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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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난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고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명성을 얻었다. 귀국 후에는 신라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년에 해인사에서 은거하며 생을 마감했다. 고려 시대에는 문창후로 추증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업적을 기려 숭앙받았다.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산비명 등이 있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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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서원은 1561년 이정이 김유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설총과 최치원을 추가 배향하고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아 나정을 보호하며 신라 시조 탄생 설화 관련 유적을 보호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최치원 - 정읍 무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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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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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력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人百己千|인백기천중국어의 각오로 학문에 정진했다. 874년 당나라 과거에 급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병의 휘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6] 희종에게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기도 했다.
884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으며, 894년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골품제라는 신분적 한계와 진골 귀족들의 견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랑했다.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부산 해운대는 최치원의 호인 '해운'에서 유래했다.[3]
2. 1. 출생과 가계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견일(肩逸)이며 금성(현, 경주시)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서 경문왕 8년(868년) 당시의 12세라는 나이로 역산해 보면 최치원의 탄생은 헌안왕 1년(857년)의 일이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최치원 자신이 찬한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병서에서 견일(肩逸)이 왕경(王京)의 사량부, 《삼국유사》는 본피부로 기록하고 있는데, 《경상도지리지》·《동국여지승람》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삼국사기》를 따라 사량부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1834년에 발간된 《교인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서유구는 최치원을 호남 옥구 사람이라고 기록하거나,[10] 고군산 사람이라고 한 기록도 존재한다.[11] 고군산에는 현재 최치원의 유적지로 여겨지는 곳이 남아 있으며,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무속고》에 따르면, 최치원의 신사가 고군산에 있었다고 한다.[12]최치원의 탄생 일화 중 금돼지 자식이라는 일화가 있다. 최치원의 어머니는 금돼지에게 납치되어 잉태했고 자살 시도를 몇 번 하였으나 최견일의 만류로 결국 최치원을 낳게 된다. 헌안왕은 당시 두 딸이 있었는데 딸들이 여왕이 되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 왜냐하면 많은 왕자들이 왕위 다툼으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헌안왕은 857년 최치원을 낳고 4년 뒤에 병세로 861년 죽었다. 최치원은 신라 왕족이나 훌륭한 부모의 역할을 했던 최견일의 아들이다.
최치원은 857년 경주 신라의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른바 "육두품(六頭品)" 계급 출신으로,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에서 귀족과 평민의 혼혈 자손에게 부여되는 계급이었다. 육두품의 신분이었던 최치원은 오를 수 있는 관직의 수준에 제약이 있었다.
2. 2. 당나라 유학
868년, 12세의 나이로 상선을 통해 당나라로 유학했다.[13] 人百己千|인백기천중국어의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874년 당나라의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16] 급제 후 2년 동안 동도(東都)를 유랑하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두 3편을 이루었다고 한다. 876년에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17]최치원의 유학이 국비인지 사비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다른 숙위학생들과는 달리 상선을 타고 당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사비 유학생으로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13]
2. 3. 고병 막하 활동과 토황소격문
881년 황소가 군사를 일으킨 황소의 난이 발생하자, 고병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되고, 고병의 천거로 최치원은 도통순관에 임명되어 병마도통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정하였다. 7월 8일에 그는 반란군의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 已議陰誅)"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6]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2. 4. 신라 귀국과 개혁 시도
884년, 신라 사신으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유산과 곡포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듬해인 885년에야 신라에 도착했다.[19]귀국 후, 최치원은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나 왕실 사찰 관련 문서를 작성하는 등 국가에 필요한 여러 문장을 지었다. 헌강왕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고, 《초월산대숭복사비》의 글을 지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자신이 당나라에서 저작한 문집 28권을 헌강왕에게 바쳤다.[19]
그러나 헌강왕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하면서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에게 밀려 외직인 태산군 태수로 나가게 되었다. 887년에는 부성태수로 부임지가 옮겨졌다. 진성여왕 재위 기간에는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을 지었다.[19]
893년, 납정절사로 임명되어 당나라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김처회가 풍랑으로 익사하자, 최치원이 하정사로 임명되어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흉년과 도적들로 인해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19]
894년, 최치원은 시무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여 아찬이 되었다. 이 시기에 천령군 (함양) 태수로 있으면서 희랑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함양에는 최치원이 조성했다는 함양 상림이 남아있다.[19]
최치원은 신라의 유교 학문 기관인 한림원의 강학 및 독서관으로 임명되었고, 병부령, 여러 지방의 도독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쳤다.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신라 개혁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귀국했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중앙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
