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슈트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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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슈트 칸국은 1642년 호쇼트 부의 투르바이흐(구시 칸)가 티베트를 정복하고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칸 칭호를 받으면서 건국되었다. 코슈트 칸국은 겔룩파 불교를 지원하며 티베트를 지배했으나, 1717년 준가르의 침공으로 라장 칸이 사망하고 멸망했다. 이후 청나라가 티베트를 통치하면서 호쇼트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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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슈트 칸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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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코슈트 칸국 |
몽골어 표기 | (Khoshuud Ulus) |
한자 표기 | 화석특한국 (和碩特汗國) |
위치 | 중국 |
![]() | |
역사 | |
성립 | 1642년 |
멸망 | 1717년 |
이전 국가 | 창파 |
계승 국가 | 중가르 칸국 |
정치 | |
정치 체제 | 유목 제국 |
통치 형태 | 군주제 |
지도자 칭호 | 칸 |
종교 | |
종교 | 티베트 불교 |
언어 | |
공용어 | 티베트어, 몽골어 |
기타 | |
현재 국가 | 티베트 망명정부 |
2. 역사
1637년, 호쇼트 부의 투르바이흐(구시 칸)는 오이라트 연합군을 이끌고 칭하이 지방을 정복했다. 그는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샤진바리크치 노민 칸(호교왕)" 칭호를 받았다.[1]
투르바이흐는 동맹 부족 준가르부의 지도자 호토고친에게는 "바토르혼타이지" 칭호를 주고 자신의 딸 아민타라와 함께 오이라트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본국에 남겨둔 형의 아들 오치르트에게 호쇼트 부의 본가를 잇게 하고, 자신은 칭하이로 부대를 불러모아 티베트 정복에 나섰다.
1642년, 창퇴 왕의 본거지 시가체를 함락시키고 티베트 제후들을 모아 "티베트의 왕"으로 즉위했다. 동시에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티베트 중추부를 기증받아 달라이 라마 정권이 성립되었다.[1]
투르바이흐의 자손들은 4대에 걸쳐 티베트 칸위를 계승했으나, 1717년 준가르의 침공으로 라산 칸이 사망하면서 직계는 단절되었다. 18세기 초, 달라이 라마 계승 문제로 왕족 내 분쟁이 격화되어 준가르(1717년), 청나라(1718년, 1719년 - 1721년)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쇠퇴했다. 결국 1723년-1724년 청나라 옹정제에게 정복당하고, 칭하이 지방의 방계 왕족들도 모든 권익을 몰수당하면서 호쇼트의 티베트 지배는 막을 내렸다.[1]
2. 1. 오이라트의 기원과 발전
오이라트는 원래 13세기 초 투바 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쿠두카 베키는 1208년 칭기즈 칸에게 복종했고, 그의 가문은 칭기즈 가문의 네 분파 모두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툴루이 내전 동안 네 오이라트 (초로스, 토르구트, 도르베트, 호이트)는 아릭 부케 편을 들었고, 따라서 쿠빌라이의 통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나라가 붕괴된 후, 오이라트는 아릭 부케의 후손인 조릭투 칸 예수데르가 북원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지지했다. 오이라트는 1455년 에센 타이시가 죽을 때까지 북원 칸을 지배했고, 그 후 할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서쪽으로 이동했다.[1] 1486년, 오이라트는 다얀 칸에게 공격할 기회를 준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렸다. 16세기 후반, 오이라트는 투메드에게 더 많은 영토를 잃었다.[2]1620년, 초로스와 토르구트 오이라트의 지도자 하르쿨과 메르겐 테메네는 최초의 할하의 알탄 칸인 우바시 홍 타이이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패배했고 하르쿨은 아내와 자녀를 적에게 잃었다. 우바시와 오이라트 간의 전면전은 1623년 우바시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3]
2. 2. 구시 칸의 티베트 정복과 칸국 성립 (1642-1655)
