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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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군인, 외교관, 정치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활약하며 동피레네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산일데폰소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 원수, 백작을 거쳤으며, 파르마 공국과 나폴리 왕국의 총독을 지냈다. 부르봉 왕정 복고 후에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다하며 후작으로 승격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원수로서의 군사적 업적은 미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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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오귀스트 헨네캥의 초상화
존칭 접두사제국 원수
이름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존칭 접미사페리뇽 후작
출생일1754년 5월 31일
사망일1818년 12월 25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그르나드쉬르가론
사망지프랑스 왕국 파리
충성



부르봉 왕정복고
군대육군
복무 기간1769–1818
계급원수
지휘피레네오리엔탈군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성 루이 왕립 군사 훈장
군사 경력
참전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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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페리뇽은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랑그도크 지방 그르나드쉬르가론에서 태어났다. 아키텐 연대 척탄병 부대에서 평민 출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프랑스 혁명을 환영하여 입법 의회 (1791년)에서 의석을 얻었으나 곧 사임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했다.

1793년부터 1795년까지 동피레네 군 지휘관을 맡아 스페인군을 에스콜라 전투에서 격파했다. 블랙 마운틴 전투에서 자크 프랑수아 드고미에 장군이 전사하자 군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았고, 1795년 초 로세스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796년 오트가론에서 500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프랑스 총재정부 대사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대항하는 산일데폰소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이후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고, 부르봉 왕가의 스파이였던 젊은 여성에게 약점을 잡혔다. 1798년 소환되어 리구리아 군대 좌익을 지휘했으며, 노비 전투에서 제2차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가 1800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백작의 문장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백작의 문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여 원로원 의원(1801), 원수(1804), 프랑스 제국 백작이 되었으며, 180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06년 9월 18일부터 1808년 7월 23일까지 파르마 공국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으로 이동하여 국왕 부부(조아생 뮈라와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와 함께 루이 18세에게 가담했다. 백일천하 동안 원수 명단에서 삭제되었고, 미셸 네에게 사형을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 이후 '페리뇽 후작'으로 승격되었고, 프랑스 귀족이 되었으며, 생 루이 훈장을 받았다.

2.1. 혁명 이전 시기

페리뇽은 1754년 5월 31일 툴루즈 근처의 소도시 그르나드에서 장 베르나르 드 페리뇽과 마리 디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페리뇽 일가는 16세기경 툴루즈 인근에 정착했으며 대대로 행정관과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페리뇽 또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콜레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콜레주를 졸업한 페리뇽은 생각을 바꾸어 1775년 기옌의 왕립척탄병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라 높은 계급까지 진급할 수 없다는 데 낙담한 그는 1783년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한 뒤에는 가문이 소유한 토지들을 관리하며 지냈다.

페리뇽은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랑그도크 지방의 그르나드쉬르가론에서 태어났다. 아키텐 연대의 척탄병 부대에서 평민 출신으로 임명된 후,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2.2. 프랑스 혁명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페리뇽은 국민위병의 중령으로 선출되었다. 1791년에는 입법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혁명파 간의 정치적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루시용 전쟁에 참전한다. 동피레네 군(Armée des Pyrénées orientales)에 소속되어 페르스토르트 전투와 불루 전투, 시에라네그라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운 그는 사령관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장군이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동피레네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794년 말 피게레스를 점령하고 이듬해 초 로세스 요새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5월 29일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1793년부터 1795년까지 페리뇽은 동피레네 군에서 지휘관을 맡아, 스페인군을 에스콜라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는 블랙 마운틴 전투에서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가 사망한 후 군 사령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10월 16일 페리뇽은 다시 오백인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1월 24일에는 주에스파냐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 2차 산일데폰소 조약의 체결에 일조했다.

1797년 11월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10월 군에 복귀하여 이탈리아 방면군(Armée d'Italie)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8월 15일 노비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했다. 주베르는 전사했고, 페리뇽은 포로로 잡혀 1년 동안 억류되어 있어야 했다.

2.3. 나폴레옹 제정 시기

1804년 5월 19일, 페리뇽은 프랑스 제국원수로 임명되었다. 1806년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군정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808년에는 나폴리 왕국 군정총독이 되어 국왕 조아킴 뮈라를 보좌 겸 감시했다. 그러나 1814년 1월 뮈라가 나폴레옹을 완전히 배신하자, 페리뇽은 더 이상 나폴리에 머무를 수 없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고향에 칩거했다.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백작의 문장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백작의 문장


페리뇽은 나폴레옹의 지지자였으며, 원로원 의원(1801), 원수(1804) 및 프랑스 제국의 백작이 되었으며, 18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06년 9월 18일부터 1808년 7월 23일까지 파르마 공국의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 나폴리 왕국으로 이동하여,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한 페리뇽은 국왕 부부(조아생 뮈라 왕과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최초의 원수 중 한 명이 된 후, 1806년에 파르마 및 피아첸차 양 주의 총독(지사)으로 임명되었으며, 1808년에는 나폴리 왕국 총독으로 조아키노 1세(뮈라) 밑에서 나폴리 방면군을 지휘하는 등 중책을 역임했다. 군인으로서는 노비 전투 이후 활약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원수로서 전장에서의 활약보다는 과거의 명성과 정치적인 배려에 의해 임명된 존재로, 매우 존재감이 옅은 원수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2.4. 부르봉 왕정복고와 말년

