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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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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조리는 고구려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대에 국상으로 임명되었다. 선비족 모용외의 침략에 맞서 고노자를 추천하여 물리쳤으나, 봉상왕의 폭정에 반발하여 미천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미천왕 대에 국상으로 복귀했으며, 그의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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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직책고구려국상
대수7
취임일294년
퇴임일미상
전임상루
후임미상
출생일미상
출생지고구려 남부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국적고구려
성별남성

2. 생애

창조리는 고구려 봉상왕 때 국상을 지낸 인물이다.

294년 국상 상루가 죽자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다.[1]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모용부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96년 모용외가 고국원까지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 하자, 봉상왕은 창조리와 대책을 논의했다. 창조리는 고노자를 추천하여 모용외의 침략을 막아냈다.

모용외의 침략을 막은 후에도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298년부터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봉상왕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폭정을 일삼았다. 300년, 창조리는 봉상왕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간언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결국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심했다. 300년 9월, 창조리는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옹립하여 고구려의 안정을 도모했다.[1] 이후 미천왕 치세 동안 국상 자리에 복귀하여 미천왕을 보좌하였다.

2. 1. 출신 배경

창조리는 남부 출신으로, 봉상왕 3년인 294년 국상 상루(尙婁)가 죽었을 때 대사자(大使者)의 직위에 있었다. 이때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大主簿)가 되었다.[1]

2. 2. 봉상왕 대의 활동

남부 출신인 창조리는 294년 국상 상루가 죽었을 때 대사자 직위에 있었다. 상루의 뒤를 이어 국상이 되었고, 작위는 대주부가 되었다.[1]

2. 2. 1. 모용외의 침입과 격퇴

296년,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고구려를 침략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고 시도하는 등 고구려가 위기에 처했다. 이에 봉상왕은 국상이었던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고,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를 추천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동북부 변경의 신성 태수로 삼자 모용외는 침략을 멈추었다.[1]

2. 2. 2. 봉상왕의 폭정과 폐위

296년, 선비족 모용외고구려를 침략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내려 시도하는 등 고구려가 위기에 처하자, 봉상왕은 창조리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창조리는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를 추천했고, 왕은 고노자를 동북 변경의 신성(新城) 태수로 삼아 모용외의 침략을 막았다.[1]

모용외의 침략은 막았으나,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298년 가을에는 우박으로 농사를 망쳤고,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과 객성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도 봉상왕은 궁궐을 고치고 조카 을불을 죽이려 하는 등 폭정을 일삼아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8월, 왕은 15세 이상 남녀를 동원해 궁실을 수리하게 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1]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했다. 그러나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며 오히려 창조리가 백성의 신망을 얻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창조리는 재차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왕은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무시했다.[1]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폐위를 논의하여 을불을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창조리는 북부의 조불, 동부의 소우를 보내 을불을 찾게 했다. 을불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창조리에게 찾아왔고, 창조리는 그를 숨기고 지지 세력을 모았다.[1]

9월, 봉상왕이 사냥을 떠난 틈을 타 창조리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라"고 외치며 갈대잎을 관에 꽂았다. 모든 신하들이 따르자,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에게 옥새를 바쳐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1]

2. 3. 미천왕 대의 활동

창조리는 미천왕 치세 동안 국상 자리에 복귀했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의 관대한 통치와 그의 조언자였던 국상 창조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의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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