1632년, 칭하이(코코노르)의 겔룩파(황모파)는 경쟁 관계에 있던 카르마파와 본교 종파를 지원하던 칼카 초그투 콩 타이지에 의해 탄압받고 있었다. 1634년, 5대 달라이 라마의 사절들은 구시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616년부터 겔룩파를 지지해 온 오이라트는 종교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구시 칸을 중심으로 티베트 원정군을 결성했다. 1635년 티베트를 잠시 방문한 구시 칸은 이듬해 1만 명의 오이라트 군을 이끌고 칭하이를 침공, 3만 명의 적군을 물리치고 초그투를 처단했다. 이후 중앙 티베트에 입성한 구시 칸은 5대 달라이 라마로부터 ''Bstan-'dzin Choskyi Rgyal-po''("법을 옹호하는 법왕")라는 칭호를 받았다.[5] 1637년, 5대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다이 구시 샤진 바리크치 노미인''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구시 칸은 칭기즈 칸 가문 출신이 아닌 몽골인으로서 처음으로 칸 칭호를 얻게 되었다.[5] 구시 칸은 바즈라파니의 화신으로 선언되었으며, 이는 구시 칸의 추종자들에게 그를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와 같은 수준으로 여기게 하는 승려와 후원자 관계를 확립했다.[5]
구시 칸은 오이라트족에게 티베트 완전 정복을 명했고, 10만 가구의 오이라트족이 코코노르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하여 코슈트 칸국이 성립되었다. 1640-1641년 겨울, 구시 칸은 베리 왕 도뇨 도르제를 격파하고, 1642년에는 창파의 통치자 카르마 텐쿄를 격파했다. 1642년 시가체를 점령하면서 구시 칸은 모든 티베트를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통제 하에 두었고, 그는 티베트에 최초의 불교 수도원을 건설한 8세기 인도의 불교도인 파드마삼바바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5] 이 원정에 참여한 칼쿨의 아들 에르데니 바투르는 ''콩 타이지''라는 칭호를 받고, 칸의 딸 아민 다라와 결혼하여 준가르 칸국을 타르바가타이 산맥 남쪽의 상부 에밀 강에 건설하도록 파견되었다. 1642년 4월 13일, 5대 달라이 라마는 구시 칸을 티베트의 칸으로 선포했다. 베이징에서는 그를 "티베트인들의 칸"이라고 불렀다.
구시 칸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 문제에만 관여하도록 하고, 소남 랍텐이라는 섭정을 직접 임명하여 민간 행정을 처리하는 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겔룩파를 제국의 지침 종교로 장려하고, 겔룩 계층과 동맹하여 달라이 라마가 부여한 칭호에 기반한 합법화 시스템을 만들었다. 1653년, 구시 칸의 위-창과 캄의 왕으로서의 칭호는 공로와 천명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공식적으로 정당화되어, 그의 칭호가 불교 신앙의 보호자이자 옹호자로서 후계자들에게 이어지도록 보장했다.[5]
1655년 구시 칸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텐진 도르제(다얀 칸)가 티베트 칸 지위를 계승했다. 그의 여섯째 아들 달라이 바타르에게는 코코노르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졌고, 오치르투는 오이라트 칸으로서 일시적인 권력을 유지했다.[5] 이 왕조의 지배자는 대대로 열렬한 달라이 라마 신자였으며, 이 왕조의 성립으로 티베트 불교계에서 달라이 라마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종파를 초월한 정치·종교의 최고 권위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2. 3. 오치르투 칸의 준가르 칸국과의 관계
오치르투 칸은 구시 칸의 조카로, 1653년 바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센게가 이복 형제들에 대항하여 싸울 때 그를 도왔다.[1] 그 결과 1661년 센게가 승리했다.[1] 1670년 센게는 이복 형제 체첸 타이이지와 조토프에게 암살당했다.[1] 오치르투는 센게의 동생인 갈단 보쇼그투 칸을 도와 체첸과 조토프를 물리쳤다.[1] 갈단은 오치르투의 손녀인 아누 다라 여왕과 결혼했지만, 오치르투는 갈단의 인기를 두려워하여 그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1] 오치르투는 갈단의 경쟁자였던 삼촌 초쿠르 우바시를 지지했다.[1] 오치르투는 1677년에 패배했다.[1]2. 4. 라장 칸의 통치와 칸국의 쇠퇴 (1703-1717)
