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1. 개요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는 프랑스령 과들루프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약한 군인이다.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 발발 후 국민 공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니스와 피에몬테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고 툴롱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았다. 동부 피레네 군 사령관으로 스페인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나, 1794년 흑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이름은 팡테옹에 새겨졌으며, 파리와 마르세유의 지명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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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파 -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 활동한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하고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했으며, 테르미도르 반동에 가담했지만, 총재정부 시기 왕당파 연루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
자코뱅파 -
자크 피에르 브리소
자크 피에르 브리소는 프랑스 혁명 시기 지롱드파를 대표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혁명을 지지했으나 자코뱅파에 의해 처형된 정치인이다. -
1794년 사망 -
쇼보쿠왕
쇼보쿠왕은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의 제13대 국왕으로 쇼케이왕의 장남이며, 왕비와 부인, 처를 두었고 5남 3녀를 두었다. -
1794년 사망 -
니콜라 드 콩도르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정치인이자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고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펼쳤으며,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전망한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적 개관 초고』와 선거 방법론을 다룬 『다수결의 결정 확률에 대한 분석의 적용에 관한 논문』 등의 저서를 남겼다. -
과들루프계 프랑스인 -
앙리 살바도르
프랑스령 기아나 카옌 출신의 프랑스 가수이자 기타 연주자였던 앙리 살바도르는 프랑스 최초의 로큰롤 곡을 발표하고 "Zorro est arrivé", "Le lion est mort ce soir", "Syracuse" 등의 히트곡을 남겼으며, 그의 노래 "Dans mon île"은 브라질 보사노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과들루프계 프랑스인 -
사뮈엘 무투사미
사뮈엘 무투사미는 프랑스 출신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하는 축구 선수이며, FC 낭트에서 활약하며 프랑스컵 우승과 리그 1 100경기 출전을 달성했고,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출전했다.
2. 생애
프랑스령 과들루프 출신의 군인이다. 젊은 시절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1785년부터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농장 이름을 따 '뒤고미에'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열정적인 애국자로서 혁명을 지지했으며, 과들루프의 혁명 세력을 대표하여 파리로 가 국민 공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마라의 권유로 군에 복귀하여 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툴롱 포위전과 피레네 전쟁 등에서 활약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자크 프랑수아 코키유(Jacques François Coquille프랑스어)는 1738년 8월 1일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과들루프(Guadeloupe) 섬의 트루아리비에르(Trois-Rivières)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장주이자 왕실 고문이었던 제르맹 코키유(Germain Coquille)와 클레르 로랑(Claire Laurent)의 아들이었다. 1785년, 부모로부터 매입한 바스테르(Basse-Terre)의 레 고미에(Le Gommier) 커피 농장 이름을 따 "뒤고미에(Dugommier)"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뒤고미에는 15세의 나이에 식민지의 귀족 사관생도(gentlemen cadets프랑스어)들과 함께 로슈포르(Rochefort)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라 로셸(La Rochelle)과 릴 뒬 레(Île de Ré)의 해군 포대에서 근무한 후 1758년 보병 중대에 배속되었다. 7년 전쟁의 서인도 제도 전선에서 싸웠으며, 1759년 과들루프 침공(Invasion of Guadeloupe) 방어와 1762년 마르티니크 침공(Invasion of Martinique) 방어에 참여했다. 1763년 소위 계급으로 해군 자유 부대(compagnies franches de la marine프랑스어)에서 자신의 요청으로 제대하고 과들루프의 자신의 농장으로 은퇴했다. 레 고미에 외에도 뒤고미에는 트루아리비에르(Trois-Rivières)에 그랑단스(Grand'Anse, 1777년 34명의 노예 기록)와 그랑퐁(Grands Fonds) 설탕 농장, 그리고 레자빔(Les Abymes)에 페루(Peru, 1784년 74명의 노예 기록) 농장을 소유한 노예주이기도 했다. 1765년 과들루프의 생트안(Sainte-Anne)에서 마리-디외도네 쿠드루이-보테(Marie-Dieudonnée Coudroy-Bottée, 1740-1810)와 결혼했다.
