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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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언위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으로, 당나라 유학 후 과거에 급제하여 신라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고려 건국 후 태자사부 등을 역임했다. 경주 출신으로 초명은 신지이며, 최치원의 종제이자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로 불렸다. 18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했으며, 42세에 신라로 돌아와 관직에 올랐다. 고려 태조를 섬기며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고,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944년에 77세로 사망했으며, 정광으로 추증되고 시호는 문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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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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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최언위 |
한자 표기 | 崔彦撝 |
로마자 표기 | Choe Eon-wi |
일본어 표기 | チェ・オニ |
생애 | |
출생 | 868년 |
출생지 | 신라 금성 |
사망 | 944년 (77세) |
사망지 | 고려 개경 |
관직 | |
신라 관직 | 신라국 집사성 시랑 겸 대리집정공 |
신라 임기 | 910년 3월 1일 ~ 911년 2월 3일 |
신라 군주 | 신라 효공왕 김요 |
고려 관직 | 고려국 평장사 |
고려 임기 | 941년 1월 23일 ~ 944년 2월 29일 |
고려 군주 | 고려 태조 왕건, 고려 혜종 왕무 |
가족 관계 | |
자녀 | 슬하 4남 |
장남 | 최광윤(崔光胤) |
차남 | 최행귀(崔行歸) |
삼남 | 최광원(崔光遠) |
사남 | 최행종(崔行宗) |
친척 | 최치원(종형), 최승우(재종질), 최항(손자)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교 → 유교 |
본관 | 경주(慶州) |
정당 | 무소속 |
학력 | 906년 중국 당나라 빈공과 급제 |
2. 생애
경주 출신으로, 초명은 '신지'였다. 육두품 출신 관료였으며, 최치원의 종제이고,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렸다. 88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895년에 중국의 과거에 급제했다.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과 서서원 학사에 임명되었다. 신라가 멸망하자 고려에 벼슬하여 태자사부에 임명되어 문한을 맡았다. 자손의 대부분은 문벌 귀족이 되었다.
2. 1. 신라 유학 및 당나라 과거 급제
신라 말 18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당시 발해 재상(宰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같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2. 2. 신라 귀국 및 관직 활동
42세에 신라로 돌아오자,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서서원 학사(瑞書院學士)로 임명되었다.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온 가족을 거느리고 돌아오니, 태자사부(太子師傅)로 임명되고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았다. 궁원(宮院)의 편액을 지었다. 벼슬은 대상(大相)·원봉태학사(元鳳太學士)·한림원령(翰林院令)·평장사에 이르렀다.
944년(혜종 원년)에 죽으니 나이가 77세였다. 정광(政匡)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왕도 개경의 궁궐 전각과 당우는 모두 최언위가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며, 왕명에 따라 승려의 비명을 휘호한 것이 많이 전해진다. 대상, 원봉태학사, 한림원령 등을 역임했으며, 자손의 대부분은 문벌 귀족이 되었다.
2. 3. 고려 건국 후 활동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최언위가 온 가족을 거느리고 고려로 돌아오니, 태자사부(太子師傅)로 임명되고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았다. 궁궐과 정원의 편액을 지었으며,[1] 왕도 개경의 궁궐 전각과 당우는 모두 최언위가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명에 따라 승려의 비명을 휘호한 것이 많이 전해진다. 벼슬은 대상(大相)·원봉태학사(元鳳太學士)·한림원령(翰林院令)·평장사에 이르렀다.[1]944년(혜종 원년)에 77세로 죽으니,[1] 시호는 문영(文英)이며, 정광(政匡)으로 추증되었다.[1]
2. 4. 사망
944년(혜종 원년)에 77세로 사망하였다. 혜종은 정광(政匡)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영(文英)이다.3. 가계
아들은 최광윤(崔光胤), 최행귀(崔行歸), 최광원(崔光遠), 최행종(崔行宗)이다.
4. 평가
최언위는 최치원의 종제이며,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렸다.[1] 육두품 출신 관료로, 당나라 유학 후 중국의 과거에 급제했다. 귀국 후 집사성 시랑, 서서원 학사를 역임했고, 신라 멸망 후 고려에서 태자사부를 맡아 문한을 담당했다. 대상, 원봉태학사, 한림원령 등을 역임했으며, 자손 대부분은 문벌 귀족이 되었다. 시호는 문영이다.
4. 1. 일대삼최(一代三崔)
최치원,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렸다.[1]4. 2. 학문적, 문화적 영향력
최언위는 최치원 및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로 불렸다.[1] 개경 궁궐 전각과 당우 이름은 대부분 최언위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또한 왕명에 따라 승려의 비명을 많이 썼는데, 그 글씨가 많이 전해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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