라장 칸은 형인 텐진 왕축 칸을 독살하고 권력을 얻었다는 설과, 섭정 상계 갸초와의 갈등 속에서 1703년에 칸의 자리에 올랐다는 설이 있다.[1] 1705~6년, 라장 칸은 라싸에 입성하여 섭정을 처형하고 6대 달라이 라마를 폐위시켰다.[2] 그는 청나라 강희제의 지원을 받아 이러한 조치를 취했으며, 6대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중 암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3]라장 칸은 차포리의 한 승려를 5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내세우고, 1707년 응아왕 예셰 갸초로 즉위시켰다.[4] 그러나 이는 겔룩파 추종자 대다수의 반발을 샀고, 코코노르의 코슈트 수장들도 분노했다.[4] 1710년, 강희제는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인정하는 칭호와 인장을 수여했다.[4] 한편, 티베트 동부 리탕에서는 한 아이가 6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라장 칸은 이를 무효화하려 했다.[5] 코슈트 수장들은 강희제에게 이 아이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황제는 결정을 유보하고 1715년 그를 쿰붐 사원에 구금했다.[5]
라장 칸은 통치 기간 동안 강제 구매 및 물품 교환을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로상 예셰를 제외한 겔룩파 엘리트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717년, 준가르의 체렌 돈두프가 코슈트 칸국을 침공하여 예셰 갸초를 폐위시키고, 리탕에서 온 소년을 7대 달라이 라마로 옹립했다. 라장 칸은 살해당하고 라싸는 약탈당했다. 준가르는 백성을 공포에 떨게 하여 겔룩파의 지지를 잃었고, 1718년 청나라의 침공은 살윈강 전투에서 준가르에게 패배했다. 1720년의 두 번째 원정으로 청나라는 준가르를 티베트에서 몰아내고, 쿰붐에 있던 소년을 7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시켰다.
2. 5. 청나라의 티베트 통치와 호슈트 칸국의 종말 (1720-1724)
18세기 초, 달라이 라마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왕족 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여 준가르(1717년), 청나라(1718년, 1719년-1721년) 등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내분으로 쇠퇴하였다. 1723년-1724년에는 청나라 옹정제에게 정복되었다.[1]투르바이흐의 자손은 이후 4대에 걸쳐 티베트 칸위를 계승했지만, 1717년 준가르의 침공을 받아 라산 칸이 사망하면서 투르바이흐 직계는 끊어졌다. 칭하이 지방에 거주하던 방계 왕족들 또한 1723년-1724년에 청나라에 정복되어 티베트 각지에 보유하고 있던 권익을 모두 몰수당했고(→ 옹정제의 티베트 분할 참조), 이로써 티베트에 대한 호쇼트 지배는 종언을 맞이했다.[1]
3. 티베트와의 관계
1634년, 5대 달라이 라마의 사절들은 칭하이(코코노르)에서 겔룩파를 탄압하던 칼카 초그투 콩 타이지를 몰아내기 위해 구시 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오이라트는 1616년부터 겔룩 전통을 지지해 왔으며, 구시는 티베트 원정을 위한 군대를 모으기 위해 종교적 친밀도를 이용했다.[1] 1637년, 5대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다이 구시 샤진 바리크치 노미인''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1] 구시는 바즈라파니의 화신으로 선언되었으며, 이는 구시의 추종자들에게 그를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와 같은 수준에 올려놓는 승려와 후원자 관계를 확립했다.[1]
1642년 시가체를 점령한 구시 칸은 모든 티베트를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 통제 하에 두었고, 그는 티베트에 최초의 불교 수도원을 건설한 8세기 인도의 불교도인 파드마삼바바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2] 같은 해 4월 13일, 5대 달라이 라마는 구시를 티베트의 칸으로 선포했다.[3] 베이징에서는 그를 "티베트인들의 칸"이라고 불렀다.[4]
구시 칸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 문제에만 관여하도록 제한하고, 소남 랍텐이라는 섭정을 직접 임명하여 민간 행정을 처리하는 정부를 수립했다.[5] 1653년, 구시의 위-창과 캄의 왕으로서의 칭호는 공로와 천명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공식적으로 정당화되었다.[5]
