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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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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야 전술은 적의 보급을 막기 위해 인원과 물자를 제거하여 적이 점령지에 머물 수 없도록 하는 군사 전략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시대부터 한국 전쟁 시기까지 다양한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대의 보급을 막기 위해 청야 전술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산성 방어와 결합한 청야 전술을 주장했다. 한국 전쟁에서는 대한민국 육군 제11사단장 최덕신이 공산주의 게릴라 토벌을 위해 청야 작전을 실시했으나,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청야 전술은 중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한국의 청야 전술

한국에서는 타민족의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다양한 청야 전술이 사용되었다.

2. 1. 고구려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수나라 군대를 상대로 청야 전술을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1]

을지문덕은 30만이 넘는 수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을지문덕은 요동에서의 방어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수양제의 별동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그는 명림답부 이래 고구려에서 사용해 오던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단 한 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도록 전쟁터 주변의 사람들과 먹을 것을 전부 치워 버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오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해졌다. 하나둘 굶주림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 뒤 적을 지치게 만들면서 결국 살수까지 유인하여 수나라 군대를 격멸하였다.[1]

2. 2. 조선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청야 전술과 산성 방어를 결합한 전략을 주장했다.[1] 그는 견벽청야를 한 후, 산성에서 저항하며 산성을 증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2. 3. 한국 전쟁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11사단은 공산주의 게릴라 토벌을 위해 청야 작전을 실시했다.[5] 이 작전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게 확보하고, 불가피하게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청소하여 적이 머물 수 없도록 벌판으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5]

1951년 2월 7일,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가현 마을에서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들은 금품을 수집한 후, 마을 주민 123명을 계곡으로 밀어 떨어뜨리거나 총살했고,[5] 방곡 마을 주민 212명,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주민 60명, 화계리, 자혜리와 함양군 유림면 서주, 손곡, 지곡 마을의 군 헌병대 가족을 제외한 주민 310명을 학살했다. 이 산청·함양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총 705명에 달했다.[5]

2월 9일에는 거창군 신원에서 민가 78채를 불태우고 주민 80여 명을 살해했다.[5] 2월 10일에는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의 모든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피난시킨다는 이유로 연행하여 노인 20여 명을 사살하고, 여자와 아이 100여 명을 대현리 담량계곡에서 학살했다.[5] 2월 11일에는 신원 초등학교에 강제 수용된 주민 1000명 중 군 헌병, 공무원, 청년 방위대 가족을 제외한 540여 명의 주민을 벅산계곡에 모아 기관총 등으로 사살하고 소각했다.[5] 이 거창 학살 사건의 희생자는 719명이었다.[5]

산청·함양과 거창 사건의 희생자 총계는 1424명에 달했다.

3. 다른 나라의 청야 전술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청야 전술이 사용된 기록이 후한기등에 나타난다.[3] 백련교도의 난 당시 러바오, 궁징한과 의 누르하치를 패주(敗走)시킨 위안충환 등의 계책이 있었다.[4]

중일 전쟁 시기 국민혁명군일본군과 중공군 양측을 상대로 청야 전술을 실시했다. 초토화 대상은 군사 시설, 식량 창고뿐만 아니라 밭과 민가에까지 미쳤으며, 난징 전투 당시에는 일본군의 은폐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건물을 모두 소각했다.[1] 국민혁명군은 난징 성벽 주위 1~2km의 거주 구역 전체와 난징성에서 반경 16km 이내에 있는 도로변의 촌락과 민가를 불태워 초토화했다.[1][4] 황하 붕괴 작전, 창사 대화재도 청야 전술의 사례이다.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 장교 최덕신은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공산 게릴라 토벌 전술로 청야 작전을 실시했다.[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는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다.[7] 러시아의 강추위와 식량 조달 문제로 인해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결국 후퇴하였고, 이는 나폴레옹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전에서도 러시아 사람들은 독일군 도착 전에 청야 전술을 사용하였다. 스탈린그라드가 90% 정도 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미리 사용해둔 청야전술과 러시아 겨울의 강추위가 전세를 뒤집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3. 1. 중국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청야 전술이 사용된 기록이 있다.[3] 고대에는 『후한기』 권4에도 나타난다. 또한 백련교도의 난 당시의 러바오, 궁징한과 의 누르하치를 패주(敗走)시킨 위안충환 등의 계책이 있다.[4]

중일 전쟁 시기 국민혁명군일본군과 중국 공산당군 양측을 상대로 청야 전술을 실시했다. 초토화 대상은 군사 시설이나 식량 창고뿐만 아니라 밭과 민가에까지 미쳤으며, 난징 전투 당시에는 일본군의 은폐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건물을 모두 소각했다.[1] 국민혁명군은 난징 성벽 주위 1~2km의 거주 구역 전체와 난징성에서 반경 16km 이내에 있는 도로변의 촌락과 민가를 불태워 초토화했다.[1][4]

국민혁명군은 그 후에도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황하를 붕괴시켜 인공적으로 홍수를 일으킨 황하 붕괴 작전이나, 일본군이 닥쳐온다는 유언비어에 휩쓸린 중국군에 의한 초토 작전인 창사 대화재도 있었다.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 장교 최덕신은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공산 게릴라 토벌 전술로 청야 작전을 실시했다.[5]

3. 2. 러시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는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다.[7] 러시아의 강추위와 식량 조달 문제로 인해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결국 후퇴하였고, 이는 나폴레옹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전에서도 러시아 사람들은 독일군 도착 전에 청야 전술을 사용하였다. 스탈린그라드가 90% 정도 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미리 사용해둔 청야전술과 러시아 겨울의 강추위가 전세를 뒤집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참조

[1] 서적 南京事件 岩波書店 1997
[2] 간행물 清末民国期莒州大庖鎮の荘氏と地域社会:成豊年間捻匪の襲来を中心に http://www.lib.tokus[...] 2002
[3] 문서 焦土(中国語記事)
[4] 보고서 日中歴史共同研究2010.近現代史「第2部第2章 日中戦争―日本軍の侵略と中国の抗戦」 https://www.mofa.go.[...] 외무성
[5] 논문 朝鮮戦争期の民間人虐殺事件に対する 刑事法的対応 ――山清,咸陽,居昌の民間人虐殺事件を中心に――
[6] 간행물 堅壁清野主義 岩波書店 1926-01
[7] 웹사이트 전투식량 - 군대문화 이야기(7) 배가 든든해야 싸움도 이긴다 https://terms.naver.[...]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유용원의 군사세계, 디지틀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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