘두르며 좌우로 돌격하여 싸웠으니, 날카로움이 무적이었다"라는 기록도 있다.[70] 이여송 휘하 친위대 중 이유승 등 용사 80여 명과 가정인 이문승도 전사했다.[71][72]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여송이 이끌었던 것은 모두 북방의 기병으로 화기를 갖추지 않고 단지 날카롭지 못한 단검만 가지고 있었다. 반면 적(일본군)은 보병이었고 그 도검은 모두 3, 4척의 뛰어난 날카로움을 지닌 것이었으므로, 충돌하여 격렬하게 싸워도 그 장도를 휘둘러 베어내므로 사람이나 말이나 모두 쓰러지고 감히 맞서 싸우는 자가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
루이스 프레이리의 일본사에는 "일본인은 중국인보다 용감했고, 무기 및 전술 면에서 우수했으며, 여러 면에서 중국군의 열세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6. 2. 명나라
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모두 태웠다. Samuel Hawley에 따르면 이로 인해 며칠 만에 약 1만 마리의 말이 죽었다고 하나, 이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전쟁 전체의 말 희생자 수를 포함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5]벽제관 전투의 실패 후, 일부 조선인들은 이여송을 로상직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여송은 자신의 부하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왕필제는 그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음료를 제공하지 않고,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평양 성벽에 처음으로 올라선 자들에게 약속했던 돈이나 벼슬을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여송은 책임을 문관인 송응창에게 돌렸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출판된 ''조선정벌기''와 ''조선군기 이야기'' 시리즈(임진왜란 이야기)와 같은 일본 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군인 6,000명 또는 10,000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서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93년 3월 23일 일본군의 집계에 따르면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에는 1,133명(다른 자료에는 1,132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부대에는 290명이었는데, 원래 병력 3,300명에서 1,800명이 감소했다. 다치바나 부대는 전역의 나머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여송에 따르면 명나라 군대는 264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76마리의 말이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명나라 장군인 오위산은 일본군이 120명의 사상자를 냈고 명나라 군대는 1,5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말했다. 조선의 관리 윤근수는 일본군과 중국군 모두 3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조선 관리인 이덕형은 일본군과 중국군 모두 500~6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말했다.[6][7][8][2][9]
명나라 군세에 의한 평양 함락과 대우 기스토의 탈출(오보에 의한 무단 후퇴라는 설도 있음) 등으로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진 일본군이었지만, 조선반도 북부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장수들을 한성에 집결시켜 전력을 재정비하려 했다.
23일, 개성에서 이여송이 한성 공략 작전 회의를 열고 사대수를 정찰대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5]
24일, 사대수가 이끄는 명나라 군의 정찰대가 일본군 정찰대(주요 지휘관은 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를 격파하고, 일본군 정찰대는 6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사대수는 이 승리를 개성의 이여송에게 보고했다. 조선인들로부터 "일본군 정예는 평양에서 궤멸되었고, 한성에는 약병만 남았다"는 보고도 있었기에, 25일, 이여송은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개성을 출발했다.