2. 5. 만년과 죽음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 아찬(阿飡)에 임명되었으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하여 산과 숲, 각지를 유랑하였다.[3] 경주 남산, 강주(현 영주시)의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에서 은거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3]최치원의 중년 및 만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900년경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한국의 여러 지역을 유랑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은거하며 최치원은 산중 고인의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강과 기슭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책을 읽고 역사를 쓰고, 자연에 대한 시를 지었다. 그는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주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의 초가집 등에서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현대 부산의 해운대구는 최치원의 호인 해운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그가 그 지역에 매료되어 해변을 내려다보는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다. 바위에 새겨진 최치원의 서예 작품이 그곳에 아직 남아 있다.[3]
결국 최치원은 그의 형 현준(賢俊|현준중국어)이 주지로 있던 해인사에 정착했다. 그의 만년은 신라의 가장 유명한 불교 승려들에 대한 긴 비문과 전기로 가장 주목할 만한데, 이는 신라 불교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 되었다.[3]
이 시기에 최치원에 관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그가 왕건에게 보냈다고 하는 시에 관한 것이다. 왕건의 훌륭함, 특히 그의 훈요 십조 반포에 감명받은 최치원은 왕건이 쇠퇴하는 신라를 계승하여 한반도의 지배자가 될 천명을 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그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지지를 담은 예언적인 시를 몰래 보냈다. “계림 황엽 곡령 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 계림(Gyerim)은 신라의 고대 별칭이며, 곡령(Gongnyeong)은 왕건의 고향이며, 고려 왕조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최치원이 사망한 지 오래 지난 12세기의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했으며, 일부 현대 학자들은 신라 출신으로 신라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최치원이 결코 이 시를 쓰지 않았고, 고려 왕조가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젊은 신라 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에게 귀속시켰다고 동의한다.[3]
최치원의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924년까지 살아 있었으며, 그의 현존하는 비문 중 하나가 그 날짜이다. 한 환상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최치원의 짚신이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가야산) 숲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으며, 최치원은 도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더 현실적인 역사적 이론은 그가 자살했다고 추정하지만, 이는 결국 추측에 불과하다.[3]
3. 사후 평가와 영향
최치원은 사후에도 오랫동안 유학자, 시인, 그리고 민간 전승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며 다양한 평가와 영향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치원은 그의 시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고 모두 한문으로 쓰여진 덕분에 시인으로도 존경받게 되었다.[1] 또한, 최치원을 둘러싸고 기이한 행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풍부한 민간 전승이 생겨났다.[1]
19세기 말, 한국 지식인들은 국가적 약세와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여 지적, 역사적 뿌리를 재검토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역사에서 대중국 숭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1]
3. 1. 고려시대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현종 14년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다.[1] 서악서원, 무성서원, 고운영당, 백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1]최치원이 사망한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타났다.[1] 조선 시대에 한국이 점점 더 유교화되면서 최치원은 한국 유교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으며, 국가의 유교 사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1] 현종(재위 1009–1031)은 최치원의 유교적 업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문창후(文昌侯|문창후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렸다.[1] 13세기 초에는 그의 초상이 국가 유교 사당에 안치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
3. 2. 조선시대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현종 14년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주의 서악서원, 태인 무성서원, 영평 고운영당, 함양 백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19]조선 시대에 한국이 점점 더 유교화되면서 최치원은 한국 유교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으며, 국가의 유교 사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종(재위 1009–1031)은 최치원의 유교적 업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문창후(文昌侯|문창후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렸다. 13세기 초에는 그의 초상이 국가 유교 사당에 안치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19]
3. 3. 근현대
신채호(1880–1936)는 최치원을 한국 지식인의 대중국 사대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로 비판했다. 신채호는 이를 한국 지식인 계층의 오랜 기간에 걸친 굴종적인 행태로 보았으며, 궁극적으로 한국의 민족 정신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사대"(큰 나라를 섬김) 사상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1]최치원은 현재 경주 최씨 문중의 시조로 여겨진다. 경주에 있는 그의 생가는 현재 그의 정신을 기리는 작은 사당으로 남아있다.[1]
3. 4. 기타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천부경을 전하는데 최치원이 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20]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한 최치원은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 켠에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최치원이 사망한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타났다. 한편, 고려 후기와 특히 조선 시대에 한국이 점점 더 유교화되면서 최치원은 한국 유교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으며, 국가의 유교 사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종 (재위 1009–1031)은 최치원의 유교적 업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문창후(文昌侯|문창후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렸다. 13세기 초에는 그의 초상이 국가 유교 사당에 안치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최치원은 시인으로도 존경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시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고 모두 한문으로 쓰여진 덕분이었다. 최치원을 둘러싸고, 그에게 기이한 행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풍부한 민간 전승이 생겨났다.
