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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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윤은 초나라의 최고 관직으로 군사와 정치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초나라 역사에서 초기, 전성기, 후기로 나뉘어 다양한 인물들이 영윤을 역임했으며, 투기, 투누오도, 오기, 소양, 춘신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서나라와 월나라에서도 영윤 제도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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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윤 | |
---|---|
정보 | |
관직 | 영윤 |
국가 | 초나라 |
유형 | 관직 |
설명 | 초나라의 재상 |
상세 정보 | |
다른 이름 | 재상 주국 |
관련 링크 | |
관련 항목 | 초나라의 재상 목록 |
2. 초나라의 영윤
초나라의 영윤은 군사와 정치를 모두 총괄하는 최고 관직이었다.
== 초기 영윤 ==
투기(鬬祁)는 초나라 최초의 영윤으로, 기원전 690년경에 활동했으며 약오 씨족 출신이다.[1][2] 팽중상(彭仲爽)은 신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688년 이후부터 기원전 683년 이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자 선(善, 子元)은 초나라 무왕의 아들로, 기원전 675년 이전부터 기원전 664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다.[1][2]
== 전성기 영윤 ==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637년까지 투누오도(鬬穀於菟, 子文)가 영윤을 역임했다.[1][2] 성득신(成得臣, 子玉)은 기원전 637년부터 기원전 632년까지 영윤이었다.[1][2] 위여신(蒍呂臣, 子皮)은 기원전 632년부터 기원전 629년까지, 투발(鬬勃, 子上)은 기원전 629년부터 기원전 627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성대심(成大心, 孫伯)은 기원전 627년부터 기원전 615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고, 그의 동생 성가(成嘉, 子孔)가 기원전 615년부터 기원전 612년까지 영윤직을 이어받았다.[1][2]
투반(鬬般, 子揚)은 기원전 612년부터 기원전 611년까지, 투월초(鬬越椒, 伯棼)는 기원전 611년부터 기원전 605년까지 영윤이었다.[1][2] 우구(虞丘, 子桱)와 손숙오(孫叔敖, 蒍敖, 孫叔)는 기원전 605년 이후부터 기원전 596년 이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자패(子佩)도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자 영제(嬰齊, 子重)는 기원전 593년 이전부터 기원전 570년까지 영윤이었고, 그의 동생 공자 임부(壬夫, 子辛)가 기원전 570년부터 기원전 568년까지 그 뒤를 이었다.[1][2] 공자 정(貞, 子囊)은 기원전 568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 영윤이었으며, 심윤에서 영윤으로 승진했다.[1][2] 공자 오(午, 子庚)는 기원전 558년부터 기원전 552년까지, 공자 추서(追舒, 子南)는 기원전 552년부터 기원전 551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위자풍(蒍子馮)은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전 548년까지, 굴건(屈建, 子木)은 기원전 548년부터 기원전 545년까지 영윤이었다.[1][2] 공자 위(圍)는 기원전 545년부터 기원전 541년까지 영윤을 역임한 후 초 영왕이 되었다.[1][2] 위파(薳罷, 子盪)는 기원전 541년부터 기원전 529년까지 영윤이었다.[1][2]
공자 흑굉(黑肱, 子皙)은 기원전 529년에 영윤을 역임했다.[1][2] 투성연(鬬成然, 子旗)은 기원전 529년부터 기원전 528년까지 영윤이었다.[1][2] 양개(陽匄, 子瑕)는 기원전 528년부터 기원전 519년까지, 낭와(囊瓦, 子常)는 기원전 519년부터 기원전 506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 후기 영윤 ==
공자 신(申, 子西)은 기원전 505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심제량(沈諸梁, 子高)은 기원전 479년부터 기원전 478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손 녕(寧, 子國)은 심제량의 아들로, 기원전 478년부터 기원전 475년 이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다.[1][2] 자발(舍, 子發)은 기원전 447년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오공자춘(郚公子春)은 초 혜왕 말기부터 초 간왕 시기까지 영윤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1][2]
오기(吳起)는 본래 위나라 출신으로, 초 도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으나, 초 도왕의 장례식에서 초나라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1][2] 주후(州侯)와 소해휼(昭奚卹)은 초 선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악군 계(鄂君啓)도 영윤을 역임했다.[1]
소양(昭陽)은 초 위왕과 초 회왕 시기에 영윤을 지냈고,[1][2] 경리(景鯉)는 초 회왕 시기에 영윤으로 활동했다.[1] 자초(子椒)는 초 회왕 시기의 재상으로 이름은 미상이다.[1][2] 소헌(昭獻, 子士)은 초 회왕과 초 경양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자란(子蘭)은 초 경양왕 시기의 영윤으로, 초 회왕의 아들이다.[1][2]