6. 3. 일본
일본 측에서는 명군을 맞아 농성파와 요격파가 대립하다가, 명군이 진용을 갖추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어 요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명군의 대포 공격에 고전하기도 했지만, 일본도를 든 일본군의 백병전 우세가 지속되어 이여송이 철수를 지시하였다. 이후 추격 여부를 두고 일본군 내에서 대립이 발생하여 결국 명군을 놓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평양과 개성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명나라 원군의 남하를 막았다는 점에서 승리의 의미가 있다고 기록했다.[5]일본군은 명나라 기병의 사료를 끊기 위해 한성 주변의 풀을 모두 태웠다. Samuel Hawley에 따르면 이로 인해 며칠 만에 약 1만 마리의 말이 죽었다고 하나, 이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전쟁 전체의 말 희생자 수를 포함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5]
17세기 중반 이후에 출판된 ''조선정벌기''와 ''조선군기 이야기'' 시리즈(임진왜란 이야기)와 같은 일본 자료에 따르면,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인 6,000명 또는 10,000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만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593년 3월 23일 일본군의 집계에 따르면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는 1,133명(다른 자료에는 1,132명), 다카하시 무네마스 부대는 290명이었는데, 원래 병력 3,300명에서 1,800명이 감소했다. 다치바나 부대는 전역의 나머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7][8][2][9]
군의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등이 농성전을 주장하는 가운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24]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이 역습을 주장하여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선봉장으로 삼고, 이시다, 오타니는 한성에 남아 병력을 거의 이분하여 벽제관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은 선봉에 타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 형제를 배치했고,[33] 새벽 2시경 모리시타 츠리쿠모[34]와 토키 요리요시 등 경병 30명을 먼저 보내 적정을 살폈다. 새벽 6시경 벽제관 남면의 여석령 북쪽 두 곳에 진을 쳤다. 선봉 500명을 이끈 토키 요리미치[35]와 우치다 마사츠구[36]는 적은 수의 군기를 세워 사대수가 이끄는 명군 2000명을 속여 진격하게 유인하여, 월천고개 남면에서 요리미치 등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무네시게와 나오쓰구의 본대 2000명은 선봉인 요리미치 등과 중진 700명의 오노 시게유키[37], 요네타비 시게히사[38]가 진영을 바꿀 때, 나오쓰구[39]와 토지 시게야스[40]를 선두에 세워 측면에서 적 후위인 고언백의 조선군 수천 명을 기습하여 성공적으로 격퇴시켰고, 더 나아가 무네시게는 기병 800명을 이끌고 명·조선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했다. 이때 일본군은 적군 7000명과 조우했다.[41] 타치바나군은 분전했으나, 적군은 계속해서 신병을 투입하며 병력을 교체했다.[41]
이 와중에 토키 요리미치, 우치다 마사츠구, 야스다 쿠니쓰구[42] 등은 돌격을 감행하여 창을 던져 수십 기를 격파했고,[43] 명·조선군을 중앙 돌파하여 회전 돌파했지만, 그때 중진의 토지 무네나오[44]는 강궁으로 20여 명의 적병을 사살하며 지원했으나,[45] 요리미치가 이여매의 독화살을 맞고, 귀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고,[46][47][48] 기봉행 이케베 에이세이[49]도 요리미치 부상 후 선봉대의 지휘를 임시로 맡아 중진과 교대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일 추격전에서 전사했다. 소수였던 타치바나·다카하시군은 분전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월천고개 북쪽 오른쪽에서 병사들을 쉬게 한 후, 이후 소하가와 타카카게 등 일본군 선봉대가 도착하자, 피로한 타치바나군을 후방으로 물리고 서쪽의 소환산으로 이동했다.[50] 이 전투가 시작될 당시 일본군 본대는 아직 한성에 있었다.