19세기 말, 한국 지식인들이 국가적 약세와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여 지적, 역사적 뿌리를 재검토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역사적 대중국 숭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인물은 언론인, 역사학자, 철학자인 신채호 (1880–1936)였다. 신채호는 최치원을 한국 지식인의 대중국 사대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로 비판했다. 이는 한국 지식인 계층의 오랜 기간에 걸친 굴종적인 행태(신채호의 주장)로, 궁극적으로 한국의 민족 정신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사대"(큰 나라를 섬김) 사상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현재 경주 최씨 문중의 시조로 여겨진다. 경주에 있는 그의 생가는 현재 그의 정신을 기리는 작은 사당으로 남아있다.
4. 저술 및 작품
최치원은 당나라와 신라에서 벼슬을 하며 올린 상소나 보고 등을 모은 관료문, 차를 마시는 것과 자연 경관 등을 다룬 사문, 시, 비문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885년 신라로 돌아온 직후, 자신이 쓴 글들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주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작성한 관료 서신과 상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사문도 포함되어 있다. 《계원필경》은 현존하는 조선 최고의 문집이자,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전하는 중국사적으로도 중요한 서적이다.[9]
최치원의 시는 상당 부분 남아있는데, 헌강왕에게 바친 작품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조선 시대 문집인 『동문선』과 12세기의 『삼국사기』를 통해 전해진다.
최치원은 한국 불교 설화와 민담을 모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저자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저자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20세기 초에는 유교 교재인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저자로 제시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학자들은 최치원의 작품이 아니라고 본다.
4. 1. 주요 저서
최치원의 비교적 방대한 저술은 신라 말 사회에서 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재능 있는 시인이자 학식 있는 관리이며 개혁에 힘썼던 동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갖지 못했던 후대의 중요성을 그에게 부여했다.
최치원의 현존 저술은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관료문 (당나라와 신라에서 벼슬을 할 때 올린 상소, 보고 등)
2. 사문 (차를 마시는 것과 자연 경관 등)
3. 시
4. 비문
885년 신라로 돌아온 직후, 최치원은 관료 문과 사문(일부 시 포함)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 편찬물의 서문이 남아 있어 원래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컬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주로 당나라에서 벼슬하며 작성한 관료 서신과 상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몇몇 사문도 포함되어 있다.[9]
최치원의 시는 상당한 양이 남아 있는데, 헌강왕에게 바친 작품에 원래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한국 시의 조선 시대 문집인 『동문선』을 통해 전해진다. 그의 몇몇 시는 12세기의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현존하는 비문, 즉 소위 사산비명(四山碑銘)은 다음과 같다(모두 현재의 대한민국 소재).
- 眞鑑國師碑銘중국어, 쌍계사 진감선사(혜소) 비, 887년, 경상남도 쌍계사.
- 大崇福寺碑銘중국어, 대숭복사비, 885년, 경주 (전체 현존하지 않음).
- 朗慧和尙碑銘중국어, 성주사 낭혜화상비, 890년, 충청남도 성주사.
- 智證大使碑銘중국어, 봉암사 지증대사비, 924년, 경상북도 문경.
최치원이 한국 불교 설화와 민담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최초의 컬렉션인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저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원래 이야기 중 13개가 다른 작품에 남아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자들은 최치원이 저자가 아니라고 동의한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이야기 중 하나가 최치원을 소재로 한 설화, 즉 『고운 최치원전(孤雲崔致遠傳)』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명확해 보인다.
4. 2. 작품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촉규화》
- 난랑비서문
최치원의 비교적 방대한 현존 저술은 신라 말 사회에서 그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와 마찬가지로 재능있는 시인이자 학식있는 관리이며 개혁에 부지런했던 동시대의 많은 인물들이 갖지 못했던 후대에서의 중요성을 그에게 부여했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과 같은 그의 소실된 저작 외에도, 최치원의 현존 저술은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 관료 문 (당나라와 신라에서 벼슬을 할 때 올린 상소, 보고 등을 포함)
- 사문 (차를 마시는 것과 자연 경관 등)
- 시
- 비문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돌아온 직후, 관료 문과 사문(일부 시 포함)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 편찬물의 서문이 남아 있어 원래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컬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桂苑筆耕)》, 즉 주로 당나라에서 벼슬하며 작성한 관료 서신과 상소로 구성된 10권으로 구성된 부분이다. 이 작품에는 몇몇 사문도 포함되어 있다.
