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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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 소후는 기원전 519년 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초나라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후 진나라와 오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후 오나라의 주래 천도를 받아들였으나, 기원전 491년 오나라에 조현하러 갔다가 대부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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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소후 | |
---|---|
기본 정보 | |
이름 | 희갑 (姬甲) |
호칭 | 후 (侯) |
왕조 | 채 |
시호 | 소후(昭侯) |
부친 | 희유 |
몰년 | 기원전 491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518년 - 기원전 491년 |
2. 생애
채 소후는 기원전 519년 아버지 도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1][2]
기원전 509년, 초나라에 조현하여 소왕에게 갖옷을 바쳤으나,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의 요구를 거절하여 3년간 초나라에 억류되었다. 이후 자상에게 갖옷을 바쳐 풀려났다.[1][2]
기원전 506년, 진나라에 요청하여 소릉에서 회맹을 열었으나, 위나라보다 상좌를 차지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1][2] 이후 진나라를 위해 회맹에 참여하지 않은 심(沈)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다.[1]
오나라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1] 합려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에 입성했다.[1][2] 자상은 정나라로 달아났다.[1]
기원전 505년, 진나라 구원군이 도착하자[2] 오나라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왕은 초나라로 복귀했다.[1][2]
기원전 494년, 초나라의 공격을 받자[2] 오나라에 도움을 청했고, 오나라는 채나라를 주래(州來)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소후는 대부들의 동의 없이 오나라 구원군을 끌여들여 주래로 나라를 옮겼다.
기원전 491년, 오나라에 조현하러 갔으나, 대부들의 공모로 암살당했다. 이후 대부들은 소후의 아들 삭을 옹립했다.
2. 1. 즉위
기원전 519년, 아버지 도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1][2]2. 2. 초나라 억류와 외교적 노력
소후 10년, 채 소후는 초나라에 조현하여 소왕에게 갖옷을 바쳤다. 그러나 초나라 영윤(令尹) 자상(子常)이 그 갖옷을 요구했으나, 채 소후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자상은 소왕에게 참언하여 채 소후는 3년간 초나라에 억류되었다. 이후 채 소후는 그 까닭을 알고 자상에게 갖옷을 바쳐 풀려났다.[1][2]2. 3. 초나라와의 전쟁 및 승리
소후는 초나라를 공격해 달라고 진나라에 청했다. 진나라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소후 13년(기원전 506년)에 소릉에서 회맹을 열었고 소후도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위나라보다 상좌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1][2] 이후 진나라를 위해 회맹에 참여하지 않은 심(沈)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분노한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다.[1]소후는 오나라에 자기 아들을 인질로 주고[1] 오나라 왕 합려와 함께 초나라를 쳐 마침내 초나라를 무찌르고 초나라의 서울 영(郢)에 입성했다.[1][2] 자상은 소후를 두려워해 정나라로 달아났다.[1]
2. 4. 초나라의 반격과 채나라의 위기
기원전 505년, 진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자[2] 오나라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초나라에서 달아났던 소왕은 초나라로 다시 돌아왔다.[1][2]기원전 494년,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다.[2] 소후는 초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이듬해 오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오나라는 채나라가 오나라에서 너무 멀다는 이유로 오나라에 가까운 주래(州來)로 채나라를 옮기는 것을 제안했고, 소후는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소후는 대부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오나라 구원군을 끌여들여 주래로 나라를 옮겼다.
2. 5. 비극적인 죽음
기원전 491년, 채 소후는 오나라에 조현하러 갔다. 그러나 대부들은 하채(下蔡)로 돌아가고 싶어하여, 공모하여 암살자 이(利)로 하여금 소후를 죽이게 하였다. 소후가 죽은 후, 대부들은 이를 주살하고 소후의 아들 삭을 옹립했다.참조
[1]
서적
사기 권35 관채세가
https://zh.wikisourc[...]
[2]
서적
사기 권14 12제후연표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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