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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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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규엽은 193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성악가이자 대중가요 가수로, 한국 최초의 전업 가수로 평가받는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일본 유학 후,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일본어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데뷔하여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하세가와 이치노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1943년 은퇴 후 친일 행적과 사기 사건 연루로 비판을 받았다. 1949년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북한으로 월북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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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채규엽
본명미상
출생1906년?
출생지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부
사망1949년 12월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함흥시
장르트로트
활동 시기1930년 ~ 1949년
직업성악가, 가수

2. 생애

채규엽은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성장했다. 출생 시기는 1905년, 1906년, 1907년, 1911년 등으로 정확하지 않다. 학창 시절에 대한 기록도 원산부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설과 경성부에서 보성고등학교 전신인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설 등으로 엇갈린다.[1]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의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했고, 경향파 예술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열었고, 1930년 근화여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독일인 교사에게 성악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1]

1930년 일본 콜럼비아레코드 경성부 지사 설립 축하연에서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것을 계기로 가수로 데뷔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유랑인의 노래〉, 〈봄노래를 부르자〉를 발표했고, 〈유랑인의 노래〉는 직접 작사·작곡했다. 오케레코드, 태평레코드, 포리돌레코드에서 노래를 발표하며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1935년 《삼천리》 인기 투표에서 남자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3]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활동하며 長谷川 一郞|하세가와 이치로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세가와'는 서울 콜럼비아 지사가 하세가와 총독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치로'는 한국인 남성 가수 최초로 일본어 유행가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7년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인기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했지만, 엔카풍 노래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 일본식 이름 사용 등으로 친일파로 보일 수 있어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보도되기도 했다.

1949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며, 1997년 평양에서 출판된 책에 따르면 1949년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1]

2. 1. 출생 및 학창 시절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성장하였다. 1905년, 1906년, 1907년, 1911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 등 출생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원산부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설과 경성부에서 보성고등학교 전신인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설이 있는 등 학창 시절에 대한 기록 역시 엇갈린다.[1]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의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경향파 예술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8년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으며, 1930년에 근화여학교에 음악 교사로 재직한 일이 있다. 또한 성악을 중학교 때부터 독일인 교사에게 배웠다는 설도 있다.[1]

2. 2. 일본 유학 및 성악가 활동

1920년대 중반부터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의 중앙음악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경향파 예술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8년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졌으며, 1930년에 근화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다. 중학교 때부터 독일인 교사에게 성악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1]

2. 3. 대중가요 가수 데뷔 및 전성기

1930년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가 경성부에 지사를 설립했을 때 축하연에서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였다.[2]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를 부르자〉로 데뷔하였으며, 〈유랑인의 노래〉는 직접 작사·작곡하였다. 오케레코드태평레코드, 포리돌레코드에서 노래를 발표하며 "유행가의 패왕"으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35년에는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남자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했다.[3]

그 무렵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활동하며 하세가와 이치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세가와'라는 성은 서울 콜럼비아 지사가 하세가와 총독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치로'라는 이름은 한국인 남성 가수 최초로 일본어 유행가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1937년 〈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인기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2. 4. 일본 활동 및 인기 하락

채규엽은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의 설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활동했다. 이때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 一郞)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하세가와'라는 성은 서울 콜럼비아 지사가 하세가와 총독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치로'라는 이름은 그가 한국인 남성 가수로서 처음으로 일본어 유행가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3]

1937년 〈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그의 인기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는 돌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3]

미군정 시기에는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지만, 엔카풍의 노래를 부르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찍부터 일본식 이름을 지어 활동했었던 탓에 친일파로 보일 수 있는 소지가 있어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3]

2. 5. 은퇴 선언 및 친일 행적

長谷川 一郞|하세가와 이치로일본어라는 이름으로 1937년 〈명사십리〉를 부른 뒤로 인기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3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일본 육군에 지원하는 돌출 행동도 보였다.[3]

종전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그러나 엔카풍의 노래를 부르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찍부터 일본식 이름을 지어 활동하는 등 친일파로 보일 수 있는 소지가 커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2. 6.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도 악극단 등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그러나 엔카풍의 노래를 부르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일찍부터 일본식 이름을 지어 활동했었던 등 친일파로 보일 수 있는 소지가 커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사기 사건 피의자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1]

1949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동안 친구인 리면상을 믿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1997년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 채규엽이 1949년에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이 확인되었다.

2. 7. 월북 및 사망

1949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동안 친구인 리면상을 믿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1997년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 채규엽이 1949년에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되어 월북 사실이 확인되었다.[1]

3. 평가

채규엽은 한국 최초의 전업 가수로 평가받는다.[1] 그러나 그가 보급한 노래는 일본 엔카풍이었고 주로 일본 노래를 번안하여 불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인기를 믿고 오만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6세 소녀에게 고소를 당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사생활 관리에도 미숙했다.[1]

3. 1. 비판적 시각

채규엽은 한국 최초의 전업 가수로 평가받지만, 그가 보급한 노래는 일본 엔카풍이었고 주로 일본 노래를 번안하여 불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인기를 믿고 오만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6세 소녀에게 고소를 당해 신문에 실릴 정도로 사생활 관리에도 미숙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

3. 2. 긍정적 시각

채규엽은 한국 최초의 전업 가수로 평가받는다.[1] 그러나 그가 보급한 노래는 일본 엔카풍이었으며, 주로 일본 노래를 번안하여 불렀다.[1]

참조

[1]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2] 뉴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상)"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07-02-15
[3] 뉴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 두 얼굴을 지녔던 최초의 직업 가수, 채규엽 (하)" http://www.yeongnam.[...] 영남일보 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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