최치원의 시는 상당한 양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위에 언급된 헌강왕에게 바친 작품에 원래 포함되었을 것이며, 주로 한국 시의 조선 시대 문집인 『동문선』을 통해 전해진다. 그의 몇몇 시는 12세기의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현존하는 비문, 즉 소위 사산비명(四山碑銘)은 다음과 같다(모두 현재의 대한민국 소재).
비문 | 내용 | 건립 연도 | 소재지 |
---|---|---|---|
진감국사비명(眞鑑國師碑銘) | 쌍계사 진감선사(혜소) 비 | 887년 | 경상남도 쌍계사 |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 | 대숭복사비 | 885년 | 경주 (전체 현존하지 않음) |
낭혜화상비명(朗慧和尙碑銘) | 성주사 낭혜화상비 | 890년 | 충청남도 성주사 |
지증대사비명(智證大使碑銘) | 봉암사 지증대사비 | 924년 | 경상북도 문경 |
최치원이 한국 불교 설화와 민담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최초의 컬렉션인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저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원래 이야기 중 13개가 다른 작품에 남아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자들은 최치원이 저자가 아니라고 동의한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이야기 중 하나가 최치원을 소재로 한 설화, 즉 『고운 최치원전(孤雲崔致遠傳)』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명확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최치원이 유교 교재인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저자로 제시되었다. 사용된 언어와 표현의 특성을 근거로, 학자들은 이것이 최치원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 비교적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신라로 귀국 후 스스로 편찬한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886년 성서)이 있다. 이 서적은 중국에도 전해진 듯하며, 《신당서》 예문지에 기재되어 있다.[9] 현존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문집일 뿐만 아니라,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전하며, 중국사적으로도 중요한 서적이다.
4. 3. 사산비명
최치원의 현존하는 비문인 사산비명(四山碑銘)은 다음과 같다 (모두 현재의 대한민국 소재).[18]제목 | 내용 | 건립 연도 | 위치 |
---|---|---|---|
진감국사비명(眞鑑國師碑銘) | 쌍계사 진감선사[혜소] 비 | 887년 | 경상남도 쌍계사 |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 | 대숭복사비 | 885년 | 경주 (전체 현존하지 않음) |
낭혜화상비명(朗慧和尙碑銘) | 성주사 낭혜화상비 | 890년 | 충청남도 성주사 |
지증대사비명(智證大使碑銘) | 봉암사 지증대사비 | 924년 | 경상북도 문경시 |
5. 관련 문화재
- 하동 운암영당 최치원 초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참조
[1]
웹사이트
최치원, 최치원
https://www.doopedia[...]
1982-01-01
[2]
웹사이트
Choe Chiwon
https://www.worldhis[...]
2016-10-27
[3]
논문
Studies of the History of Goryeo
1948-01-01
[4]
논문
Tales of the Extraordinary: An Inquiry into the Contents, Nature and Authorship of the Sui chŏn
1981-01-01
[5]
문서
校印桂苑筆耕集序
桂苑筆耕集校注
[6]
문서
檄黄巣書
[7]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01
[8]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01
[9]
문서
崔致遠『四六』一巻、又『桂苑筆耕』二十巻。高麗人、賓貢及第、高駢淮南従事。
[10]
논문
호서 지방의 최치원 사적고
한국사학회
1996-01-01
[11]
논문
문창후 최치원의 출생지 소고 / 최치원의 출생지에 관한 재고
1983-01-01, 2000-01-01
[12]
논문
고운의 생애와 정치활동
주류성
2001-01-01
[13]
논문
숙위학생고
1969-01-01
[14]
서적
唐代留華外國人生活考述
상무인서관
1976-01-01
[15]
논문
최치원의 정치 이념과 종교관
1982-01-01
[16]
문서
계원필경
[17]
문서
초투헌태위계
879-01-01
[18]
문서
초투헌태위계, 재계, 헌시계
879-01-01
[19]
문서
함양군학사루기
[20]
뉴스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https://news.naver.c[...]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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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천년고찰…고운사 찾은 신도들 눈물로 기도
천년고찰 고운사의 보물 등 국가유산 3건 전소…보물 10건 자리 옮겨
'불탄 누각' '메케한 연기'…천연고찰 고운사가 주저앉았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문화유산, ‘보이지 않는 빛’으로 들춰보니…‘아차 실수!’, ‘인간미’까지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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