춘신군(春申君)은 이름이 황헐(黃歇)이며, 초 고열왕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1][2] 이원(李園)은 초 유왕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고,[1][2] 여청(呂靑)은 초 의제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1][2]
2. 1. 초기 영윤
투기(鬬祁)는 초나라 최초의 영윤으로, 기원전 690년경에 활동했으며 약오 씨족 출신이다.[1][2] 팽중상(彭仲爽)은 신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688년 이후부터 기원전 683년 이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자 선(善, 子元)은 초나라 무왕의 아들로, 기원전 675년 이전부터 기원전 664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다.[1][2]2. 2. 전성기 영윤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637년까지 투누오도(鬬穀於菟, 子文)가 영윤을 역임했다.[1][2] 성득신(成得臣, 子玉)은 기원전 637년부터 기원전 632년까지 영윤이었다.[1][2] 위여신(蒍呂臣, 子皮)은 기원전 632년부터 기원전 629년까지, 투발(鬬勃, 子上)은 기원전 629년부터 기원전 627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성대심(成大心, 孫伯)은 기원전 627년부터 기원전 615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고, 그의 동생 성가(成嘉, 子孔)가 기원전 615년부터 기원전 612년까지 영윤직을 이어받았다.[1][2]투반(鬬般, 子揚)은 기원전 612년부터 기원전 611년까지, 투월초(鬬越椒, 伯棼)는 기원전 611년부터 기원전 605년까지 영윤이었다.[1][2] 우구(虞丘, 子桱)와 손숙오(孫叔敖, 蒍敖, 孫叔)는 기원전 605년 이후부터 기원전 596년 이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자패(子佩)도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자 영제(嬰齊, 子重)는 기원전 593년 이전부터 기원전 570년까지 영윤이었고, 그의 동생 공자 임부(壬夫, 子辛)가 기원전 570년부터 기원전 568년까지 그 뒤를 이었다.[1][2] 공자 정(貞, 子囊)은 기원전 568년부터 기원전 559년까지 영윤이었으며, 심윤에서 영윤으로 승진했다.[1][2] 공자 오(午, 子庚)는 기원전 558년부터 기원전 552년까지, 공자 추서(追舒, 子南)는 기원전 552년부터 기원전 551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위자풍(蒍子馮)은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전 548년까지, 굴건(屈建, 子木)은 기원전 548년부터 기원전 545년까지 영윤이었다.[1][2] 공자 위(圍)는 기원전 545년부터 기원전 541년까지 영윤을 역임한 후 초 영왕이 되었다.[1][2] 위파(薳罷, 子盪)는 기원전 541년부터 기원전 529년까지 영윤이었다.[1][2]
공자 흑굉(黑肱, 子皙)은 기원전 529년에 영윤을 역임했다.[1][2] 투성연(鬬成然, 子旗)은 기원전 529년부터 기원전 528년까지 영윤이었다.[1][2] 양개(陽匄, 子瑕)는 기원전 528년부터 기원전 519년까지, 낭와(囊瓦, 子常)는 기원전 519년부터 기원전 506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2. 3. 후기 영윤
공자 신(申, 子西)은 기원전 505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심제량(沈諸梁, 子高)은 기원전 479년부터 기원전 478년까지 영윤을 역임했다.[1][2] 공손 녕(寧, 子國)은 심제량의 아들로, 기원전 478년부터 기원전 475년 이후까지 영윤으로 재직했다.[1][2] 자발(舍, 子發)은 기원전 447년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오공자춘(郚公子春)은 초 혜왕 말기부터 초 간왕 시기까지 영윤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1][2]오기(吳起)는 본래 위나라 출신으로, 초 도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으나, 초 도왕의 장례식에서 초나라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1][2] 주후(州侯)와 소해휼(昭奚卹)은 초 선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악군 계(鄂君啓)도 영윤을 역임했다.[1]
소양(昭陽)은 초 위왕과 초 회왕 시기에 영윤을 지냈고,[1][2] 경리(景鯉)는 초 회왕 시기에 영윤으로 활동했다.[1] 자초(子椒)는 초 회왕 시기의 재상으로 이름은 미상이다.[1][2] 소헌(昭獻, 子士)은 초 회왕과 초 경양왕 시기에 영윤을 역임했다.[1][2] 자란(子蘭)은 초 경양왕 시기의 영윤으로, 초 회왕의 아들이다.[1][2]
춘신군(春申君)은 이름이 황헐(黃歇)이며, 초 고열왕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1][2] 이원(李園)은 초 유왕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고,[1][2] 여청(呂靑)은 초 의제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1][2]
3. 기타 국가의 영윤
3. 1. 서나라
제계형은 춘추 시대 말기의 인물이다.[3]3. 2. 월나라
기원전 441년경 월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다.[5]4. 영윤 제도의 변화와 의의
5. 한국 역사와의 비교
참조
[1]
서적
中国政治制度史
清华大学出版社有限公司
[2]
서적
春秋大事表
Zhonghua Book Company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서적
史記會注考證
文史哲出版社
1996
[7]
저널
論古文字材料所見之「伊尹」稱號 ——兼論〈尹至〉、〈尹誥〉之「尹」、「執」(摯)
201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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