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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아이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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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아이롤디는 이탈리아의 육상 선수로, 1869년 오리지오에서 태어났다. 레코-밀라노, 밀라노-토리노 마라톤에서 우승했으며, 1895년 밀라노-바르셀로나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1896년 하계 올림픽 참가가 좌절되었는데, 올림픽 위원회가 그를 프로 선수로 간주하여 출전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아이롤디는 스피리돈 루이스의 기록을 깨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롬바르디아주와 스위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남아메리카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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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아이롤디
기본 정보
카를로 아이롤디
카를로 아이롤디
이름카를로 아이롤디
종목장거리 달리기
출생일1869년 9월 21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오리조
사망일1929년 6월 18일
사망지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2.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카를로 아이롤디는 1869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바레세현 오리지오의 농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바레세현 지역에서 열리는 스포츠 경기에 참가하며 육상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기록상 처음 참가한 경기는 고를라 미노레에서 열린 대회였다.[2] 이후 국내 및 국제 대회로 활동 무대를 넓혔고, 당시 주요 경쟁자였던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의 루이 오르테그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1][2]

1892년에는 레코-밀라노 마라톤과 밀라노-토리노 마라톤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당대 최고의 마라톤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2] 그의 가장 큰 성공은 1895년 9월에 열린 밀라노-바르셀로나 마라톤 대회 우승이었다. 이 대회는 총 1050km 거리를 12개 구간으로 나누어 달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1][2] 아이롤디는 우승 상금으로 2000ESP를 받았다.[1][2]

3. 1896년 아테네 올림픽 참가 좌절

카를로 아이롤디는 1896년 하계 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삼았으며, 우승 가능성도 점쳐졌다.[1][2] 그러나 아테네까지 갈 여비가 부족했던 그는 당시 유명 잡지였던 La Bicicletta|라 비치클레타ita의 후원을 받기로 했다.[1][2] 후원 조건은 오스트리아, 튀르키예, 그리스를 도보로 횡단하는 것이었으며,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70km를 이동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1][2] 잡지사는 그의 여정을 기록하고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1][2]

여정은 밀라노에서 시작하여 트리에스테와 피우메를 거쳐 스플리트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1][2] 아이롤디는 크로아티아 해안을 따라 코토르케르키라섬을 지날 계획이었으나,[1][2] 두브로브니크 도착 전에 넘어져 손을 다치는 바람에 이틀간 휴식을 취해야 했다.[1][2] 이후 알바니아를 도보로 횡단하는 대신 오스트리아 배편으로 파트라로 이동한 뒤, 도로가 없어 철도를 따라 아테네까지 걸어갔다.[1][2]

28일간의 고된 여정 끝에 아테네에 도착한 아이롤디는 올림픽 참가를 신청했으나,[1][2] 올림픽 위원회는 그가 과거 밀라노-바르셀로나 마라톤 대회에서 상금을 받은 것을 문제 삼아 프로 선수로 간주하고 참가를 불허했다.[1][2] 이탈리아에서 그의 참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1][2]

3. 1. 올림픽 참가 좌절에 대한 이탈리아 내 반응

아이롤디는 28일간의 고된 여정 끝에 아테네에 도착했지만, 189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아이롤디가 과거 밀라노-바르셀로나 간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 상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프로 선수로 간주하여 출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그의 참가를 요청하는 전보가 왔지만, 조직위원회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탈리아에서는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그리스 선수의 우승을 돕기 위해 강력한 경쟁자인 아이롤디의 참가를 의도적으로 막았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이 사건은 당시 스포츠계에 적용되던 엄격한 아마추어리즘 규정과 그 적용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롤디 자신도 이 결정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스피리돈 루이스에게 개인적인 대결을 신청했으나, 루이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경기는 성사되지 못했다.

4. 올림픽 이후의 삶

귀국 후 아이롤디는 스피리돈 루이스가 세운 기록을 깨기 위해 여러 번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주로 롬바르디아주나 스위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스위스에서 결혼하여 베른취리히에서 일했다.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그는 남아메리카로 이주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atletical[...] 2006-01-10
[2] 웹인용 statistics at atleticaleggera.com http://www.atletical[...] 201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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