미국 독립 전쟁 중인 1778년에 잠시 군에 복귀하여 세인트루시아 전투(Battle of St. Lucia)에서 자원병 중대를 이끌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 뒤고미에는 과들루프에서 소수의 혁명 지지 농장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식민지 의회를 장악하고 과들루프 총독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 농장주들과 대립하며 오랜 갈등을 겪었다. 1790년, 뒤고미에가 이끄는 과들루프 연대(Guadeloupe Regiment) 일부는 마르티니크 혁명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세 차례의 원정에 참여했으나, 총독과 식민지 의회를 전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뒤고미에는 1791년 7월 식민지 혁명가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국민 공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2.2. 프랑스 혁명과 국민공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뒤고미에는 과들루프에서 소수의 혁명 세력을 지지한 농장주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과들루프에서는 식민지 의회를 장악하고 총독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 농장주들과 혁명 세력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뒤고미에는 혁명 세력의 입장에 서서 귀족 농장주들과 대립했다. 1790년, 뒤고미에가 이끄는 과들루프 연대 부대 일부는 마르티니크의 혁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세 차례 원정에 참여했지만, 총독과 식민지 의회를 전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열정적인 애국자였던 뒤고미에는 1791년 7월, 식민지 혁명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국민 공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파리에서 그의 열정은 마라의 주목을 받았고, 마라의 권유로 군대에 복귀하여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3. 군 복귀와 툴롱 포위전
국민 공회에서 진정한 공화주의자임을 보여준 뒤고미에는 1792년 10월 10일 프랑스 혁명군의 마르샬 드 캉프(여단장)로 임명되었지만, 처음에는 임무가 없었다. 그는 1793년 5월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에서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1793년 9월, 뒤고미에는 니스 백국과 피에몬테 지역에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과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질레트 전투에서 조제프 드 방(Joseph de Vins)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켰다.
뒤고미에는 1793년 11월 3일 사단장으로 승진했으며, 같은 날 툴롱 포위전을 수행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장 프랑수아 카르토 장군의 뒤를 이었다. 그는 젊은 포병 대위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안한 공격 계획의 타당성을 알아보고 이를 채택하여 실행에 옮겼다. 11월 30일에는 영국군의 돌격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오른팔과 어깨에 타박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뒤고미에 장군은 진정한 공화국의 용기로 싸웠다"고 보고하며 그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했다. 12월 17일, 뒤고미에는 툴롱의 핵심 요새를 탈환하기 위한 최종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12월 18일 툴롱 포위전을 승리로 마무리하며 도시를 탈환했다.
훗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뒤고미에에 대해 “용감하고 대담하며, 예리한 전략적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섭고, 성격이 급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도 뒤고미에를 회고했으며, 자신의 유산에서 뒤고미에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100를 지급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2.4. 동부 피레네 군 사령관과 죽음
1794년 1월, 뒤고미에는 스페인과의 피레네 전쟁에서 싸우던 동부 피레네 군(Army of the Eastern Pyrenees)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안토니오 리카르도스 카리요(es)가 지휘하는 스페인 군대로부터 루시옹(Roussillon)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임 당시, 이전 해에 끊임없이 스페인 방어선을 공격하며 성과 없이 약화된 군대를 먼저 재편성했다. 스페인 측에서는 사령관 리카르도스와 그의 후임 알레한드로 오릴리(es)가 연이어 질병으로 사망하면서 지휘 체계에 혼란이 발생했고, 이는 뒤고미에의 임무 수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뒤고미에는 뛰어난 전략을 발휘하여 스페인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 4월 28일: 테크 전투(fr) 승리
* 4월 30일: 알베르 전투(fr) 승리
* 5월 1일: 뷜루 전투(fr)에서 라 우니온 백작(es)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루시옹을 탈환했다.
* 5월: 라 우니온 백작이 포르방드르(Port-Vendres)에서 철수했다.
* 5월 29일: 4주간의 콜리우르 포위전(Siege of Collioure) 끝에 콜리우르(Collioure)를 함락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뒤고미에는 부상을 입었다.
* 8월 13일: 산 로렌스 데 라 무가 전투(ca)에서 스페인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 9월 17일: 5월 7일부터 포위 공격을 계속했던 벨레가르드 요새(fr)를 탈환했다.
* 9월 22일: 대담한 공격으로 쿠스투주(fr)의 요새와 진지를 점령하고 스페인군을 패주시켰으며, 많은 장비와 군수 물자를 노획했다.
11월 18일, 뒤고미에는 카탈루냐에서 벌어진 흑산 전투(fr, Battle of the Black Mountain)에 참전했으나, 전투 중 스페인군이 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도미니크-카트린 페리뇽(Dominique-Catherine Pérignon) 장군은 11월 20일 전투를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뒤고미에의 시신은 11월 19일 벨레가르드 요새의 자유의 나무 아래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이후 페르피냥(Perpignan)으로 옮겨져 피라미드 형태의 기념비에 안장되었다. 11월 25일, 국민공회는 그의 공적을 기려 파리 팡테옹의 기둥에 그의 이름을 새기도록 결정했다. 훗날 나폴레옹은 그의 유품을 보관했으며, 툴롱 포위전을 기념하여 그의 아들에게 100을 하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