제5대 달라이 라마의 드레풍 사원 거처를 따서 명명된 간덴 포드랑은 1642년 티베트의 겔룩파 정부로 설립되었다. 코슈트 칸국은 겔룩파의 적들을 물리침으로써 건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칸의 정부 내 역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자료에서는 칸이 티베트의 실제 행정과 거의 관련이 없었으며, 달라이 라마와의 승려와 후원자 관계만을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르네 그루세는 코슈트 왕국이 코코노르와 차이다무 분지를 포함하는 반면 티베트는 보호령이었다고 말한다. 멀린은 1642년 제5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에서 구시가 달라이 라마보다 낮은 자리에 소남 랍텐과 같은 수준으로 앉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멀린은 또한 1657년 소남 랍텐이 사망할 때까지 제5대 달라이 라마는 허수아비였고, 소남 랍텐이 "사실상의"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루치아노 페테치에 따르면, 구시 칸은 1642년에 제5대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에 대한 모든 세속적 권력을 부여했지만, 달라이 라마는 실제 행정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국가의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데시''(desi, 총독)의 직책이 만들어졌으며, 달라이 라마는 단지 ''데시''에 대한 사법 결정에 대한 항소를 결정했을 뿐이다. 몇 년 후, 제5대 달라이 라마는 ''데시''를 임명함으로써 그의 세속적 권력을 주장했다. 페테치는 군사 문제와 티베트에 대한 외세의 위협 외에는 구시 칸과 그의 후계자가 1705~6년의 쿠데타, 즉 라장 칸이 티베트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기 전까지 행정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제5대 달라이 라마가 구시 칸으로부터 티베트를 통치할 권한을 받았지만, 칸이 민간 업무의 "사실상의" 관리자인 ''데시''(총독) 소남 랍텐을 선택하는 데 관여했으며, 제5대 달라이 라마는 종교 문제에 국한되었다고 주장한다. 피츠허버트와 트래버스는 1650년대 소남 랍텐과 구시 칸이 사망한 후 제5대 달라이 라마의 "정부에 대한 일상적인 통제"가 증가했다고 묘사한다.
간덴 포드랑의 부상에 대한 구시 칸의 핵심 역할은 20세기까지 연례 국가 의례를 통해 기념되었다. 몽람 대기원제 동안 사람들은 구시 칸의 군대 스타일로 몽골 스타일의 군복을 입었다.
이 왕조의 지배자는 대대로 열렬한 달라이 라마 신자였으며, 이 왕조의 성립으로 티베트 불교계에서 달라이 라마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종파를 초월한 정치·종교의 최고 권위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18세기 초, 달라이 라마의 계승자를 둘러싸고 왕족 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여 준가르(1717년), 청나라(1718년, 1719년 - 1721년) 등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내분으로 쇠퇴하여 1723-24년, 청나라의 옹정제에게 정복되었다.
1637년, 호쇼트 부의 투르바이흐(구시 칸)는 오이라트 각 부의 연합군을 이끌고 칭하이 지방으로 원정하여 적대 세력을 제압했다. 투르바이흐는 라싸로 올라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샤진바리크치 노민 칸(호교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투르바이흐는 동맹 부족인 준가르부의 지도자 호토고친에게 자신의 딸 아민타라와 "바토르혼타이지"라는 칭호를 주어 오이라트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또한 오이라트 본국에 남겨둔 형의 아들 오치르트에게 호쇼트 부의 본가를 잇게 하는 한편, 자신이 상속할 부중을 모두 칭하이로 불러들여 이 군세를 가지고 티베트 전역의 정복에 나섰다.
1642년, 중앙 티베트의 패자 창퇴 왕의 본거지 시가체를 1년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고, 점령한 삼두프체 궁전에서 티베트 제후들을 모아 "티베트의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달라이 라마 5세를 시가체로 초청하여 "티베트 13만호", 즉 얄룽장포 강 유역을 주로 하는 티베트의 중추부를 기증, 여기에 달라이 라마 정권이 발족한다.
투르바이흐의 자손은 이후 4대에 걸쳐 티베트 칸위를 계승했지만, 1717년, 준가르의 침공을 받아 라산 칸이 사망하면서 투르바이흐 직계는 끊어졌다.
칭하이 지방에 거주하던 방계 왕족들 또한 1723년 - 1724년에 청나라의 정복을 받아 티베트 각지에 보유하고 있던 권익을 모두 몰수당했고, 티베트에 대한 호쇼트 지배는 종언을 맞이했다.
4. 역대 칸
1642년 티베트 고원 중추 장악 후 티베트 칸 즉위.
텐진 타얀 걀포 (샤진바리크치 다얀 칸)
즉위식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칭호 받음.
즉위식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칭호 받음.
1707년 청나라 황제에게 칭호 받음.