오전 10시경, 고양원에 명군이 좌·우·중앙의 3개 부대로 밀려왔다. 일본군 선봉대는 전군을 벽제관 남면의 망객연에 매복시키고, 동시에 삼면 포위 작전을 진행하여 타치바나, 다카하시[51]와 기카와 히로이에가 좌측, 소하가와 히데카즈, 모리 모토야스, 치쿠시 히로몬와 우키타 히데이에가 우측으로 우회 진격했다. 오전 11시경, 정면에 나선 다카카게군 선봉 두 부대 중, 명군의 화살 앞에 선 아와야 카게오 부대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신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퇴를 시작하자 명군은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부대인 이노우에 카게사다 부대가 그 측면을 돌아 공격했고, 이노우에 부대에 있던 시미즈 카게하루도 철포대로 사격하여 명군은 대혼란에 빠졌다.[52][53]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부장인 다치바나 시게이에[54]에게 철포대를 이끌고 세 번 사격하게 하고, 다카하시군과 함께 많은 군기를 휘날리며 북을 울려[55] 전군이 일제히 좌측에서 적진을 강습했다.[56] 소하가와 히데카즈, 모리 모토야스[57], 치쿠시 히로몬 부대가 우측에서 측면 공격을 가했고, 다카카게 본대[58]와 요시카와 히로이에[59], 안코쿠지 에케이[60], 우키타 가의 가신 토가와 타츠야스와 쿠니토미 사다쓰구[61], 하나부사 쇼키도 정면에서 진격하여 명군 선봉을 격파하고 북쪽 벽제관에 있던 이여송의 본대에 육박하여 정오에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타치바나군에는 소니 유키나가의 사자 우사미 미부가 분전하여 두 개의 투구를 획득했다.[62] 또한, 타치바나 가신의 금갑 장 안동 상구[64]와 일기토를 벌여 이여송 자신도 낙마했으나, 이여매의 화살을 맞고 상구는 전사했다. 낙마한 이여송은 소하가와의 부장 이노우에 카게사다의 부대에 몰렸으나, 측근 이유성이 방패가 되어 이를 막았고, 이여매, 이여백 등이 구출했다. 이여송의 친위대도 이유성 등 8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에 명군 부총병 양원이 화군(화기 장비 부대)을 이끌고 원군으로 달려와 전열을 회복하고 방어에 힘썼으나,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협소한 지형에서 삼면에서 포위되는 형세가 되자 붕괴를 시작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65]
이리하여 일본군 본대의 본격적인 전투 참여를 기다리지 않고 정오경에는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고, 타카카게 등 일본군은 후퇴하는 명군을 벽제관 북쪽 고개인 회음령에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추격하다가 추격을 멈췄지만, 무네시게와 히데이에의 군세는 더 북쪽 호미리까지 추격하여 오후 5시까지 한성으로 철수했다. 명군은 개성까지 후퇴했다.
오노 시게유키[66], 코구시 시게시게[67], 오노 큐하치로[68], 토지 시게야스, 이마무라 키헤이, 이노우에 헤이지, 호아시 사헤이, 야나세 신스케도 전사했고, 무네시게는 이 격전에서 기마까지 피투성이가 되고, 두 개의 투구를 안장 사방에 붙였고, 칼은 휘어져 칼집에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히데카즈의 가로인 요코야마 카게요시, 부장 카츠라 고자에몬, 우츠미 오니노죠, 카라마 야헤이, 테지마 오우노스케, 유아사 신에몬, 요시다 타자에몬, 하라마 고우자에몬 등, 히로이에 부하의 와타누키 토지로도 전사했다.
참모본부 편찬 「일본전사·조선역」에서는 실제로 전투를 벌인 일본군 선봉을 2만,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본대를 2만 1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분로쿠의 역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다카하시 나오쓰구의 병력(군역 수)는 통설로 약 3천 명으로 여겨지지만, 인부 등 비전투원이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75][76] 그리고 당시 출진한 여러 다이묘들은 대부분 군역 수 미만의 병력으로 출병하는 것이 상례였으며(『류가와번총서』제1집 보유(5) 「종군자 도리토리지로베에노죠의 수기각서」의 기록에 따르면, 분로쿠의 역 최초의 도해 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끈 인원은 1500명이었다), 타치바나 군의 참전 병력은 1500명 정도로 추정된다.[77]
'''일본군 편성'''
구분 | 지휘관 | 병력 |
---|---|---|
총대장 | 우키타 히데이에 | |
선봉대장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
선봉대 | ||
선진 |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나오쓰구 | 3,000명[78] |
이진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8,000명 |
삼진 | 고바야카와 히데쿠니, 모리 모토야스, 쓰쿠시 히로몬 | 5,000명 |
사진 | 요시카와 히로이에 | 4,000명 |
합계 | 20,000명 | |
본대(대부분 전투 미참가) | ||
선진 | 구로다 나가마사 | 5,000명 |
이진 |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쓰구 | 5,000명 |
삼진 | 가토 미쓰야스, 마에노 나가야스 | 3,000명 |
사진 | 우키타 히데이에 | 8,000명 |
합계 | 21,000명 | |
한성 수비 | ||
고니시 유키나가, 오토모 요시쓰네 | 14,000명(고니시군은 후퇴 직후) |
참조
[1]
웹사이트
A critique of Samuel Hawley's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 Part 1: The first invasion | Great Ming Military
https://greatmingmil[...]