페리뇽은 아르투아 백작의 천거를 받아 왕정 하에서 제 1군관구 사령관과 10군관구 사령관 등의 직책을 맡아 보았으며,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의 편을 들지 않았다.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완전히 추방당한 뒤, 페리뇽을 우대하여 파리 군정총독으로 임명하고 후작위를 내렸다. 1818년 9월, 페리뇽은 심한 통풍과 지병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그 해 12월 25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1814년 프랑스로 돌아와 부르봉 왕정복고와 루이 18세에 가담한 그는 백일천하 동안 원수 명단에서 삭제되었으며, 미셸 네에게 사형을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 '페리뇽 후작'으로 승격되었고, 프랑스 귀족이 되었으며, 생 루이 훈장을 받았다. 조지 오스터만 박사는 "페리뇽은 마치 그가 마지못해 훌륭히 섬겼던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었다"고 평했다.

루이 18세는 제2차 왕정 복고 후, 1816년에 페리뇽에게 원수 지팡이를 수여하여 원수로 복귀시켰다. 1817년에는 후작으로 승진했다.

3. 평가

페리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여 원로원 의원(1801), 원수(1804) 및 프랑스 제1 제국 백작(1804)이 되었고, 18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파르마 공국 총독을 역임한 후 나폴리 왕국에서 국왕 부부(조아생 뮈라와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814년 부르봉 왕정 복고와 함께 루이 18세에게 가담했으나, 백일천하 동안 원수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미셸 네에게 사형을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페리뇽 후작 작위와 함께 프랑스 귀족이 되었으며, 생 루이 훈장을 받았다. 조지 오스터만 박사는 "페리뇽은 마치 그가 마지못해 훌륭히 섬겼던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었다"고 평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피레네 전선(대 스페인 전쟁)에서 활약한 후 오백인회 의원 및 스페인 대사를 역임했다. 1799년 노비 전투에서 부상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3.1. 부정적 평가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 중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보다는 과거의 명성과 정치적인 배려로 임명된 경우로, 존재감이 옅은 원수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3.2. 종합적 평가

페리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여 원로원 의원(1801), 원수(1804), 프랑스 제1 제국 백작(1804)이 되었고, 180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06년 9월 18일부터 1808년 7월 23일까지 파르마 공국 총독을 역임했고, 이후 나폴리 왕국에서 국왕 부부(조아생 뮈라와 카롤린 보나파르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814년 부르봉 왕정 복고와 함께 루이 18세에게 가담했으나, 백일천하 동안 원수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미셸 네에게 사형을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페리뇽 후작 작위와 함께 프랑스 귀족이 되었으며, 생 루이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피레네 전선(대 스페인 전쟁)에서 활약한 후 오백인회 의원 및 스페인 대사를 역임했다. 1799년 노비 전투에서 부상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프랑스로 소환되었다.

원로원 의원이자 최초의 원수 중 한 명으로, 1806년 파르마 및 피아첸차 양 주의 총독(지사)으로 임명되었고, 1808년에는 나폴리 총독으로서 나폴레옹의 매제인 나폴리 왕 조아키노 1세(뮈라) 휘하에서 나폴리 방면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는 노비 전투 이후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점차 부르봉 왕가에 접근하여 결국 부르봉 왕가를 따랐다. 이 때문에 백일 천하 기간 워털루 전투 직전 나폴레옹에 의해 장관 명부에서 삭제되고 계급을 박탈당했다.

제2차 왕정 복고 후인 1816년, 루이 18세에게서 원수 지팡이를 다시 받아 원수로 복귀했고, 1817년에는 후작으로 승진했다.

결론적으로 페리뇽은 전장에서의 활약보다는 과거의 명성과 정치적인 배려로 임명된, 존재감이 옅은 원수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4. 가족

페리뇽은 1786년 엘렌 카트린 드 그르니에 드 테리드와 결혼하여 3남 8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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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이름출생-사망
부인엘렌 카트린 드 그르니에 드 테리드1764~1816 (몽테슈 시장 프랑수아 드 그르니에의 딸)
장녀제르멘 아녜스 드 페리뇽1787~1844
차녀멜라니 드 페리뇽1788~1858
장남장바티스트 드 페리뇽1789~1807
3녀쥐스틴 드 페리뇽
4녀엘리자베트 마리 드 페리뇽
차남프랑수아 앙리 드 페리뇽1793~1841
5녀아델 도로테 드 페리뇽
6녀카롤린 드 페리뇽1799~1819
7녀마리 이르마 드 페리뇽1803~1849
8녀옥타비 드 페리뇽1804~1847
3남레오폴 드 페리뇽1806~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