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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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우로는 신라 시대의 장군으로,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흘해 이사금의 아버지이다. 가라를 구원하고 감문국을 토벌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으나, 왜국 사신에게 한 실언으로 인해 왜군에게 붙잡혀 불에 타 죽었다. 그의 아내는 왜국 사신을 죽여 복수했고, 이로 인해 왜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석우로를 뛰어난 책략가로 평가하면서도 실언으로 인해 공적이 기록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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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우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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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석우로 |
한자 | 昔于老 |
가나 | 세키 우로 |
로마자 표기 | Seok Uro |
인물 정보 | |
휘 | 석우로(昔于老) |
별호 | 우로음(于老音)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249년' 또는 '253년' |
사망지 | 미상 |
배우자 | 명원부인(命元夫人) |
성별 | 남성 |
국적 | 신라 |
군사 정보 | |
소속 | 신라군 |
계급 | 미상 |
2. 생애
내해 이사금 14년(209년), 우루상팔국(경상남도 남서쪽의 가야 제국)의 공격을 받은 가라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태자였던 석우로는 동생 석리음과 함께 가라를 구원하러 가서 우루상팔국의 장군을 쳐서 포로 6천 명을 얻었다.
조분 이사금 2년(231년) 7월, 이찬(2등관)의 지위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경상북도 김천시)을 토벌했다. 233년 5월 및 7월에는 왜인의 침공이 있었는데, 7월 침공 때 우로는 사도(경상북도 포항시)에서 맞서 싸워 병선을 불태워 왜인을 궤멸시켰다. 244년 1월, 서불한(1등관인 이벌찬의 별칭)으로 승진하여 군사 통괄을 위임받았다. 245년 10월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출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마두책(경기도 포천시)까지 퇴각했다. 이때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병졸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땔나무를 태워 따뜻하게 해 주었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첨해 이사금 시대에 신라 지배 하에 있던 사량벌국(경상북도 상주시)이 반란을 일으켜 백제에 귀순했을 때도 우로가 출격하여 사량벌국을 토멸했다.
그 후 왜국의 사자 갈나고를 접대했을 때, "너의 왕을 소금 노예(소금 긷는 사람)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만들겠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이 때문에 왜왕은 크게 분노하여 장군 우도주군(무내숙녜?)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우로는 왜군 진영에 가서 실언을 사과했지만, 왜인은 용서하지 않았고, 우로는 붙잡혀 불에 타 죽었다.[1] 미추 이사금 시대에 우로의 아내가 왜국의 대신을 사적으로 접대하여 술에 취하게 하고 불에 태워 죽여 원한을 풀었다. 이 일로 인해 왜인은 신라의 수도 금성(경주시)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1]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석우로를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패배하는 일이 없었던 책략가"라고 평하면서도, "단 한 마디의 실수(실언)로 자신의 목숨을 잃고 신라와 왜국 간의 개전을 초래한 것으로 인해, 공적이 기록되지 못했다"라고 평했다.
2. 1. 어린 시절
내해 이사금 혹은 각간 수로(水老)의 아들로 태어났다.2. 2. 정복 활동
230년 조분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이찬이자 대장군이 되어 김천시 개령군에 있던 감문국(甘文國)을 병합하였다.[1] 233년 7월에는 왜인이 쳐들어오자, 포항시 사도(沙道)에서 화공으로 이를 물리쳤다.[1]242년 정월, 서불한에 올라 군정을 담당하였다.[1] 이듬해 고구려가 북방을 쳐들어와 이를 상대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두책(馬頭柵)에서 방어하였다. 이때 우로가 병사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높였다.[1]
첨해 이사금 때 상주시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백제로 배반하자,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이때 인근 8개의 소국도 함께 정복하였다.[1]
2. 3. 최후
253년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찾아왔을 때, 석우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만간 너희 왕[6]을 소금장이로 삼겠다"고 희롱하였다. 이 말에 왜왕이 크게 분노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석우로는 자신의 말이 잘못이었다며 왜군을 찾아갔다.석우로는 왜인들에게 당시의 발언이 농담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왜인들은 석우로를 붙잡아 불에 태워 죽였다. 이후 미추 이사금 시대에 석우로의 아내가 왜국의 대신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불태워 죽여 원한을 갚았고, 이로 인해 왜인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2. 4. 사후
미추 이사금 때 왜국에서 사신을 보냈다. 석우로의 아내는 이사금에게 청하여 자신이 직접 사신을 대접하게 했다. 사신이 술에 취하자, 그녀는 사신을 불에 태워 죽여 남편의 원한을 갚았다.[1] 이 일로 분노한 왜인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1]훗날 석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2]
3. 가족 관계
3. 1. 가계도
wikitext4. 평가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석우로를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패배하는 일이 없었던 책략가"라고 평가하면서도, "단 한 마디의 실수(실언)로 자신의 목숨을 잃고 신라와 왜국 간의 개전을 초래한 것으로 인해, 공적이 기록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5. 기타
석우로와 관련된 설화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과 실제 역사적 사실 사이에 차이가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미시나 쇼에이의 『일본서기 조선관계 기사 고증』에 따르면, 신라가 우라카미 팔국을 멸망시킨 사건은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시대의 일이라고 한다.[1] 이는 석우로가 3세기에 활동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석우로가 231년에 감문국을 정벌하고, 249년에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며, 사량벌국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시나 쇼에이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들은 실제로는 6세기, 즉 진흥왕과 법흥왕 시대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석우로 관련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설화의 내용과 역사적 정황 사이에 불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석우로 설화는 3세기의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후대에 윤색되거나 다른 시대의 사건이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5. 1. 석우로 관련 설화의 해석
미시나 쇼에이의 『일본서기 조선관계 기사 고증』에 따르면, 신라가 우라카미 팔국을 멸망시켰다는 기사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시대의 일이라고 한다.[1] 신라와 백제 간의 가야 제국을 둘러싼 교전은 6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사량벌국이 신라에 복속되는 것은 법흥왕 시대에 사벌주가 설치된 525년의 일로 여겨진다.[1]이는 석우로가 활약한 시기가 3세기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석우로가 231년에 감문국을 토벌하고, 249년에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며, 사량벌국을 토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시나 쇼에이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사건들은 실제로는 6세기, 즉 진흥왕과 법흥왕 시대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따라서 석우로 관련 설화는 그 자체로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설화의 내용과 역사적 정황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석우로 설화는 3세기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후대에 윤색되거나 다른 시대의 사건이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日本書紀/卷第九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https://zh.wikisourc[...]
2023-10-15
[2]
문서
宇治谷孟の現代語訳『日本書紀』で宇'''留'''助富利智干とあるのは誤りである。
[3]
문서
沙梁伐国の反乱と昔于老による討滅については、新羅本紀には対応する記事は見られず、昔于老伝のみの記事となっている。
[4]
문서
昔于老の殺害については、新羅本紀では沾解尼師今3年(249年)4月のこととし、昔于老伝では沾解尼師今の7年(253年)のこととする。
[5]
문서
新羅本紀・味鄒尼師今紀には対応する記事は見られない。『[[日本書紀]]』巻9・[[神功皇后]]摂政前紀の後部の長大な分注記事が、倭人による昔于老の殺害と、その妻の倭人への報復記事と関連していると言われる。(→井上訳注1980 p.64)
[6]
문서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왜왕은 [[진구 황후]]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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