2019-08-14
[2]
웹사이트
The Battle of Byeokjegwan — Part 2: Aftermath and analysis | Great Ming Military
http://greatmingmili[...]
2018-03-28
[3]
문서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Byeokjegwan — Part 1: A detailed reconstruction | Great Ming Military
http://greatmingmili[...]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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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 critique of Samuel Hawley's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 Part 1: The first invasion | Great Ming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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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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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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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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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卷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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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卷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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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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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川市史 史料編V近世文書(前編)61 立花文書 四八六 安国寺恵瓊書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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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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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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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宣祖修正實錄
https://sillok.hi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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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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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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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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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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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징비록
평민사 동양문고
[33]
서적
일본전사 조선역 (보전 제육십칠종무의 결심)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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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류천번총서 제일집〔구오〕인물약전소전(십구)모리시타 쵸운소전
[35]
문서
류천번총서 제일집〔구오〕인물약전소전(이)토키츠라히사소전
[36]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三)内田統続小傳
[37]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六)小野鎮幸小傳
[38]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七)米多比鎮久小傳
[39]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一)高橋統増小傳
[40]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十一)戸次鎮林小傳
[41]
서적
日本戦史・朝鮮役(本編・附記)
参謀本部編
[42]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五)天野源右衛門小傳
[43]
서적
柳川史話 第二卷 人物篇(其の二)八八 十時傳右衛門について
[44]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八)戸次統直小傳
[45]
웹사이트
筑後将士軍談 巻之第二十 戸次統直舉勇名於異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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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六十九十時傳右の戦死)
[47]
서적
筑後国史
[48]
문서
朝鮮側の『宣祖実録』と『毛利家記』の記述
[49]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四)池邊永晟小傳
[50]
서적
毛利家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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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 補遺(九一)敵を背にして陣す
[52]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二 粟屋井上碧蹄の戦功)
https://dl.ndl.go.jp[...]
[53]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三 清水景治碧蹄の戦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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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九)立花成家小傳
[55]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 補遺(八五)三本品柄
[56]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 立花宗茂碧蹄の殊功)
https://dl.ndl.go.jp[...]
[57]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五 毛利元康碧蹄の戦功)
https://dl.ndl.go.jp[...]
[58]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一小早川隆景碧蹄の殊功)
https://dl.ndl.go.jp[...]
[59]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四 吉川広家碧蹄の戦功)
https://dl.ndl.go.jp[...]
[60]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六 安国寺恵瓊碧蹄の戦功)
https://dl.ndl.go.jp[...]
[61]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七十八 戸川達安碧蹄の戦功、第七十九 国富源右の剛勇)
https://dl.ndl.go.jp[...]
[62]
웹사이트
日本戦史・朝鮮役(補伝 第八十 宇佐美民部の戦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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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 補遺(五六)立花の笠験とは金甲也
[64]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十二)安東常久小傳
[65]
웹사이트
明史/卷238
http://zh.wikisource[...]
[66]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十三)小野成幸小傳
[67]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十四)小串成重小傳
[68]
서적
柳川藩叢書 第一集〔九五〕人物略傳小傳(十五)小野久八郎小傳
[69]
서적
日本戦史・朝鮮役(本編・附記)
参謀本部編
1924
[70]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7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72]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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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적
징비록
평민사
[74]
웹사이트
명사 2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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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적
文禄・慶長の役 : 東アジアを揺るがせた秀吉の野望
학연
[76]
간행물
일본전사 조선역
참모본부
1924
[77]
서적
立花宗茂
[78]
서적
立花宗茂
[79]
간행물
日本戦史・朝鮮役(本編・附記)
참모본부
[80]
서적
중국-조선·한국 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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